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490화 (490/561)

#49. 종전 (3)

예멘 전역은 이슬람식 충성맹세(بَيْعَة)에 의해 빠른 속도로 안정화되었다.

각지의 토호와 부족들, 그리고 아직 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민병대 및 군부대의 사령관들이 알림 샤히디에게 잇달아 충성을 서약하고, 그들의 권익 보호에 대한 문서화된 약속을 받아감으로써 이 땅의 오래된 전근대적 질서가 새단장을 마치게 된 것이다.

“당신께 나의 충성을 바칩니다. 어려울 때나 쉬울 때나, 힘들 때나 편안할 때나, 높으신 알라께서 당신의 죄악을 명징한 증거로써 밝히시는 경우를 제외하면, 나는 당신의 명령을 듣고 그에 충실히 복종하겠습니다.”

이렇게 샤히디와 직접 대면해서 충성서약을 할 기회를 주는 것은 각지의 유력자들이 먼저 의향을 타진해온 일이었다. 대외적인 안전보장도 안전보장이거니와, 이슬람 전통 방식으로 문서화 된 충성계약이 성립하고 나면, 격변의 풍랑 속에서 자신의 지도력을 의심하는 내부의 목소리들을 ‘무적의 승리자’ 샤히디의 권위를 등에 업고서 찍어 누를 수 있게 되는 까닭이었다.

돌아온 마법의 시대는 이 세상의 모든 지배질서를 동요하게 만들었다. 이 오랜 전란의 땅에서 전통과 관습으로 이어져 내려온 전근대적 질서도 예외일 순 없었다.

안사르 알라와 안사르 알 샤리아(알 카에다의 세력)가 무너진 지금, 그들에게 의지했던 옛 영주(셰이크)의 후손들과 이맘들에게는 이제 새로운 지주(支柱)로서의 알림 샤히디가 필요했다.

알 카에다가 참수작전으로 분해된 이래 확실한 편을 정하지 못했던 예멘 중부 일대(하드라무트 지역)는 이런 과정을 통해 추가적인 교전 없이 자연스러운 흡수가 이루어졌다.

충성맹세를 하러 온 이맘과 토호들은 선거철의 정치인들처럼 웃는 낯짝으로 사진을 찍고 돌아갔다. 모두가 만족하는 거래였다.

한편 샤히디에 대한 충성맹세는 각지의 부족들이 자존심을 세우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알라의 검 알림 샤히디에게 굴복한 것이다. 우리가 너희에게 협조하는 것은 그분께서 그러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니, 너희가 우리의 정복자라고 착각하지는 마라.”

여기서 말하는 너희란 대통령지도력위원회(PLC)와 남부과도연합을 의미했다. 두 세력이 각기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를 배후로 둔 꼭두각시라는 건 온 예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

오랫동안 죽고 죽이는 싸움을 치러온 외세의 앞잡이들을 상대로 허리를 굽히라는 건, 과격한 자들에게는 차라리 희망 없는 싸움을 계속하다가 죽는 게 나을 만큼의 치욕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PLC나 과도연합과 형식상 대등한 지위를 누릴 수 있게끔 판을 짜주었다.

각지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병력은 여러 부족의 민병대에서 차출한 각성능력자들을 출신지가 아닌 다른 지역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마련했다. PLC나 과도연합의 군대에게 맡기자니 기율이 영 미덥지가 못했고, 민병대의 근거지와 임무지역이 일치할 경우엔 해당 지역의 고립성이 심화되어 통제에 어려움이 발생할 것이 우려되었다.

이렇듯 지역별로 교차 배치된 민병대원들에게는 샤히디 명의의 당부가 전달되었다.

“그대들의 고향이 공정한 처우를 받기를 바란다면, 그대들 또한 임무지역의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 이전까지의 증오는 나를 봐서라도 전부 내려놓기를 바란다. 그대들이 나 알림 샤히디의 기치 아래 모인 전사들임을 기억하라.”

이슬람 샤리아 형법의 기본은 보복의 상호주의다. 눈에는 눈, 귀에는 귀. 너희 가족이 당하는 꼴을 보기 싫으면 너희가 먼저 잘하라는 당부는 그래서 민병대원들에게 잘 스며들었다.

