#50. 세계의 변화 (3)
나는 술타나와 독대하여 최근의 사업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투자자로서 듣는 현황 브리핑 같은 것이었다. 허리를 세우고 바르게 앉은 술타나는 내가 무언가를 물어볼 때마다 성실한 태도로 답변을 주었다.
“이미 서신에 적었던 바와 같이, 여는 지금 그대를 믿고 몸값을 높이는 중이다.”
과거와 달리, 술타나는 이제 거리낌 없이 영어를 사용했다. 오직 내 앞에서만 보여주는 모습일 터였다.
“얼마 전엔 처음으로 그린드라(Gerindra) 당(黨)의 진정한 주인과 직접 통화를 하기도 했지. 여가 당적을 정하고 자신을 지지해준다면 지금 겪고 있는 다양한 ‘불편함들’에 대하여 최대한의 도움을 제공할 의사가 있노라고.”
술타나를 견제하는 정적들은 결코 하나의 단일 세력이 아니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이 신흥 지방군주가 가진 것들을 빼앗아 자신들의 힘으로 더하는 것.
고로 술타나가 알아서 굽히고 들어오며 일정한 권력과 이권을 스스로 내놓는다면, 그리고 그게 비용을 들여 강제로 빼앗는 것보다 경제적이라면, 정적들로선 굳이 끝까지 생사결을 벌이려 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언젠가는 당적을 정하긴 해야겠지. 하나, 여가 끝까지 다른 세력에 기대지 않고 자립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 연후에 편을 정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대우엔 당연히 큰 차이가 있을 게 아닌가. 그대가 일찍이 여에게 해주었던 굳은 말들은 여로 하여금 지금의 풍랑을 견디게 해주는 기둥이라. 우리가 더불어 인내하면 결국 그만한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야.”
나는 내가 술타나에게 뭐라고 했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이윤을 우선하느라 사업 환경의 불확실성을 증가시키는 선택을 하진 않겠다. 사업의 핵심은 이윤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일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내게 좋은 사람으로 남아라. 그러면 나는 이윤보다 당신이라는 사람을 남기도록 하겠다…….
‘말은 이렇게 해도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못하는 모양이군.’
사실 술타나의 입장에선 일말의 근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 술타나에 대한 나의 의존도보다 나에 대한 술타나의 의존도가 훨씬 더 높은 까닭이다.
물론 내가 거래선을 바꾼다고 해서 기왕 얻은 왕작과 공식적인 권한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상징적인 군림과 제한적인 권력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명문화되지 않은 지배력으로 왕국을 완전히 독점해야 성이 차겠지.
“사업장이 테러를 당할 위험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저들의 바람은 그대가 배를 갈아타는 것이지, 그대가 이 나라에서의 사업을 축소하거나 아예 철수해버리는 게 아니니까.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째거나 다른 농장으로 날려 보내는 짓을 했다간 다른 정파들에게 얼마나 극심한 공격을 받겠는가 말이야.”
“사업장보다는 술타나 당신의 신변이 더 걱정이지요.”
“후후. 걱정이라……. 반역자를 처형했던 날에도 그랬지만, 그대에게 받는 걱정은 느낌이 참 좋군. 어느 누가 말하는 걱정보다도 더 좋아.”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술타나는 책상 서랍으로부터 술병을 꺼내었다. 내게 선물로 보내었던 것과 같은 고도수의 야자수액 증류주(아락)였고, 이미 몇 번 마신 것처럼 양이 조금 비어있었다. 보수적인 이슬람 법학자가 본다면 이것만으로도 술타나를 탄핵할 것이었다.
“그대여. 같이 한잔하지 않겠는가?”
“일하는 중에 정신을 흐리는 건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시무(視務)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오랜 벗이자 서로를 신뢰하는 남녀의 해후이기도 하다. 여는 지금껏 그리 생각하고 있었건만, 그대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한 잔만 주십시오.”
