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혼돈과 공황 (9)
연쇄적인 혼돈과 공황의 물결은 중동의 산유국들에게도 새로운 위기를 선사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동지역의 경제엔 반짝 볕이 드는 분위기였다. 세계 제일의 원유 수출국인 러시아가 카자흐스탄 침공 건으로 대대적인 무역제재를 맞으면서, 나날이 아래로 처박히기만 하던 유가가 모처럼 반등할 기미를 보였던 까닭이다.
그러나 호재는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 지나지도 않아, 돈이 급해진 러시아가 중국과 인도를 경유하는 우회수출을 개시한 탓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가격은 터무니없이 저렴했다. 중국과 인도가 압도적인 협상력의 우위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중동의 산유국들에게는 가벼운 호재가 무거운 악재로 뒤바뀐 꼴이었다.
그 와중에 이젠 일본과 영국에서 촉발된 쌍끌이 공황이 세계경제에 강진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실물경기의 급격한 악화에 대한 우려는 국제유가에 강력한 하방압력으로 작용한다.
설상가상으로, 중동 제국(諸國)의 국부펀드들은 다른 국부펀드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증시에 아주 많은 자금을 투자해놓은 상태였다. 증권가에선 중동지역 주요 국부펀드들이 오늘 하루 입은 손실액만 합쳐도 어지간한 나라의 1년 예산을 넘어선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그러니 중동의 여러 왕실들을 투자자로 삼은 알림 샤히디가 투자자들의 등쌀에 못 이겨 내게 간절한 연락을 해온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서신은 「속삭이는 자」, 즉 샤이탄(사탄)의 지혜로 초현실적이면서도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존재를 탄생시킨 영국을 비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는 이번 사태에 대한 이슬람 문화권 전반의 여론이기도 했다.
생체전투함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 다음엔 현실적인 걱정이 이어졌다.
「위대하신 스승님. 저희가 언제쯤이면 스승님의 존안을 다시 뵐 수 있을는지요?」
「이곳의 불온한 기류는 나날이 무게를 더해가고 있으며, 각국의 왕실은 그와 함께 높아지는 불안 속에서 저희에게 약속의 이행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아직 무력하고 배울 것이 많은 저희는 그저 현명하시고 자비로우신 스승님의 은혜를 기다릴 뿐입니다……」
저자세로 일관하는 연락의 마지막엔 「알라께서 스승님의 앞길을 인도하시길.」이라는 말이 붙어있었다. 언뜻 보기엔 그냥 상투적인 인사말 같지만, 내 앞길을 알라가 이끌기를 바란다는 건 결국 내가 하루빨리 성전에 착수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였다.
샤히디 그룹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무언가를 이룬 적이 없고, 이룰 능력도 없다. 분에 넘치는 명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리고 그 명성에 도취되면 도취될수록, 나에 대한 샤히디 그룹의 의존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들을 달래는 내용의 답신을 보내주었다.
「그대들은 초조해하지 마시오. 오늘의 충격으로 인한 중동 여러 국가들의 내부적 파란은 다소의 시차를 두고 정점에 이를 거요. 그 정점이 오기 전에 승리를 터트리는 건, 결정적이지 않은 순간에 예비대를 투입해버리는 어리석은 지휘관의 행태와도 같소.」
「우리가 안사르 알라(예멘 반군)의 이단자들을 상대로 행할 성전은 당신네 위구르 민족의 미래를 위해 최대한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할 사업이오. 성전의 후원자들에게서 무언가 더 투자를 받아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루하루 심해지는 그들의 목마름이 성전의 부가가치에 반영되고 있다는 말이지.」
「그렇다고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을 거요. 우리는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테니, 그때까지 전사의 기량을 갈고닦으면서 후원자들에게 태연하고 담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도록 하시오.」
「내 모든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안사르 알라의 이단자들은 건조하고 메마른 달(주마다-알-아왈)이 오기 전에 참혹한 패배를 경험하게 될 거요.」
이러는 동안에도 전 세계로 퍼진 혼란의 불길은 시시각각 기세를 더해가고 있었다.
