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진노의 날 (18)
사냥감은 오래지 않아 이 관념적인 시공간의 특성을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내가 거대한 용으로 화하고도 단숨에 결판을 내지 못한 대가였다. 너무도 터무니없어 보이는 권능의 행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었다.
“크로오오오오우허어어어어스트!”
콜리어가 스승새끼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HMS 트라운서의 지배권을 겨루다가 갑작스럽게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격이니, 공포에 아주 잡아먹히지만 않는다면, 이 기이한 현상의 배후에 누가 있을지 짐작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죽지 않는다아아아! 나는 죽지 않아아아아아!”
불을 밀어내는 진동전류역장의 힘이 강해진다. 이 비틀린 시공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콜리어는, 마법사로서 바깥세상에서보다 훨씬 더 강력한 기량을 발휘하고 있었다.
「쩌정- 쩡-」
대영박물관 담장 밖의 가스등들이 줄줄이 뽑혀 나와 콜리어의 머리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끝이 날카롭고 세 개의 등이 달린 가스등은 장식이 달린 삼지창과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콜리어는 가스등을 발사체로 삼아 전자기 가속을 걸었다. 고래를 상대로 숙련도를 끌어올린 마법적 레일 건의 발사였다. 허공에 깔린 한 쌍의 도파관 채널과 그 사이에 작용하는 로렌츠 힘이 발사체를 강맹하게 사출시켰다.
불의 격류를 거슬러 관통한 가스등들이 내 몸 곳곳을 부수다시피 뚫고 들어왔다. 그러나 고통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피격 부위마다 새까만 입자들로 부서지고 흩어졌던 용의 육신은, 시간을 되돌리듯 다시 모여들어 처음의 모습을 회복했다.
꼬챙이처럼 박혔던 가스등들은 어두운 압력에 밀려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금속 재질의 지주가 박살난 포석과 부딪히며 요란한 쇠 울림을 빚어냈다.
그렇잖아도 나쁘던 콜리어의 안색이 한층 더 나빠졌다.
“괴물……!”
콜리어가 본연의 실력보다 강한 힘을 발휘해봐야, 스스로의 영혼에 변화를 줘가며 싸우는 나에 비해서는 크게 불리한 입장이다. 혐오스러운 영생의 별을 그리면서 내가 공연히 필승을 자신했던 게 아니다.
콜리어는 무슨 수를 써도 내 영혼에 본질적인 타격을 줄 수 없다. 엘(El)의 별은 애초에 그렇게 되도록 설계한 술식이니까. 술식이 제공하는 내적 완결성의 결계 속에서, 시전자의 영혼은 아무리 부서지고 흩어져도 삽시간에 피해를 회복할 수 있다.
나를 능가하는 술식 이해와 영혼을 다루는 마법의 힘으로 별 자체를 깨버리지 않는 한, 콜리어가 도달 가능한 최선의 결말은 패배에 가까운 무승부였다.
그럼에도 나는 작은 후회를 느꼈다.
‘차라리 사람의 모습으로 습격을 할 걸 그랬나?’
그랬다면 콜리어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는 게 늦어졌을 테고, 사냥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을지 모르는 노릇.
그러나 후회는 늦었기에 후회인 것이다. 지금은 지나간 선택지에 대한 미련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불의 숨결을 끊는 즉시 커다란 앞발을 들어 콜리어를 내리찍었다. 교차로 하나를 통째로 으깨버리는 공격이었다.
「쿠르르르르르릉!」
교차로 일대가 지진폭탄을 맞은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린다. 마법적 방호를 두른 콜리어는 가까스로 내 공격을 회피했다. 파편에 휩쓸려 넘어지고 구르면서도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듯한 기동으로 속도를 내어 활로를 향해 달려간다. 우스꽝스럽다 못해 비참하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대마법사에게나 가능한 초인적이고도 필사적인 도주였다.
「쿠웅! 콰르릉!」
연신 내리찍는 발과 철퇴처럼 휘두르는 꼬리가 번번이 허탕을 친다.
‘마력을 투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허깨비 같은 세상에서 내게 걸린 유일한 제약이 바로 마력을 외부로 투사하기 어렵다는 것. 내게 속한 기억이 아니고, 나로부터 발원한 세상이 아니어서 그렇다. 모든 공격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나 자신을 통해 쏟아내는 식으로만 행할 수 있다.
