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442화 (442/561)

#44. 진노의 날 (17)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짧은 시간 동안 별생각이 다 스쳐갔다. 극한의 위기상황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건 낡은 영웅서사의 주인공들이나 하는 짓 아니었던가? 왜 원탁의 버러지 새끼가 나를 상대로 영웅극을 찍고 있나? 이쪽이나 저쪽이나 마왕인 것은 똑같은데.

광희(狂喜)하는 콜리어는 성공 직전까지도 이런 방법으로 내 지배력 확장에 맞설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해본 모양새였다.

즉, 이 새끼는 지금 그냥 얻어걸린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또 마지막까지 발버둥을 치지 않았다면 잡지 못했을 기회이기는 하다. 나 또한 콜리어에게 이런 기량과 의지가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조금 전까지 다 잡은 사냥감이라 여기고 있던 입장에선 허탈한 짜증이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고민했다.

‘돌겠군. 연결을 끊어야 하나?’

콜리어가 조장하는 통제불능은 윌리엄의 역병 코드만큼이나 빠른 확산속도를 보이며 역류하는 중이었다.

역류라 함은, 트라운서로부터 시작된 신경계 탈취의 흐름이 슬금슬금 아비터로까지 밀려들어오고 있다는 뜻. 내가 두 생체전투함을 하나의 군체에 가깝게 연결해놓은 탓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구우웅-!」

완성 직전에 깨진 염동술식의 잔향이 두 생체전투함의 선체에 기이한 울림을 퍼트린다. 마력회로엔 경미한 손상이 발생했다.

나는 내 수중에 떨어진 트라운서의 마력회로를 가동하여 콜리어를 찍어 죽이려 했으나, 그때마다 콜리어는 트라운서의 인간혼합물들을 물리적으로 해체하거나 파괴하여 술식의 완성을 방해했다. 잠깐만 방심해도 트라운서의 선체가 여러 조각으로 쪼개질 지경으로.

콜리어가 구사하는 「생명」은 인간혼합물들을 구성하는 세포들에 대하여 일괄적인 자기파괴 신호(Programmed cell death)를 뿌릴 수 있을 만큼 정교했다. 필시 설계 단계에서부터 구상해두었던 수단일 터였다.

그때마다 나는 신호를 저지하거나 파괴된 조직들을 복원하는 데 힘을 낭비해야 했다. 술식의 완성은 둘째 치고, 콜리어에게 달아날 길을 열어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먼저 나와 겨뤘던 섀빙턴이 아비터를 산산조각으로 분해하려 들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

내가 상대하는 적이 확실히 대마법사는 대마법사였다.

「응애애애-! 응애응애응애응애!」

점점 더 내 본신의 위치로 번져오는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단순히 싸워 이기는 게 목적이라면 두 함선의 결합을 풀어버리는 편이 내게 더 유리할 것이다. 지금은 트라운서도 아비터처럼 너덜너덜해진 상태니까. 콜리어는 어떠한 종류의 화력우세도 없이, 윌리엄의 역병을 끌어안은 채로 나와 불리한 대결을 벌여야 한다.

그러나 여기가 지상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콜리어가 대결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오직 도주만을 우선시할 경우, 나 또한 고려한 바 있는 탈출 경로- 즉 지하를 경유하여 바다로 이어지는 탈출을 저지하기가 까다롭다.

이쪽에 황금기의 눈이 있는 이상 간단히 놓치지야 않겠지. 그러나 이제 와서 사냥에 실패할 확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렇듯 나와 콜리어의 대결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와중에, 아기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한 트라운서의 내부 여기저기에서 목숨을 부지한 섬나라 애국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어서!”

멀쩡한 이가 드문 승조원들은 서로를 부축하고 서로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서 생체전투함으로부터의 탈출을 꾀하고 있었다.

“내 손을 잡아! 거기서 나오란 말야!”

