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474화 (474/561)

#48. 안사르 알라 (2)

예멘에 할거한 세력들 중 독보적 최약체인 PLC(대통령 지도력 위원회)는 그 행정부를 예멘 땅에 두고 있지도 않았다. PLC가 장악한 지역 내엔 행정부를 설치할 만한 도시가 전무한 까닭이었다. 있는 거라곤 한국 기준으로 일개 읍(邑)조차도 되지 못하는 마리브(Marib)와 모카(Mocha)가 전부.

그나마 최전선과 가까운 마리브는 언제 함락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운 상태여서, 실질적으로는 인구 1만 남짓한 작은 항구 모카가 PLC 영역 내의 최대거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PLC의 행정부는 동맹이자 후원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 위치하고 있었다. 안사르 알라에게 수도(首都) 사나(صَنْعَاء/Sana'a)를 빼앗겼을 때부터 사실상 망명정부나 마찬가지인 신세였으되, 행정부의 명칭을 대통령 지도력 위원회로 바꾸면서 거점이 리야드라고 아예 못을 박아버린 것이다.

이는 알고 보면 사우디아라비아가 안사르 알라에게 보내는 유화적인 메시지였다. 출장에 앞서 현지 상황을 파악한 경태는 자기가 이해한 이 메시지를 딱 한마디로 요약했다.

「우리 이제 그만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PLC가 지금의 이름을 쓰기 시작한 건 사실 최근의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그냥 예멘 아랍 공화국 행정부라는 평범한 명칭을 사용했다.

새로운 이름을 쓰기 시작한 표면적인 계기는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전(前) 대통령의 ‘자발적인’ 퇴진과 권력 이양이었다. 암중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력과 협박을 받아가며 자리를 내려놓은 하디 전 대통령은, 퇴임식에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예멘 아랍 공화국의 새로운 행정부로 기능할 대통령 지도력 위원회의 첫 번째 과제는, 항구적인 정전을 위한 후티 반군(안사르 알라)과의 평화협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날 이후 하디 전 대통령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받아본 보고서는 그의 마지막 행적을 이렇게 적고 있었다.

「리야드의 모처에 감금되어있다는 소문은 있음. 그러나 사실관계 확인이 불가능함.」

사우디아라비아가 안사르 알라와 악연이 깊은 하디 전 대통령을 치워버린 것은 그 자체로 강력한 협상의지의 표명이었다.

비록 사우디 스스로는 아랍의 맹주라는 체면 때문에라도 먼저 나서서 협상을 하자고 할 수 없었지만, 대표자를 갈아치운 괴뢰정부를 내세워 협상을 시도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괴뢰(傀儡/꼭두각시)이지 않은가.

안사르 알라는 시아파 이슬람의 종주국인 이란이 사우디의 목젖 밑에 들이대 놓은 칼날과도 같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기후가 온건한 남서부 산악지대에 인구가 몰려있는데, 그 바로 아래가 안사르 알라의 세력권인 까닭이다.

이는 사우디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태였다.

그럼에도 사우디가 무승부를 희망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도무지 싸워서 이길 가망이 보이질 않으니까.’

마법의 시대가 돌아오기 전에도 압도적인 장비와 화력의 우세를 살리지 못한 채 졸전을 거듭했던 집단이 사우디아라비아의 군대다.

군 장교 출신인 경태의 전임자는 그들의 무능에 감탄했었다. 제공권을 장악한 군대가 미군의 정보자산 지원까지 받아가면서 그토록 처참하게 박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전장에서 각성능력자의 힘이 중요해진 지금은 그러한 무능이 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전의(戰意)라는 게 있는지부터가 의문인 사우디-PLC 연합군은 하루하루 처참함의 고점을 갱신해나가며 패주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공군과 용병들이 억제력을 발휘해주지 않았다면 일찌감치 모든 거점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우디를 더욱 조급하게 만드는 건 백악관 미치광이의 언행이었다.

「우리가 대체 왜 저 야만인들을 위해 군대를 배치하고 국방예산을 낭비해야 합니까?」

지속적인 유가 하락과 석유수요 감소는 사우디의 외교적 지위를 격하시켰다. 더는 현대문명의 생명줄을 틀어쥔 국가가 아니게 되어버린 셈.

그렇다고는 해도 미국이 홍해의 안정을 꾀하려면 사우디아라비아의 협조가 필수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사우디가 아예 몰락해버릴 경우 사우디 그 자신이 안사르 알라 다음가는 홍해의 불안요소로 떠오를 게 분명하다. 오일 머니를 퍼먹던 잉여인생들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항로를 위협하는 해적으로 전직하지 말란 법이 없으니까.

그러나 백악관의 미치광이는 그딴 걸 생각할 위인이 아니었다. 기업가 시절의 마인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 인간에겐 오로지 당장 절감할 수 있는 예산만이 중요했다.

계산을 끝마친 미치광이는 악명 높은 재앙의 주둥아리에 시동을 걸었다.

