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혼돈과 공황 (16)
총격을 당한 옥타 테크 CEO는 그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상태가 매우 위중하다는 보도가 나왔다. 당분간은 의식을 회복할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현지시각으로 같은 날 밤, 에섹스 주 우드사이드 그린에선 옥타 테크의 연구시설에 대한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시청자 여러분! 지금 보시는 화재현장은 옥타 테크의 핵심 연구시설 중 하나로 알려진 하우 그린(Howe Green) R&D 캠퍼스입니다! 최초로 화재신고가 접수된 시각은 오후 9시 13분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소방당국은 이 화재가 인위적인 방화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밝혔습니다!」
검은 밤을 배경으로 세차게 타오르는 거대 시설의 모습이 전파를 타고 송출되자, 세계 증시는 거의 발작을 일으키다시피 반응했다. 저러다 불사암 정형화 가공 기술이 소실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확산된 탓이었다.
지금 영국 증시가 어찌어찌 숨이라도 쉬고 있는 것은 옥타 테크가 지닌-적어도 세상엔 그렇게 알려져 있는-기술에 대한 믿음 덕분이었다.
경하중량 2천 톤짜리 초계함이 하늘을 날게 하고, 그 초계함에 원자로 이상의 성능으로 전력을 공급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쳐 외부의 관측을 교란하며, 국지적인 기상조작과 단거리 워프 항해마저 가능케 하는 기적의 불사암 정형화 가공 기술.
이 기술이 증발해버리면 그 여파는 파멸적일 수밖에 없다.
공교로운 것은, CEO 저격 사건과 연구시설 방화 사건이 영국을 규탄하는 유엔 결의안의 통과를 전후하여 발생했다는 사실이었다. CEO 저격은 결의안 표결을 위한 특별총회 개최를 약 두 시간 앞둔 시점에서 벌어졌고, 연구시설 방화는 결의안이 채택되고 나서 다시 두어 시간이 흐른 후에 이루어졌다.
영국 수사당국은 이 두 사건 사이에서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전자는 거액의 자산손실을 비관한 개인투자자의 단독 범죄이고, 후자는 악마숭배 척결을 표방한 과격 종교단체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 발표를 있는 그대로 믿어주지 않았다.
당장 백악관의 미치광이부터가 게거품을 물었다.
「북한이나 러시아보다 더 질이 나쁜 세계 최악의 불량국가(Rogue state) 영국이 세계경제를 인질로 삼아 국제사회를 협박하고 있습니다! 이 이상 자신들을 건드리면 가진 걸 모두 불태워버리고 너희들과 함께 경제적 동반자살을 해주겠다는 광기 가득한 협박입니다!」
「나는 이것을 자살폭탄 테러리스트의 외교 전략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영국! 미국은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미국은 결코, 결코, 결코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우리 미국과 동맹국들의 권익을 중대하게 훼손한다면, 거룩하신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대 미국은 당신네 나라를 완전히 파괴해버릴 것입니다! 내 의지는 강인하고, 미국 시민들의 의지 또한 그러하며, 미국의 힘은 올바른 의지를 실천하기에 충분합니다!」
「깨어있는 영국의 시민들이여! 행동하십시오! 당신들의 의회로 행진하여 의사당을 점령하십시오! 미쳐버린 정부와 정신 나간 폭도들의 발악을 저지하고 여러분 자신과 사랑하는 조국을 파멸의 운명에서 구하십시오! 만약 죽도록 싸우지 않으면 당신들에게는 더 이상 나라가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미국과 일본, 그 외의 다른 우방국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만이 당신들에게 열려있는 유일한 생명의 길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세계여! 불한당들의 협박에 물러나지 마십시오! 미국이 여러분의 앞에 서있습니다! 올바른 다수가 사악한 자들에게 맞서지 않으면 그때는 악이 승리할 것입니다! 선량한 사람들과 국가들이 역사의 방관자가 될 때, 파괴의 무리들은 오직 힘과 세력을 축적할 뿐입니다!(When decent people and nations become bystanders to history, the forces of destruction only gather power and strength!)」
이러한 입장표명 이후에도 미국 대통령은 SNS를 통해 계속해서 영국 시민들의 행동을 촉구했다. 「의회를 점령하라! 웨스트민스터 궁전으로 행진하라!」는 멘션에 샤히디가 응원의 메시지를 남기자 ‘좋아요’ 표시와 더불어 「당신의 응원에 감사한다.」라는 답글을 달기도 했다.