강화계수가 높은 몸에 증류주 한 잔 들어간다고 판단력이 무뎌지진 않는다. 술타나는 조금 짓궂은 미소-이 꼰대에게서는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를 머금고 내게 4분의 1 가량 술을 채운 글라스 잔을 넘겨주었다. 술에는 알코올 이외의 유해성분이 들어있지 않았다.
“자.”
술타나가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나는 쨍- 소리가 울리도록 잔을 부딪친 후 약간의 술을 머금었다. 입안에서 굴리는 술은 잘 만든 증류주 특유의 향긋함과 달콤함을 과시했다. 정신을 흐리고 건강을 해치지만 않는다면, 술은 이견 없이 최고의 음료라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나는 술잔을 느린 호흡으로 홀짝이며 사무적인 대화를 이어나갔다. 술타나는 나보다 빠르게 술을 마시면서도 평온한 안색과 처음과 같은 성실함으로 대화에 응했다.
그러다가 세 번째로 비운 자신의 잔을 매만지며 뜬금없이 하는 소리가 이러했다.
“그대. 오늘 밤 여와 동침하지 않겠는가?”
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감추지 않자, 술타나는 조용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장 결혼하자는 소리가 아니다. 또한 후계를 생산하자는 소리도 아니지. 여의 가임기까지는 아직 날짜가 남아있으니까. 여는 그저 순수한 의미로 동침을 제안한 것이다.”
이건 한층 더 어이가 없어지는 소리였다.
“그건 부정한 관계가 아닙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게 놀랍군요.”
“부정한 관계라니. 부정한 관계의 본질은 한 사람에 대한 정절을 지키지 않고 여러 사람과 관계하는 것(Seks bebas)이라. 여는 스스로는 정절을 깬 적이 없으며 이제 오로지 그대만을 바라보기로 다짐하였거늘, 이 결심을 번복하지 않는 한 누가 있어 여를 두고 도덕관념이 없다 하리?”
“혼인 외 관계는 무조건 금지된 것(하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꽉 막힌 꼰대들이나 하는 말일 뿐이다.”
내가 아는 한 가장 꼰대 같은 인간은 내 표정을 보더니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소리를 내며 웃는 걸 최대한 삼가는 꼰대에게는 폭소에 해당하는 행동이었다. 운철 왕관에 달린 가느다란 장식들이 낭창낭창 흔들리며 빛을 반사했다. 예전에 쓰던 금관 장식에 비하면 손색이 있는 반사광들이었다.
“그대가 여를 어찌 보고 있었는지는 알 만하지만, 여는 스스로가 제법 개방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그 증거로서, 여는 꽤 오래전부터 남녀가 결혼 의지만 확고하다면 연애를 해도 된다고 생각해왔다. 3개월의 봉숭아 물들이기가 아닌 진짜 연애를.”
“…….”
“전통을 중시하는 것과 전통을 불가침의 절대규범으로 여기는 것은 서로 다른 개념이며, 뒤쪽의 정신은 옛 왕국의 멸망과도 관계가 있느니. 그대는 여를 너무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보지 말라. 여는 여자의 몸으로 술타나의 칭호를 거머쥔 자이며, 지나간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을 줄 아는 사람이로다.”
점입가경이다.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해도 된다는 말은, 이곳 사회에선 예로부터 남녀의 연애 자체가 금기였기에 비로소 의미가 성립하는 것이었다.
이곳의 전통에 따르자면 남녀의 만남과 대화는 반드시 양가의 부모가 지켜보는 자리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예외적으로, 양측의 신뢰가 충분히 깊어졌을 경우 부모들의 사전허락을 받아 함께 심부름을 다녀오는 정도의 외출은 가능하다. 시간이 늦었거나 오래 걸리는 경우엔 보통 남녀의 형제자매들 중 한 사람이 감시자로 따라붙는다.