이런 한계라도 없었다면 스승새끼가 과거의 나를 간단하게 잡아먹었을 테지만, 막상 내가 사냥을 하는 입장이 되자 여간 짜증스러운 게 아니었다.
스승새끼의 가장 추악한 연구를 조금이라도 개선해놓았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점점 더 요령이 생기는군.’
엘의 별을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즉 나도 지금의 내게 주어진 힘을 휘두르는 데 다소의 미숙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냥감이 매순간 이 기억과 시간의 미궁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듯, 나는 내 힘을 활용하는 노하우를 익혀가고 있었다.
콜리어는 내가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종적이 끊어진 곳은 미궁의 다른 시공간으로 이어지는 경계면과 가까웠다.
「쿠콰콰쾅!」
공중에서 수천 가닥으로 갈라진 내 꼬리가 포병대대의 집속탄 사격처럼 시가지에 내리꽂혔다. 개중 두 가닥의 꼬리에서 피의 맛과 냄새가 느껴졌다. 상처 입은 영혼이 흘리는, 콜리어의 영적 본질이 녹아있는 관념적인 피의 향미다.
나는 맛과 냄새를 느낀 지점으로 나 자신을 수축시켰다. 거대한 용의 육체가 가느다란 꼬리 끝으로 모조리 몰려 들어가는 형세였다.
동시에, 나는 목적지에 이미 존재하는 내 일부를 밤송이 같은 형상으로 팽창시켰다. 검은 가시로 이루어진 구체의 폭발적인 팽창은 사냥감을 찢어버리기 위한 공격이었다.
가시들의 끝에 다시금 피 맛이 느껴진다. 그러나 파고든 깊이가 얕았다. 결정적인 순간 콜리어가 염동이든 뭐든 써서 치명상을 피한 게 분명했다. 나는 더 이상 용이 아니게 된 부정형의 육체에 눈과 귀와 입을 빚어냈다.
「너의 공포가 느껴진다, 콜리어!」
눈이 마주친 콜리어는 눈물을 흘리며 달아났다. 그 모습이 어쩐지 어릴 때의 나를 떠올리게 하여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수천 개의 가시를 부풀려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수만 줄기의 가시덩굴로 변형시킨 후, 콜리어가 달려가는 길의 모든 것들을 긁어 커다란 입 속으로 쓸어 넣었다. 혀는 없고 오로지 날카로운 이빨들만이 돋아 유동(流動)하는 기형적인 입이었다.
마차도, 자동차도, 부서진 건물의 잔해와 승객 하나 없이 멈춰있던 노면전차도, 저작운동을 하는 이빨들 사이에서 잘게 부서져 가루가 되어버린다.
숨 가쁘게 마법을 뽑아내며 달음박질친 콜리어는 가까스로 도로가 끊어지는 지점에 도달했다. 나는 두 번째와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입으로 포효했다.
「그만 단념해라! 너에게는 희망이 없다!」
피 흘리는 원탁의 대마법사는 아이처럼 울면서 기억의 경계면으로 투신했다. 경계면을 이루는 시간과 공간의 조각들 위로 파도와도 같은 파문이 일었다.
파문이 가라앉기 전에 콜리어를 쫓아 들어가자, 우기(雨期)를 맞이한 아프리카 동부의 덥고 습한 공기와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 그리고 격렬한 포격이 나를 맞이했다.
「씨이이잉-!」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함께 날아든 포탄들이 내 부정형의 몸을 두들긴다. 옛 왕립해군의 32파운드 함포 포탄들이었다.
콜리어는 몸바사에 정박한 2급 전열함 HMS 버논Ⅱ의 갑판 위에 버티고 서서 무더기로 포탄을 쏘아 보냈다. 원탁의 마스터들이 젊었을 때에도 이미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았던 구식 함포의 둥그스름한 무쇠 포탄들은, 대마법사가 대충 조준해서 쏴대기에는 현대적인 포탄들보다 오히려 나은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무의미한 발악이었다. 이런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바로 조금 전에 경험하지 않았나. 콜리어가 하는 짓은, 그 수단의 우월함을 제외하면, 잔뜩 겁에 질린 사람이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마구 던져대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나는 파도를 가르며 물 아래로 들어가 나 자신을 부풀렸다. 나 자신에게 주는 변화는 내게 익숙하고 상상하기 쉬운 이미지일수록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다리가 여러 개 달린 두족류 형상의 바다괴물이 되었다.
