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혼돈과 공황 (14)
이런저런 사안들을 논의한 후, 나는 그레이스에게 오래 전에 준비해두었던 선물을 하나 안겨주었다.
「코카인……이라고?」
“그래.”
선물의 정체는 엘 후에고에게서 빼앗아 피지의 레부카 항에 보관해두었던 정제 코카인 5톤이었다. 미국·유럽 시장에서의 최종 소매가를 기준으로 잡으면 물경 15조 원어치에 달하는 양. 도쿄 앞바다에서의 교전에 참가했던 해적함대 원정전단이 동남아 각지의 은신처에 흩어져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이 아프리카로 복귀할 때 가져가도록 하면 되었다.
“용처는 네가 알아서 결정해라. 영국에 풀어 혼란을 더하든, 네 교세를 확장하기 위한 소모품으로 쓰든. 어디에 쓰더라도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자기, 이제 그만 좀 달콤하면 안 될까? 몸이 달아오르고 자궁이 욱신거려서 참아내기가 고역이거든.」
그레이스는 눈을 빛내며 내게 지속적인 코카인 공급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어쩌다 수중에 들어와 보관하고 있었던 물량일 뿐 새로이 조달할 능력은 없다고 답했다. 애초에 마약을 취급할 생각 자체가 없노라고.
뒤쪽의 이유를 궁금해하던 그레이스는 조직의 기강과 건전성을 저해하지 않기 위함이라는 내 답에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대화가 이렇게 흐르는 동안 나는 한 가지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 미친년이 왜 이렇게 여유로울까.’
내가 손에 넣은 아비터-트라운서 융합체는 그레이스와 나 사이의 힘의 균형에 지대한 변화를 야기하는 요소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나를 예민하게 탐색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정상인데, 지금의 그레이스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정황상 내가 고래를 보호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음을 알 것임에도, 그럼에도 고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 역시 수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로부터 유추해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혹시 버섯의 숲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기라도 했나?’
「레이디 아밀라리아」와 그 자매들의 인지 연결망에 인간 의식의 메아리를 남겨, 일종의 ‘충동’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거대 각성체를 제어한다는 계획. 그 계획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올리는 중이라면 내가 공중전투함을 손에 넣은 것에 개의치 않을 법도 했다.
나는 슬쩍 떠보았다.
“버섯교단 쪽 일은 잘되어가나?”
「버섯교단? 아아, 레이디 아밀라리아의 교회?」
“그쪽에서 도는 ‘여신의 계시’에 대한 소문. 보나 마나 네 소행일 게 아닌가.”
내가 거론한 계시란 아밀라리아의 숲에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환각을 의미했다. 삿된 어둠에 잠긴 불길한 도시의 실루엣. 안개로 뒤덮인 거리에 묵시록의 짐승들이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악의 소굴. 여러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어두운 환각은 인류에게 닥쳐올 종말의 위험을 경고하는 여신의 계시로 포장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계시를 받은 사람들은, 어제부터 자신이 보았던 환각 속의 검은 도시가 런던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뭘 숨기겠어? 내가 한 일이 맞아. 자기가 알려준 「접신」을 아주 잘 쓰고 있는 것도 맞고.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해주는 거지만, 조만간 희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아.」
“희소식?”
「당신이 생각하는 그거야.」
“…….”
「왜. 내가 너무 솔직해서 놀랐어?」
“조금 의외이기는 하지.”
「큭큭. 어차피 다 짐작하면서 떠보려고 물어본 거잖아. 그리고, 아내가 남편을 믿지 않으면 어떡하겠어? 당신이 먼저 내게 믿음을 주었으니 나도 당신에게 믿음으로 보답해야지.」
내가 라일라를 대동하여 아밀라리아의 정원을 찾았을 때만 하더라도, 악마숭배자들의 성과는 그렇게까지 위협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이 미친년은 그 뒤로 라일라의 자매들을 대체 몇이나 더 갈아 넣은 걸까? 계획의 전환점이 될 만한 새로운 지혜를 얻기라도 했나? 그래서 인간의 메아리를 남기는 효율에 지수함수적인 증가가 있었던 것인가?