“퇴, 퇴함하기 전에 자, 자, 자폭 절차를 이행해야……!”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제어장비가 하나도 없는 마당에 자폭은 무슨 놈의 자폭이야?! 왜, 탄약고에 폭탄이라도 설치할까?! 그 부러진 다리를 가지고 탄약고까지 갈 수나 있을 것 같아?! 당장 나오기나 해! 이 사탄의 찢어진 창자처럼 생겨먹은 배에서 탈출하고 보자고!”

이 세상엔 역경을 맞이했을 때 유독 빛을 발하는 인간들이 있다. 여기선 승조원들에게 윽박을 질러가며 탈출을 주도하는 한 상사가 그러했다. 이 상사가 없었다면, 나머지 생존자들은 이성이 무너지고 심지가 꺾여 파편화된 개인들로만 남았을 터.

“제로알파…… 제로알파의 신병은…….”

“닥쳐! 배가 땅에 내려앉아있는 지금 탈출하지 못하면 우린 그냥 끝장이야!”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콜리어도 볼 수 있고, 내가 들을 수 있는 것은 콜리어도 들을 수 있다. 물론 어디에 의식의 초점을 잡는가에 따라 달라질 일이긴 하나, 배를 버리려는 생존자들의 존재 자체는 나와 콜리어 둘 다 포착했다.

콜리어는 생존자들과 가까운 조립식 아기들에게 강렬한 굶주림의 신호를 보내었다. 통제에서 벗어나 울고 있는 아기들이라 해도 신경망 자체는 연결되어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이를 가로막지 않았다.

격렬한 대결의 한 갈피에, 콜리어와 나의 의사가 뜻밖의 합치를 이루는 순간이었다.

벽과 바닥과 천장을 이루는 조립식 아기들이 저마다 눈을 뜨고 냄새를 맡으며 뭉글뭉글 부풀어 올라, 생존자들에게 사나우면서도 배고픈 입질을 해댔다.

「으아아아앙!」

“으아아악!”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산 채로 잡아먹히는 생존자들의 비명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조립식 아기들의 원산지가 대부분 아프리카였으므로, 피부 검은 아기들의 군체가 영국인들을 잡아먹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떨어져! 이 괴물들!”

탈출을 주도하던 상사는 아기들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치고 팔꿈치로 내려찍으며 마지막까지 악전고투를 벌였으나, 결국은 잡아먹히는 결말을 피하지 못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상사는 몸이 두 조각으로 찢어지고 나서야 겨우 움직임을 멈추었다.

최후로 내뱉은 말은 크기가 너무 작아, 그를 물어뜯는 아기들의 귀로만 들을 수 있었다.

“릴……리…….”

트라운서가 승조원들을 포식하여 수백만 kcal의 열량을 아무런 방해도 없이 보충한 건 콜리어보다는 내게 더 유익한 일이었다.

탄수화물 함량이 너무 낮아서 아쉽지만, 적은 숫자로 포함된 여성 승조원들이 단백질과 지방의 비율을 적절하게 맞춰주었다. 조립식 아기들에게도 영양소의 균형은 중요한 요소다.

승조원들이 잡아먹히는 와중에도, 아비터와 트라운서의 다른 부분들에선 콜리어와 나의 대결이 첨예하게 지속되고 있었다.

놓을까, 말까. 국면전환의 수를 고민하던 내 뇌리에, 음산하면서도 기분 나쁜 영감 하나가 벼락처럼 번뜩였다.

‘할 수…… 있나?’

스승새끼가 오랜 구도 끝에 완성한 어두운 영생의 지혜. 하나하나의 선을 30개의 영혼으로 긋고, 도합 105인의 영혼을 소모하여 그리는 칠망성의 마방진. 신성(El)을 향한 항해. 내적 균형과 폐쇄적인 완결성의 별. 영원과 불멸을 추구하는 재탄생의 의식.

내 오래된 악몽의 시발점.

나는 신속하게 사냥감의 위치를 재확인했다. 다음으로는 사냥감과 신경다발로 연결되어있는 공중전투함의 상태를 분석했다.