「가진 거라곤 기름 빼면 모래밖에 없는 사우디 사막부족들과 그 추장을 상대로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많은 양보와 굴욕들을 감수해왔습니다! 카슈끄지인지 카슈크림인지 하는 기자가 암살을 당했을 때도, 나는 국익을 고려하여 그들의 비위를 맞춰줘야만 했지요! 그것은 매우 굴욕적인 경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겁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들에게 군사적인 보호와 안보협력을 무상으로 제공하지 않을 것이며, 그럼으로써 아낀 예산을 경기활성화와 미래 산업 육성을 위해 사용할 것입니다! 미국을 계속 위대하게! 미국을 더욱 위대하게!」

「미래 산업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요즘 많은 사람들이 헌터들의 수입에 놀라움을 표하고 있습니다! 특히 비행기나 선박의 동력을 제공하면서 아주 편하게 거액의 돈을 버는 것이 가장 놀랍고 부럽다고들 하지요!」

「생각해보십시오! 헌터들이 그렇게 편히 벌어들이는 돈이 곧 지난날의 중동 사막 추장들이 불로소득으로 가져가던 돈이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누구나 한 번쯤은 배 아프고 아니꼽다는 생각을 해봤을 겁니다! 개중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경우는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그들의 거만함과 폐쇄성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지요!」

「오일 머니! 오일 머니! 그 빌어먹을 놈의 오일 머니! 모범적인 미국인으로서 순수하게 노력으로 성공을 거머쥔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참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한마디로 “니들은 이제 끈이 떨어졌으니 안보협력을 바란다면 돈을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과거의 미국 또한 아주 많은 불로소득을 누리던 국가였다는 사실은 이 미치광이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우디-PLC 연합군이 허접쓰레기라곤 하나, 이들이 완전히 패퇴해버리면 그때는 아랍에미리트가 후원하는 남부과도위원회도 순망치한의 위기를 겪게 된다. 이란의 위성국가가 홍해의 입구, 탄식의 문(바브 엘 만데브)을 통제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이 점을 들어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 백악관의 참모들이 이래선 안 된다고 읍소를 해댔으나, 파천황 그 자체인 백악관의 미치광이는 “아 몰라! 그딴 건 내 알 바 아니고 예산 아낄 거야! 해협통행권 따위 주술사 왕이랑 친해지면 해결될 텐데 왜들 그리 걱정이지?”라는 태도를 꿋꿋하게 고수했다. 세계 화공 분야의 석유 수요는 미국의 생산량만으로도 상당 부분을 채워줄 수 있었기에 더 거침이 없었다.

사우디와 PLC는 국제외교무대에서도 벼랑 끝에 몰렸다.

예멘 내전 최약체인 PLC가 이제껏 국제사회에서 예멘의 정통정부로 인정받아온 것은 미국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미국이 등을 돌렸으니, PLC는 자칫하다간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정통정부의 지위마저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게다가 유럽도 지금은 자기들 코가 석 자지.’

영국과 유럽연합 국가들은 바브 엘 만데브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영국은 지금 나라가 뒤집어지기 직전이고,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유럽연합 국가들도 아라비아 반도 남단의 산악지대에 힘을 투사할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이란에 대한 중국의 지지에 맞설 여력이 충분치 못했고.

무엇보다, 옛 제국주의 국가들은 검은 대륙에서 주술사 왕을 상대로 너무나 많은 판돈을 털려버렸다. 남은 이권들이라도 어떻게 지켜보고자 발버둥을 치는 중인 이 강도국가들에게, 예멘의 일은 상대적으로 우선순위가 낮은 과제였다.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이렇다 보니, 사우디의 종교계 및 민간영역이 느끼는 불안감 또한 폭발 직전의 상태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느 늙은 무프티(율법학자)는 공개적으로 이런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대로 가면 성지까지 위험해진다! 남쪽에서 승리를 거둔 시아파 이교도들이 해안을 따라 북상하면 수일 만에 신성한 땅의 관문 제다가 무너지고 곧장 메카가 위협에 노출될 것이다! 묻노니, 왕실은 성지를 지킬 의지와 능력이 있는가?」

다른 나라 사람들의 감각으로는 쉬이 이해가 가지 않을 근심이다. 성지 메카는 예멘 접경지대로부터 무려 5백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으니까. 특히 휴전선과 수도 사이의 최단거리가 채 30킬로미터도 되지 않는 모 국가의 국민들이 보기엔 지나친 호들갑으로 보이겠지.

그러나 사우디의 국민들은 자기네 군대가, 특히 육군이 병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간혹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승전보가 들어오긴 했어도, 그것만으로는 자국 군대에 대한 사우디 국민들의 평가를 바꿀 수 없었다.

더욱이 최근엔 국경에서 백 킬로미터나 이격된 대도시 압하가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길도 없는 산악지대를 통해 국경을 넘어 침투한 시아파 게릴라들이 박격포와 로켓 공격을 가한 후 달아난 것이다.

이들이 자랑스럽게 공개한 공격 영상은 사우디의 민심이 극도로 요동치게 만들었다. 지난 2009년에도 후티 반군이 사우디 영토를 침공하고 두 개 마을을 점령한 전례가 있었지만, 도시가 공격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접경지대에선 많은 주민들이 피난길에 올랐고, 그렇지 않은 주민들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대대적인 필수품 사재기에 나섰다.

