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진노의 날 (12)
전율하는 거인의 공간왜곡은 다소 변형된 형태의 염동력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염동력 자체가 음의 중력을 발생시키는 질점(質點)들처럼 작용하거나 기존 질점들의 인력을 상쇄하거나 하여 공간이 휘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거인이 한낱 집광렌즈 대용으로 구현한 공간왜곡은 초점거리가 맞지도 않고 그 초점이 균일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빛의 집적도를 소폭 올리기만 하면 그만인 일이었으니까. 그 낮은 집적도조차 평면적으로 들쑥날쑥해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나는 사정이 다르다. 규모는 작을지언정 명확한 초점 설정이 필요하다. 왜곡된 공간을 통해 HMS 아비터의 선체를 정확한 위치로 쏘아 보내야만 한다. 이는 회로가 정교한 대마법사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나는 머리가 아파올 정도로 집중하여 초점을 설정한 후,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회로에 장전해두었던 거인의 이적을 발현시켰다.
다음 순간. 온 세상이 둥글게 구부러졌다.
「쿠우위이이이-우우웅-!」
정면에서 번쩍이던 전열화학포 발사섬광이 고흐의 그림 속 광원처럼 번져, 공간의 왜곡면을 타고 마르지 않은 물감처럼 흘러내렸다. 포탄의 궤도는 휘어지는 빛을 뒤따랐다.
포성과 그 잔향 또한 기괴하게 기워진 울림으로 변했다. 포성의 일부와 잔향의 일부가 서로의 시간을 바꾸거나 뒤섞이며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소리의 총량은 그대로이되 경유하는 시공간이 달라진 결과일 터.
하늘과 땅의 모습 역시 그러했다. 둥근 어항 속 물고기가 보는 세상을 빛과 어둠의 유화로 그려놓고서, 물감이 굳기 전에 맹렬하게 회전시키는 듯한 풍경이었다. 하늘과 섞인 도시와 바다는 내 오래된 악몽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한 호흡.
두 호흡.
세 호흡.
빠르고 가쁜 호흡이 세 번 지나갔을 때, HMS 아비터는 왜곡된 공간을 이탈하여 HMS 트라운서의 지척에서 튀어나왔다. 이동한 거리가 길지는 않았으나, 내가 성공시킨 것은 분명 현생인류 최초의 워프항해였다.
그리고 그 대가가 찾아왔다.
푸하아아악-!
빛과 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내가 회로를 장악하고서부터 줄곧 잠잠했던 조립식 아기들의 입이 저마다 핏물을 토해냈다. 섀빙턴과 싸울 때 그러했듯이, 일시적으로 통제에서 벗어난 조립식 아기들이 제멋대로 호흡기와 입을 만들어 본능만 남은 울음들의 합창을 빚어내는 상황. 생체 전투함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인 출혈들이 줄을 이었다.
확장마력회로 전체가 불타오르는 듯했다. 극한의 과부하가 남긴 파괴적인 후폭풍. 나는 격통이 엄습하는 와중에 당장이라도 붕괴하려는 회로를 수습하느라 황금 같은 시간을 낭비했다.
「끼우우웅!」
HMS 트라운서의 선체가 날카로운 금속성의 비명을 내지른다. 거리가 가깝다보니 소리도 선명하다. 이쪽의 공간왜곡과 워프 돌격에 기겁했는지, 트라운서는 공격이고 뭐고 다 때려치운 채 전력으로 달아나려 드는 중이었다. 선체를 돌보지 않는 급격한 가속과 방향전환.
얼마나 급했는지 선체에 작용하는 염동력의 균형조차 맞지 않는다. 트라운서의 선체 곳곳에서 크고 작은 손상들이 발생하는 게 보였다. 고정 볼트가 모조리 깨진 장갑판들이 바람을 타고 뒤집히며 시가지로 떨어져 내렸다. 쿠웅 쿵 부서지는 소리들이 올라왔다.
「……하십시오! 모두 대피하십시오! 긴급피난명령 발효지역이 요코스카, 요코하마, 가와사키, 도쿄 시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다치가와, 이루마, 요코타에서 주일미군과 자위대의 합동 구조작전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수도고속 제4로는 다수의 연쇄추돌사고로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지상의 경고방송이 아스라이 들려오는 가운데, 나는 아비터의 선체 일부를 물리적으로 재구축하여 조립식 아기들로 이루어진 기다란 촉수를 사출했다.
이 촉수가 장갑판 없는 자리에 꽂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윌리엄의 역병을 트라운서의 확장회로에 침투시킬 수 있다. 그러면 이 싸움은 내 승리로 끝난다.
