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폐막(閉幕) (2)
얕게 뜬 고래의 몸통 위에서 낮은 파도가 철썩인다.
피 흘리는 고래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 발작적으로 함포사격을 가하던 자위대 호위함들은, 명중탄이 여러 발 나왔는데도 고래가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정찰용 제트 바이크와 드론 바이크들을 접근시켰다. 혹시 죽은 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각성능력자들의 감각으로 생사를 판별하기 위함이었다.
키요우타마히코가 투사하는 존재감은 바다에서 한창 추격전을 벌일 때나 도시를 공격할 때에 비해 크게 줄어들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마력장의 자유로운 수발(收發/펼치고 거둠)이 가능한 자연각성체는 아직 보고된 사례가 없다.
점점이 날아온 항공정찰 세력은 전보다 훨씬 더 근접한 거리에서 고래의 마력장에 접촉했다. 비행 바이크들이 마력장의 경계면을 따라 방향을 꺾는 모습들이 보였다. 객관적으로는 여전히 거대한 마력장이긴 하나, 어쨌든 기존에 보고된 반경에 비하면 절반 이하에 불과하다.
이는 피라냐 무리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피잉! 피잉!」
자위대 호위함들이 크고 날카로운 능동 탐색 음파(액티브 소나)를 쏘아댔다. 평범한 고래라면 청각장애를 일으킬 수준의 소음 공격이었다. 낮은 음계로 「후우우웅-」 하고 울리는 저주파 핑(Ping)도 함께 쏘아졌다.
이어 어뢰 형태의 유선조종 정찰 드론이 발사되어 고래를 향해 나아갔다.
「피잉- 핑- 핑- 핑-핑-핑-」
도플러 효과로 시시각각 간격이 줄고 음계가 높아지는 드론의 소나는 어뢰의 그것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고래가 만약 죽은 척을 하고 있는 거라면 당장 도망치거나 무언가 방어를 취해야 정상인 죽음의 신호다. 핵이 아닌 평범한 어뢰라 할지라도, 무방비로 직격당했다간 극초음속 작살에 관통당하는 것 이상의 피해를 입을 테니까.
그러나 고래는 드론이 지척까지 접근하는데도 조용히 떠서 물결에 흔들릴 따름이었다.
붉게 물든 물결은 처음보다 빠르게 넓이를 더해갔다. 원래 있던 관통상에 포탄 피격이 더해진 탓이었다. 물 위로 뜬 몸통의 면적이 작고 포탄의 입사각이 나빴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고래는 함포사격을 맞았을 때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정찰 드론이 고래의 몸통 아래를 가로질러 지나갔다.
이 정도면 신중은 기할 만큼 기한 것이다.
해상자위대와 미 해군 함대는 재빨리 다수의 함선들을 접근시켰다.
악명으로만 따지면 전율하는 거인보다도 윗줄로 쳐주는 각성체 혹등고래의 부산물엔 어마어마한 금전적 가치가 있다. 그 가치에 비하면 2억 3천만 달러의 현상금 따윈 푼돈으로 치부해도 좋을 정도로. 핵폭발에 휩쓸려 증발해버렸다면 모를까, 확보 가능한 상황에선 최대한 확보하는 게 맞았다.
물론 확보한다 한들 식용으로는 팔아치울 수 없다. 중국의 부호들이 아무리 몸보신과 영약에 환장을 하더라도, 핵무기가 무더기로 사용된 바다로부터 날아오른 후 독성 화학물질을 뒤집어쓰기까지 한 고래의 부산물을 좋다고 먹을 만큼 미쳐있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전 세계의 모든 연구기관들이 앞다퉈 경매에 입찰할 테고, 명성 높은 주술사들 사이에서도 치열한 입찰 경쟁이 벌어질 것이다.
‘단순히 돈만 걸려있는 문제가 아니지.’
영험함으로 명성을 높인 제3세계의 주술사들은 국가수반에게 주술적인 조언이나 제의(祭儀) 따위를 제공하며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두고 한국의 어느 언론은 「비선실세들의 전성기」라는 시니컬한 촌평을 내놓기도 했다.
일본은 고래의 부산물로 이 비선실세 주술사들을 유혹할 수 있었다. 주술사들은 자기 돈을 쓰기보다는 피부에 잘 와닿지도 않는 국가 이권이나 외교적 대가들을 내놓으라는 유혹에 쉬이 넘어올 터.
지도자가 맛이 간 제3세계 국가들의 고혈을 쥐어짜 자국 경제의 숨통을 트는 것이야말로, 일본정부가 고래의 유해를 가장 가치 있게 활용하는 전략이 될 것이다.
연합임무부대가 사실상 해체되어버린 지금, 일본은 영국의 몫을 미국과 갈라먹음으로서 이 전략으로 취하는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었다.
‘아슬아슬하겠는데…….’
고래의 생명은 당장이라도 꺼질 듯이 위태로웠다. 다른 무엇보다 과다출혈과 점점 더 깊게 번져나가는 화학적 중독이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기다렸다. 피라냐들이 더 많이, 더 가까이 달라붙어야 핵공격의 위협이 사라지는 까닭이었다.