이 같은 상호탐색의 과정에서 남녀는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임으로써 자신이 현재 결혼 예비절차를 밟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이 다 빠질 때까지 결혼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대로 탐색이 종료되는 식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개방적이라고 못할 것까진 없겠군…….’
내 결혼을 두고는 “처음부터 그런 관계인 남녀가 어디 있겠는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야, 노력을.” 같은 잔소리를 수시로 해대고, 아들을 가지고는 자식이 못나 신붓감을 데려오지 않는다고 불평했던 술타나는,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예 꽉 막혀있지만은 않은 어머니였던 셈이다.
하숙집 주인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하숙생들의 생활을 감시하는 이슬람 꼰대들의 나라에서는 술타나가 자신의 ‘개방적인 측면’에 자부심을 가질 법도 했다.
일전에 내게 위장신분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했던 것도 돌이켜보면 궤를 같이하는 사고방식이었다.
술타나의 눈에 아련한 회한이 스쳤다.
“이제는 내 아들이 아니게 된 핏줄…… 그 녀석이 데려온 상대가 온갖 사내들에게 다리를 벌리며 살아온 매춘부만 아니었던들, 여는 결국 녀석의 결혼을 허락했을 것이야.”
“…….”
“뭐, 이것도 아궁…… 아니, 그 반역자를 기르면서 속을 썩이며 바꿔온 마음가짐이긴 하지만…… 여는 어머니로서 최대한 이해하고 또 받아들이려 노력하였음이라. 그러나 어찌 최소한의 정절도 없는 여자를 한 가족으로 맞이하리오. 최소한 왕국을 도모하는 어머니에게 누를 끼치진 않을 만큼의 미덕을 갖춘 상대를 골라 와야 할 게 아닌가.”
기합 같은 한숨을 내쉰 꼰대는 스스로를 빠르게 다잡아, 자식을 사사(賜死)한 어머니로부터 철관을 쓴 왕으로 돌아왔다.
“여하간, 어떤가? 오늘 여의 침실에 함께 들겠는가?”
평소 가끔씩 하고 다니던 침대 위의 노동 정도라면 싫어도 못할 것까진 없다.
그러나 스스로 꼰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 꼰대의 논리에 따르자면, 이 꼰대는 오늘부터 내게 정절을 지킬 결심을 하고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즉, 예전에 했던 말과 달리, 오늘 이후로는 더 이상 나 이외의 다른 선택지를 고려조차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런 일방적인 통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뭉근한 짜증이 치밀었다. 이 땅에 깔아놓은 사업장들을 고려하면 술타나의 체면을 뭉개기도 곤란했다. 꼰대가 자신의 체면을 걸고 구사하는 벼랑 끝 전술이었다.
“나중에 후회할 일은 그만두시지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나는 당신의 기대에 보답할 생각이 없습니다.”
최대한 우회적으로 거절하는 말에 술타나가 다시금 미소를 머금었다.
“후회할 일이 무엇이겠는고? 여의 정절은 여의 것이며, 여가 세운 결심은 그대의 정절과는 무관하다. 또한 내 이미 그대에게 율법에 따라 세 명의 부인을 더 두어도 된다고 하였으니, 그대가 다른 여자를 품는다 한들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
꼴꼴꼴. 술잔에 아락을 따르는 소리. 술타나는 새로 채운 잔을 든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지금도 보라. 여가 이렇게까지 권하는데도 삼가고 절제하는 그대의 모습을.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여가 그대의 지조 없음을 경계하거나 그대에 대한 평가를 낮추기를 바라는가?”
“나는 절대로 자식을 만들지 않을 겁니다.”
“뜻대로 하라. 끝끝내 그대의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재건한 왕국이 당신의 대에서 끝나도 좋습니까?”
“설마 좋을 리가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새 왕통을 자을 씨실로 그대의 피를 대신할 것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호랑이가 아닌 잡스러운 짐승의 피로 왕통을 잇느니 차라리 일대에 그치는 영광이 더 나을 것이야.”
