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혼돈과 공황 (3)
보고는 자연스럽게 사회와 경제의 영역으로 이어졌다.
비록 장기간 이어진 해상봉쇄와 영국의 경제적 비상(飛上)으로 인해 두 단계 아래로 밀려나긴 했어도, 일본은 아직까지 인도를 능가하는 세계 5위의 경제대국으로 남아있었다.
그러한 일본이 맞이한 재난은 결코 일본 한 나라만의 문제일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영국의 경제도 동시에 무너질 위기였다.
거대한 연쇄작용의 시발점은 공중전투함의 생체 비행모듈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기업, 옥타 테크의 기록적인 주가 폭락이었다. 원탁과 영국정부가 합작으로 세운 이 위장기업은 불과 반나절 사이에 시가총액의 절반 이상이 증발해버렸다.
옥타 테크가 유발한 쇼크는 이 순간에도 관련 섹터 전반으로 쓰나미처럼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이 섬나라 위장기업이 전 세계 불사암 가공 산업의 선구자이자 상징으로 통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세계 증시의 불사암 가공 산업 섹터엔 그간 실로 천문학적인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어왔다.
옥타 테크가 불사암 비행 모듈을 처음 공개했던 날을 기점으로 싹트기 시작한 투자자들의 광기는, 도쿄 앞바다의 하늘에 룰러 급 공중우세 초계함이 출현한 순간부터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부풀어 올랐다.
그 광기의 총본산이라 할 만한 곳이 바로 런던 증권거래소였다.
「전 세계의 모든 주요 기관들 및 애널리스트들이 한목소리로 쌍끌이 공황과 불사암 버블 붕괴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화상으로 연결된 김재환이가 가슴을 펴고 보고했다.
「FTSE 지수가 하루 만에 18.96퍼센트나 빠졌습니다. 공중전투함들의 폭주 소식이 전해진 때가 장 후반이었던지라 서킷 브레이커는 한 번밖에 발동하지 않았지요. 처음 거래정지가 풀리고 나서부터 불과 1시간 9분 동안 12퍼센트가 더 빠지는데, 이야, 세상에. 대응할 거 미리 다 해놓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막 저려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시간 대비로만 따지면 닷컴버블 때도 이 정도의 급락은 못 봤습니다.」
국가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서킷 브레이커는 폐장이 가까운 시간엔 발동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기로, 영국은 미국과 동일하게 폐장 전 35분 이후로는 발동하지 않는 게 규정이었을 것이다.
다만 전체 지수 하락폭이 20퍼센트를 찍었다면, 남은 시간과 무관하게 당일의 모든 거래가 중단되었을 것이다.
「미국시장도 난리였지만 영국보다는 덜했습니다. 나스닥 지수가 7.27퍼센트 떨어지고 끝났으니 선방했다고 봐야지요. 한국은 지금 당장은 지수하락보다 내선일체 개미들이 투신할 한강물 온도를 더 걱정해야 할 판이고…… 그 개미들의 지옥인 일본은 뭐…… 여기는 어떻게 필설로 형언하는 게 무의미한 레벨이고요.」
내선일체 개미는 빚을 지면서까지 일본 시장에 무모한 투자를 감행하는 개인 투자자들을 비꼬듯이 부르는 명칭이라고 들었다.
자료화면에 뜬 일본 시장의 투자주체별 매매 동향 및 자금의 출처 등은 일반적으로 공개되는 것보다 훨씬 더 상세한 것이었다. 여기엔 한국의 개인투자자들이 운용하는 자금의 흐름도 분리되어 표시되었다. 이를 본 경태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음, 역시. 기대를 배신하지 않아. 개미들은 오늘도 주식을 고점에 사서 저점에 팔고 있구나…….”
김재환이는 내가 단독행동을 결심한 시점에서 수연의 경고를 전달받았다고 했다.
「만에 하나라도 영국놈들의 의심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려다 보니 포지션을 바꾸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만, 남들이 다 피눈물을 흘릴 때 조금이라도 벌었으니 다행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조금은 한화로 5천억이 넘는 돈이었다. 자기 성과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아이 같은 겸손. 나는 단맛이 진한 홍차를 한 모금 삼키고서 물었다.
“그게 조금이라고 할 만한 액수냐?”