영국에선 총리가 다우닝가 10번지의 관저를 떠나 서쪽 먼 윌트셔 카운티의 MOD 코샴(Corsham)으로 이동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각성능력자들이 포함된 과격 시위대가 언제라도 철책을 넘거나 무너뜨리고 들어와 관저를 불태울 위기였기 때문이다.
영국 총리는 이것이 소요가 진정될 때까지의 일시적인 조치라고 발표했다. 표적을 잃은 시위대는 격분했고, 하원에선 여당을 비판하는 야당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편 일본이 요청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 소집은 이틀 뒤에 열리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이는 실로 이례적인 신속함이었다.
그 와중엔 안보리 소집을 저지하지 못한 유엔 주재 영국 대사가 회의장을 나오던 도중 휘청거리며 쓰러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HMS 아비터가 폭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잠을 자기는커녕 끼니도 챙기지 못하면서 다른 나라 대사들을 상대해왔을 늙은 외교관의 피로였다. 솔직히 아는 게 없어서 더 힘들었을 것이다.
간밤의 사태에 대하여 정부에 공개적으로 해명을 요구했던 왕립해군 항모전단 소속 45형 구축함 HMS 다이아몬드는, 최후통첩의 한계시간이었던 정오로부터 두어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자함(自艦)이 더는 영국 정부와 국방부, 그리고 해군본부의 지휘를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 대통령이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내놓았다.
「영국은 사악한 사기꾼들의 나라입니다!」
거구의 백악관 미치광이는 얼굴이 격노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불경스럽고, 도덕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으며, 기술적인 측면에서조차 심각한 결함이 내포되어있는 거대한 악의의 결정체를 만들어 놓고, 그게 인류의 미래를 밝힐 희망의 상징인 양 전 세계의 선량한 투자자들과 우방국들을 속여 막대한 이득을 취해왔습니다! 그것은 부정하기 그지없는 음모이자 비열한 속임수였지요! 그 속임수는 급기야 끔찍한 재난을 낳고 말았습니다!」
「나는 우리 미국의 투자자들이 그 재난으로 말미암아 차마 가늠하기도 어려울 만큼 참혹한 손실을 입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기관과 개인을 가릴 것 없이 미국의 막대한 국부가 산산이 분해되어 사라지고 말았다는 보고를! 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입니까?」
「내게는 촉수를 휘두르고 공간을 왜곡하며 번개폭풍을 일으키는 거대 살덩어리 비행체보다 미국 시민들의 생활이 무너지는 게 더 큰 공포입니다!」
「미국의 투자자들은 착했습니다! 미국의 투자자들은 착했는데 어떤 저주받을 섬나라의 사생아 날강도 새끼들이 그런 투자자들의 돈을 털어먹었어요! 그 돈은 성실한 미국 노동자들의 은퇴자금이었고! 꿈 많은 미국 부모들의 양육자금이었으며! 제 임기 내내 저와 시민 여러분들이 힘을 합쳐 소중하게 가꿔온 미국 경제의 황금빛 알곡들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백악관 미치광이는 오로지 미국이 입은 경제적 피해만을 말할 뿐 지난밤 도쿄 광역권을 덮친 재난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하기야 나스닥이 하루에 7% 이상 폭락했으니, 경제를 제일로 아는 인간의 입장에선 다른 나라의 재난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을 법도 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생체전투함과 고래가 일으킨 초현실적인 재난에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건 솔직히 놀라운 일이었다. 광인의 정신세계는 역시 상식으로 헤아리기가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내 좌우명은 언제나 같습니다! “누군가가 너를 좆되게 하면, 삽으로 퍼주듯이 되갚아줘라!(When somebody screws you, screw them back in spades!)”…… 신에게 맹세컨대 영국은 반드시 이번 일의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또한 나는 그들에게서 아주 아주 아아아아주 많은 보상을 받아낼 것입니다! 나는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저 날아다니는 흉물(凶物/Abomination)을 만들어낸 모든 기술을 가장 먼저 독자적으로 감찰할 권한과, 영국이 지닌 모든 자산에 대한 최우선 변제권이 우리 미국에게 있음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뭐라고요? 최우선 변제권은 일본에게 있는 거 아니냐고요? 당연히 아닙니다! 왜냐면 객관적으로 볼 때 도쿄가 공격을 받은 것보다 우리 미국의 대사관이 공격을 당한 것이 더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대통령은 대통령이라고, 백악관 미치광이는 입장 표명을 끝낼 즈음 생체전투함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여론을 의식한 발언들을 입에 담았다.
