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464화 (464/561)

#47. 혼돈과 공황 (10)

마도서 봉쇄수도원을 단 한 번의 시도만으로 함락시키려는 건 과도한 욕심이었다. 나는 확실한 성공을 바랐고, 그러기 위해 얼마간의 시일을 투자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내가 처리해야 할 다른 일들의 중요성과 우선순위를 고려하여, 봉쇄수도원에 대한 첫 번째 정신오염 파상공세는 한 시간 정도로 마무리 지었다.

그동안 나는 틈틈이 섀빙턴의 유산을 분석할 수 있었다. 조립식 아기들을 이용한 정신오염 공격은 반쯤 자동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광명의 탐구자, 똥쟁이 섀빙턴이 지니고 있던 가주의 신물(神物)엔 「제4상(相) 광휘의 왕홀(Sceptre of the fourth state blaze)」이라는 이름이 음각되어 있었다.

긴 지팡이 형상의 왕홀에 내장된 마법술식은 마력을 이용한 플라즈마 생성의 원리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마력을 물리적인 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은 「발화」와 유사하나, 그 이후의 작용 대부분은 「방전」에 모태를 둔 것 같았다. 원형이 거의 남지 않을 지경으로 코드가 바뀌긴 했어도, 대마법사의 지식과 황금기의 눈으로 그 뿌리를 더듬기는 어렵지 않았다.

‘본인도 많이 괴로웠던 모양이지?’

스승새끼가 기억하는 한, 섀빙턴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연구에 대한 동료들의 비판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발화」보다는 「방전」이 더 순수한 빛에 가까우리라는 지적에 오로지 아집으로만 대응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아집의 이면에는 나름대로 고뇌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 왕홀에 내장된 술식은 그러한 고뇌와 치열한 궁구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보통의 노력으로는 도달하지 못할 수준의 완성도였기에.

왕홀의 상단에 박힌 수정 안쪽엔 신명기 4장 12절의 문구가 새겨져있었다. 통상시야를 기준으로는 빛의 반사에 따라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 문구였다.

「그가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수정을 감싼 합금 테두리엔 짧은 그리스어를 각인해놓았다.

「Ἃγιον Φῶς」

아기오 포쉬(거룩한 빛). 혹은 정교회에서 말하는 「신성한 불(Holy fire)」은 정교회의 부활절에 예루살렘의 성묘교회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의미했다.

죽은 섀빙턴이 이 술식을 무어라 불렀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평범한 플라즈마와 구분할 이름이 필요하긴 했기에, 나는 이것을 테두리에 각인된 문구대로 그냥 「성화(聖火)」라 칭하기로 했다. 다른 이름을 붙이겠답시고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뭔가.

높은 완성도와는 별개로, 「성화」는 그 자체로는 딱히 쓸모가 없는 술식이었다. 우수한 마력효율로 플라즈마를 생성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걸 제어하는 능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까닭이었다. 기껏해야 소규모 플라즈마 점화 시 시전자가 해를 입지 않게끔 최소한의 거리조절 및 위치지정 능력이 있는 게 다다. 투사 가능한 거리는 채 20미터가 되지 않았다.

이 부실한 제어능력은 섀빙턴의 뚜렷한 목적의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실용성 따윈 알 바 아니고, 오로지 순수한 빛에 닿겠다는 열망만으로 연구를 수행했을 테니까. 태양이 플라즈마 덩어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최소한 관념적으로는 빛과 관련성이 있기도 하다.

이걸 어떻게 보완하면 좋을까.

가만히 숙고하던 나는, 불현듯 콜리어가 선보였던 진동전류역장(Oscillating Electric Field) 생성 술식을 떠올렸다. 해당 술식에서 역장 제어를 구현하는 코드를 추출하고 수정한다면 「성화」에도 접목이 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지팡이에 대해 묻다가 이 이야기를 들은 경태는 감탄성을 토했다.

“가만, 가만. 불을 막아내던 역장을 개량해서 역장 안에 진동전류 대신 플라즈마를 가두면…… 그거 완전 플라즈마 방어막 아닙니까? 보잉에서 만들다가 흐지부지된 그거요.”

미국 보잉(Boeing) 사에서 만들던 플라즈마 방어체계는 전자 빔의 충돌을 이용한 공기 이온화로 플라즈마 역장을 생성하여 충격파를 경감시키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특허의 명칭도 「전자기 아크를 이용한 충격파 감쇠(Shockwave attenuation via electromagnetic arc)」라 되어있다.

해당 방어체계의 역장이 실질적으로 버블(Bubble)에 가깝다는 점, 현상을 빚어내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제외하면 기능적인 측면에서만큼은 내가 1차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결과물과 유사한 면이 있긴 했다.

