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466화 (466/561)

#47. 혼돈과 공황 (12)

내가 인간으로서 결핍된 부분이 많다는 것쯤은 나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굳이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이 없는 건 내가 아니라 그레이스 쪽이라 해야 할 것이다. 눈앞의 마녀를 경계하는 것은 본능이나 감각이 아닌 이성적 판단의 영역이니까. 어차피 이것도 유치한 장난질이겠지만,

자세를 바르게 되돌린 그레이스가 심장 어림에 손을 올리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진심으로, 당신이 거둔 승리에 온 마음을 다해 경의와 감사를 표하는 바야. 당신은 내가 살아가던 세상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어.」

나는 불식간에 눈을 조금 찌푸렸다. 자신의 세상을 바꿔놓았다는 그레이스의 말이 앞서 라일라가 했던 말과 비슷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짧은 순간이나마 그레이스와 라일라가 겹쳐진 건 내게 정체불명의 불쾌감을 선사했다.

내 표정을 본 그레이스가 곤란한 웃음을 물고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내가 그동안 장난을 너무 많이 쳤나 보네. 이번엔 정말 진솔하게 하는 말인데.」

“그렇다 치고 넘어가지. 논의해야 할 일들이 많다.”

「싫어. 더 말하고 싶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그레이스의 볼엔 옅은 홍조가 떠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스크린 속 그레이스의 눈동자를 화소(畫素)가 튀도록 자세히 들여다본 나는, 다소 어이없는 심정으로, 혹시나 하는 생각에 확인하듯 물어보았다.

“혹시 술 마셨나?”

「약간. 그래도 판단력이 흐려질 정도로 취한 건 아니야.」

“퍽이나 그래 보이는군. 나중에 다시 통화하지.”

「나중에 다시 통화해도 마찬가지일걸? 그도 그럴 게, 당신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게 되어버려서 마신 술이니까. 아마 당분간은 계속 이럴 것 같아.」

“그건 또 무슨 미친 소리인가.”

「말했잖아. 당신은 내 세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그레이스는 후-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내 삶에 이제껏 당신과 같은 사람은 없었어. 당신처럼 내게 다가온 사람도 없었지. 당신의 존재는 나날이 특별함을 더해 왔는데, 이젠 그 특별함이 내 안의 어떤 역치를 넘어서버렸나 봐. 갑자기 당신이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더라고.」

“그것참 웃기는군.”

「맞아. 웃기지. 내가 봐도 웃기긴 해. 세상에. 내가. 이 내가. 후후.」

여기에 만약 진심이 있다고 치면, 그것은 마스터 엘름스테드를 잡아먹은 것과 같은 독사의 식욕일 터였다. 경계심을 허물어놓았다가 적시에 독니를 박아 넣기 위한 거짓된 유혹.

이런 속임수에 넘어가는 게 인간 수컷들의 평균이고, 노회한 원탁의 마스터조차 예외가 아니었으니, 그레이스가 검증된 무기를 놓지 않는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걸리면 좋고 안 걸려도 그만인 일이잖은가.

「내 세상은 아주 오랫동안 정체되어있었지. 그건 적의와 생명의 위협으로 가득한 정체였어. 당신도 겪어봐서 알지 않아?」

이렇게 물으며, 그레이스는 아련한 웃음을 흘렸다. 자연스러운 표정 연기였다. 진심을 도구로 쓸 줄 아는 숙련된 배우의 기술이다.

「단 한 번만이라도 발을 잘못 내디디면 무저갱으로 추락하는 위태로운 외줄타기. 그런 외줄타기가 수십 년간 이어지면, 변치 않는 증오와는 별개로, 과연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게 가능한 일이기는 할까? 싶은 마음이 든단 말이야. 내 적들이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으로는 실감하기 어렵게 되는 거지.」

다시 한 번, 그레이스의 말이 라일라의 말과 겹쳐진다. 나는 심중에서 한 마리 지네처럼 기어오르는 불쾌감을 인내했다.

엄밀히 말해 그레이스와 라일라는 같은 울타리 안에 속해있었다. 권력관계의 상하가 달랐을 따름이지. 그러니 서로 느낀 바가 흡사했다 한들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 그레이스의 말마따나,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던 나 역시 겪어봐서 아는 느낌이기도 하고.

「지난밤…… 아, 이제는 지난밤이 아니구나.」

그레이스가 자그맣게 키득거린다.

「아무튼. 도쿄 상공의 그 터무니없는 싸움을 보는 내내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 정말이지, 매 순간순간들이 전율로 가득해서 아무 생각도 못 하겠더라. 정황상 당신의 승리가 확실해졌을 땐 머리에서, 심장에서, 온몸의 혈관 속에서 온통 환희와 열락의 폭죽이 터지는 듯한 느낌이었어. 문자 그대로 미칠 것만 같았다고.」

“즐거웠다니 다행이다.”