「우리는 강력한 핵폭탄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핵폭탄들은 전 세계 어느 곳이라도 30분 이내에 타격이 가능한 미사일에 탑재되어 있지요! 미국 본토와 가까운 곳이라면 30분이 아니라 3분, 심지어는 1분 이내에 착탄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결단이 필요할 때 결코 망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내릴 결단엔 전략핵무기의 사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미국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추악한 섬나라와 달리, 우리 미국의 정부엔 악마의 똥구멍을 핥는 악취미를 가진 관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나와 여러분들이 힘을 합쳐 다시 위대하게 만든 우리의 조국은 태생부터가 진정한 신자들(True believers)의 나라였으니까요!」
「그러니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들께서는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여 주십시오! 위대한 나라와 올바른 정부, 그리고 이 위대한 나라에 어울리는 강인한 대통령이 여러분의 삶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의지가 굳건하므로 신께서도 우리 미국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발언의 강경함만 놓고 보면 미국이 영국을 버리는 미래는 거의 확정된 것처럼 느껴졌다.
미국이 이런 태도를 취하니 다른 나라들도 눈치 볼 것 없이 영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거의 폭주에 가까운 흐름이었다.
심지어 불량국가의 대표주자인 북한마저 영국을 규탄하는 흐름에 숟가락을 얹었다. 평소엔 미치광이 행세를 하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눈치를 많이 보는 나라답다고 해야 할 일이었다.
「우리 공화국은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인류의 존엄과 세계의 평화를 중대하게 위협하는 세력에 맞서 싸울 의무를 수행할 의지로 충만해 있으며, 우리 공화국의 강위력한 핵무기들은 지금 즉시라도 인류의 적을 겨냥하여 발사할 준비가 되어있고……」
바깥세상의 혼돈이 깊어지는 동안, 나는 콜리어가 남긴 마도서 「버금가는 고결함의 봉쇄수도원」을 내 것으로 만들 계획을 짜고 있었다.
내게 영감을 준 것은 황금기의 정수를 무기화한 원탁의 방식이었다.
‘의식의 희석이라…….’
정수 내에 존재하는 결손과 그로 인해 발현되는 광기를 대마법사 셋과 열렬한 추종자들의 의식으로 채우거나 희석시킨다는 발상. 가만히 곱씹어보면, 이는 봉쇄수도원 안에 들어있는 수도기사들의 뇌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적용 가능한 발상이었다.
물론 광신의 결정체라고 봐도 무방할 105개의 뇌와 의식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인력들이 의식을 보조해줘야 할 것이다.
이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나를 마흐디(메시아)로 섬기는 메리옘 그룹의 광신도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머릿수는 수도기사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수도기사들의 뇌 하나하나를 분리하여 따로따로 상대하자니, 하나를 상대하는 동안 나머지 수도기사들이 극단적인 판단을 내릴 가능성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안으로는 충성심이 남다른 부하들을 동원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안전을 기하려면 천 단위의 인력을 차출해야 하는데, 그런 짓을 했다간 조직 전반에 일시적인 기능 마비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고르기 어려운 선택지라 하겠다.
한 시간 남짓한 궁구 끝에, 나는 원탁의 방식에 적절한 변주를 가하기로 했다.