짝- 소리가 나도록 가볍게 손뼉을 친 그레이스는 기도하듯 손을 모은 채로 화면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자, 이제 들어볼까? 이번 싸움에서 대체 무엇을 알아냈기에, 우리 자기가 그만큼 거대한 확장회로를 손에 넣고도 바로 런던으로 쳐들어가자는 말을 하지 않는지……. 내가 레이디 아밀라리아를 떨어뜨릴 것까지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상황이야?」
“그렇다.”
나는 전향자들을 심문하여 알아낸 정보들을 공유해주었다. 원탁이 황금기의 정수를 부분적으로 깨워 외장형 술식 자동연산장치로 삼았다는 것. 그러기 위해 세 사람의 대마법사와 그 추종자들이 의식의 희석을 시도했다는 것. 마스터 메드크럭스가 관측과 방어 임무를 맡고 위성궤도에 나가있다는 것과, 그가 「신벌」이라는 이름의 공격위성들을 제어하고 있다는 것. 거기에 현실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 등.
허리를 편 그레이스가 팔짱을 끼고 숨을 들이쉬었다.
「과연. 아비터와 트라운서가 런던 밖으로 나온 시점에서 그보다 더 위험한 뭔가가 있으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불완전하게나마 의식을 되살려놓은 황금기의 정수라. 말만 들어도 만만치 않을 것 같네. 그런데-」
“그런데?”
「「알파 크루시스 아크」와 「신벌」이라고 했지? 마스터 메드크럭스 쪽은 황금기의 정수보다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겠어? 콜리어가 당신을 굴복시킨 후 원탁을 장악할 생각을 한 것만 봐도 그래. 그건 즉 확장회로를 지닌 당신과 콜리어의 힘으로 공략 가능한 취약점이 있다는 뜻인데, 그 취약점이 설마하니 황금기의 정수가 있는 쪽은 아닐 것 같거든.」
“확인해보기 전까진 모르는 일이지. 콜리어가 알고 있었던 취약점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일 가능성도 배제해선 안 돼.”
어쩌면 콜리어가 점쳤던 승산엔 인적 요소가 포함되어있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런던에 잔류한 마스터들이나 동반승천 카르텔의 구성원들 가운데 상황변화에 따라 편을 갈아타기로 약조한 인간들이 있었다면, 런던 및 영국 본토의 감시·방어체계를 교란하거나 부분적으로 우회하는 식으로 승부를 걸 수 있었을 테니까.
「확인은 어떻게 해볼 셈이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나서 위력정찰을 강행해보는 수밖에. 물론 최선은 그 전에 다른 경로로 정보를 얻는 것이고.”
위력정찰은 적에게 화력을 투사하여 적이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살피는 공격적인 정찰방식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나 자신을 적에게 노출해야 하는 방식이므로, 아무리 신중하게 진행하더라도 낭패를 볼 위험이 존재했다.
「만반의 준비는 당신이 나포한 전투함들의 개수(改修)를 말하는 거지? 우주환경에서의 운행과 전투능력을 완비하는 것 말이야.」
“맞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지금으로선 어림하기 어렵다.”
「음- 내게 괜찮은 생각이 하나 있어.」
“뭐지?”
「어떤 무기로도 닿지 않을 까마득한 거리에서 런던을 향해 고질량 투사체를 날리는 식이면, 아무런 위험부담도 없이 메드크럭스의 교전능력을 시험해볼 수 있지 않아? 이러면 직접 교전을 치를 필요가 없으니 개수에 들어가는 시간과 자원이 많이 절약될 거야. 잘만 하면 이것만으로도 원탁을 끝장낼 수 있겠지.」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우주에서의 최대교전거리가 대체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나? 영국과 원탁이 힘을 합쳐 제작한 레이저 병기라면 회절(回折/Diffraction)을 고려해도 족히 몇만 킬로미터까지는 파괴력이 유지될 텐데.”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시준기(視準器/Collimator)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광선을 100% 평행하게 정렬(시준)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대기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공간에서도 레이저 병기엔 유효사거리가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유효사거리는 일반적인 요격용 레이저 무기들을 기준으로 잡아도 수백 킬로미터 이상이다. 상대가 원탁이라면 만 단위라고 가정하는 편이 안전했다.
‘레이저가 무장의 전부라는 보장도 없지.’
