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469화 (469/561)

#47. 혼돈과 공황 (15)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 세계에 만연한 혼돈과 공황 속에서 금융시장과 경제지표들의 폭락은 하루 이틀로 그치지 않았다.

사흘, 나흘, 닷새, 엿새……. 날짜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죽은 고양이 한 마리조차 튀어 오르지 않는 가파른 하락세는 온 인류에게 바닥을 모를 거대한 공포를 선사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새로운 대형 투자은행의 파산위기설이 나돌고,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들이 신용등급 강등을 경험했으며, 각국 중앙은행들과 정책결정권자들은 자국의 재정위기와 더불어 신흥국들의 연쇄 국가부도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막막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증시의 거래일을 기준으로 도쿄 사태로부터 7일째 되는 날에 발표된 주술사 왕의 성명은 세계 경제에 던져진 한 줄기의 서광과도 같은 것이었다.

「혼탁하고 어지러운 인간 세상이여. 이 세상 모든 정령들과 신령들의 중재자이며, 사람과 우주의 균형을 수호하는 주술의 왕 홍고 무크와비응이카의 전언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가면을 쓰고 나온 그레이스는 변조된 음성으로 먼저 인간들의 죄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오늘날 인세에 가득한 고통과 시름은 거듭된 짐의 경고를 무시하고 위대한 바다 정령의 화신에게 적대한 자들과 그들을 눈 뜨고 방조한 자들의 죄업이라.」

「내 일찍이 이르지 않았느뇨. 일본인들이 와다츠미 키요우타마히코라 부르는 정령의 죽음은 인간 세상의 운명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리라고. 정령을 해하여 인간과 자연의 균형을 파괴하는 자들에게는 재액이 있으리라고.」

「정령은 불멸의 존재라. 그 화신체인 고래는 부당한 죽음으로부터 반드시 돌아와 자신의 분노를 새롭게 보이리니. 죄지은 자들은 결국 자신들의 노력이 헛된 희생만 키웠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의 좌절과 그때의 후회를 죄인들은 어찌 견디려는가. 또 소수의 죄가 사해(四海)의 고통을 불러왔으니 이 책임은 어찌 감당하려는가. 백 번을 죽고 천 번을 다시 죽어도 보속(補贖)을 이룰 방법이 없으리.」

꾸짖음 다음에는 희망을 주는 선언이 이어졌다.

「주술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지혜이며, 짐이 자연과 인간의 균형을 수호하는 것은 결국 사람을 바른길로 이끌어 인간 세상에 고통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라. 교만과 불의의 대가라고는 하나 온 사해가 도탄에 빠져 시름하고 있는데, 어찌 왕이 만민의 눈물을 외면하리오.」

「죄인들과 그 방조자들이 이제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짐의 교화에 따를 것을 서약한다면, 짐은 기꺼이 손을 내밀어 세상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리라.」

「교화에 따른다 함은 왕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요, 왕의 율법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다만 왕에 대한 부당한 적대를 청산하고, 왕이 권하는 정령과의 조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왕이 베푸는 은혜에 감사의 마음으로 보답하는 것이다.」

이후 그레이스는 구체적인 지원 규모를 언급했다. 철·구리·티타늄·유황·코발트·아연 등 연간 천억 달러 상당의 천연자원을 국제시세의 절반 가격으로 공급할 의향이 있으며, 화물의 운송은 바다와 고래의 위험 따위 개의치 않는 왕의 전사들과 어용상인들이 맡을 것이고, 필요하다면 일부 일본 기업들의 부채를 금과 기적태환권 레헤마 페드하로 인수해줄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자원 수출대금의 일부는 동군연합 국가들의 산업화에 필요한 생산설비들과 더불어 파산한 일본 선사들이 소유했던 선박들로 받겠다고도 했다. 해당 선박들이 각성능력자들의 힘을 활용할 설비를 갖추고 있지 못할 경우, 이미 문을 닫았거나 법정관리를 받고 있는 일본 조선업체들 중 적어도 하나 이상을 합자사업으로 부활시켜 절충교역의 형태로 개수(改修)를 맡기겠노라고.

이 선언이 나온 직후 국제증시는 일제히 반등했다. 정보를 미리 들어 알고 있었던 김재환이는 고작 몇 시간 사이에 큰 수익을 올리고서 무척이나 감격스러워했다.