민주당은 대통령이 또 테러리스트와 어울린다고 비난했으나 대통령은 이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주미 중국 대사는 이젠 화를 내기도 지쳤는지 真是寒心(정말 한심하다) 네 글자만 쓰고 말았다.
미국의 대통령이 타국의 내란을 선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지적하고 나설 생각을 않았다. 영국이 그만큼 고립되어있다는 증거이자, 미국이 더는 영국을 우방국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세상이 이렇게 흐르는 동안에도 나는 내게 주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갔다.
그중 하나가 브라츠키 크루그와의 거래였다.
「친구. 명단은 받아봤나?」
나는 수화기를 넘어오는 임마누일의 물음에 미심쩍은 감정을 담아 되물었다.
“받아봤지. 한데, 내가 이 목록을 믿어도 되는 건가?”
「왜? 희망자가 너무 많아서?」
“그래.”
본디 내가 생각했던 건 중국 국안부의 천인계획에 엮여있는 매국노들을 협박으로 채찍질하고 돈으로 유혹하여 끌고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브라츠키 크루그로부터 전달받은 명단엔 천인계획과 전혀 무관한 인간들이 너무나도 많이 올라있었다. 경태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력자 채용에 신규지원이 몰린 꼴”이었다. 매국노 경력을 경력이라고 하는 것도 우습지만.
‘석사 학력은 또 뭐가 이리 많은지.’
본래 박사급 인력을 열 명 남짓 확보한 후 그 인맥을 활용해 차근차근 추가인력 채용을 진행해 나가려 했던 내게, 박사와 석사를 합쳐 7백이 넘어가는 기나긴 명단은 당혹스럽다 못해 어이가 없기까지 한 것이었다.
게다가 박사급 인력들의 면면도 보통이 아니었다.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핵심 과학자들 모임, 「7월 1일 클럽(Клуб 『1 июля』)」의 회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은 영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솔직히 의심스럽군. 이 많은 고급인력들이 단체로 조국을 등지려 하는 것부터가 이상하거니와, 이 거대한 매국 행위를 기꺼이 도와주겠다는 자네들 역시 수상하기 짝이 없어. 자네들이 아무리 내게 빚이 있다지만, 이건 돈보다 조직의 안전을 우선해야 할 사안이 아닌가?”
주정뱅이는 순순히 긍정했다.
「그야 그렇지. 해외정보국(СВР)이나 연방보안국(ФСБ)에게 발각당하기라도 했다간 자네가 주겠다고 한 수고비를 다 뇌물로 바쳐도 수습이 안 될 테니까. 최소한 받은 돈의 열 배는 더 토해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간부들 중 일부가 레포르토브스카야(Лефортовская) 호텔에서 장기 투숙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레포르토브스카야 호텔은 모스크바 레포르토보에 소재한 연방 교도소를 의미한다. 이번 일이 브라츠키 크루그에게 그만큼 부담이 된다는 뜻.
“그런데 왜?”
하다못해 내게 거액의 자금을 추가로 요구했다면 조금은 이해가 갔을 것이다. 세상에 돈으로 해결이 안 되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대개 더 많은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인 법.
그러나 이 추운 나라의 마피아 놈들은 영 마피아답지 않게 굴고 있었다.
「크헤헤헤! 거 나에 대한 신용이 너무 없구만!」
음흉하게 웃어 젖힌 임마누일이 영문 모를 말을 내뱉었다.
「너무 수상쩍게 여기지 마! 왜냐면 이건 사실 매국 행위가 아니거든! 오히려 조국의 미래를 지키는 숭고한 일이지!」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사실은 말이야, 자네가 받은 명단은 거의 다 조만간 징병당할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네.」
“징병?”