이름뿐이지만 이들에게 샤히디의 전사들이라는 명예를 준 것도 제법 효과가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멋진 제복을 입으면 애써 몸가짐을 다르게 해보려고 하는 것과 비슷한, 그러나 그보다는 훨씬 강력한 효과였다. 이 효과는 교육수준이 낮은 집단일수록 강하게 작용한다.

또한 이들은 지역간 차별대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각지의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확인시켜줄 수단이기도 했다.

‘방송이나 온라인 매체로 보여주기보다는 혈족과 지인의 입을 통해 듣도록 해주는 쪽이 더 확실한 법이지.’

사우디와 UAE 양측은 알림 샤히디가 보여주는 능란한 전지 안정화에 조금 난감해하는 기색이었다. 자기들이 파고들어 지배력을 확대하거나 추가적인 이익을 추구하거나 할 구석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샤히디가 끌어오는 출처 불명의 막대한 해외자금은 사우디와 UAE로부터 받아둔 사전투자 이상의 액수였고, 그 많은 돈을 지역발전기금의 형태로 각지의 부족들에게 맡기니 샤히디에 대한 부족들의 지지도는 계속해서 상승곡선을 그려갔다.

중동의 제국주의자들은 샤히디 그룹이 금전적인 측면에서조차 자신들에 대한 의존도가 생각만큼 높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한 번 당황했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온천에 차린 캠프에서 관리했다. 경태는 두 팔을 번쩍 들고 환호했다.

“와! 형님이랑 바위사막에서 온천 캠핑!”

수연이 하루쯤 쉬고 가기를 권했던 알 하미(الحامي) 인근의 온천 「정원의 눈」은, 그 이름처럼 위에서 수원(水原)을 내려다보면 언뜻 사람의 눈과 흡사한 것도 같은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암반 한가운데 서너 명쯤 들어가면 꽉 찰 크기의 작은 수직 동혈이 뚫려있고, 그 동혈 안에서 온천수가 샘솟아 나오는 것이었다.

직접 와서 보니 이곳은 조립식 아기들과 접촉을 유지하며 휴식을 취하기에 좋은 위치였다.

나는 여기서 하루가 아니라 닷새쯤을 쉬어 가기로 했다. 부하들에게는 재충전의 시간을 주고 나만 사무를 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마도서 봉쇄수도원과 조립식 아기들을 활용해 부하들의 능력을 강화해줄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뜨거운 열사의 땅에서 온천욕을 즐긴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사막의 밤은 사람이 저체온증으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바람이 차다. 실제 최저기온은 20도 언저리라도 연중 고르게 부는 강한 바람이 체감온도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더욱이 이곳은 산지여서, 차광(遮光)만 확실히 해주면 한낮에도 체감기온이 한국의 초가을과 비슷해졌다. 또 해안에 닻을 내린 「알 왈리드 1세」 선단과는 5분 이내로 왕복이 가능하기도 하여, 부하들이 심신을 달래는 데엔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내가 방침을 정하고 수연이 실무를 맡은 전후처리는 물 흐르듯 막힘없이 이루어졌다. 나와 나란히 사무를 소화하는 수연에게서는 편안한 안정감의 색채가 엿보였다. 잔잔한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의 감정을 꼭 닮아있는 색채였다.

이런 쪽으론 분장(分掌)할 업무가 드문 경태는 괜히 얼쩡거리며 정신 사나운 소리를 해댔다.

“아, 아깝다. 이 정도면 우리 형님께서 노벨평화상이라도 하나 받으셔야 하는 건데.”

“……갑자기 웬 노벨평화상 타령이냐?”

“이 예멘이 내전에 시달린 게 벌써 몇 년째입니까? 그걸 한순간에 끝내버린 업적이면 사실 노벨상을 받고도 남죠. 단순히 내전을 종결지은 걸로 끝이 아니라 완벽에 가까운 안정화 작업까지 해주고 있잖습니까. 그것도 3억 달러 가까운 사비를 들여가면서요.”

경태는 진지한 어조로 헛소리를 나불댔다.

