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혼돈과 공황 (5)
나는 이어지는 보고들을 적당한 선에서 끊고 원탁의 전향자들을 심문했다. 고래 먹이를 실은 원양어선들이 도착하기 전에 기본적인 심문을 진행해놔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향자들은 모두 격리수용되어 있었다. 이는 방역을 위한 격리인 동시에 원활한 심문을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서로 말을 맞출 기회를 주었다간 교차검증을 하기가 곤란해진다.
심문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기사들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섀빙턴과 콜리어가 가려 뽑았을 인재들이 아둔할 리가 있나. 그저 광신으로 머리가 꽉 막혀있을 뿐. 이들에겐 새로운 주인인 내가 무엇을 원할지 숙고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으므로, 내가 질문을 할 때마다 막힘없는 대답들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나는 몹시 당혹스러운 진술을 듣게 되었다.
“정수의 사고기능을 부분적으로 복원해냈다고?”
여기서 말하는 정수란 당연히 황금기의 정수를 뜻하는 것이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나를 마주한 3등위 기사장교 투항자는 한층 더 깊게 머리를 조아리며 긍정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나는 잠시나마 포커페이스가 무너질 뻔했다.
“어떻게? 뇌로서의 정수는 결손이 많을 텐데?”
지식의 보고이자 기억의 도서관으로서의 정수는 형언하지 못할 가치를 지닌 성유물이다. 그러나 인간의 뇌로서는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뇌의 구조는 복잡했으며, 과학으로도, 마법으로도 복구가 불가능한 영구적인 결손들이 너무 많았다.
기사장교가 다시금 긍정했다.
“주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래서 원탁내각의 거짓된 선지자들은 결손이 존재하는 부분들을 다른 인간들의 영혼과 의식으로 채우거나 보완하는 연구를 진행해왔고, 최근 들어 그 연구가 결실을 맺은 것으로 압니다.”
“…….”
3대 성유물의 기원, 「대홍수를 목격한 인간」의 의식을 되살려보자는 건 크로우허스트가 원탁에 몸담고 있었던 시절에도 몇 번 나왔던 이야기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실제 계획으로 넘어가는 일은 없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이미 곱씹었듯 정수의 상태가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대홍수를 목격한 인간의 의식이 자기를 깨운 자들을 적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던 까닭이다. 하물며 그게 불완전한 의식일 경우 위험성이 더더욱 높아진다.
후자의 위험성은 원탁의 대마법사들이 도저히 감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궁지에 몰리니 눈에 뵈는 게 없어졌나?’
나는 기사장교에게 원탁이 이 위험성에 대처할 방법을 마련했는지를 물었다. 기사는 공순한 태도로 원탁이 도달한 답을 입에 올렸다.
“마스터 콜리어는 의식의 희석이야말로 정수 부분 가동의 열쇠라고 말씀…… 아니, 말한 바 있습니다.”
“의식의 희석?”
“예. 통제 불능이나 광기가 발생하는 부분들을 그와 연결된 다수의 의식에 희석시켜 무력화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마도서 봉쇄수도원에 들어가 있는 수도기사들처럼 더없이 순수한 충성과 숭배, 그리고 복종의 마음으로 가득한 의식들을 연결하고, 그 의식들의 주인이 되는 대마법사 3인이 함께 접속하여 지배력을 발휘하면 폭주 위험이 거의 없으리라 했습니다.”
요컨대 황금기의 정수를 외장형 술식 연산장치로 써먹겠다는 발상이었다. 이제까지처럼 정수 안에 있는 마법의 진리들을 열람하고 분석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게 아니라, 굳이 원리를 이해하지 않아도 사용 가능한 도구로 만들겠다는 의미.
만약 그 의도를 완벽하게,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구현해내는 데 성공한다면, 정수 안에 잠들어있는 모든 마법들이 정수를 제어하는 대마법사들의 소망에 따라 자동적으로 발현될 것이다.
물론 그 경우에도 한계는 있다. 정수 안에 구체적으로 어떤 작용의 마법들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저 사용자의 소망에 따라 정수가 알아서 결과를 출력해주기를 바라는 꼴이니까. 그래서는 나오는 결과의 효율성과 합목적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의 스승새끼가 무서워하며 읽었던 영국 소설 「원숭이 손(Monkey’s paw)」의 내용처럼, 소망을 어떻게든 이루어주기는 하되 그 결과가 사용자의 뜻과 반드시 일치하리라는 법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배력을 세 사람이 협력하여 행사해야 한다는 점도 문제다.
정수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으나, 그 셋의 의지가 그때그때 얼마나 정확하게 일치할 수 있을까. 황금기의 정수가 아니라 손가락 하나를 셋이 공유해도 온갖 말썽과 불협화음이 빚어질 판국에.
