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혼돈과 공황 (17)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 소련은 흑해에 면한 크림 반도의 항구도시 페오도시아에 한 척의 실험용 선박을 배치했다.
무기개발계획 05961, 딕슨이라는 암호명을 부여받은 이 선박엔 「아이다르(Ҳайдар)」라는 이름의 함상 레이저 발사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었다.
이 시스템의 최대출력은 50메가와트. 비록 광선 정렬(시준) 기술의 한계로 사거리와 발사지속시간이 다소 짧았다고는 하나, 출력만큼은 영국산 공중전투함의 레이저 포대를 압도하는 광학병기가 지금으로부터 거의 반세기 전에 탄생했던 것이다. 무기개발 경쟁에 미쳐있었던 진짜 빨갱이들의 광기였다.
그러나 시대를 많이 앞서간 이 광학병기는 수차례의 발사실험을 거친 후 실용성이 너무 낮다는 이유로 개발이 중단되었다. 레이저 포대 하나의 무게가 6백 톤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러시아에서 끌어오기로 한 연구 인력들 중엔 이 아이다르 개발계획에 참여했던 사람도 하나 포함되어 있었다.
「아아, 물론 기억하고 있지요.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말고요. 4백 개의 수소 탱크, 발전기로 개조한 3개의 제트 엔진, 알코올을 냉매로 썼던 거대한 냉각 순환배관…… 그건 당대 과학기술의 정수라고 해도 좋을 아름다운 기계였습니다. 첫 발사에 성공했을 땐 모두가 환희에 차서 소리를 질렀었죠.」
1차 경유지에 도착하여 숙청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진 기술대학 교수는, 내가 탈출의 후원자이자 새로운 연구를 의뢰할 고용주라는 말을 듣고 순순히 자신의 기억을 열어 보였다.
「이렇게 떠올리니 새삼 그리워지는군요. 지금의 러시아보다 당시의 소련이 훨씬 더 나았는데……. 위대했던 조국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추락해버렸는지…….」
교수의 탄식에선 취기가 묻어났다. 러시아인답게, 긴장이 풀리자 술부터 찾은 모양이었다.
「개발계획이 폐기된 자세한 경위…… 말입니까? 따로 말씀드릴 것도 없이 알고 계신 게 전부입니다. 아이다르는 아름다웠지만 군사적으로는 효용가치가 없었지요.」
「당시 크렘린이 바랐던 건 최종적으로 우주에 쏘아 올릴 레이저 무기였는데, 자그마치 6백 톤짜리 시스템을 무슨 수로 위성궤도에 올리겠습니까? 그건 지금도 초능력자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하고 전용 운반체를 만들어야 간신히 성공할 일입니다. 영국의 그 공중전투함이라도 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군사위원회 서기 아크로메예프 원수가 현장시찰을 나와서는 우리 연구진들에게 물어보더군요. 위력을 유지하면서 부피와 중량을 지금의 10분의 1 이하로 줄일 수 있겠느냐고. 거기까지가 우주에 배치 가능한 병기의 한계선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시간과 예산이 있으면 가능하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원수가 이렇게 다시 묻더군요. “예산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이 없다. 다만 시간이 문제다. 시일이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1년? 2년? 설마 3년 이상?”」
「우리는 겁먹고 머뭇거리다가 한 20년이면 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원수는 곧바로 화를 냈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서구의 자본가들과 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조국의 안위를 위협하고 있는데, 20년이 말이나 되는 소리냐면서…….」
「돌이켜보니 그때도 우리는 숙청을 두려워하고 있었군요. 하하.」
언뜻 보면 과거에 대한 향수와 수미상관적인 비관을 담고 있을 뿐인 교수의 말들은, 사실 새로운 고용주인 나에 대한 우려를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 인간, 내가 무리한 성과를 요구할까 봐 겁내고 있군.’
이제 와서 내게 버림을 받으면, 피난길에 오른 연구자들은 정말로 생사가 불투명해진다. 나는 차분한 음성으로 교수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당신들에게 비현실적인 요구를 할 생각이 없으니까. 무엇이 현실적이고 무엇이 비현실적인지 구분할 능력도 있소.”
「그것은, 음, 고마운 말씀이십니다. 많이 안심이 되는군요.」
말은 이렇게 해도 정말로 안심이 되는 느낌은 아니었다. 보나 마나, 이제껏 상대해왔던 상급자들과 정책결정권자들이 대부분 나와 비슷한 소리들을 지껄였던 것이겠지.
나는 교수가 가진 연구자로서의 자존심과 애국심을 건드리기로 했다.
“내가 당신들에게 최우선적으로 맡길 일은 영국의 레이저 병기를 분석하고 역설계(Reverse engineering)하는 거요.”