수도기사들의 정신을 수천수만의 아기들이 우는 소리에 파묻어버리기로.
나는 곧바로 행동에 착수했다. 105개의 뇌들은 과연 어떠한 정보와 지혜를 보관하고 있을까.
「쉬익- 철컥! 쉬익- 철컥!」
봉쇄수도원 궤짝 덮개에 붙은 인공심장과 투석장치는 일정한 간격으로 작고 규칙적인 구동음을 발하는 중이었다. 비경구 영양공급장치에 물려놓은 새로운 영양공급액은 의식이 끝날 때까지 버티고도 남을 양이었다.
의식의 도구이자 의식을 치를 공간이기도 한 생체전투함의 마력장은 봉쇄수도원의 마력장을 한껏 억압했다.
나는 먼저 생체전투함의 확장회로와 신경을 연결한 후, 봉쇄수도원의 접속단자에도 조립식 아기들로부터 뻗어 나온 신경다발을 꽂아 넣었다.
그러자 숭배로 가득한 사고가 언어처럼 흘러들었다.
「오, 주여. 당신이십니까?」
정신에서 정신으로 직접 전해지는 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봉쇄수도원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언어화된 사고는 동굴 속의 외침을 닮은 기묘한 메아리를 품고 있었다.
나는 이 한마디로부터 아주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 이러한 깨달음은 부분적으로 황금기의 눈을 통한 관측을 병행한 결과이기도 했다.
「주여. 주여. 어이하여 말씀이 없으시나이까? 감히 당신을 해하려던 대적(大敵)은 어찌 되었나이까? 그는 그가 저지른 죄의 일곱 배에 해당하는 벌을 받았나이까? 당신께서 거두신 승리를 알려주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당신께 새로운 찬양을 바치는 기쁨을 누리게 해주소서.」
모든 감각을 차단하고, 개인으로서의 자아가 희미해질 지경으로 믿음과 숭배만을 남겨놓은 수도기사들. 이 기사들의 의식(意識)은 조립식 아기들로 이루어진 확장회로와는 다른 의미에서 다형성 군체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입’에 해당하는 기사가 내게 ‘말’을 올리면 다른 기사들의 의식은 자연스럽게 뒤따라 합일을 이룬다.
그러한 합일에 필요한 약간의 시간이 내가 앞서 느꼈던 메아리를 빚어내는 것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105인의 정신이 같은 ‘말’을 합창하는 꼴이니까.
하기야, 105개의 뇌가 하나의 마도서로서 힘을 발휘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 순간에도 마도서에서는 언어화되기 이전의 사고가 배경소음처럼 전해져오는 중이었다. 잘 빚어낸 화음과도 같은 조화를 이루는 그 배경소음들은, 어떤 의미로는 내가 고래에게 건네는 말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찬양」 「찬양」 「찬양」 「찬양」 …….
이런 광신도들에게 섣불리 뭔가 의지를 전해버리면, 당초 마도서를 처음 획득했을 때 내가 경계했던 것처럼, 언어화된 사고에 실린 느낌의 미세한 차이만으로도 원래의 주인이 아님을 알아차릴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계획대로 조립식 아기들의 전의식(前意識)을 일깨워, 그 모든 정신들이 빚어내는 혼돈 가득한 울림들을 봉쇄수도원 속으로 부어넣었다.
「응애애애애애애애!」
뚜렷한 자아를 형성할 기회조차 없었던 아기들의 연결망으로부터 기인한 정신오염의 해일이, 의도적으로 자아의 경계를 지운 광신도들의 정신세계를 집어삼켰다.
「이게 무슨」 「응애」 「주여」 「으아아아앙」 「응애응애」 「당신의 종들을」 「응애」 「응애」 「응애」 「구원하소서」 「응애」 「응애」 「구원」 「응애」 「구원」 「응애」 「흐우우우」 「므아아아」 「응애」 「응애」 …….
이 거대한 홍수와도 같은 범람을 관조하며, 나는 스승새끼의 기억으로부터 성경 시편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