「응애애애애-!」
아기들의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생체 채찍이 바람 찢는 소리를 내며 트라운서에게로 쇄도했다.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길이. 회로가 온전치 못한 지금으로선 긴 채찍이 끊어지지 않도록 강화하는 것조차 버겁다.
트라운서는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선체를 비틀었다. 이쪽을 조준하던 함포와 레이저 포대가 죄다 어긋난 방향으로 포탄과 광선을 쏟아낸다. 빗나간 광선줄기들이 멀리 있는 시가지에 직선으로 불을 지르고, 철갑유탄이 작렬하여 추가피해를 일으켰다.
「터엉!」
장갑판을 치고 튕겨져 나오는 채찍. 때린 자리엔 조립식 아기들이 터진 핏자국이 찍혔다. 온힘을 다해 아비터를 전진시키며, 나는 조립식 아기들의 근육을 수축시키는 동시에 염동력을 실어 재차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은 중력과 관성을 무시하며 사납게 치솟았다.
그러나.
닿지 않는다.
「이에에에엑! 끄애애애애액!」
과부하로 인한 손상을 완전히 수습하지도 않고 움직인 탓에, 생체 전투함 곳곳에서 다시금 붕괴가 시작될 조짐이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피로가 누적된 용골에선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발생했다. 배가 둘로 찢어지면 생체회로도 물리적으로 찢어질 수밖에 없다.
전투함의 구성요소들을 다 버리고 생체 확장회로만을 수축시키는 것도 지금으로선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를 갈면서도 더 이상의 추격이 무리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번 사냥은 실패다.
미련스러운 추격을 이어가봐야 처음보다 더 빠르게 벌어지는 간격 앞에 좌절하는 일만 남아있다.
그렇다고 포격전을 속행하여 탄약고 유폭을 노리자니 이것 역시 승산이 너무 낮았다. 내 감각에만 의지하는 포격의 명중률은 간격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급감할 테니까. 무엇보다 탄약고가 터진다고 대마법사가 죽는다는 보장이 없다.
따라서, 냉정하게 생각하면, 지금부터는 이 전장을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을 고민해야 맞다.
「파츠츠츠츠츳!」
트라운서의 레이저 공격이 채찍의 허리를 끊어놓았다. 탄화된 인간혼합물들이 불씨를 품은 검은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허리가 잘린 채찍 조각이 지상의 도시로 추락한다.
나는 즉각적인 환시장막 전개로 대응했다. 그러나 확장회로의 상태가 불안정한 관계로 처음처럼 전방위적인 차폐는 불가능했다. 트라운서가 있는 방향, 그리고 극초음속 운동에너지 지대공미사일 포대가 있는 방향. 이렇게 두 개의 면을 가리는 게 고작이었다.
당장은 트라운서와의 거리가 가까워 수상함대와 방공군의 공격을 받고 있지 않으나, 간격이 벌어지고 나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포화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냥 추락시키는 게 최선인가?’
아비터의 아래엔 녹지가 거의 없는 거대한 시가지가 깔려있었다. 아비터를 지상으로 추락시킨 후, 아직 남아있는 확장회로의 힘을 써서 지하 배수로로 이어지는 길을 뚫는다면 어떨까.
내가 아비터와의 연결을 끊고 달아날 경우, 트라운서는 지상에 남겨진 아비터의 마력장에 유인당할 터. 이 틈을 타 강이나 바다로 빠져나가면 탈출은 성공이다. 전향한 기사들이 두 번째 사냥에 실패한 나를 순순히 따라올지는 의문이나, 지금은 생환을 우선시해야 할 때.
정 뭣하면 한두 명 정도만 기절시켜서 데려가는 방법도 있다.
갈등하는 내 귀에 몽환적인 고래의 포효가 들려왔다.
「우우-! 히우우우-!」
참 공교롭기 짝이 없는 우연이다. 아비터와 트라운서, 그리고 고래의 위치는 두 번째 사냥을 막 개시했을 때처럼 또다시 일직선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대학병원 하나를 두들기고 또 다른 대학병원으로 향하는 고래의 앞엔 도쿄 타워가 서있었다. 다른 조명이 다 꺼지고 항공장애 표시등만이 명멸하는 도쿄 타워는 고래의 공격을 버텨낼 만한 구조물이 아니었다. 고래가 그저 지나가며 뿌리는 충격파만 맞아도 위태로울 것이다.
나는 트라운서를 노려보았다.
내면에서 이성과 욕망이 첨예한 대립을 이어갔다. 내 욕망의 지침은 여전히 사냥감의 심장과 죽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실은 욕망을 따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피아간의 거리는 아직 가깝다. 공중전투함은 선회·가속·제동 모두가 보통의 배와 격이 다르지만, 어쨌든 일반적인 선박들의 안전규정을 기준으로는 충돌이 우려될 만큼 가까운 간격이다.