“장기적으로 수백만의 인명을 기아와 죽음으로부터 구해주고, 또 세계적으로 중요한 홍해항로의 안전까지 확보해줬으면 솔직히 노벨상을 받기엔 충분한 업적 아닙니까? 형님께서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사시는 분이라 못 받으실 뿐이죠.”

“농담이라도 좀 말 같은 소리를 해라.”

“에이. 말이 안 될 건 또 뭐겠습니까? 그 제국박이 처칠도 자기가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고 굳게 믿었고, 실제 수상은 못 했어도 지지하는 여론이 꽤 있었는데요. 객관적으로 볼 때 처칠보다는 형님이 백배는 더 낫다는 게 이 김경태의 판단입니다.”

나는 어이없는 감정을 담아 경태 녀석을 바라보았다. 경태는 히히 웃으며 제 부하들이 노는 곳으로 달아났다. 내 옆에선 수연이 작은 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

경태 녀석의 방해는 내가 어느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한 보고를 열람하고 있을 때 들어온 것이었다. 찢어지는 비명이 담겨있던 첨부 영상은 어느새 재생이 끝나버린 상태였다.

아무래도 경태 녀석은 내가 이 영상을 보는 걸 방해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영상에 담겨있는 건 샤히디를 살인자라고 비난했던 한 여인의 비참한 죽음이었다.

죽은 여인은 5년 전 열두 살이었던 아들을 안사르 알라에게 소년병으로 빼앗겼던 한 사람의 어머니였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아들이 안사르 알라의 패배와 함께 시체가 되어 돌아오자, 여인은 자신의 피로 글씨를 적은 팻말을 들고 사나의 대로에 나와 샤히디를 살인자라고 규탄했다.

인근 주민들이 보기에 여인의 행동은 자칫 샤히디의 분노를 야기하여 지역 공동체의 이익과 생존성을 저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미친년이 괜히 여러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여인은 갑작스러운 간통 혐의를 뒤집어쓴 채 같은 동네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었다.

문제는 교육 수준이 낮은 지역주민들이 과잉충성의 일환으로 해당 영상을 공개했다는 점. 저마다 말이 다른 상황설명과 정당성 주장으로 말미암아 진상이 드러나는 바람에, 온라인에선 안 좋은 쪽으로 화제가 되고 있었다.

‘이까짓 게 뭐라고.’

나는 샤히디의 명의로 애도와 유감의 뜻을 표하라는 지시를 작성했다. 책임자를 찾아 처벌하고, 소년병들의 유가족들에겐 일정한 보상금을 지급하겠다는 발표를 함께 내보내면 논란을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식 잃은 어머니에게 누명을 씌워 돌로 쳐 죽였던 지역 공동체는, 아마도 비슷한 방식의 모의로 새로운 희생양을 몇 명쯤 만들어내어 이번 고비를 넘기겠지.

샤히디에게 우호적인 언론들은 이번 사건의 책임을 안사르 알라와 지역사회의 야만성에서 찾고 있었다.

「이번 사건은 분명 끔찍한 비극이다. 그러나 애초에 소년병들을 전장으로 내몰아 죽도록 만든 자들이 누구인가? 바로 안사르 알라의 시아파 광신도들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샤히디의 전사들은 소년병들과 싸울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샤히디의 전사들이 강인하다 하나, 총에 맞으면 목숨이 위험한 건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데 모래폭풍이 몰아치고 독가스가 터져 나오는 전장에서 어찌 적들의 사정을 세세히 살펴가며 싸울 수 있었겠는가?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가 전쟁에 대해 너무도 무지하다는 사실을 먼저 자각해야 할 것이다.」

「소년병들은 안사르 알라의 창이자 방패였다. 창을 꺾고 방패를 부수지 않고서 그 너머의 살인자를 무릎 꿇릴 방법 따위는 없다.」

「알림 샤히디는 사비를 들여 중립국의 법학자들을 초빙하면서까지 행정과 치안의 공정함을 보장하려 했다. 그럼에도 지역사회의 주민들이 소년병의 어머니에게 사적 제재를 가한 것은 샤히디의 고결한 뜻과 권위를 무시한 처사라고 봐야 한다.」