“굳이 말하자면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

내가 긍정하자 경태 녀석이 눈을 빛내며 다시 감탄했다.

“오오, 방어막. 오오, 우주전함…….”

설령 내 구상대로 술식이 완성된다 한들, 질량으로 뚫고 들어오는 투사체는 여전히 막아내기 버거울 터였다.

특히 도쿄 상공에서 나를 난감하게 했던 극초음속 운동에너지 탄두 미사일 같은 흉물과는 상성이 완전히 상극이다. 그런 흉물은 확장회로의 힘을 최대로 발휘한 플라즈마 방어막조차 그냥 없는 것처럼 관통해 들어올 게 뻔하다.

그러나 레이저와 같은 지향성 에너지 무기에 대한 방어력은 극히 우수할 테고, 플라즈마의 특정 대역 전자기파 흡수 특성에 따른 스텔스 효과도 덤으로 얻게 된다. 그래도 적외선 관측은 피하기 어려울 터라 「환시」의 개량 역시 소홀히 해선 안 되겠지만.

‘장기적인 투자계획을 집행하면 핵융합마저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생체전투함에 토카막을 실어놓고, 거기에 연료를 투입하며 마법적인 플라즈마 생성 및 제어를 보태어 핵융합 발전을 구현해낼 경우, 모르긴 몰라도 「방전」보다 훨씬 더 높은 마력 효율로 전기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겠지.

문제는 그러기 위해 얼마의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단 토카막을 획득하는 것부터가 난관이고, 실험과 운영에 투입할 전문 인력을 확보하기도 어려운 일이니까.

모든 선택은 결국 합목적성과 기회비용의 우열에 따라 갈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핵융합은 낙제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탄자니아 모로고로의 호텔에서 경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안타깝네요. 원탁의 대마법사들이 심보를 고쳐먹고 마법을 좀 대국적으로 써주기만 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완전히 달라질 텐데 말입니다.」

대마법사들이 문명의 발전에 기여한다면 얼마나 큰 진보가 있겠느냐는 요지의 이야기였다. “나는 화성에 가겠다.”라고 떠들어대는 모 미국 기업가의 인터뷰를 보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도피 욕구를 느꼈던 때의 대화인지라 제법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그보다, 흑사병 발발은 어떻게 된 거냐?”

생체전투함을 스텔라 포르투나 아래의 해저면에 둘 땐 유선연결을 통해 통신능력을 확보했다. 나는 그 통신선으로 흑사병 관련 보고를 받고서 봉쇄수도원에 대한 공격을 끊고 올라온 것이었고.

봉쇄수도원엔 비경구 영양공급 장치를 통해 수면제와 환각제의 칵테일을 주입해놓았다. 직접 눈으로 봐가면서 주입량을 조절한 만큼, 105인의 수도기사들은 다음 공격을 가하기 전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터였다.

내가 화제를 전환하자 경태가 제 머리를 탁 쳐 보였다.

“아차. 제가 정신이 좀 없었네요. 지팡이에 정신이 팔려서 그만.”

앞서 웨스트버튼을 죽이고 획득한 제례검을 몹시 유용한 무기이자 도구로 사용해온 만큼, 경태의 입장에선 또 다른 대마법사의 유산인 지팡이의 기능이 궁금했을 것이었다. 기능을 알아둬야 앞으로의 계획이나 전술을 구상할 때 반영할 수 있으니까.

경태가 펼친 손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회의실로 가시죠.”

나는 도쿄에서의 흑사병 확산이 과연 어떤 양상으로 나타날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런던에서 라즈베리 프로젝트의 최종단계를 이행할 때를 위한 좋은 참고사례가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회의실에선 각양각색의 기호를 단 마커(Marker)들이 떠있는 도쿄 광역권의 지도를 볼 수 있었다.

이는 기존에 쓰던 전술지도 어플리케이션(TAK/Team Awareness Kit)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었다. 헌터들이 맡는 임무가 다양해짐에 따라 온갖 종류의 확장 프로그램들이 나와 있는 상태여서, 이럴 땐 보안검사를 거쳐 애드온 몇 개를 더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어떤 마커들은 사건·사고 정보를 나타내었고, 어떤 마커들은 군·경·엽사들의 이동이나 배치 정보를 보여주었으며, 또 다른 마커들은 발열 의심자가 관측된 지점들을 관측 시점으로부터 경과한 시간과 함께 표시해주었다.

상대적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마커들은 발열 감지 카메라를 장착한 드론들이었다.