「회장님께서 벌어 오시는 돈에 비하면 이 정도는 조금이 맞지요!」
내가 그레이스와의 거래를 통해 원자재 무역 중개수수료를 받아내기 시작한 이후, 김재환이는 곧잘 이렇게 투정 같은 비교를 하곤 했다. 경태는 이를 두고 ‘현타가 왔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요즘 젊은 세대가 쓰는 유행어라고 첨언하면서.
“……내 말은, 의심을 받지 않을 만큼 적은 금액이 맞느냐는 뜻이었다.”
「물론입니다. 일본 증시야 원래 홀짝에 미친 도박판이었고, 불사암 응용산업 섹터의 대장주들도 일찌감치 버블을 걱정하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었으니까요. 특히 옥타 테크는 PER(주가수익비율)이 6천을 넘어갈 때부터 공매도 잔고 비중이 꾸준히 늘고 있었습니다. 저보다 많은 수익을 올린 세력이 한둘이 아닐 텐데요, 뭐. 아마 한동안은 “내가 터진다고 했제?! 했제?!”를 외치는 스타들이 쏟아져 나올 겁니다.」
“그렇다면 됐다. 훌륭한 일 처리였다.”
「으흫.」
칭찬을 받은 김재환이가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화면 너머로 간밤의 혼돈을 지켜본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 도쿄를 휩쓸고 지나간 재난은 끔찍하고 무서울지언정 당장 자신에게 닥친 일로 느껴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폭락 릴레이를 이어가는 각국의 주식시장은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피부에 직접 와닿는 현실적인 공포를 선사했을 터. 나는 이러한 공포가 세계 각지에서 영국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키우고 집단행동을 강화하는 힘으로 작용하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다른 부하가 차례를 넘겨받아 이어가는 보고는 여러 나라들의 시위현장 중계화면을 시각자료로 보여주었다. 시위가 벌어지는 도시가 워낙에 많아 그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수모를 겪지 않는 영국 대사관이 하나라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모든 시위대들이 영국에 던지는 질문은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었다.
「너희는 대체 무엇을 만들어낸 것인가?」라고.
비단 시위대만이 아니라, 각국 정부들 역시 자국의 외교적 채널들을 총동원하여 대동소이한 질문들을 쏟아내고 있을 것이었다.
“영국 정부에서 뭔가 입장을 내놓은 게 있나?”
내 물음에, 브리핑을 진행하던 부하가 끄덕였다.
“예.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입니다. 「영국 정부는 어디까지나 옥타 테크 사(社)로부터 불사암 가공 비행 패널을 납품받아 사용했을 뿐이며, 도쿄 상공에서 발생한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아는 바가 없다.」 라더군요. 총리가 직접 발표한 내용입니다. 딱 이 말만 하고서 질문도 받지 않고 서둘러 연단을 내려가 버렸지요. 굉장히 황망한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들의 반응은?”
“우호적인 반응은커녕 중립적인 반응조차 거의 없습니다. 일본은 즉각적인 비난 성명을 발표한 후 유엔 안보리 긴급소집을 요청했으며, 현재까지 영국을 제외한 상임이사국 전체와 비상임이사국 3개국이 해당 요청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 상태입니다.”
“3개국?”
“예. 아일랜드가 가장 먼저 지지 의사를 표명했고, 노르웨이와 인도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하필 아일랜드가 지금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건 영국의 작은 불행이라 할 만했다. 영국이 달리 쌓은 업보가 많긴 하지만, 아일랜드만큼 영국에 대한 감정이 나쁜 나라도 드물 테니까.
일단 안전보장이사회 공개회의 소집 자체는 상임과 비상임을 통틀어 전체 이사국 중 단 1개국만이라도 요청을 하면 이루어진다.
그러나 영국을 규탄하기 위한 안보리 회의를 소집하더라도,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영국의 거부권을 무력화하려면 특별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오랜만에 평화를 위한 단결이 성립하는 꼴을 보겠군.’
유엔 총회 결의 제377호, 이른바 「평화를 위한 단결(Uniting for Peace resolution)」은 한국전쟁 당시 소련의 거부권을 무력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적 장치다. 이게 아니었다면 유엔 평화유지군의 참전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평화를 위한 단결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상임이사국 5개국 중 4개국과 비상임이사국 과반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안보리를 통과한 안건은 유엔 총회에 상정되며, 여기서 다시 전체 회원국의 3분의 2가 찬성표를 던져야 비로소 결의안이 탄생한다.