「영국의 레이저 병기……라고요?」
“그렇소. 순간 최대출력이 20메가와트에 가까운 물건이오.”
비밀을 과도하게 지킬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 정도는 기계적 분해와 소프트웨어 분석을 진행하다 보면 노출될 수밖에 없는 사실이거니와, 연구자들의 신병이 이미 내 부하들의 관리하에 있는 까닭이었다. 이들은 런던이 함락되는 날까지- 혹은 내가 원탁이나 그레이스에게 살해당하는 날까지 내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
런던 함락 이후 이들을 어찌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때 가서 결정해도 늦지 않다.
「20메가와트요? 그 정도면 레이저 방어를 강화한 최신형 탄도탄조차도 치즈처럼 갈라져버리겠군요. 역설계라면 이미 실물이 있다는 말씀이신데, 그걸 어디서 무슨 수로 구하셨습니까? 당신께서는 대체-」
나는 놀라움을 표하는 교수의 말을 잘랐다.
“과도한 호기심은 당신들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삼가는 게 좋소.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하지 말고, 영국의 최신병기를 어찌 구했는지도 묻지 마시오. 의혹은 그냥 의혹으로만 남겨두고, 당신들은 다만 내가 알려주는 것들만을 알고 시키는 일만 제대로 해내면 되는 거요. 알겠소?”
「아, 예. 알겠습니다.」
“최종 행선지에 도착하면 파손된 포대 다수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포대 하나가 연구용으로 주어질 거요. 당신들은 그걸 보고 재주껏 역설계를 해내면 되오. 거기에 필요한 장비와 예산은 최대한으로 지원해 주리다.”
「그런 조건이라면 확실히…… 어려운 일이 아니로군요.」
“그러기를 바라오. 설마하니 러시아의 기술력이 단순히 보고 베끼는 것도 못 할 지경으로 서구에 뒤처져있지는 않으리라 믿소.”
「……당연합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겐 그저 예산과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파손된 포대들을 수리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3개월. 역설계를 끝내고 최초의 복제품을 완성하기까지는 반년의 시간을 드리지.”
「잠깐. 그건 시일이 너무 빠듯합니다!」
“전혀 빠듯하지 않소.”
나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소련 시절을 생각해보시오. 자본가들이 먼저 만들어낸 실물이 있는데도 반년간 복제에 실패했다고 했으면, 그날부로 반혁명적 인텔리겐치아로 낙인찍혀 굴라그에 처박혔을 거요. 내가 양산능력 확보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잖소?”
「그건…… 그렇지만…….」
“기한을 엄수하면 박사급에게는 백만 달러, 그 이하의 보조 인력들에겐 오십만 달러의 보상을 일괄적으로 지급하겠소. 그리고 하루를 앞당길 때마다 1만 달러씩을 추가로 드리도록 하지. 만약 30일 이상을 앞당길 경우 성과급은 1일당 3만 달러로 소급적용될 거요. 기한을 맞추지 못하면 같은 기준으로 보상을 깎을 것이고.”
「…….」
“어떻소? 이래도 여전히 빠듯하다는 생각이 드시오?”
「……해내겠습니다.」
“당신들의 조국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니 최선을 다하길 바라오. 훗날 러시아의 상황이 진정되고 나면, 당신들은 영국의 첨단 광학병기를 역설계해본 경험을 가지고서 돌아가게 될 게 아니오?”
자존심과 애국심을 자극하고, 넉넉한 액수의 금전적인 보상까지 약속했다. 이 정도면 연구 인력들의 능력을 한계까지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저기, 그런데, 그, 파손된 포대들……이라는 건…….」
“뭔가 문제가 있소?”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수가 아는 한, 파손된 영국제 레이저 포대가 나올 만한 곳은 도쿄에서 재난을 일으킨 공중전투함들이 유일할 것이다. 영국은 아비터와 트라운서를 제외한 다른 신형 레이저 탑재 플랫폼을 공개한 적이 없었다.
“말하지 않았소? 의혹은 그냥 의혹으로만 남겨두라고. 호기심은 물론 학자의 미덕이지만, 그것 때문에 죽는 고양이가 되지는 마시오. 뒤따라 출국할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예……. 주의하겠습니다.」
낯선 타지에서 내 부하들과 악마숭배자들의 감시하에 격리될 연구 인력들을 정서적으로 안정시키려면, 가족들이 안전한 곳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주기적으로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내가 지급하는 돈은 고립된 환경에선 영 실감하기 어려운 숫자에 불과하다. 그 돈이 가족들에게 전달되어 실제로 쓰이는 걸 보여줘야 비로소 의욕이 고취될 것이다.