그러고서 내린 결론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콜리어의 신경과 영혼이 조립식 아기들과 접속되어있는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옛 보육원에 그려졌던 제례의식의 별은 기본적으로 결계형성 및 표적유도 기능을 수행한다. 술식 자체는 시전자로부터 나와 별을 타고 흐르는 것. 따라서 너저분한 종교적 의미들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기능만을 구현할 경우, 인간의 영혼을 삼키는 불길한 별은 그저 폐쇄적인 순환을 이루기만 하면 된다.

깔끔하게 작도할 필요도 없고, 그 형태가 반드시 칠망성이어야 할 이유도 없다. 다만 일곱 단계의 마법적인 연산을 거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연산의 마지막에 시전자 본인을 자원으로 투입함으로써 완성되는 술식인 것이다.

대결의 무대를 영적인 의식(意識)의 세계로 옮긴다면, 거기서부터는 순수하게 영혼을 다루는 마법의 기량이 승패를 좌우한다. 그다음엔 영혼을 삼키고 육체를 강탈하는 대신,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후 술식을 해제해버리는 변칙적인 방법으로 사냥감을 살해할 수 있다.

별에 바칠 제물은 조립식 아기들의 영혼.

내키지 않는 한숨을 내쉬고서, 나는 내 본신의 마력회로에 별의 술식을 장전했다. 남은 일은 콜리어를 속이는 것뿐이었다.

“그래! 떨어져라, 떨어져 나가! 이 괴물아!”

내 의도를 오판한 콜리어가 환희 반 분노 반으로 치를 떨며 외치는 말은, 공교롭게도 조금 전 트라운서에 잡아먹힌 영국군 상사를 꼭 닮아있었다.

“섀빙턴을 죽이고! 아비터를 나포하고! 이제는 이 트라운서를 대파하기까지! 이 정도면 탐욕스러운 그대도 만족할 만하지 않은가, 크로우허스트! 그대는 무서울 정도로 잘 싸웠다! 이 콜리어를 놓치는 걸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조립식 아기들의 영혼은 생체전투함의 근간을 이루는 영적 다형성 군체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들이다. 생체질량은 잃어도 수복할 수 있으나, 영혼을 잃으면 곧바로 회로에 타격이 오는 것이다.

그런 구성요소들을 특정 마법의 일회성 재료로 써버리는 건, 겉보기만으로는 영적 군체의 주요 결절들을 끊어 생체전투함을 해체해버리려는 시도와 흡사했다. 단지 그 규모가 제한적이어서 트라운서를 완전한 붕괴로 몰아넣을 수준까진 아닐 따름.

배를 파괴해서라도 달아날 길을 열고자 했던 콜리어의 입장에선, 내가 이제야 겨우 저를 단념했다고 오해할 법한 상황이다. 두 전투함의 상호연결을 끊는 대신 조금 더 욕심을 부리고 있을 뿐이라고.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런던으로 오면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격앙된 어조와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유치하기까지 한 원색적 감정의 표출. 콜리어는 여전히 전장경험 부족으로 말미암은 인지 매몰의 덫에 빠져있었다. 사고능력이 평소와 같았다면, 내 속임수를 간파할 가능성이 지금보다는 높았을 것이다.

사람을 잡아먹는 영생의 별이 HMS 트라운서의 선체를 제단으로 삼아 완성되었다.

내 영혼에서 흘러나온 어두운 지혜가 별을 이루는 선들을 타고 흘러, 제단의 추상적인 중심에 위치한 콜리어에게로 쇄도해 들어간다.

다음 순간, 나는 악몽의 세계로 진입한 나 자신을 자각했다.

‘익숙한 풍경이로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마다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을 담고 있는 기억의 조각들이 무작위로, 무한히, 누더기처럼 이어지는 영적인 차원의 영역이었다. 각각의 조각들에 담겨있는 시간과 공간들은 모두 콜리어가 살아온 삶의 일부였다.

비록 뿌리가 되는 기억이 다르다곤 하나, 이 기괴하면서도 음울한 풍경 자체는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다.

나는 내 안에서 거센 물살처럼 차오르는 전능감을 느꼈다. 불경스러운 별의 주인인 나는, 이 세계에선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한한 힘을 품고 있는 신적인 존재였다.