「어. 징병.」
“석사들이야 그렇다 치고, 박사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인가? 다들 국립연구소에 재직 중인 고급인력들인데? 나이도 징병을 당하기에는 너무 많잖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거짓말 같지? 그런데 진짜야. 처음 들었을 땐 나도 놀랐어. 오, 이 나라가 정말로 미쳐 돌아가고 있는걸? 하고. 뭔가 잘못 전해진 게 아닌가 싶어서 다시 한 번 확인해보기도 했지. 근데 맞더라구. 상식이 죽었나 봐.」
“…….”
「어디 보자……. 우선 과학 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는 싹 다 털릴 예정이로구만. 노보시비르스크 레이저 물리학 연구소, 라브렌티예프 유체역학 연구소, 보레스코바 촉매 연구소, 크리스티아노비치 이론 및 응용역학 연구소, 니콜라에바 무기화학 연구소, 제오시트(Цеосит) 엔지니어링 센터, 보로즈초바 유기화학 연구소……,」
연구소들의 이름을 읊던 주정뱅이가 투덜거렸다.
「젠장. 뭔 놈의 연구소들이 이렇게 많아? 아무튼 그렇게 됐어. 모스크바 소재의 연구소들도 몇몇 군데는 강제징병이 예정되어있지.」
“……개중엔 국립우주연구제작센터 소속인 사람도 있던데? 그런 중요 시설에서까지 사람을 끌고 간단 말인가? 뭐 기술연구직 강제동원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일반 전투병으로?”
「아 글쎄 그렇대두.」
러시아 흐루니체프 국립우주연구제작센터는 액체연료 우주발사체와 대륙간탄도탄 제작 능력을 보유한 핵심적인 전략연구시설이었다. 이런 연구소에서 인력을 차출해 전선으로 내보내는 건 그야말로 광기의 소치 그 자체였다. 연구원들이 전사하면 그것만으로도 국가적인 손실이고, 포로로 사로잡히거나 투항하는 경우에는 국가기밀 유출을 피할 수 없다.
「바딕 자네, 우리 대통령이 혹시 돌아버렸나 생각하고 있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이게 단순히 병력이 부족해서 하는 짓만은 아니야. 여기엔 나름 정치적인 배경이라는 게 깔려있거든.」
“정치적인 배경?”
「엉. 자네가 들어봤을지는 모르겠네만, 지난 13년에 우리 위-대하신 대통령 각하께서 야심차게 과학 아카데미 개혁을 선포하셨단 말이야. 뭐 말로는 과학 아카데미의 부패를 척결하고 연구기능과 행정기능을 분리하여 어쩌고저쩌고했는데…… 진짜 목적은 과학 아카데미가 보유한 여러 자산들을 별개의 기관으로 독립시켜서 각하께서 해 드시기 좋게 만들어놓는 거였지. 여기는 러시아니까.」
“명단에 이름을 올린 과학자들은 그때 반대를 했던 자들이다?”
「대충 그렇다고 보면 돼. 대놓고 반대를 했던 양반들도 있고, 그 양반들하고 학맥으로 엮여있는 다른 양반들도 있고. 그 양반들이 찍힌 탓에 덩달아 숙청을 당하게 된 피해자들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유탄을 맞은 순진한 대학원생들도 있고…….」
임마누일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개혁에 반대한 양반들이라고 해서 마냥 깨끗하지만은 않아. 자기 권한이 닿는 한도 내에서 열심히들 생계형 비리를 저질렀지. 연구자 숙소랑 연구소 시설을 사기업에 임대해주고 돈을 받아 챙긴다거나, 연구비를 횡령한다거나, 아카데미 소유 부동산의 명의를 친척에게로 이전해놓는다거나, 북극해 탐사용 쇄빙선을 크루즈 업자에게 빌려주고 대가를 챙긴다거나, 아카데미의 모든 상업적 저작물에 대한 권리를 미국으로 빼돌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자세히 아는 걸 보니 자네들도 한 다리 걸쳤나 보군.”
「물론이지! 이런 건 안 먹는 놈이 바보라고!」
“…….”
「아무튼, 이런 양반들의 반대 때문에 결국 대통령 각하가 뜻을 이루지 못했단 말이야. 장장 5년에 걸친 지루한 싸움이었지. 그러니 우리 각하의 원한이 얼마나 깊겠어? 잘만 하면 호화 요트를 한 척 더 장만하든, 호화 별장을 하나 더 마련하든 했을 텐데.」
“그런 사정이 있다손 쳐도, 국가 핵심 연구인력 징병은 여전히 미친 짓이지. 징병을 빌미로 끌고 가서 곧바로 묻어버릴 계획이라 보는 편이 그나마 합리적이겠군. 그 역시 제정신으로 할 짓은 아니겠네만.”