그래도 위협적인 것은 사실이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콜리어를 더 빨리 사냥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까지 들은 진술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 가정하면, 이 대범한 계획은 감각과 의식(意識)을 다루는 마법의 거장 콜리어의 기여 없이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콜리어가 자신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대마법사라고 외쳐댔던 게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런던에 그런 게 있으니 공중전투함을 둘 다 런던 밖으로 내보낼 생각을 했겠지 싶기도 했다. 그 말은 곧 황금기의 정수가 외장형 술식 연산장치로서 어느 정도 유의미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기사는 정수의 제어를 맡은 세 대마법사가 셀번, 알드윈, 아이비어(Iveagh)라고 털어놓았다.
나는 심문을 이어갔다.
“다른 건 없나? 메드크럭스와 팔머는 뭘 하고 있지?”
지금까지 죽은 원탁의 대마법사는 모두 일곱이다.
그레이스에게 자기를 새로 낳아달라고 꼴값을 떨다가 죽은 진리의 서기(書記) 엘름스테드. 크로우허스트에게 살해당한 왼쪽 눈의 사서 본브릿지. 내 정신세계에서 병신 같이 말라죽은 스승새끼. 홍콩 앞바다에서 으깨어 죽인 소생의 대가 웨스트버튼. 탄자니아에서 전사한 원탁의 수호자 로더필드. 그리고 간밤에 차례로 죽인 섀빙턴과 콜리어에 이르기까지.
죽여야 할 대마법사는 이제 다섯이 남았다.
다섯 중 셋이 정수의 무기화에 매진하고 있다면, 남은 둘에게도 무언가 힘써 추진하는 프로젝트가 있으리라 의심하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지금의 원탁은 대마법사의 능력을 무의미하게 놀려도 좋을 만큼 여유로운 처지가 아니잖은가.
기사장교는 또다시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마스터 팔머는 원탁의 행정과 실무를 총괄하고 있고, 마스터 메드크럭스는 이미 작년 말부터 우주로 나가있었습니다.”
“우주에? 왜?”
“마소의 축복이 언제 다시 거두어질지 모르는 만큼, 대마법사들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은 대기권 바깥에서 항시 마소의 흐름을 정밀하게 관측하고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 역할을 자임한 것이 바로 마스터 메드크럭스였지요.”
생각해보면, 어느 날 갑자기 마소가 사라지고 마법의 암흑기가 다시 도래할지 모른다는 걱정은 나보다 원탁의 대마법사들이 훨씬 더 무겁게 했을 것이었다. 그저 어떠한 위협도 없는 평온한 삶을 바랄 뿐인 나와 달리, 그들에겐 승천을 통해 우주적 존재로 거듭나고 싶다는 욕망이 있으니까. 걱정보다는 차라리 공포에 더 가까운 감정을 느꼈겠지.
그 욕망은 또한 종교적인 사명감이기도 하다. 진정한 인류의 부활을 이루지 못하면 현생인류에겐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원탁이 그간 줄곧 잔혹하게 사다리를 걷어차 온 것은, 원탁의 대마법사들 입장에선 한정된 자원의 소모를 통제하여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한 절박한 정의의 실천이었다.
따라서 메드크럭스의 위성궤도 체류 자체는 충분히 이해 가능한 범위였다.
“대충 이해는 간다만,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에서도 그러한 관측을 계속하고 있다는 건가?”
“그러합니다. 가문 기사단들 사이에서 돌았던 이야기에 따르면 원탁내각에서 마스터 메드크럭스의 관측임무 해제에 관한 논의가 잠시 오갔던 적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지만 원격으로 회의에 참석한 메드크럭스 본인의 발의에 따라, 기존의 관측임무에 우주전 대비 임무를 더하는 쪽으로 노선이 정해졌다고 하더군요. 원탁의 적들이 세력을 더 키우고 나면 우주로부터 런던을 공격해올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고 들었습니다.”
우주전쟁이라 하면 다소 막연한 미래의 일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으나, 일정한 수준의 추력을 아주 긴 시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각성능력자들의 등장은 그 미래를 현실의 코앞까지 앞당겨놓은 상태였다.
일반적인 오해와는 달리, 어떤 비행체가 우주로 나가기 위해 반드시 지구 중력의 탈출 속도(Escape velocity)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 중력의 탈출 속도는 추가적인 추력이 붙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지구에서 벗어나기 위한 속도이기 때문이다.