「회장님께서 허락해주신 시장조작의 맛……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주술사 왕의 동군연합에 속한 국가들은 무력을 이용한 정권 탈취로 말미암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며, 외국인 납치 살해 및 해적 행위 등의 범죄로 인해 강력한 무역제재를 당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시장은 주술사 왕의 발언을 호재로 받아들였다. 우선 주술사 왕에게 자신의 말을 실천할 능력이 있고, 지금 같은 비상시국에서는 그간 주술사 왕을 배척해온 유럽 국가들도 유화적인 자세를 보여줄 수밖에 없으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던 까닭이다.

‘주술의 장막이 열리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대형 호재이기도 하고.’

이제껏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대부분은 무수한 부족 갈등과 옛 식민모국들의 이권 착취, 온갖 반군조직들의 난립 및 심각한 정치적 부패 등의 이유로 가진바 잠재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해왔다.

그러나 주술사 왕의 세력권에선 그 많던 부족 간 갈등과 반군조직들의 투쟁이 자취를 감추었다. 또한 경제제재를 당하고는 있을지언정 그 이상의 족쇄였던 여러 불평등 조약들과 자본 지배구조들이 모조리 무력화되었으며, 주술사 왕의 저주를 두려워하는 관료들은 역사에 없었던 수준의 청렴한 행정을 보여주고 있기까지 했다. 주술신앙에 빠진 백성들이 왕의 통치와 가르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음은 물론이었다.

이런 시장이 개방되는 건 보통 커다란 호재가 아니다.

하다못해 기적태환권이 엮인 파생상품 시장만 만들어도 중장기적으로 불사암 산업 섹터 붕괴에 따른 피해의 상당부분을 만회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당신 옆의 대머리를 경계하십시오! 머리가 반짝이는 그가 만약 민주당원이라면 그는 높은 확률로 주술사 왕의 추종자일 테니까요!」

백악관의 미치광이가 공개석상에서 삿대질과 함께 외쳤던 정치적인 비아냥거림.

일전에 미국의 한 유명 기업가가 주술의 장막을 넘어가 레페를 사서 발모(發毛)의 기적을 경험하고 온 이래, 미국에서는 그 진위를 두고 정치권에서까지 논란이 일었다. 해당 기업가가 민주당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재정적 후원자였기 때문이다.

결국 청문회를 통해 사실이 입증된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기적태환권의 신용을 끌어올리는 결과를 낳았다. 민주당과 대립하며 주술사 왕과의 관계개선을 주장해온 백악관 미치광이에겐 최고의 선물이었다.

여하간, 사정이 이러한 관계로, 김재환이가 고마워한 시장조작은 이제 갓 막을 올린 단계에 불과했다.

앞으로 그레이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기업들의 생사가 갈리고 시장이 위아래로 출렁거릴 텐데, 그때마다 발언의 내용을 미리 알고 있으면 돈을 미친 듯이 쓸어 담을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성명에서, 그레이스는 또한 자신이 죽음에서 돌아올 고래를 달래어 볼 것이라고도 이야기했다. 이는 내 의사를 반영한 것이었다.

「다시금 이르노니 짐은 정령들과 신령들의 중재자라. 삿된 자들이 짐을 가로막지 아니하며 죄업을 쌓은 자들이 교화를 받아들이는 한, 짐의 자리는 언제나 사해의 만민과 분노한 정령의 화신체 사이에 있을진저. 이것은 짐의 주력(呪力)을 믿고 도움을 간구해온 자들에 대한 짐의 응답이기도 하다.」

주술의 장막 바깥의 세상은 이를 주술사 왕이 대(對) 키요우타마히코 대응전선에 합류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제재를 풀기만 한다면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작금의 세계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레이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들도 있었다.

모래폭풍이 이는 하늘로부터 수천수만의 번개줄기들을 내리꽂으며 내려오던 주술사 왕의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여전히 강렬하고 전율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목격자도 많고 영상으로 남은 기록도 많아 허구라고 주장할 수도 없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그날 이래, 온 세상의 신비주의자들은 주술사 왕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주술사라는 데 이견을 내놓지 못하게 되었다. 내로라하는 주술사와 사이비들도 주술사 왕의 권위 앞에선 겸허히 자세를 낮추는 게 보통이었다.

하여, 주술사 왕의 성명을 접한 신비주의자들은 이러한 기대를 내비쳤다.