영국을 규탄하는 결의안은, 규탄 자체보다는 영국의 배를 갈라 불사암 정형화 가공 핵심기술을 긁어내는 게 최우선 목표가 될 것이다. 필시 참사 재발 방지 및 세계평화 증진을 위한 국제사회 공동의 감찰이라는 명분으로 포장하겠지.
일단 결의안이 통과되면 일본은 최대의 피해국으로서 최대의 지분을 주장할 수 있다. 주장을 하는 것과 인정을 받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긴 하지만, 어쨌든 상임이사국들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을 상대로 협상을 걸어볼 밑천이 생기는 셈이다.
나로서도 결의안은 통과되는 쪽이 유익했다. 국제사회가 합심하여 영국을 털어먹으면 런던의 방비도 그만큼 약화될 테니까.
견디다 못한 영국과 원탁이 폭주라도 해준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나는 문득 떠오른 가능성을 입에 담았다.
“혹시 영국이 러시아를 회유하진 않을까?”
러시아는 카자흐스탄을 침공한 이래 끝없는 군사적 소모와 외교적 고립의 늪에 빠져있었다.
러시아가 고전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물론 각성체 전마를 대량으로 운용하는 카자흐스탄 기병대의 기동력과 전투력이다.
그러나 러시아 자신에게도 문제가 너무 많았다. 현장 지휘관들의 재량을 인정하지 않는 낡고 경직된 교리, 군사적으로 무능한 모스크바의 지휘 간섭, 극심한 부패로 말미암아 제대로 돌아가는 구석이 없는 장비 관리 및 군수보급 체계,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부적응, 명분의 부재와 처음부터 바닥이었던 장병들의 사기, 잦은 전쟁범죄로 인한 현지 민심의 이반 등등.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재래식 군사력이 사실상 고갈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나 역시 그러한 견해에 동의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썩었을 줄이야.’
설상가상으로 최근엔 몽골 기병대까지 카자흐스탄 시민군에 의용병으로 가세하는 중이었다. 위구르 자치구 북부에 분포하는 카자흐 족이 위구르 반군과 손을 잡고 카자흐-러시아-중국-몽골의 접경지대인 아러타이 지구(阿勒泰地区) 북쪽을 장악했는데, 이곳의 험준한 산악지대(알타이 산맥)를 통해 몽골 기병들이 대대적으로 넘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뜬금없는 몽골 의용병들의 참전은, 이 기회에 중국과 러시아의 틈바구니에 갇힌 신세를 벗어나 보려는 몽골 정부의 의지일 가능성이 높았다.
몽골 정부는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반군의 소행일 뿐이라고 해명하고 있었으나, 누구도 그 해명을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소위 「나이람달(Найрамдал) 반군」이라 불리는 비정규 무장집단과 몽골 정규군 사이에서 이렇다 할 교전이 벌어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이람달 반군의 본거지는, 비록 국경 근처라고는 해도 몽골 영토 안쪽에 있다. 몽골이 반군 진압에 적극적이었다면 그 유명한 기마엽사군단 「망구드 오르다(Мангуд орда)」부터 출격시키고 보았을 것이다.
여하간, 여러모로 위기를 겪고 있는 러시아라면 거부권을 팔아달라는 영국의 구애에 넘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수연이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으나 지극히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이 제공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까요.”
수연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미 의결된 유럽연합과 국제연합의 대 러시아 제재들은 영국과 러시아가 손을 잡는다고 해서 풀어질 것들이 아니며, 영국 자신부터가 새로운 제재대상에 오를 판이니 러시아에게 우회 수출입 경로를 제공할 처지도 못 됩니다. 기껏해야 자국이 제재를 받기 전까지 일시적인 편의를 봐주는 정도가 고작이겠지요.”
“그건 그렇지.”
“그리고 러시아는 반드시 불사암 정형화 가공 원천기술을 입수하고 싶어 할 겁니다. 러시아 입장에선 영국의 반대편에 서기만 하면 무조건 일정한 지분이 굴러들어 오리라 믿을 테니, 영국이 러시아를 회유하려면 그보다 더 높은 비율의 기술이전을 약속해야 합니다. 그런데-”
수연이 나를 바라보며 역으로 물었다.
“러시아가 만족할 만큼의 기술이전이 가능하기나 하겠습니까?”
“아니.”
영국이 꾸며낸 수준의 불사암 정형화 가공 기술은 절대로 실현이 불가능한 공상이다. 이건 대마법사로서 분명하게 단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