더불어, 내 눈밖에 나버릴 경우 가족들이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근심이 있어야 통제가 용이해질 것이기도 했다. 통신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면 기밀이 새는 걸 막을 수 있다.
「그런데, 레이저 말고 다른 연구 프로젝트는 없는 겁니까?」
“왜 없겠소? 당신들 모두에겐 각자 나름의 일감이 주어질 거요. 나는 씀씀이가 후한 사람이오. 성과를 거두는 자에겐 반드시 보상이 있을 테니, 모두에게 그리 전해두도록 하시오.”
「그건 다행이로군요.」
연구원들 중 일부는 인도네시아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잠수정의 개량만이 아니라,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종류의 기술 및 생산역량을 축적하기 위하여.
생산과 보급은 전쟁의 생명이다. 군수물자 생산능력이 그레이스 쪽으로 편향되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술타나의 영지는 푸에르토 바야르타와 더불어 분산투자를 집행하기에 좋은 땅이었다.
염원하던 왕작(王爵)을 얻은 술타나는 내게 내 마음대로 굴려도 무방한 영지를 하나 내주었다. 술타나의 공식적인 권한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인도네시아처럼 정치적 후진성이 강한 나라에서 권력자의 명시적 권한만을 따지는 것만큼 무의미한 짓도 드물었다.
이 영지에선 내 뜻이 곧 술타나의 뜻이었다. 내 부하들은 정식 직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유지나 공무원들의 머리 위에서 군림했다.
노동생산성은 대단히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었고, 내가 충분한 성과급을 지급하는데도 불구하고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한 관료들 몇몇을 실종 처리해주자 나머지 관료들의 청렴성 또한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일자리가 늘고, 소득수준이 향상되고, 관료들의 부패도 사라지고. 내가 전권을 행사하는 영지에선 왕의 선정(善政)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날로 높아져만 가고 있었다.
‘레이저 농축법에도 한번 손을 대보고 싶은데.’
우라늄을 레이저로 이온화시킨 후 전자기장을 이용해 포집하는 레이저 농축법은, 감시에 쉬이 노출되는 대규모 원심분리 시설 없이도 고농축 핵연료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전자기장 제어는 콜리어가 창안한 술식으로 대체 가능하다. 그레이스의 지배력이 미치는 영역에 피치블렌드 광상(鑛床)과 광산들이 존재하는 만큼, 우라늄 이온화 레이저만 개발한다면 「파란 고양이」 이외의 핵무기를 손에 넣을 길이 열린다.
러시아인 교수와의 통화는 고래의 출현으로 중단되었다.
“형님. 고래여왕님이 또…….”
경태가 곤란한 미소를 머금고 보고하기 전부터, 멀리서 다가오는 고래의 존재를 눈으로 보아 알고 있었다. 나는 통화를 적당히 끝낸 다음 스텔라 포르투나의 선현으로 나갔다.
고래의 치료는 아흐레째 되는 날에 마무리 지었다. 마음 같아선 이보다 더 시간을 들여 나에 대한 고래의 신뢰를 굳히고 싶었으나, 예멘 출장을 언제까지고 미룰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 타협이 불가피했다. 치료를 끝낸 후 고래의 행동을 관찰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세계 최악의 해양각성체가 세 개째의 복제 장기 주머니를 떼고 운신의 자유를 되찾았을 당시, 나는 고래가 쇠하지 않은 분노와 증오를 품고 곧장 도쿄로 돌진할 가능성을 경계했다. 우려가 현실화될 경우엔 내가 몸으로 길을 막아 고래를 진정시킬 작정이었다.
그러나 고래는 못다 한 응징을 재개하는 대신 내 주변을 맴돌며 이렇게 요구했다.
「너는 여기에 있어라.」
이는 앞서 고래가 문법을 교정해주었던 문장들 중 하나였다. 내가 슬쩍 뒤로 움직이자, 고래는 나를 쫓아 움직이며 같은 노래를 불러댔다.
「너는 여기에 있어라.」
이러한 발화(發話) 뒤엔 「너」와 「여기」가 포함된 의미 불명의 또 다른 발화들이 뒤따랐다. 고래는 침착하고 끈질기게 같은 노래를 반복했고, 나는 지루할 정도의 시행착오를 거쳐 그 의미를 대강 짐작해낼 수 있었다. 이는 미리 예상한 시나리오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고래는 나와 다시 만날 방법을 마련해두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나는 고래에게 이렇게 화답해주었다.
「너」 「온다」 「나」 「호출신호1」
「나」 「온다」 「너」 「호출신호2」
여기서 「호출신호1」과 「호출신호2」에 해당하는 음률은 내가 원래 알고 있던 최초의 호곡(號哭)을 임의로 편집, 재구성한 것이었다. 언뜻 들으면 고래의 노래와 비슷하지만, 당연히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
그러나 고래의 지능이라면 이로부터 다르에스살람 앞바다의 조우를 떠올릴 수 있을 터.