「저토록 위대한 주술사가 중재자를 자처하고 나섰으니, 설령 고래가 그의 예언대로 살아 돌아온다 한들 도쿄에서와 같은 재난이 다시 벌어지지는 않지 않을까?」

이는 일본 내의 불안을 진정시키는 데에도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지금의 일본엔 미신에서라도 절박한 희망을 구하고 싶어 하는 자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아진 까닭이었다.

이 관대하고 전향적인 성명에서 그레이스가 유일하게 적의를 표한 대상이 바로 영국이었다.

「저주받으라, 영국이여. 무한한 탐욕으로 무고한 어린아이들과 무구한 아기들의 영육을 주물러 전함을 만든 자들아. 너희에게는 어떠한 용서도 자비도 없으리라.」

주술사 왕의 짧은 저주는 영국의 사회 혼란을 가중시켰다. 일본에서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효과가 터져 나온 것이다.

특히 「무고한 어린아이들과 무구한 아기들의 영육을 주물러」 운운하는 내용이 충격을 가중시켰다. 공중전투함의 재료가 인간이라는 건 아직 확실한 물증이 제시되지 않은 루머다.

그런데 그 루머에 별안간 세계 최고라는 주술사의 권위가 더해진 것이다.

나는 일본 정부가 화생방대를 파견해 긁어갔던 피고름 샘플들을 떠올렸다. 해당 샘플들의 DNA 검사는 진즉에 완료되었을 터.

‘추이를 봐가면서 공개 여부를 정할 요량인가.’

지금 검사 결과를 공개한다면 영국을 압박하기에는 좋다. 그러나 영국이 가지고 있을 것으로 믿어지는 기술들을 손에 넣었을 때, 그 기술들을 직접 써먹기가 곤란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그런즉 일본 입장에서는 확보한 증거들을 바로 공개해버리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이렇게 결정적인 증거들을 쥐고 있음을 영국 측에 알리고 먼저 물밑협상을 진행해보는 쪽이 유익하겠지.

이런 상황에서 영국과 원탁은 껍데기뿐인 위장기업을 희생양으로 삼아 난국을 타개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 옥타 테크의 임직원들은 생체 비행 모듈의 폭주로 말미암아 발생한 일련의 참상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옥타 테크의 CEO로서 모든 피해자분들께 진심어린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수일간의 칩거를 깨고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위장기업의 최고경영자는 굳은 얼굴 위에 단단한 각오와 결의를 띄우고 있었다. 화면 너머로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 각오와 결의는 당연히 진심에서 우러난 사죄 따위를 위한 게 아니었다.

그 증거로서, 의례적인 사과로 시작한 입장 발표 생중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도발적인 책임회피로 점철되기 시작했다.

「비행 모듈 제작사의 입장에서 HMS 아비터와 HMS 트라운서의 폭주는 실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비행 모듈의 폭주가 반드시 제조 단계에서의 결함 때문이라고만은 볼 수 없습니다.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키요우타마히코와의 근접 교전이 비행 모듈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아비터와 트라운서의 비극은 키요우타마히코가 지닌 어떤 신비한 초능력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만약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고래의 저주가 실존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 인류가 그 고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그 고래에게 바닷물의 회전구체를 두른 채 하늘로 날아올라 음파 폭격을 퍼부을 능력이 있으리라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여튼, 이 같은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아비터와 트라운서의 폭주가 우리 옥타 테크의 과실이라고 단정 짓기는 이릅니다. 피해자 여러분들의 분노는 이해하는 바이나, 성급한 판단은 무고한 희생자를 낳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옥타 테크의 CEO는 쏟아지는 야유 속에서도 비장한 표정으로 도발을 이어갔다. 경태의 표현을 빌리면 ‘어그로’를 자신에게로 집중시키려는 희생적인 노력이었다.

「주식시장의 피해와 그 책임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히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아비터와 트라운서의 비극은 어느 누구의 책임도 아닌 불운한 사고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재난이나 재난에 준하는 사고의 가능성은 우리 옥타 테크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기업들에게 열려있으며, 투자자는 평소부터 그 위험성을 고려하여 자산을 분배해야 합니다. 재난으로 인한 투자실패의 책임을 그 재난을 직접 맞이한 당사자에게 지우는 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아쉽긴 합니다만, 투자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투자자 개별의 선택이며, 우리 옥타 테크가 뭔가 피해를 끼쳤다고 보지는 않고 있습니다. 제가 투자자들에게 주식을 사라고 협박을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죽음을 각오한 듯한 희생양이 여기까지 도발을 했을 때, 회견장에서는 갑작스러운 총성과 찢어질 듯한 비명들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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