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진노의 날 (15)
성난 고래를 유인해온 비행선은 고래의 동태가 바뀐 시점에서 함체가 크게 기울 정도의 급선회를 감행했다. 전장을 이탈하는 비행선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다. HMS 트라운서의 모든 가용 화력은 이쪽을 공격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고래가 트라운서를 향해 돌진하자, 비행선 내의 승조원들과 비행선 호송대의 조종사들이 일제히 기쁨과 성취감의 색채로 물들었다. 공중전투함의 자위적 공격을 받을 가능성을 감수하고 실행한 작전을 사상자 하나 없이 성공시켰으니 기쁠 만도 하겠지.
트라운서의 조립식 아기들에게 과부하가 걸리는 게 보인다. 저런 식이면 전투함이 앞으로 몇 분이나 버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극심한 과부하였다. 콜리어는 트라운서를 소모품처럼 써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저 한 몸 탈출하는 것을 우선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서로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속도를 높여 빠져나가다 보면 운이 따라줄 경우 격노한 고래를 내 쪽으로 떠넘길 수도 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내가 뒤로 물러나준다면 그것 또한 콜리어 입장에서는 괜찮은 결과다.
‘그럼 곤란하지.’
콜리어를 놓치더라도 성과가 나쁜 것은 아니다. 대마법사 하나를 죽였고, 불완전한 상태로나마 공중전투함 한 척을 노획했으며, 남은 한 척은 완전히 파괴해버리는 셈이니까. 내 몸과 정신을 짓누르는 피로감이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하는 게 어떠냐고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이렇게나 좋은 기회가 찾아왔는데 왜 그걸로 만족하고 끝내야 한단 말인가?
트라운서와 고래, 아비터의 위치 변화를 주시한 끝에, 나는 다시 한 번 속임수를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공간왜곡을 이용한 블러핑을.
나는 아비터의 회로에 공간왜곡의 코드를 장전했다.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감량을 심하게 해버린 아비터의 조립식 아기들은, 내가 아무리 과부하를 걸더라도 이전에 시도했던 워프 돌격을 재현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단순히 공갈을 치기 위해서라면, 보다 짧은 시간 동안만- 즉 이미 한 차례 워프 돌격을 경험한 콜리어가 또 다른 돌격의 조짐을 느끼고 기겁을 할 정도로만 공간왜곡과 워프 도약을 구현하면 그만이다.
이전의 공간왜곡은 가쁜 숨으로 세 호흡에 걸쳐 이어졌다.
그렇다면 이번엔 단 한 호흡이면 족하지 않을까?
구현시간이 이전의 삼분지 일이면 지금의 아비터로도 견딜 만한 과부하가 걸릴 것이다. 콜리어가 낚이지 않는다 한들 곧바로 사냥이 실패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비터를 상실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계산이 끝났다.
나는 내 생애 두 번째의, 첫 번째보다는 다소 짧은 워프 항해를 감행했다.
둥글게 휘어지는 공간을 목도한 트라운서는 극적인 방향전환과 기동변화를 선보였다. 단지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겁을 한 콜리어의 비명이 들리는 착각이 들 만큼. 발작적으로 방향을 꺾으며 가속한 트라운서는 마침내 격노한 고래의 사정권에 진입했다.
「우르르르르릉!」
대기를 뒤흔드는 맹렬한 진동이 트라운서를 직격한다. 고래가 발하는 연속적인 진동 충격파는 천둥을 닮은 굉음을 자아냈다. 차이가 있다면, 천둥과는 달리, 이 파괴적인 연주는 고래 스스로 멈출 때까지 끝나지 않으리라는 점.
「끼우우웅- 드드드등-」
아비터의 선체 곳곳에서 불길한 금속성의 울림이 발생했다. 응력을 견디지 못한 선체가 변형되는 소리. 마력회로에 걸린 과부하의 여파로, 손상된 골조를 붙잡아주던 조립식 아기들의 근력이 약해진 탓이었다.
‘조금만 더……!’
아직은, 아직은 버틸 수 있다.
근력 약화는 일시적이고, 전투함도 당장 끝장이 날 만큼 위태로운 상태는 아니다. 앞으로 1분. 혹은 2분. 트라운서에게 결정타를 꽂을 때까지만 버텨주면 된다.
예의 그 역병 촉수를 다시 빚어 사냥감의 몸뚱이에 꽂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선체 손상 따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여차하면 전투함으로서의 아비터를 해체해버리고 인간혼합물 생체조직만 남긴 후, 적함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공격을 이어나갈 작정이다.