「누가 아니래? 아무래도 우리 각하께서 불안증이 도져 말년의 히틀러처럼 되어버렸나 봐. 카자흐스탄 전선 상황이 워낙 안 좋아서 쿠데타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고.」
쿠데타, 쿠데타라. 그러고 보면 이 주정뱅이가 아까 어울리지도 않게 조국의 미래를 지키는 숭고한 일 운운했었지. 나는 비로소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직감했다.
“혹시 이 일에 다른 후원자가 엮여있나?”
「오, 역시 바딕. 눈치가 빨라. 과연 극동회사의 수장다워.」
“누구지?”
「그냥 나랏일에 대한 근심이 많은데, 지금 당장 정권을 탈취하거나 할 깜냥은 없는 어느 높으신 분이라고만 알아둬. 어차피 자네에게 해가 될 일은 없을 테니.」
“그걸 내가 어찌 믿나?”
「못 믿을 건 뭔가? 솔직히 우리가 자네에게 크게 해를 끼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우리가 자네 회사에 대해 뭘 얼마나 알고 있다고. 기껏해야 알맹이 부실한 해외 거점 몇 개소랑 밀수용 선박 몇 척이 전부인걸.」
“흠…….”
「그 소심한 후원자가 바라는 건 국가의 중요한 연구 인력들을 다년간 해외로 피신시켜두는 게 다야. 말 그대로 국가의 미래를 보존하려는 거지. 연구원들의 바람은 자기 자신과 동료들, 그리고 대학에서부터 대학원까지 따라온 제자들이 전선으로 끌려가지 않는 거고.」
“내가 만약 나중에 안 돌려보내려고 하면?”
「기꺼이 돌려보낼 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지. 설령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지금 다 죽는 것보다는 되찾을 희망이라도 남겨두는 편이 낫잖아?」
여기엔 암시가 하나 담겨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사람을 아예 팔아넘기지는 말고 인력 파견관리 즈음으로 다뤄달라는 암시가.
“브라츠키 크루그가 직접 피난처를 마련해주지 않는 이유는?”
「어허. 추궁이 끝이 없구만. 이거 좀 서운한걸……. 아무리 정황이 수상쩍다지만 이렇게까지 나를 못 믿다니.」
주정뱅이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자네, 이 진실한 모냐(Верный Моня)가 발행한 백지수표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귀한 백지수표를 쓰면서 사람을 구해달라고 했으니, 나와 브라츠키 크루그의 신용을 부도내지 않으려면 원하는 대로 구해줘야 할 거 아닌가? 우리는 자네 회사가 고용하지 않는 사람들만 책임지면 돼.」
글쎄.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 같은데…….
모르긴 몰라도, 국가 핵심 연구시설의 연구원들마저 강제징병으로 끌려갈 지경인 만큼, 브라츠키 크루그의 조직원들 또한 상당수가 조직과 공생관계로 엮여있는 권력자들을 위해 사병(私兵)으로 뛸 준비를 하고 있을 터였다. 조직의 역량 자체가 평소와 같을 수 없다는 뜻이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본다면, 여러 조직들의 연합체인 브라츠키 크루그가 서로 다른 권력자들을 배후에 둔 둘 이상의 파벌로 갈라진 상태일 수도 있었다.
이 경우 임마누일에겐 다른 파벌보다는 내 쪽이 더 믿을 수 있는 상대였던 것이겠지. 자기 파벌에 속한 조직원들과 간부들이라도 마냥 믿기는 어렵겠고. 도망자들을 러시아나 브라츠키 크루그의 세력권 안에 두면 그게 어디든 위험하리라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가능성은 충분했다.
내가 납득했다고 여겼는지 임마누일이 웃음을 섞어 이야기했다.
「자네가 연구 인력들을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많이 데려다가 잘 쓰고 돌려보내달라고! 자네라면 밥 하나만큼은 든든하게 먹이면서 돌봐주겠지!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