「즐거워? 아니. 내가 느꼈던 격정들을 그렇게 단순한 표현으로 담아낼 순 없어. 부족해. 너무나 부족해.」

“…….”

「내장이 꽉 조여들고, 숨을 고르게 쉬기가 어렵고, 등골에서 정수리까지 끊임없이 전기가 흐르는 감각들. 그런 감각들의 홍수에 휩쓸렸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니, 아까 말했던 것처럼 당신이라는 사람이 새롭고 낯설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야.」

이 미친년은 취한 사람 특유의 감정과잉과 과장된 언어들도 잘 연기하는구나 싶어진다. 과연 원탁의 대마법사를 거짓된 연인 흉내로 잡아먹은 마녀다운 기량이라 하겠다.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이 느껴지지 뭐야.」

“부끄러움?”

「응. 부끄러움. 웨인 당신도 분명 나와 비슷한 관성에 갇혀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런 생각을 하니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더라고.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당신이 치른 싸움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 건 덤이었고 말이야.」

이렇게 말한 그레이스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날 밤의 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래? 실무진들로부터 대략적인 정보 공유를 받긴 했지만, 직접 싸움을 치른 당신의 입으로 그 당시의 상황들을 들었으면 해.」

그레이스가 내 진술을 요구할 것은 예상한 바였다. 확장회로를 강탈한 과정, 자신이 넘겨준 「환시」의 활용, 공간왜곡 술식의 출처와 그 술식을 이용한 워프의 원리, 두 대마법사를 살해한 구체적인 방식 등등 알고 싶었던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테니까.

물론 그 모든 것들을 하나에서 열까지 다 알려줄 이유 따윈 없다. 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대답을 돌려주었다. 걸러야 할 내용은 다 걸러낸 건조한 정보공유였다.

내 사무적인 경과 진술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스는 내 한 마디 한 마디에 빠짐없이 고조된 반응들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내가 불경스러운 영생의 별을 전개하는 대목에선 짤막하게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영생의 별에 대한 설명이라곤 영혼을 다루는 마법의 거장 크로우허스트가 타인의 육체를 강탈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그 술식을 응용해서 상대를 죽였다는 두루뭉술한 내용이 전부임에도 그러했다. 술식 발동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술직이 발동되고 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준 게 없었다.

다만 내가 사냥감인 콜리어와 같은 확장회로로 이어져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점만 알려주었을 따름.

「굉장해. 굉장해.」

그레이스는 홍조가 여전한 얼굴로 감탄어린 날숨을 내쉬었다.

「콜리어를 죽인 방식이 특히 마음에 들어. 원탁의 대마법사가 스스로 만들어낸 확장회로의 아기들에게 잡아먹히다니. 짜릿해. 정말 최고야. 아, 그 장면을 직접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섀빙턴과 콜리어의 머리를 따로 챙겨 놨다. 회로파열로 뇌가 망가지긴 했지만, 트로피로 삼기엔 괜찮겠지.”

「고마워. 우리 남편은 참으로 달콤하기도 하지. 아내이자 동맹자로서 면목이 없어지는걸,」

“왜?”

「왜냐니.」

그레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명백히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부채감을 느끼지 못할 만큼 뻔뻔하지는 않아. 공동의 적에게 맞서는 호혜적 동맹이라기엔 지금까지 내가 기여한 부분이 너무 적지. 먼저 신용을 증명하여 동맹을 성립시킨 것도 당신이고, 난 어디까지나 보조전력과 금전적인 이익, 그리고 그 외의 부수적인 편의들을 제공했을 뿐이니까.」

엄밀히 말해, 금전적인 이익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레이스의 기여가 마냥 적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한국 2위의 국적항공사를 장난처럼 인수할 수 있도록 해준 자금력이 검은 대륙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천연자원 밀수선에서 나온 것이니까.

그러나 그레이스가 부채감을 입에 담은 것 자체는 좋은 일이었다. 그게 진심이냐 아니냐를 떠나, 어쨌든 내게 추가적인 지원 내지 보상을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기에.

“정 그렇게 부채감을 느낀다면 네가 한 가지 양해해줘야 할 일이 있다.”

「뭔데?」

“우선 이것부터 말해야겠군. 그레이스. 지금 이 상황은 주술사 왕으로서의 네가 일본 경제의, 나아가 세계 경제의 구원투수로 등판할 절호의 기회다.”

「아아. 뭘 원하는지 알 것 같네.」

“그런가?”

「당신이 천거해준 왕국 재상이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상신했었거든.」

“왕국 재상이라면, 르완다 대통령 말인가?”