해상자위대와 보조를 맞추고 있는 미 해군 함대는 아직도 많은 수의 핵무기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내가 도쿄 광역권의 하늘에 떠있을 때야 핵을 맞을 걱정이 없었지만, 바다로 들어온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나는 마력장을 억제한 상태로 해저협곡 상단의 경사면을 따라 이동, 고래가 내 정수리 위의 수직선상에 위치하도록 했다. 때가 되면 고래를 끌어당겨 협곡의 바닥까지 내려갈 작정이었다. 거기서부터 다시 해저 섭입대(攝入帶) 방향으로 빠져나가 수심 2천 미터 아래로 잠항해버리면 수상함대가 뭘 어쩔 건가.
핵어뢰는 최대 잠항심도가 8백 미터밖에 되지 않고, 보다 깊은 수심까지 내려오는 특수제작 핵폭뢰는 하강속도가 어뢰보다 많이 느려서 간단하게 회피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고래를 몰아댈 때와 달리, 나 같은 눈깔병신을 상대로는 화망을 구축하기도 불가능하다.
「꾸궁! 꿍!」
해수면으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폭음이 울려왔다. 해상자위대와 미 해군이 날파리들을 상대로 경고성 포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자위대와 미군이 합동으로 구축한 봉쇄선 주변에선, 물경 수백은 되어 보이는 다국적 초능력 용팔이들의 무리가 초저공비행으로 원을 그리며 맴도는 중이었다. 돈 냄새를 맡고 사고현장에 몰려든 사설견인차량들을 꼭 닮아있는 모양새였다.
이 용팔이들이 노리는 건 당연히 고래의 부산물이었다. 고래의 피가 섞인 바닷물만 좀 담아가도 주술사들에게 제법 쏠쏠한 값을 받아낼 수 있을 테니까.
용팔이들 중엔 그보다 더 큰 욕심을 부리는 놈들도 많았다. 기체에 시료 채취용 작살포를 달고 온 놈들은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왔다고 봐야 했다. 고래사냥엔 거의 기여하지 않으면서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을 놈들이었다.
특히 중국 국적의 헌터들이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했다. 기체에 커다랗게 국적 표시를 넣거나 아예 깃발을 따로 달거나 하여 자신들이 중국인임을 강조하는 헌터들은, 다른 국적의 하이에나들보다 훨씬 더 대담한-그리고 뻔뻔한-시도들을 거듭했다.
대놓고 고래사냥을 방해하던 환경 미치광이들조차 처음엔 외국 국적의 민간인 각성능력자들이라는 이유로 직접적인 공격을 삼가야만 했던 자위대와 미군이다.
하물며 고래가 무력화되어 가장 위험한 고비를 넘긴 지금, 중국 국적의 엽사들을 함부로 격추시키기엔 외교적인 부담이 너무 크다. 비행 바이크를 몰 수 있는 이중각성능력자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전략자원 취급을 받는다.
이런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급기야는 침투에 성공하더니 고래 위로 착륙을 감행하는 정신 나간 인간마저 등장했다. 제트 바이크의 배기구에서 나오는 열로 인해 고래의 살이 조금 익어버리기까지 했다.
자기 기체에서 내린 이 미친 짱깨는, 파도가 얕게 들어오는 고래의 등을 단단히 밟고 서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작은 오성홍기를 꺼내어 여 보란 듯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마치 주인 없는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잘들 노는군.’
이딴 짓이 중국 정부의 의지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중국은 일본의 외교적 대영전선 구축에 힘을 실어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을 터이므로.
어쩌면 일본정부가 이미 일정 지분을 약속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그러나 경위가 어찌되었든, 자국의 이능엽사가 외국군의 공격을 당하면 중국이 대응을 하지 않을 순 없다.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중국 공산당의 핵심 지지층이 폭주할 게 뻔하니까. 일당독재의 편의를 위해 인민들의 민도를 낮추고 과도한 국가주의를 조장해놓은 가짜 빨갱이들의 업보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 해군 함대와 해상자위대 사이에 호흡의 불일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 해군이 자국의 이익 수호를 위해 보다 적극적인 구축(驅逐) 행위를 개시한 반면, 해상자위대는 중국과 외교적으로 껄끄러워질 수 있는 행동들을 미 해군에게 떠넘긴 채 음습한 기동을 통해 미군이 단독으로 고래를 확보하는 걸 막으려는 모양새였다.
실효 점유가 점유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건 비단 영토만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영국의 지분을 갈라먹자는 합의를 효력 있는 외교문서로 작성하기엔 시간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을 것이다.
명문화되지 않은 국가 간의 합의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뀌거나 깨어질 수 있다. 게다가 지금의 미국 대통령은 외교무대에서 우방국에 대한 배려 따윈 내다버리고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키기로 악명 높은 미치광이다.
미국과 일본의 급조된 합동지휘체계가 파열음을 낼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쿠궁! 끼기기기기!」
항적의 밀도가 실시간으로 폭증하던 바다에서 기어이 충돌사고가 발생했다. 군함은 아니고, 미일 양국과 하청계약을 맺은 수렵기업 소유의 배들이 서로 양보를 하지 않으려다 회피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었다.