「이러한 야만성은 안사르 알라 정권의 악하고 무질서한 통치 아래 배양된 것으로서-」

이 정도면 언론사들에게 따로 금전적인 후원을 해주지 않아도 무방할 것 같았다. 어차피 이슬람 문화권의 언론들이라는 게 대부분 관영(官營) 아니면 관제(官制)여서, 그 배후에 있는 정부들이 샤히디의 편을 들어주는 한 비판적인 논조가 나올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서구권 언론들의 기사에서도 샤히디에게 부정적인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동안 축적해온 이미지와 인기의 힘, 그리고 지금까지 내보내왔던 보도들의 관성 덕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곳 예멘에서 행하는 안정화와 새로운 지배질서 구축은 아프가니스탄의 예행연습을 겸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쪽도 전근대적 관습과 부족 정체성이 강하게 남아있는 땅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다만 군사적으로 패퇴시킨 안사르 알라와 달리, 탈레반은 종교적인 구실로 숙청해야 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그게 큰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놈들의 종교적 악덕이 어디 한두 가지여야지.’

트집을 잡으려면 무엇으로든 잡을 수 있다. 정치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그러나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명분으로 숙청해버리면 그만이다.

숙청당한 놈들 가운데 다수는 중국의 뇌수술 공장에서 인간 발전기, 인간 발화기관 등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중국이 축적한 뇌수술 노하우를 내가 습득하는 방안도 검토하고는 있는데, 대마법사의 인시를 그런 식으로 낭비하는 게 과연 경제적인 선택일지는 의문이었다.

오후 다섯 시. 해가 저물 시간이 다가오자 부하들이 해변의 마을로부터 현지 요리들을 공수해왔다. 끼니때마다 받기로 하고 미리 후한 값을 치러놓은 요리들이었다.

여기엔 아직 굽지 않은 육류가 포함되어 있었다. 경태가 “캠핑에서 바비큐를 빼놓을 순 없다.”며 따로 주문한 것들이었다.

“듣자니 이 동네 닭고기 바비큐는 좋은 돌을 줍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하더라고요.”

얕게 판 구덩이에 숯불을 채운 경태는, 제 부하들과 함께 주워 세척한 돌멩이들을 숯불 위에 고르게 깔았다.

돌이 뜨겁게 달궈진 뒤엔 그 위에 식용유를 바르고 닭고기를 올렸다. 몸통을 세로로 두 쪽 내어 편평하게 펼쳐지도록 손질한 후 양념에 버무려두었던 닭고기였다. 경태는 지글거리며 익어가는 고기를 앞뒤로 뒤집어가며 추가적인 양념을 발라 풍미를 진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구운 고기를 볶음밥에 얹어 먹는 게 이 지역의 전통적인 방식이라고 했다.

수연은 내 몫의 식기에 보기 좋게 음식을 덜어준 후, 산양유와 사프란을 첨가한 홍차를 내어왔다. 찻잎과 사프란은 해안 마을의 이맘이 ‘고귀한 사람들의 식사에 필요한 것’이라며 자발적으로 내어준 것이었다.

이 지역의 소득수준을 감안하면, 이맘이 준 한 병의 이란산(産) 사프란은 제법 값어치가 높은 뇌물이었다.

“향이 마음에 드십니까?”

“음. 적당하다. 부드러우면서도 깔끔해.”

노을빛으로 물든 바위 사막에서 이국적인 요리와 차를 즐기는 시간은 나 같은 눈깔병신에게도 제법 각별한 것이었다.

건조한 산지의 기온변화는 급격하여, 식사를 마칠 즈음엔 온천욕을 즐기기에 적당한 수준까지 온도가 떨어졌다.

「정원의 눈」에서 샘솟는 온천수의 양은 내가 힘을 써서 인위적으로 늘려놓았다. 지하에 흐르는 온천수맥의 위치를 파악한 후, 암반에 추가적인 균열을 냄으로써 단위시간당 유출량을 거의 일곱 배에 가깝게 증가시킨 것이다.

이렇게 끌어올린 온천수는 커다란 바위들을 염동력으로 절삭 가공하여 만든 개방형 사각욕장들로 흘러들었다. 마른 침식지형의 틈새에 자리한 욕장들은 사막의 밤바람에 섞인 모래 알갱이들을 피하며 편안한 휴식을 취하기에 적합했다.