일부 군사전문가들은 의외로 안사르 알라의 메카 공격이 현실화될 가능성을 점쳤다.

「후티 반군이 홍해의 입구를 완전히 통제하게 되면 사우디의 해군은 동서로 양분된단 말이죠……. 그러면 후티 반군은 미사일과 자폭드론, 그리고 산악 및 해상침투 게릴라들의 파괴공작으로 홍해 내의 사우디 해군 역량을 차근차근 무너뜨려나갈 수 있습니다.」

「직접적인 교전을 회피하며 보급시설을 파괴하는 데 주력하기만 해도, 반년이 지나기 전에 홍해 내의 모든 사우디 군함들이 작전불능 상태에 빠질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 한들 후티 반군이 메카를 공격하는 건 매우 소모적이고 비합리적인 선택이 될 겁니다. 그러나 시아파 광신도들이 합리적이어봤자 얼마나 합리적일까요?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메카가 지니는 가치를 감안할 때, 후티 반군이 메카를 공격할 개연성은 충분히 갖춰져 있다고 봅니다. 그때의 사우디가 과연 후티 반군을 저지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사우디 왕실이 국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카드가 알림 샤히디였다. 사우디의 차기 국왕이자 국왕 대행인 왕세자는 공영방송 채널에 등장하여 준엄하게 설교했다.

「그대들이 다 아는 어느 위대한 전사가 자신의 동지들과 왕국의 군대를 함께 이끌고 이단자들에게 반격을 가할 준비를 하고 있다. 움직임이 곧 축복(الحركة بركة)이라고는 하나, 무릇 큰 움직임엔 큰 준비가 필요한 법.」

「당장은 이단자들이 짧은 개가를 올리고 있지만, 이 세상은 마치 무희(舞姬)와 같아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해서도 잠깐 동안은 춤을 춰주기 마련이다(الدنيا زي الغازية، ترقص لكل واحد شوية). 알라께서는 언제나 정의로운 자들과 함께하는 분이시라. 바르지 못한 무리의 기쁨이 오래가지 못할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하지 않은가?」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신민들은 경거망동을 삼가고 승전보를 기다리라.」

나라에 위기가 닥친 상황에서 지도력이 붕 떠버리면, 다시 말해 중앙정부에 대한 신뢰가 사라져 버리면 내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야심가들이 발호하게 되어있다. 가뜩이나 사우디엔 와하브파 광신도들이 많으니, 지역 사회의 법학자들이 제정일치의 군벌 지도자로 전직할 위험도 컸다.

따라서, 사우디 왕가는 광신도 준군사집단들의 난립을 막기 위해서라도 민중들에게 알기 쉬운 희망의 상징을 내세워야만 했다.

그럼에도 알림 샤히디를 “그대들이 다 아는 그 사람”이라는 식으로 돌려서 말한 건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었다.

이후 사우디 곳곳에선 진정한 의미의 기도메타가 막을 올렸다.

「알라시여. 당신의 참된 전사인 알림 샤히디에게 사악한 마기(Magi)들을 무찌를 힘을 내려주소서. 다시 한 번 당신의 영광과 권능을 허락하여주소서.」

「너희 불신자들이 승리를 구하면 곧 패망이 너희에게 이르렀느니라. 너희가 믿는 자들에 대한 적대를 단념한다면 그것이 너희에게 가장 좋으니라. 너희가 정녕 전쟁을 바란다면 믿는 자들의 전사가 돌아올 것이며, 너희의 군대가 아무리 많아진들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이는 알라께서 믿는 자들과 함께 계시는 까닭이다.」

「알라께서 싸우는 자들에게 영광을 허락하시니 이는 불신자들이 부당함을 받았음이니라. 알라께서는 실로 그분의 전사에게 승리를 주실 능력이 있으시다.」

이렇게나 절박한 처지인 만큼, 샤히디 그룹을 앞세운 내가 안사르 알라를 압도적으로 짓부숴버리면 사우디 왕실에게 더없이 깊은 감명을 선사할 수 있을 터였다.

당초의 출장계획은 지금처럼 영국이 터지고 유럽의 대외 투사력이 고갈된 상황을 상정하지 않고서 세웠던 것.

상황이 달라지면 상품의 가격도 달라져야 한다.

나는 사우디로부터 무엇을 더 뜯어내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물질적인 대가에 집중하는 건 하책이다. 그런 건 어느 정도는 기본으로 딸려오게 되어있기도 하고.

가장 가치 있는 건 사우디 왕가가 지니고 있는 종교적인 권위였다.

그들은 「두 성지의 수호자(خَادِمُ ٱلْحَرَمَيْنِ ٱلشَّرِيفَيْنِ)」로서 번복할 수 없는 선언으로 샤히디와 그 동료들에게- 그리고 내가 지정하는 성전사들에게 새로운 권위를 부여해줘야만 할 것이다.

이 선언은 자칫 중국과의 외교적 단절을 야기할 위험을 품고 있지만, 그래도 하지 않고는 도저히 못 버티게끔 판을 깔아줄 요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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