마치 황금기의 인간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막상 내가 이렇게 겪게 되니, 과거의 스승새끼가 힘에 도취되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이 돌아온 세상에 익숙해진 나조차도 이럴진대, 마법의 암흑기를 살다가 갑작스럽게 이런 전능감을 마주한 스승새끼는 오죽했겠는가.

“이게 대체 뭐야!”

경악하여 외치는 콜리어는 20세기 초엽으로 추정되는 영국의 거리에 서있었다. 가까운 곳엔 대영박물관이 흐릿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박물관의 본관은 시대의 변천에 따른 변화가 매우 적었으나, 나는 본관의 모습이 어느 시절의 것인지 쉬이 분간해냈다.

콜리어가 딛고 선 기억의 조각은 원탁이 아직 대영박물관 제0과라는 이름을 쓸 때의 것이었다.

지금의 나는 스승새끼와 다르게 마력 고갈로 죽을 우려가 없었으나, 쉬운 싸움을 굳이 어렵게 만드는 취미도 없었다. 바깥의 세상이 안심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그저 도망치는 것 외엔 저항할 방법이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나와는 달리, 원탁의 대마법사인 콜리어는 이 공간에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나름대로 마법을 써가며 저항하는 것이 가능하다.

싸움을 단숨에 끝내버릴 생각으로, 나는 나 자신에게 거대한 변화를 부여했다.

나는 여덟 장의 날개를 가진 초월적인 크기의 용으로 화했다.

「쿠르르르르르!」

날갯짓의 여파만으로도 옛 런던의 시가지가 폭풍을 맞은 것처럼 쓸려나간다. 내가 땅을 내딛는 걸음 한 번에 대영박물관이 절반쯤 무너져 내렸고, 날개는 도시 구획 몇 개를 통째로 감싸 길을 차단하는 벽이 되었다.

내 눈은 벤 네비스(Ben Nevis)의 정상보다 높은 고도에서 사냥감을 내려다보았다. 낭패한 기색의 콜리어가 미처 몸을 돌리기도 전에, 나는 콜리어를 향해 입을 벌리곤 불의 폭포와도 같은 용의 화염을 쏟아냈다.

나 자신은 용의 불에 면역이지만, 내 날개에 갇힌 모든 것들은 간접적인 복사열만으로도 순식간에 불이 붙어 타올랐다.

유감스럽게도 콜리어는 즉사하지 않았다. 「방전」을 잘 다루는 놈답게, 진동전류역장(Oscillating Electric Field)을 전개하여 불길을 차단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열의 발생은 전자의 이동을 동반하며, 불을 구성하는 이온화된 기체와 플라즈마는 당연히 전하를 띠고 있고, 전하를 띠고 있는 것들은 전기장의 힘으로 밀어낼 수 있다. 미국 국방고등기술연구소(DARPA)에서도 아직 연구만 하고 있는 기술을 원탁의 대마법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구현해내고 있었다.

물론 여기는 물리법칙이 온전하게 통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진동전류역장으로 불을 막을 수 있다는 콜리어의 믿음은 실질적인 결과에도 영향을 주었다.

“으아아아아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술식과 마력을 쏟아내는 콜리어. 원탁의 대마법사가 사력을 다해 펼친 방어마법은 불과 열의 침투를 허용하지 않는 직경 30미터 가량의 반구형 공간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염동장막이 더해져, 파편이 침투하거나 공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경험을 쌓으면 위험하겠어.’

로더필드처럼 전투경험을 쌓을 경우 위험하지 않을 대마법사가 어디 있겠느냐만, 나는 지금의 콜리어를 보며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때로는 단 한 번의 실전경험이 신병을 숙련병으로 바꾸기도 한다.

사냥을 신속하게 끝내기로 마음먹은 참이지만, 기왕 마주한 적의 지혜를 외면할 이유는 없다. 지식은 곧 힘이다. 나는 콜리어가 쓰는 술식의 코드를 집요한 목마름으로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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