「응. 당신 말대로 영입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인간이더라. 야망이 크고 욕심이 많아서 탈이지만, 그만큼 유능하면 이해해줄 수 있는 범위지. 제어하기가 딱히 어렵지도 않고. 아무튼, 당신이 바라는 건 원자재 공급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무형의 모든 이익들에 대해 당신의 지분을 보장해달라는 거겠지?」

“이해가 빨라서 좋군.”

지금까지 주술사 왕의 동군연합, 이른바 「후루(Huru) 신성왕국연합」의 자원 수출은 거의 전부가 위장기업을 창구로 삼아 중국을 경유하는 밀수의 형태로만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제 동군연합의 국제적인 지위가 외교와 경제 양면에서 정상화되고 나면, 더는 밀수의 형태로 자원을 수출할 이유가 없어진다. 이대로라면 내 조직이 기존의 무역경로에서 빨아들이던 중개수익은 큰 폭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손끝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던 그레이스가 눈웃음을 곁들여 말했다.

「자원 수출입이나 금융 관련 분야에 대한 실무협상의 전권을 당신에게 위임하겠어.」

“괜찮겠나?”

「괜찮지 않을 게 뭐겠어. 따지고 보면 이 또한 당신이 만들어낸 기회를 내가 받는 꼴인데, 염치도 없이 모든 이익을 독차지하려 들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동맹을 깨려고 작정하지 않은 이상에는.」

“그럼 금전적인 수익은 50대 50으로 나누도록 하지. 전쟁 준비에 필요한 인력과 기술은 이제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내가 알아서 조달해주겠다. 실무진은 동군연합의 관료들을 우선적으로 활용하되 내 부하들이 관리감독 권한을 행사할 거다. 필요하다면 동군연합 내의 공식적인 직위를 내어줘야 할 테고. 혹시 이견 있나?”

「없어. 믿고 맡기도록 할게. ‘이제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내 말을 따라 하는 그레이스는 무척이나 즐거운 기색이었다. 보는 입장에선 굉장히 찜찜한 기분이 들게 하는 모습이었다. 50대 50의 분배비율을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한 것 역시 찜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찜찜함과는 별개로, 수출입이 공식적인 경로로 이루어진다 함은 온갖 형태의 계약들로 이루어진 사슬을 가지고 상대를 얽어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 계약들을 위반하면, 위반의 대가를 정산하기 전까지는 국제무대에서 정상적인 거래와 활동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니 그레이스가 최초 계약 단계에서 난장을 치지 않는 한 내 이익은 확실하게 보전될 터였다.

그레이스는 상쾌한 어조로 말했다.

「마음껏 이익을 뽑아가도록 해. 어차피 거래하는 입장에선 평범한 부패국가라고 생각할 테니까. 연간 수백억 달러의 이권쯤은 되어야 여러 왕국들을 통치하는 여왕의 혼수라고 할 수 있겠지. 안 그래, 국서(國壻)?」

내가 이익을 뽑아낸다고 해봐야 런던 공략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선을 지켜야 한다. 마녀는 그걸 알기에 부담 없이 입 발린 소리를 하는 것일 테고. 나는 혼수니 국서니 하는 잡소리들을 무시하며 논의의 주제를 전환했다.

“다음으로 넘어가지. 칠각기사단이 지금 영국에서 혼란을 부추기기 위해 벌이고 있는 일들이 있나?”

그레이스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본격적인 행동에 착수한 건 없어. 사람들의 불만을 부추기거나, 헛소문과 거짓 자료들을 퍼트려 대중을 선동하는 정도만 하고 있을 뿐이야. 주어진 시간이 짧기도 했고, 행동에 앞서 현명한 남편의 의견을 듣고 싶기도 했거든.」

“잘됐군. 경찰에 속해있는 기사단원들은 얼마나 되나?”

「스코틀랜드 야드에 재직 중인 인원만 헤아려도 세 자릿수는 돼. 왜? 그들을 따로 써야 할 데가 있어?」

스코틀랜드 야드는 그레이터 런던의 치안을 담당하는 메트로폴리탄 경찰청의 별칭이었다.

영국의 악마숭배자들은 예로부터 군과 경찰에 투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면 그것이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업이며, 동시에 공권력의 수사를 회피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가 칠각기사단을 장악한 이후로는 그러한 침투에 대해 조직적인 장려와 지원이 이루어진 것으로 안다. 스승새끼의 유해에도 원탁의 마스터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그 문제의 대책을 논한 기억들이 남아있었다.

비록 그레이스가 정확한 숫자를 밝히진 않긴 했으나, 내 목표를 달성하기엔 충분한 규모와 직위들을 갖추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내가 그리는 큰 그림의 한 획을 입에 담았다.

“그들을 움직여 영국 내 무슬림 공동체들을 자극해주었으면 한다. 단발성 사건이 아니라, 수개월에 걸쳐 갈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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