실상은, 중력가속도보다 빠른 상승가속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어떤 비행체라도 결국 지구의 대기권을 벗어나게 된다. 다만 중력을 상쇄하고 남는 추력이 낮으면 낮을수록 시간이 오래 걸릴 따름.
물론 우주 진출을 위해선 추력 이외에도 많은 기술적 요소들이 갖춰져야 하는 만큼, 당장의 지구 위성궤도는 아직 큰 변화 없이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존의 우주패권을 쥐고 있는 강대국들이 담합을 통해 국제적인 감시와 규제를 강화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시시각각 거대한 변혁의 물결이 다가오고 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전 세계의 전문가들은 늦어도 수 년 이내로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우주시대가 막을 올리리라 예견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모든 우주개발 프로젝트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도출한 결론이었다.
따라서 원탁의 대마법사들이 일찌감치 우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기로 결의한 걸 기우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결과적으론 현명한 선택이 되었다고 해야겠지.
나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런던에 궤도폭격이나 가해볼까 했더니.’
아비터와 트라운서를 융합시킨 공중전투함은 우주방사선을 막아줄 외장(外裝)과 우주활동에 필요한 내장(內裝)을 갖추기만 하면 본격적인 우주항행이 가능한 물건이다.
이런 전투함에 고출력 레이저 포대와 텅스텐 발사체 투사장비들을 달아 위성궤도로 올리면, 그때는 웬만한 나라 하나를 지워버리고도 남을 규모의 궤도폭격이 가능해진다.
순수한 질량과 운동에너지를 이용한 궤도폭격은 대륙간탄도탄에 비해 대기권 재돌입 발사체 제작의 기술적 난이도가 낮은 편이다. 원하는 지점에 착탄시키기 위한 궤도계산과 자세제어가 까다로워서 그렇지, 핵심 발사체 자체는 그냥 크고 굵은 텅스텐 막대에 불과한 까닭이다.
대중적으로는 「신의 지팡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미 공군의 궤도폭격 연구 프로젝트 「초고속 막대 묶음(Hypervelocity rod bundles)」은 길이 6.1미터에 지름 30센티미터짜리 텅스텐 실린더를 사용하는 것을 가정했었다.
실린더 하나의 무게는 대략 8.2톤 언저리.
내가 한 덩어리로 뭉쳐 재탄생시킨 생체전투함은 그 정도 사이즈의 실린더를 세 자릿수로 운반할 수 있는 체급이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다시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비하겠다는 내용은 들은 게 있나?”
“마스터 메드크럭스가 체류하는 플랫폼 「알파 크루시스 아크(Alpha Crucis Ark)」로 하여금 「신벌(Divine retribution)」이라는 이름의 보조위성들을 통제하게 한다고 했는데…… 송구한 말씀이오나 알파 크루시스 아크나 신벌의 구체적인 사양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습니다.”
“아니. 이 정도만 해도 꽤 도움이 되었다.”
위성궤도의 메드크럭스가 조기경보를 해주고, 지상의 대마법사들이 그 경보를 받아 외장형 술식 연산장치로서의 황금기의 정수를 가동하는 식이면, 궤도폭격만으로 원탁을 파괴하기란 지난한 일이 될 것이었다.
베일에 싸여있는 메드크럭스의 교전능력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방금 얻은 정보들을 곰곰이 되새김질해보던 중, 나는 기사장교의 이야기에 상식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음을 깨달았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구나.”
“하문하시오소서, 주여.”
“메드크럭스가 우주로 나간 게 작년 말이라 했지. 하지만 나는 영국이 새로운 우주정거장을 구축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건 아무리 은폐하려고 해도 은폐가 될 일이 아닌데, 어찌된 것이냐?”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장기 거주가 가능한 규모의 우주정거장은 숨기고 싶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다. 우선 세계 각지의 천문대와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중국과 러시아가 우주비행체의 정체를 밝히라고 지랄을 할 것이며, 제3세계 국가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이므로.
한때 첩보위성의 대명사 격이었던 라크로스만 하더라도, 밝기 2.1의 별과 같은 반사광으로 인해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이 즐겨 관측하는 우주비행체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메드크럭스가 진작부터 우주로 나가있었다고 하니 이상할 수밖에.
내 물음을 의심 어린 추궁으로 받아들였는지, 기사장교는 긴장의 색채로 스스로를 물들이며 머리를 낮추었다.
“다시 한 번 송구한 말씀을 드립니다. 저 역시 거기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저는 그저 제가 들은 것들을 있는 그대로 전해드렸을 뿐입니다.”
“……흐음.”
황금기의 눈과 분해능이 높은 후각은 기사가 지금 진실을-적어도 자기 자신은 진실이라고 믿는 내용을-고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나는 풀리지 않는 의문에 시선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