“별로 유익하지 않은 쪽으로 생각이 바뀌셨군요.”
“왕국에 무엇이 유익한가는 왕이 판단한다. 그대에게는 왕의 판단을 논할 자격이 없다.”
들고 있던 잔을 쭉 비우고 내려놓은 술타나는, 낮보다 더 가까운 간격으로 다가서서 내 옷깃을 움켜쥐었다.
“싫다면 말하라. 강요하진 않으리.”
“이미 사실상의 강요입니다.”
“뭐 어떤가. 그대가 여에게 가르침을 주었듯이, 나라를 짊어진 군주에게는 부끄러움이 없을진대. 여는 그대가 왕국을 위한 최선임을 확신한다.”
술타나의 말 마디마디에선 방금까지 마신 술의 야자향이 묻어났다. 지금이야 마신 지 얼마 안 되어서 향기지만, 내일이 되면 주취자 특유의 싫은 구취로 바뀌어있을 것이다.
‘오늘의 잠은 쪽잠이 전부겠군.’
침대 위의 노동도 노동이지만, 내게는 그렇잖아도 부족한 잠이 더 부족해진다는 게 고역이었다. 측근이 아닌 타인을 곁에 두고는 신경이 곤두서서 제대로 수면을 취할 수가 없다.
그래도 요즘은 원탁을 무너뜨리는 싸움에 많은 진전이 있어서 그런지 과거보다는 잠을 잘 자게 되어서 형편이 좀 나았다.
“침실이 어딥니까?”
침실의 위치는 뻔히 보이지만, 이미 아는 티를 내어선 곤란했다. 내 물음에 술타나는 빙그레 웃으며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쪽으로.”
이 같은 비즈니스 섹스에 임할 때 나는 상대를 실신시키는 것 외에 다른 처리방식을 알지 못한다. 보다 정확하게는, 다른 처리방식은 불필요한 심력소모가 너무 컸다.
다행히 술타나를 실신시키는 데엔 큰 문제가 없었다. 이 꼰대가 받은 할례는 면도날로 그어 피를 내는 수준에 불과했던 까닭이다. 이러면 흉터가 남기는 해도 성감(性感)은 거의 온전하게 보존된다.
만약 술타나가 음핵과 소음순, 그리고 대음순까지 다 절개한 후 꿰매어버리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할례를 받았다면, 이번 침대 위의 노동은 정도 이상으로 피곤하고 귀찮은 일이 되었을 것이다.
일전에 술타나는 자기가 어릴 때에도 옛 왕가의 자손이 귀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술타나가 온건한 방식의 할례를 받은 데엔 그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었다. 거친 할례는 패혈증이나 파상풍 등 치명적인 감염을 동반할 가능성이 높다.
쪽잠에서 깬 나는 샤워를 하고서 침실과 붙어있는 거실로 나와 TV를 켰다.
공식적인 표준시는 셋, 비공식적인 표준시는 넷인 나라답게, 인도네시아의 뉴스채널과 고위험수렵 정보 채널 중엔 24시간 내내 송출을 쉬지 않는 채널들이 많았다.
예전엔 바하사 인도네시아(인도네시아어)를 모르는 내가 출장을 나와서 볼 만한 로컬 채널이라곤 24시간 모든 프로그램을 영어로 내보내는 「인도네시아 TV」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헌터들이 많아지고, 인도네시아로 들어오는 용병과 사냥꾼들도 늘어남에 따라, 최소한 뉴스 및 정보 채널들만큼은 영어 프로그램을 추가 편성하거나 영문 자막을 달아주거나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외국인 헌터들의 수가 많다고는 못해도, 그들의 소비력은 숫자에 비해 굉장한 수준이었으니까.
나는 관심 있는 소식이 나올 때까지 연달아 채널을 바꾸었다.
「호주 정부가 유해 각성체 대량구제를 위한 군사작전 「오퍼레이션 인랜드 스러스트」의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함에 따라, 제3차 에뮤전쟁과 제2차 낙타전쟁, 그리고 제5차 토끼전쟁이 또다시 호주의 전략적 패배로 끝나게 되었-」
틱.