익숙한 정도에 비례하여 초고속으로 이루어진 변신은 만족스러운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나는 작은 불쾌감을 느껴야만 했다. 이 괴물의 형상에 대한 내 상상의 익숙함은 사실 내가 아니라 크로우허스트의 기억에 뿌리를 둔 것이었기에.
‘스승새끼의 기억이 이런 데서도 도움이 되나.’
어린 시절 전열함의 함장을 꿈꾸었던 스승새끼는, 바다에 나아간 자신이 ‘대영제국과 국왕폐하의 적들’만이 아니라 신화적인 괴물들을 상대로도 싸워 이김으로써 넬슨을 능가하는 영웅이 되는 상상을 즐기곤 했다.
그래서 어린 크로우허스트의 책꽂이엔 언제나 존 애쉬턴이 엮은 책들이 꽂혀있었다. 「버지니아의 총독이자 뉴잉글랜드의 제독인 캡틴 존 스미스의 모험과 담화록」이라거나, 「동물학 속의 신비로운 생물들」과 같은.
특히나 「동물학 속의 신비로운 생물들」에서 깊은 바다 속 심연의 괴물을 다루는 장은, 스승새끼가 하도 읽어댄 탓에 해진 페이지들이 떨어져 나올 지경이었다.
그 기억을 품은 유해가 내 머릿속에 잠들어있으니, 변신이 느리면 이상할 노릇이다.
「콰직-! 빠드드드득!」
원탁의 마스터들을 시작의 땅으로 실어다주었던 전열함이 삽시간에 부서진 파편들의 무더기로 변해버린다. 8백 마력 증기기관이 깨진 갑판 위로 솟구쳐 오르고, 박살난 연돌이 공중에서 춤을 추었으며, 황동 스크류는 팽글팽글 돌며 날아가 모래사장 위로 떨어졌다.
말이 2급이지, 일선에서 물러나기 이전의 HMS 버논Ⅱ는 131문의 함포를 탑재한 1급 전열함이었다. 245피트(약 75미터)짜리 선체를 단숨에 바스러뜨리는 물리력은 지금의 콜리어가 항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콜리어는 또 한 번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했다. 바깥세상에서의 한계를 넘어선 권능을 오로지 도주를 위해서만 발휘하는 대마법사란 참으로 잡기 번거로운 사냥감이었다.
“제발 그만해라! 원하는 건 뭐든 해주겠다!”
콜리어가 해안포대의 대포들을 통째로 날려 보내며 울부짖었다.
“그대야말로 가장 위대한 대마법사임을 인정한다! 그러니 살려만 다오! 살려주기만 하면 그대를 빛과 진리의 영도자로 따를 것을 약속한다!”
믿을 수 없다.
바깥의 상황은 엘의 별이 완성된 시점부터 그 상태로 줄곧 방치되어있는 채다. 별의 결계를 깨고 현실로 돌아간다면, 상황이 달라진 것을 인지한 콜리어는 곧바로 마음을 바꿔 도망칠 생각부터 품을 게 뻔했다.
그때 다시 별을 완성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콜리어는 바보가 아니고, 같은 수에 두 번 속진 않을 테니까.
놀랍게도 이 새끼에겐 투사의 자질이 있었다. 이대로 살려 보내면 절대로 안 될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거짓된 희망으로 정보를 캐내는 정도라면 해보고 싶다. 그러나 저 교활한 놈이 항복을 한다고 해서 순순히 생사여탈권을 맡기지는 않을 테고, 바깥세상의 내가 무방비한 상태이니 시간을 길게 끌기도 곤란하다.
사실 지금도 신경이 적잖이 곤두서있었다. 내 의식이 여기에 있는 동안 바깥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진 않았을까. 무의미한 가정이지만, 경태나 수연이라도 가까이에 둘 수 있었다면 조금은 안심이 되었을 것이다…….
“그마아아아안!”