중국발(發)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 당시 국가를 가리지 않고 대량으로 쓰이다가, 시일이 흘러 바이러스의 치사율이 자연적으로 감소한 지금에 와서는 쓸모가 줄어 중고 매물이 넘쳐흐르게 된 열화상 카메라들. 야생동물들을 추적하는 헌터들이 얼마간 물량을 소화해주었을지라도 여전히 많은 매물이 시장에 남아 있다.

그 카메라들을 분산 조달하여 드론 데이터 링크에 연결할 준비를 해두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윌리엄의 역병을 완성했을 때 장차 쓸모가 있으리라 예상하여 미리 끝내두었던 준비였다.

지도에 표시된 모든 발열환자가 페스트 환자라고 볼 순 없다. 그러나 이 시점의 발열환자가 높은 비율로 페스트 환자일 것은 분명했다.

발열환자가 많이, 빈번하게 관측된 지역은 적색 그라데이션이 들어가 있었다. 지도를 살핀 나는 간략한 감상을 말했다.

“숫자가 많진 않은데, 증상 발현은 상당히 빠른 편이로군.”

경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예상 범위 이내입니다. 위생과 영양상태가 열악한 사람들이 원체 많았잖습니까.”

흑사병의 잠복기는 통상 2일 이상이다. 그러나 감염자의 상태가 좋지 않다면 불과 수 시간 만에 첫 증상이 나타나는 일도 가능했다.

페스트균이 어떤 경로로 인체에 침투하든 최초의 증상은 열과 오한이었다. 거기서 다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선(腺) 페스트와 패혈성 페스트, 그리고 폐렴성 페스트 및 인두·수막 페스트의 차이가 나타나는 식. 발열 단계에서 항생제를 투여하면 열중 여덟아홉이 살아남을 수 있으나, 2차적인 증상이 발현한 다음엔 치사율이 급격히 상승한다.

“일본 정부의 대응은 확인된 게 있나?”

“다른 이유들로 겁을 줘가면서 외출 및 이동 자제를 권고하는 중이죠. 고래가 비를 뿌려놔서 아직 위험하다거나, 폭력단이랑 약탈자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거나, 하수도 같은 데서 살다 나온 불결한 행로병자(行路病者)들을 조심해야 한다거나 등등이요.”

일본어의 행로병자는 한국어의 행려병자와 같은 말이었다. 병에 걸렸으나 치료해줄 사람이 없는 부랑자를 뜻하는 단어.

지도 좌우로 뜬 실시간 영상들을 보건대, 일본 정부의 간접적인 통제는 많은 시민들에게 효과적으로 먹히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고래가 뿌린 비의 영향으로 가로수들이 싹 다 죽어버린 구역에선 돌아다니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간혹 방독면을 쓴 채 빈집들을 털고 다니는 약탈자들의 무리만이 눈에 띌 따름이다.

나는 미끄러지는 화면들을 주시하며 물었다.

“항생제 추가 확보는 원활하고?”

“예. 공중전투함의 아기울음소리와 아비터에서 피고름이 흘러나오는 광경이 처음 전파를 탔을 때 누님이 딱 지시를 내려놨거든요. 이제부터는 의심을 받을 걱정 없이 무조건 주문을 넣기만 하면 된다고. 감염이 일본 바깥으로 퍼질지도 모르는 만큼 최대한의 물량을 확보해놔야 한다고.”

고름은 그 자체로 어떠한 병원균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런즉 아기들의 울음을 듣고 피고름의 범람을 보자마자 항생제를 대량으로 발주하는 것은 냉정한 이성과 비상한 판단력으로 설명 가능한 일이었다. 기업가나 투자자들의 세상에서는 그게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일을 해두는 유능한 부하가 있으면 이런 점이 좋았다.

“잠깐.”

나는 화면에 스쳐간 어느 부두의 모습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4번 화면. 방금 지나간 곳으로 되돌려보도록.”

내 말이 현장에 전해지기까지는 약간의 시차가 필요했다.

“그만. 거기.”

역으로 흐르던 화면이 내가 원하는 지점에서 멈추었다. 해당 지점, 혼탁한 파도가 철썩이고 온갖 잔해와 쓰레기들이 물결치는 을씨년스러운 부두엔 눈에 익은 모양새의 녹슨 대형어선 한 척이 정박해있는 상태였다. 뱃머리 옆에 적힌 선명(船名)은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해남파 남사 제12선」

수연 녀석의 주문을 받아 고래의 먹이를 싣고 왔던 바로 그 어선이다.

먼바다로 떠났어야 할 이 배가 대체 왜 도쿄에 있는 것일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