한쪽은 함수가, 한쪽은 현측 흘수선이 뭉개진 두 배가 서서히 파도에 삼켜진다. 그렇잖아도 혼란스럽던 수면 위는 이 사고로 말미암아 한층 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양쪽 진영 모두 인명구조를 핑계로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속내들이 이렇다 보니 실제 구조는 뒷전이어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던 익수자가 익사자로 전락하기도 했다.
고래가 아직 죽지 않았는데 이러고들 있는 건, 양측의 이성이 욕망에 잡아먹히고 있다는 증거다.
기다리는 건 이 정도면 됐다.
저들은 이제 절대로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한다.
나는 고래가 사용하던 원시마법을 모사하여, 해수면으로부터 해저협곡으로 하강하는 강력한 수류(水流)의 가압가속 터널을 생성했다.
「후르르르르르-」
흐름의 세기에 비하면 기이할 정도로 작은 울림과 함께, 둥둥 떠있던 고래와 그 주변의 부유물들이 쑤욱 빨려 내려왔다.
그간의 표류로 조금 달라진 고래의 위치는 딱히 말썽이 되지 않았다. 고래의 등을 밟고 서있던 중국 엽사는 덤으로 끌려 들어왔다. 하강하는 속도는 어지간한 군용 잠수함의 급속잠항을 능가했다.
물 위에선 당장 난리가 났다.
순간적인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해관계자들이 곳곳에서 격한 반응들을 드러내는 모습들이 보인다. 서로를 견제하던 이해관계자들 모두가 지금은 한마음으로 욕설을 내뱉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내 예상대로, 대부분의 배들은 최소한의 기동조차 조심스러워해야 할 상황이었다. 핵무기는커녕 보통의 어뢰나 폭뢰조차 함부로 쓸 처지가 아니라는 뜻.
「피잉-! 핑! 피피핑!」
서로 다른 배들이 마구잡이로 능동 소나 핑을 쏘아댔다. 분해능(分解能)이 높은 고주파 핑이 소나기처럼 수중으로 쏟아져 들어왔지만, 이렇게 무더기로 쏘아대면 서로가 서로의 탐색능력을 저하시키게 되어있다. 착저한 상태인 나를 발견하기는커녕 고래조차도 선명하게 잡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이때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커다란 어뢰처럼 수중으로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수중 기동능력을 보유한 특수한 제트 바이크들이었다.
「쿠구우우우!」
수중에서 울려 퍼지는 로켓추진의 굉음들.
일반적인 제트엔진과 달리, 제트 바이크의 추진계통에선 흡기(吸氣)가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다. 제트 바이크의 흡기는 어디까지나 출력 강화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일 따름. 설계단계에서 조금만 신경을 쓰면 언제든 로켓추진으로 전환 가능한 제트엔진을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잠항능력을 보유한 다목적 제트바이크를 만드는 게 기술적으로 많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수밀성과 내압성을 향상시킬수록 제작이 까다로워지며, 수중활동에 필요한 장비들이 탑재공간을 잡아먹고 중량을 증가시킨다는 게 문제이긴 해도.
물고기를 사냥하는 가마우지 떼처럼 수중으로 내리꽂힌 공수양용 제트 바이크들은, 조심스러운 접근을 통해 고래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래의 몸통에 작살포를 조준했다.
작살을 꽂아 고래를 수면 위로 견인해내는 데 성공하면, 얼마간이라도 고래의 부산물에 대한 지분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헌터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인생을 바꿀 만한 대박이 터지는 셈이었다.
그러나 쏘아진 작살들은 하나도 명중하지 않았다. 하강하는 물살이 워낙에 강하여 작살의 진행경로가 아래로 휘어진 탓이었다.
공수양용 제트 바이크들은 보통 최대잠항심도가 깊지 않다. 고로 물속으로 들어온 기체들은 대부분 두 번째 발사기회를 얻지 못했다. 헌터들이 와이어를 감아 작살을 재장전하는 동안, 정신을 잃은 고래의 침강엔 한층 더 가속이 붙었다.
자신의 기체에 투자를 많이 한 소수의 헌터들만이 계속해서 고래를 쫓아왔다. 이들의 힘만으로는 고래를 견인하기에 역부족이었지만, 탐욕에 눈이 멀어버린 헌터들은 그에 아랑곳 않고 고래와 더불어 내게로 가까워져왔다.
이들은 고래의 마력장 때문에 생체전투함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다. 하강하는 급류가 해저면의 모래를 뭉글거리게 한 탓에 광량이 높은 탐조등 역시 생체전투함의 외피에 닿지 않았다.
잘된 일이었다.
아까 조립식 아기들에게 소고기를 먹일 때 고래에게 열량을 나눠줄 것을 염두에 두긴 했어도, 신선한 인간들이 제 발로 기어들어온다면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내려오는 헌터들을 알뜰하게 분해하면 고래의 출혈을 막을 만큼의 재료는 나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