트라운서의 상태라고 좋지는 않았다. 강한 진동을 받는 전열화학포 포탑과 레이저 포대들은 이미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 보이지 않는 작살이 꽂혀 바르르 떨어대는 짐승을 보는듯한 광경이었다.
나는 이리저리 방향을 꺾으며 전진하여 트라운서의 움직임을 견제하는 동시에, 고래의 공격에도 힘을 실어주었다. 고래가 빚어내는 진동과 동일한 주파수의 진동을 쏴서 공명에 의한 증폭이 일어나도록 유도한 것이다.
최소한의 힘을 써서 큰 피해를 주는 공격.
「퍼엉! 퍼펑! 투콰쾅!」
고래가 두른 물의 구체 겉면에서 거친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트라운서가 가하는 마법적인 반격들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곱씹었듯, 이런 식의 근거리 난타전은 고래에게 압도적으로 더 유리한 것이었다. 게다가 나까지 고래에게 힘을 보태고 있음에야.
어쨌든 이렇게 되었으니 트라운서에 대해서는 환시장막을 쓸 이유가 사라졌다. 나는 전열화학포 포격과 더불어 위력 감소가 없는 레이저 공격을 트라운서의 함체에 꽂아주었다.
함교에 돋은 아기들의 귀를 통해 노이즈 섞인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로우허스트! 크로우허스트! 아까의 고압적인 언사는 내 사과하겠다! 협상을 다시 하자! 우리는 대등한 관계로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듣고 있는가, 그대?! 내 앞을 막지 마라! 길을 비키란 말이다!」
고래와 나의 합동공격으로도 공중전투함의 장갑판을 분쇄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장갑판을 고정한 리벳들까지 멀쩡하지는 못했다. 강한 진동에 노출되어 느슨해진 리벳들은, 헐거워지면 헐거워질수록 더 강하게 흔들리는 악순환 끝에 줄줄이 제 자리를 이탈해버렸다.
저마다의 소리로 불협화음을 내던 장갑판들 또한 줄줄이 벗겨져나갔다.
「아, 안 돼!」
공중전투함이 일반 선박처럼 용접접합을 했더라면 접합부위가 파손될 때까지 더 긴 시간을 버텨냈을 것이다. 그러나 향후 우주공간에서의 작전까지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한 공중전투함은 정비와 개량의 편의성 때문에라도 리벳 접합을 쓰는 게 당연했다.
장갑이 벗겨져나간 자리마다 거대한 인간혼합물의 외피가 노출된다. 내가 증폭시킨 고래의 진동 충격파는 생체전투함에게 광범위한 타박상과 파열상, 그리고 내출혈을 선사해주었다. 생체강화가 아니었으면 조립식 아기들의 뇌와 장기까지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터.
여기에 더해 내가 강철조차 순식간에 녹여버리는 광선들로 지져주기까지 하자, 드디어 트라운서에서도 부분적으로 통제를 벗어난 조립식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응애애애애애-!」
트라운서의 표면으로부터 손상되었거나 연결이 끊어진 조립식 인간 덩어리들이 부슬부슬 떨어져 나온다. 마치 바스러지는 재와 같이. 피아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트라운서와 아비터에서 나는 울음소리들이 괴기스러운 화음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때 불미스러운 상황변화가 발생했다. 줄기차게 트라운서를 공격하던 고래가 돌연 이쪽을 향해 머리를 돌린 것이다.
「우우우우우!」
물의 구체를 뚫고 나오는 키요우타마히코의 포효엔 선명한 적의가 담겨있었다. 직후 내게로 고래의 진동 충격파 공격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으나,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너와 같은 편이란 말이다.
사실 고래 입장에선 내가 제게 공격받는 ‘동족’을 구하러 온다고 착각할 만한 상황이긴 했다. 지금의 고래에게 내 도움을 인지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대책은 있었다. 염동력을 정교하게 구사하는 대마법사의 눈에 진동의 주파수와 진행방향이 보인다는 것은, 강화간섭과 상쇄간섭이 모두 가능하다는 의미. 다만 고래의 공격을 중화하느라 낭비하는 회로점유율이 아까울 따름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고래에겐 내가 저의 공격을 중화하고 있음을 인지할 능력이 없다는 점. 물의 구체에 시각과 청각이 막힌 고래는 그저 제 주변의 마력장 변화와 그 특성을 느끼고 원래 하던 공격을 계속 퍼붓기만 할 뿐이었다.