원탁의 대마법사가 영국 우주국(UKSA)과 우주사령부(UKSC)의 기술지원 및 자문을 받아가며 연 단위의 시간 동안 위성궤도에 나가있었다면, 넘쳐흐르는 폐 위성들과 우주쓰레기들만 그러모아도 질량발사체를 포함한 온갖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레이스가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거리가 왜 문제야? 당신에겐 공간도약 술식이 있잖아.」
“……그 술식을 쓰고 나서 과부하가 걸려 반병신이 된 아비터를 못 봤다고 할 셈인가? 공간도약의 한계가 궁금하면 그냥 궁금하다고 해라.”
「아하하. 들켰네.」
“내가 가진 공간도약은 그런 용도로는 쓸모가 극히 제한적이다. 술식을 연구하고 개선할 시간이 반세기쯤 주어진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아무리 애를 써도 7~8초 가량 활성화하는 게 고작이야.”
「그런가, 그런가…….」
“나라고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게 아니다. 그러나 그 먼 거리에서 공격을 하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님을 알지 않나. 전문 인력을 확보해 발사체의 속도와 궤도를 먼저 계산해놔야 하고, 그 속도와 궤도를 맞추는 것도, 시간에 맞춰 정확한 발사 위치를 점유하는 것도 일이다. 까딱 잘못하면 런던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날아가겠지.”
「그게 왜?」
“음?”
그레이스는 상쾌한 표정과 어조로 말했다.
「좀 빗나가면 어때서? 어차피 도시 하나를 반파할 정도의 질량만 던지는 건데. 그냥 맞을 때까지 계속 던지면 되잖아.」
“미친 소리 좀 작작 해라.”
「큭큭. 당신에게는 이게 미친 소리구나? 나로서는 원탁을 뭉개버릴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은 일인데.」
“……이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당신이 그러기를 바란다면.」
비록 나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내게는 선이라는 게 있다. 원탁의 제국주의자들과 나 사이에 그어놓은 정도와 절제의 선이.
그리고 이 선이 아니더라도 그레이스의 제안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곤란한 것이었다. 그 먼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지구와 나 사이의 연락은 사실상 단절을 피할 수 없으니까. 교신을 시도하면 무조건 내 기도가 적에게 노출된다고 보아야 하며, 지상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했을 때 내가 나서서 대처할 수도 없게 된다.
또 발사체가 날아가는 데 시간이 걸리는 만큼, 방어가 불가능하겠다고 판단한 원탁이 그 질병 같은 자존심을 꺾고 런던을 버려버리면 내 공격은 그냥 헛수고가 되어버리고 만다.
통화의 말미에, 그레이스는 맥락도 없이 제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자기. 내가 왜 아직도 원수에게서 받은 이름을 쓰고 있는지 알아?」
은총(그레이스)이라는 이름은 마스터 엘름스테드가 멋대로 붙여준 것이다. 인도 서북부 태생으로 아리아인의 피를 물려받은 그레이스에겐 당연히 본명이 따로 있을 것이었다.
“모르겠군.”
솔직히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듣고 보니 확실히 이상하기는 했다. 그레이스는 소녀 같은 미소를 꾸미며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간단해. 들을 때마다 기분이 더러워지기 때문이야. 말하자면 내 영혼의 날을 일상적으로 갈아주는 숫돌 같은 거지.」
“…….”
「이름은 존재를 규정한다고 하잖아? 나는 내가 분노와 증오 이외의 무엇도 아니기를 바라왔어. 그런데 당신에게는…… 어쩐지 내 본래의 이름을 알려주고 싶어지네.」
“알려줄 건가?”
「유감스럽게도 그럴 수가 없어. 언제부터인가부터 더는 떠올리지 못하게 되어버렸거든.」
“그렇군. 유감이다.”
「있잖아, 조금 불공평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당신의 본명을 알려주지 않을래?」
질문을 받은 나는 짧게 침묵한 끝에 거짓으로 대답했다.
“나도 잊었다. 오래 전에 잊었지.”
「아아, 그래? 아쉽게 됐네.」
그레이스는 아쉬워하는 티를 내며 짧은 한숨을 내쉰 후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그래도 당신과 나 사이에 공통점이 있는 건 마음에 드는걸.」
나는 언짢은 기분으로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