「영국이 외교적으로 제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가운데, 국제사회의 감시가 약화된 틈을 타 홍콩에 대한 중국의 탄압이 재차 강화되는 추세-」
틱.
「자카르타에서 또다시 바다악어에 의한 인명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이로써 이달 들어 바다악어에게 살해당한 사망자의 숫자가 여든한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인 시가지의 침수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틱.
「알라의 검 알림 샤히디의 승리로 평화가 찾아온 예멘 땅에는-」
틱.
「일본 정부가 유엔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에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옛 식민국가들의 양해와 지지를 구하기 위해 해외순방에 나서겠다고 발표한 고이즈미 총리는 순방의 첫 번째 행선지로 한국을 선택했습니다. 커피클럽의 회원국인 한국을 설득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과제라는 게 일본 정부의 시각인데요, 일본이 구상하는 거부권 협의기구엔 우리 인도네시아의 지분도 있는 만큼 우리 정부 또한 일본의 행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채널을 바꾸기를 멈추었다.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은 기간은 고작 3년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식민지는 식민지였으니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거부권 협의기구에 인도네시아도 회원국으로 이름을 올릴 자격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뉴스 채널은 한국의 동향 또한 비중 있는 내용으로 다루었다.
일본의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에 대한 한국의 여론은 「내키지는 않지만 저 새끼들을 도와줘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임이사국이 있으면 우리에게 적잖은 힘이 될 것이다.」 정도로 요약 가능했다.
중국은 가용 각성능력자 전력을 급격하게 확대하는 중이고, 북한은 연일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 주겠다.” 운운하며 전쟁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데, 이 와중에 전통적인 맹방인 미국은 주한미군을 전부 철수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던 까닭이다.
「한국인들은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하기를 바랍니까? 그렇다면 주둔비용을 전액 한국이 부담하십시오! 미국의 대통령인 나는 불합리한 세금 낭비를 참을 수 없습니다! 나는 한국처럼 부유한 나라의 안보 무임승차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와 같은 백악관 미치광이의 광기 어린 행보는 나날이 강도를 더해가는 북한과의 갈등과 어우러져 한국인들의 안보 불안을 심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안보협력을 강화할 상대는 싫어도 일본이 전부였다.
북한과의 갈등이 날로 첨예해지게 된 원인들 중 하나는 일련의 한국 인터넷 방송인들이 일으킨 사고였다.
특정 수렵기업 연합체 소속으로 헌터와 방송인 일을 병행하는 이들은 또한 극우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난 「무장공비 브이로그」 사태에 응징을 가한다는 명분으로 북한 영토에 침투하여 몹시 해괴한 짓을 벌이고 온 것이다.
이들은 사후의 입장발표에서 “북한의 도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무능한 정부에게는 우리를 처벌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북한의 우스꽝스러운 도발을 같은 방식으로 갚아줌으로써 북한이 감히 추가적인 도발을 하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그로써 국민들의 안보 불안을 덜어주고자 했을 뿐이다.”라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마침 뉴스 화면에선 그들이 인터넷에 올린 북한에서의 활동 영상 일부가 자료화면으로 제공되고 있었다. 시청률이 낮은 심야의 방송이다 보니 자료화면 제공에 할애하는 시간이 넉넉했다.
화면 속에서, 인터넷 방송인들은 제압당한 북한 병사의 발버둥을 내려다보며 낄낄대는 중이었다.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애벌레처럼 몸부림을 치는 북한 병사는 그로 인해 살갗이 까여 피가 나고 허리띠가 풀려 바지가 조금 벗겨졌다.
이를 본 한 침입자 헌터가 내가 알아듣기 어려운 표현이 섞인 조롱을 입에 담았다.
「아 북남 소추 쉑 꼬물거리는 게 귀엽노 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