점점 더 서늘함을 더해가는 공기 아래, 나는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근 채로 짙어지는 어스름을 맞이했다.

하늘에는 별이 보이고, 계곡의 아래로는 달빛에 젖은 사막과 바다가 깔려있다. 건천을 따라 자란 기름야자 나무들 사이에선 하얀 벽과 비취색 장식을 가진 모스크가 독특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비록 나는 이 풍경을 온전하게 감상할 수 없으나, 부하들에게는 심적으로 꽤나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수연은 흰 수건을 몸에 감은 채로 나와 같은 욕장에 들어왔다. 욕장 가장자리엔 제 몫의 노트북과 태블릿을 올려놓았다.

극한환경에서의 사용을 전제로 만들어진 러기드 태블릿과 노트북은 당연히 높은 등급의 방수처리가 되어있어, 하려고만 한다면 온천욕과 업무를 병행할 수 있었다. 염동력으로 띄워놓고 타자 역시 염동력으로 두드린다면 딱히 물이 들어갈 일도 없겠지만.

이 녀석에게 그냥 쉬라는 말이 소용없다는 건 경험으로 아는 바였다.

무엇보다, 지금은 나부터가 가만히 쉬고 있는 게 아니기도 했다. 모범을 보이지 못하니 말하기도 떳떳지 못하다. 다만 내가 하듯이 쉬엄쉬엄 하라고만 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일본의 정계와 여론 동향이 담긴 보고를 열람했다.

오늘, 일본에선 총리가 직접 참석하는 공개 토론회가 방송되었다. 여야의 주요 인사들은 물론이고 영향력 있는 재야인사들까지 한자리에 모인 이 토론회는, 일본 총리가 자신의 정치생명을 좌우할 논란을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제안한 것이었다.

조금 전, 시차를 감안하면 현지시각으로는 거의 자정이 되어서야 종료된 이 토론회는 처음엔 살벌한 분위기로 막을 올렸다.

「총리! 예 아니오로 분명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정부가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을 위해 북방영토와 다케시마, 센카쿠 열도를 전부 포기할 방침을 검토 중이라는 폭로가 사실입니까?」

우익 재야인사의 사나운 질문에, 총리는 분명한 “예”로 대답했다.

이에 토론회는 시작부터 난장판으로 변했다. 여기저기서 매국노니 비국민이니 하는 고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잔뜩 야윈 몰골의 총리는 형형한 눈빛으로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이 침착한 모습은 내게도 조금은 인상적이었다.

토론회장이 조금 잠잠해진 틈을 타 총리는 이렇게 호소했다.

「여러분! 우리가 주변국들의 외교적 지지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상임이사국의 지위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일 뿐입니다! 주변국들과의 굳건한 연대가 상임이사국의 영향력을 뒷받침해준다면, 우리는 투자하는 것 이상의 국익을 거둬들일 수 있습니다!」

「투자? 투자라고?! 영토는 주권행사의 신성한 기반이다! 영토를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그걸 그냥 포기해버리는 걸 두고 투자? 투우우자? 네놈! 지금 그게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총리는 또다시 터져 나오는 사나운 반발을 긴장된 웃음을 머금고 긍정했다.

「바로 그겁니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영토는 신성한 것이며, 그 무엇도 영토를 대신할 순 없죠! 달리 말해, 영토는 오직 영토로만 대신할 수 있습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친애하는 귀빈 여러분! 그리고 이 방송을 보고 계신 국민 여러분! 우리가 지금껏 북방영토나 다케시마, 센카쿠 열도에 집착해온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국가의 미래가 바다에 걸려있으며, 그 섬들이 바다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중요한 땅들이기 때문이지 않았습니까?」

좌중이 의구심으로 잠잠해진 틈을 타 총리는 힘찬 말들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보다 넓은 바다를 손에 넣읍시다! 분쟁지역을 포기하는 대가로 국제사회에서의 특별한 지위와 영향력을 얻고, 그 힘과 외교적인 지지를 지렛대 삼아 영국의 해외영토를 지난 도쿄 참사의 보상으로 받아내자는 말입니다!」

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폭력적인 논리 전개여서, 좌중은 직전과는 다른 의미로 할 말을 잃었다. 총리가 토론회의 흐름을 초반부터 자신의 것으로 가져온 순간이었다.