「응애응애응애응애-!」
가까스로 고래의 집중 공격에서 벗어났으나, 선체의 절반 이상이 피멍으로 뒤덮인 트라운서는 즉시 도주할 만한 상태가 못 되었다. 당장은 속도를 높여 달아나기는커녕 느리게 고도를 상실하는 중이다.
지금 트라운서의 상태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다발성 장기부전이나 급성 구획증후군, 급성신부전 등으로 죽고도 남았을 만큼 나빴다.
그럼에도 회복속도는 조바심이 날 정도로 빠르다. 내상이 아물고 피멍이 지워지는 속도가 워낙 빨라 숫제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과연 원탁의 대마법사답다고 해야 할 「생명」의 기량.
그러나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나는 아비터의 선체로부터 조립식 아기들로 이루어진 채찍을 빚어 사출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안정된 상태에서 사출한 생체 채찍은 말단부에서 소닉 붐이 터지는 속도로 목표를 향해 쇄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트라운서의 선체에 역병의 코드를 주입할 촉수가 꽂혔다.
「푸하아아아악!」
이미 한 번 보아 익숙한 광경이 다시 펼쳐졌다. 아비규환으로 가득한 도시에 페스트의 소나기를 뿌리는 건 이로써 두 번째. 마력회로 내에서 바이러스처럼 증식하는 코드에 감염된 생체전투함은 함선 전체가 병적으로 부어오르며 일제히 피와 고름을 쏟아냈다.
나는 아비터의 선체를 트라운서에 들러붙게 만들었다. 장갑이 없는 부분마다 서로 지배자가 다른 인간혼합물 생체조직들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먹어라! 뜯어먹으며 파고들어!’
아비터를 이루는 조립식 아기들이 내 의지에 호응하여 트라운서의 조립식 아기들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함선 표면에 셀 수 없이 돋아난 입과 이빨들이 기괴한 형상으로 늘어나 사냥감을 물어뜯고 그 피를 빨아들인다.
이는 공격의 방편인 동시에 열량보충의 방편이기도 했다. 아비터의 연료 탱크는 바닥을 드러낸 상태니까. 이제부터 필요한 열량과 영양은 적에게서 취해야만 한다.
어쩐지 로더필드와의 결전이 떠오르는 순간.
역병 감염 따윈 나중에 처리하면 그만이다.
「휘오오오오오!」
이 와중에도 분노한 고래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점점 더 한 덩어리로 뭉쳐가는 아비터와 트라운서를 충격파 공격으로 한꺼번에 두들겨 패고 있는 것이다.
나는 로더필드와 싸울 때처럼 상하를 뒤집어 트라운서를 방패로 삼았다. 그러면서 두 전투함간의 영적·생체적 융합을 촉진하고, 트라운서의 회로에 대한 침투도 이어갔다. 고도유지에 대한 부담은 모조리 상대에게 떠넘겨버린 채로.
추락을 걸고 벌이는 또 한 차례의 치킨 게임이었다.
새로운 무전이 들어왔다.
「크로우허스트! 너는 진짜 미친놈이냐?! 정신 나간 짓 그만둬!」
나는 콜리어가 체통 없이 질러대는 소리들을 모조리 무시했다. 트라운서에 대한 내 지배력이 점점 더 확대됨에 따라 도시의 야경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섀빙턴과 싸울 때와는 달리, 지금의 내겐 온전히 내 지배하에 있는 확장회로가 존재한다. 이는 곧 지금의 치킨 게임에 더욱 대담하게 임하도록 해주는 힘이었다.
뭣하면 속도만 좀 줄여서 이대로 경착륙을 해버려도 무방하다. 짧은 치킨 게임으로도 우세를 점할 수는 있고, 일단 우세를 점하기만 하면 그다음엔 순수한 힘겨루기만으로도 승기를 이어나갈 자신이 있기 때문에.
내게도 확장회로가 있다는 건 그런 뜻이다.
‘차라리 그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군.’
내 마음을 기울게 한 건 언제든 다른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고래의 존재였다. 괜히 서두르다가 승산 높은 싸움을 망치느니, 조금 느리게 가더라도 안정감 있는 길을 고르는 편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나는 아직 고래가 지닌 능력의 바닥을 알지 못한다.
잠시 후.
혐오스러운 형상으로 뒤얽힌 두 척의 생체 공중전투함은 희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상에 내려앉았다. 커다란 철도차량기지를 깔아뭉개는 거친 경착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