나는 콜리어의 절규를 무시하며 포트 지저스(Fort Jesus)를 밀어버렸다. 질량에 밀려 무너지는 석조요새로부터, 대영제국 동아프리카 보호령(East Africa Protectorate)의 찢어진 깃발이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나는 콜리어를 쫓아 콜리어 개인의 영광과 오욕이 녹아있는 여러 시공간들을 통과했다. 나를 잡아먹으려 했던 과거의 스승새끼보다 내가 더 유리한 점이 있다면, 크로우허스트의 영광과 콜리어의 영광이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가 변할 수 있는 모습은 점점 더 크기와 복잡성을 더해만 갔다. 예상한 바이지만, 콜리어가 이 시공간에 익숙해지는 속도보다 내가 내 힘에 익숙해지는 속도가 훨씬 더 빠른 것 같았다.
의사당이 보이는 템즈 강변의 산책로, 히말라야 산기슭의 퇴락한 사원, 캔터베리의 자그마한 장원, 아일랜드 독립군들의 영혼을 갈아버리며 마소를 뽑아냈던 벨파스트 근교의 비밀시설,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의 내부, 델리 라이시나 언덕 위의 인도 부왕 관저, 어디인지 모를 영국 도시의 후미진 거리 등을 거쳐, 콜리어가 마지막으로 도망친 장소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시기를 보냈던 낡은 하숙집이었다.
원탁의 마스터들의 유대는 그들이 한없이 초라한 존재였던 시절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스승새끼의 유해엔 희미하게나마 이 하숙집에 대한 기억 역시 들어있었다.
원탁의 제국주의자들에게도 평범한 인간이었던 시절이라는 게 있었다. 이들도 인간에게 내포된 가능성의 구현인 것이다.
하숙집의 창문 너머로 불과 네다섯 걸음 거리에 새로운 기억의 경계면이 반짝였다. 정문으로 뛰어들어 창문을 향해 달리며, 콜리어는 놀랍게도 기억의 경계면 자체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재주를 선보였다.
나는 검고 거대한 급류가 되어 하숙집을 덮쳤다.
“안 돼에에에에!”
새까만 해일이 기억의 경계면과 창문 사이를 휩쓸자, 콜리어는 비통한 곡소리를 냈다.
이제 사냥감에겐 달아날 길이 없다.
이번 변신은 순수하게 나의 익숙함에 힘입은 것이었다. 스스로를 액화시켜 파도와 홍수처럼 쫓아오는 스승새끼를 내 평생에 걸쳐 몇 번이나 꿈꾸었던가. 이 진저리나는 익숙함은 다른 어떤 익숙함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나는 해일의 파괴력과 심해의 수압으로 하숙집을 파괴했다. 이내 콜리어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심연 속에서 자기 한 몸 간신히 지키는 신세로 전락했다.
원탁의 대마법사를 감싼 염동력의 구체는 내가 가하는 압력에 눌려 시시각각 크기가 줄어갔다. 콜리어가 미칠 것 같은 표정으로 불을 밝혔으나, 그래 봐야 볼 수 있는 건 오직 자기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콜리어는 서럽게 흐느끼며 숨 가쁘게 물었다.
“크로우허스트……. 크로우허스트……! 너는 기어이 나를 죽이려는 것이냐……?”
나는 묵묵히 염동력의 구체를 조여 갔다. 계속해서 줄어드는 구체는 원탁의 대마법사가 팔과 다리를 몸에 꼭 붙이고 웅크린 자세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기분 나쁘게도 자궁 속의 태아를 연상케 하는 자세였다. 이 불쾌감은 힘든 사냥의 성공에 따른 성취감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바깥세상에 방치된 조립식 아기들은 지금쯤 배가 많이 고플 것이었다.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눈을 떴을 때, 통제에서 벗어난 아기 한둘이 내 살을 물어뜯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트라운서의 연료탱크에도 남은 연료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가능한 빨리 나가야 한다. 나는 혼이 찢어진 뒤에 남을 사냥감의 육신을 어찌 처분할지 결정했다.
「콜리어.」
절박한 기대를 온몸으로 드러내는 사냥감을 향하여, 나는 피로감을 담아 침착한 어조로 선언했다.
「너는 이유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