「북방영토 대신 버뮤다 섬과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를! 다케시마 대신 버진 아일랜드와 디에고 가르시아 섬을! 센카쿠 열도 대신 포클랜드 제도를! 어째서 우리가 이 좁은 동아시아의 바다에 갇혀있어야 합니까? 우리가 영국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빼앗는다면! 응당 상임이사국의 지위에 어울리는 전 지구적 해양투사력도 함께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에게 그렇게 할 힘과 의지와 명분이 있음을 굳게 확신합니다!」

기세를 탄 총리는 더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목청을 높일 수 있었다.

「영토가 신성하다지만 국민의 생명보다 더 신성하지는 않습니다! 지난 대참사에 휘말려 세상을 떠난 우리 국민들의 생명은 영국의 해외영토를 다 받아내도 모자랄 만큼 값지다는 게 이 고이즈미의 생각입니다!」

「비록 섬은 아니지만, 만약 영국령 지브롤터가 우리 일본의 영토가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일본 최초의 유럽 내 영토를 관세와 물류의 관문으로 삼으면 얼마나 많은 무역이익이 발생하겠습니까?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대한 영향력은 우리에게 또 얼마나 많은 정치적·외교적 이익을 가져다주겠습니까?」

「제 팬클럽의 회원인 어느 한국인 청년이 좋은 말을 하나 가르쳐 주더군요! “사람이 무릎을 꿇는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다.”라고요! 예! 우리 일본은 과거사를 정리하기 위해 무릎을 꿇음으로써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추진력을 얻을 것입니다!」

「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구상이 그저 허황된 망상에 불과하다고 느끼십니까? 아니면 온 나라의 힘을 모아 전력으로 도모해볼 만한 대업이라고 보십니까?」

내내 말문이 막혀있던 극우 명사들 가운데 하나는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린 채로 씹어 내뱉듯이 입을 열었다.

「설득력이…… 있어!!!」

다른 패널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동조하는 발언들이 나왔다. 이런 동조자들은, 사실 대부분 야스쿠니 선녀를 통해 사전에 그레이스의 지령을 받은 바람잡이들이었다.

일본 총리는 고래에 대한 국민들의 두려움도 건드렸다.

「동아시아의 바다를 벗어나 오대양에 해외영토를 획득하는 것은 국가안보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세계적인 해양각성체 감시망을 구축하는데 다케시마가 더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가 더 도움이 되겠습니까?」

「앞으로의 세계에선 고래를 비롯한 해양각성체들의 동향을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이 국가의 안보를 좌우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섬나라인 우리 일본은 다른 나라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자체적인 대(對) 자연각성체 해양안보역량을 구축할 능력을 반드시 갖추어야만 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과 친애하는 의원 여러분! 도쿄의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이 고이즈미에게 힘을 실어주십시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나아갑시다! 일본을 다시 위대하게! 일본을 다시 위대하게!」

이후 총리는 외교적 수단에 의한 해외영토 획득이 실패할 경우 전쟁을 치러서라도 대가를 받아낼 것임을 암시했다.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는 않았으되 누가 들어도 그 의지가 느껴지는 교묘한 화법이었다.

지금의 일본에겐 전쟁을 치를 체력이 없지만 영국의 상황도 일본보다 나을 것이 없고, 명분이 확실한 ‘정의로운 응징’에 대하여 ‘평소 전쟁 준비를 충실하게 해둔 이웃 국가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히 개전이 가능하다는 암시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섬들을 점령하고 국제사회로부터 공인을 받으면 영국이 뭘 어쩌겠냐는 이야기였다.

점점 더 강해지는 바람잡이들의 호응 속에서 진행된 토론회는, 마지막에 총리가 박수갈채를 받으며 퇴장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 토론회를 본 경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씁…… 이상하다. 펀쿨섹 이 양반이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지나치게 극한경험을 하는 바람에 정신적으로 각성이라도 해버렸나? 이젠 그냥 고이즈미가 아니라 6성 돌파 초월등급 고이즈미가 되어버렸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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