며칠에 걸쳐 영국 해군 함정들을 사냥하는 내 연주를 수백 킬로미터, 어쩌면 수천 킬로미터 바깥의 먼바다에서부터 듣고 찾아온 경험이 있는 고래라면, 내가 전하려는 뜻을 금세 이해하리라 생각했다.
극히 한정된 어휘들로 의사소통을 하려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으나, 고래는 내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같은 발화를 네다섯 차례 반복하자 「알았다」에 해당하는 울음을 뱉은 것이다.
「너는 여기에 있어라.」
나는 고래를 두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처음과는 달리, 이번엔 고래가 바로 쫓아오거나 하지 않았다.
적당히 거리가 벌어진 시점에서 내 몫의 호출신호를 연주하자, 고래는 그제야 꼬리지느러미를 움직이며 내게로 다가왔다.
다음은 고래가 나를 시험했다.
「너는 여기에 있어라.」
느릿하게 헤엄쳐 3백 미터쯤 거리를 벌린 고래는 국소적인 지향성 음파를 이용해 내게 제 몫의 호출신호를 쏘아 보냈다. 나는 고래가 있는 곳으로 다가감으로써 또 한 번의 어려운 의사소통을 완수해냈다.
고래는 신경계를 기쁨과 만족의 색채로 물들이며 「알았다」를 세 번 반복했다. 그러고는 내가 앞서 빚었던 불완전한 발화, 「너」 「온다」 「나」 「호출신호」를 한 번 부르더니, 각각의 단어가 동일하거나 비슷하게 포함된- 그러나 들어가는 순서와 횟수가 다르며 내 발화처럼 툭툭 끊어지지 않는 완전한 노래를 불렀다.
고래의 의도는 뻔했다. 예전에 한 번 그랬던 것처럼 틀린 문법을 교정해주는 것이었다. 단락 없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노래를 해석하면 「너는 내가 이 노래를 부르면 내게로 찾아와라」, 「나는 네가 이 노래를 부르면 네게로 찾아온다.」 정도가 되지 않을는지.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들은 경태는 고래의 노래보다 의미를 모를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집채보다 크고 도시를 부술 만큼 강한 유부녀 문법 선생님 히로인…… 게다가 둘만의 밀어를 정해서 서로를 불러내는 관계…… 음, 여기에 대항하려면 우리 춘식이도 어서 거세를 해서 암컷타락을 시켜줘야…….”
나는 내친김에 고래에게 스텔라 포르투나 선단과 내 부하들을 보여주었다. 내가 부재하는 동안에도 내 부하들이 고래와의 접촉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나」 「가족」 「여기」 「있다」
사실 「가족」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 상대가 아무리 짐승이라도 꺼려지는 일이었으되, 「무리」에 해당하는 어휘가 아직 확실치 않았기에 속이 불편하거나 말거나 「가족」으로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래는 몹시 놀라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충 「너는 가족이 저렇게나 많으냐?」라는 의미의 놀라움 같았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문법을 교정해주었다. 내가 했던 것 그대로 「나」 「가족」 「여기」 「있다」가 들어가는 불완전한 노래를 한 번 부르고, 문법적 변형이 들어간 「나」 「가족」 「여기」 「있다」를 넣어 완전한 노래를 부르는 식으로.
완전해진 노래는 「여기에 있는 게 내 가족들이다.」라는 의미일 것이었다.
주변을 맴돌던 고래는 수 킬로미터 바깥으로 가서 지향성 음파로 호출신호를 쏘고, 그 신호를 받은 내 부하들이 출동해 내 몫에 해당하는 호출신호로 응답하는 것을 몇 번에 걸쳐 확인한 후 먼바다를 향해 헤엄쳐 사라졌다.
이때만 해도 몰랐다. 사라진 고래가 또 다른 고래들을 끌고 올 줄은. 그저 주술의 장막 너머로부터 일본으로 이어지는 물류공급 체인의 안전성을 고려해, 고래가 일본 쪽으로 가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고만 여겼을 따름.
얼마 지나지 않아, 고래는 광활한 바다 곳곳에서 다쳤거나 병든 동족들을 찾거나 불러내어 내 부하들의 경계망 안쪽으로 데려왔다.
이렇게 찾아온 고래는 깊은 심도에 머물며 노래했다.
「아픔」 「아니다」
‘아픔 아니다’의 다음엔 이제껏 듣지 못한 새로운 음률의 마디가 하나 더 붙어있었는데, 정황상 그 의미는 「해줘」일 가능성이 백에 가까웠다.
요컨대, 「아픔 아니다 해줘」라는 요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