적의 포격이 작렬했다. 이번엔 빗나가지 않았다.
「게헥…….」
포격의 여파로 떨어져 나온 인간혼합물 조각이 내 본신의 발치까지 굴러왔다. 여러 개의 콧구멍으로 숨을 쉬는 입이 죽어가는 아기의 그것을 닮은 신음소리를 뱉어낸다. 본체에서 분리된 조각들의 생명은 빠른 속도로 잦아들었다. 기형적으로 생긴 폐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졌다.
확장회로가 안정적이지 못한 상태여서, 물리적 피해가 추가적인 손실을 유발하는 상황. 완전히 착륙한 후 재정비를 하는 게 아니면 상황은 더 악화되기만 할 것이다.
지속적인 악화 자체는 디폴트로 놓고 다음 행동을 생각해야 한다.
「쿠웅!」
대응사격의 포성이 선체를 울린다. 포탑 안의 시체인형들은 묵묵히 빈 가대에 포탄을 채워 넣고 있었다. 날아간 철갑유탄은 트라운서의 장갑판을 깨고 들어가 폭발했다. 그러나 사상자와는 별개로, 조립식 아기들의 피해는 빠른 속도로 수복되었다.
피아의 마력장이 부대끼는 경계면에 「발화」를 투사해보는 건 어떨까?
넓은 공간을 순간적으로 불태우면 그게 바로 열압력 폭발이다. 충격파의 범위는 두 공중전투함을 집어삼키고도 남는다.
그런 짓을 했다간 장갑이 많이 벗겨진 이쪽의 피해가 더 크겠으나, 저쪽도 레이더 등의 선외 구조물과 밖으로 드러난 무기체계들의 손실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적의 화력을 절반만 날려버릴 수 있어도 무언가 새로운 활로가 열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쪽이 받을 피해를 대략적으로라도 계산하기가 어려웠다. 이쪽은 자칫하면 회로가 붕괴할 판이다. 욕망의 채찍질을 받은 머리는 새롭고 극단적인 도박수를 떠올렸다.
‘아예 이 배 자체를 성형관통탄(EFP)으로 만들어버릴까?’
아비터의 선체가 헐벗긴 했어도 남은 장갑판이 없지는 않다.
이 장갑판들 가운데 몇몇을 성형 발사체(Liner)로 삼고, 선체 일부구획을 제거하거나 염동방호로 코팅하여 폭발용기로 삼으며, 그 안에서 최대출력의 「열화」를 터트리면, 폭압에 변형된 장갑판들은 저마다 초음속의 투사체로 화하게 된다.
그러나 그 투사체들이 제대로 명중한다는 보장은 없다.
무슨 수로 조준을 할 것인가?
온갖 파멸적인 생각들이 들끓어 오르며 부침을 거듭하는 틈에, 불현듯 수연 녀석의 당부가 다시 한 번 뇌리를 스쳐갔다. 어쩐지 아까보다는 한층 더 강해진 스침이었다.
머리가 조금 식는 느낌이 들었다.
“…….”
기회는 다음에도 있을 것이다. 나는 혀를 한 번 차고서 지상을 탐색했다. 아비터를 연착륙시킬 장소를 물색하기 위함이었다.
이 와중에도 트라운서의 화력투사는 계속되었다. 포탄이 작렬할 때마다 영적 결합이 분리된 인간혼합물 조각들이 후둑 후둑 떨어져 내린다. 지금으로선 약화된 레이저 광선들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방어에 쓸 물이 거의 다 바닥나버린 탓이었다.
내가 착륙지점을 결정하고 아비터의 고도를 낮추기 시작할 즈음, 어두운 함교의 무전기를 통해 카랑카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원탁의 대마법사이자 원탁내각의 대의원인 마스터 콜리어가 고한다! 왕립공군의 공중초계함 HMS 아비터를 나포한 자여!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면 부름에 응하여 스스로의 정체를 밝혀라! 나, 위대한 콜리어는 그대와의 대화를 바란다!」
함교의 무전기가 용케 아직까지 기능이 살아있었다. 같은 메시지를 두 번 더 반복해서 송출한 마스터 콜리어는, 내가 묵묵히 하강을 이어가자 이쪽의 무전기가 죽었다고 판단했는지 함선 외부 스피커로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이 싸움의 승패는 이미 갈라졌다! 내 눈엔 네가 처한 열세가 뚜렷하게 보인다! HMS 아비터의 강탈자는 겸허히 패배를 인정하고 대화에 응하라! 나 콜리어는 승자의 관용을 베풀 준비가 되어있다!」
나처럼 염동력으로 지향성 음파를 쏘지는 못하였으되, 스피커와 염동 흡음결계의 조합을 통해 바깥으로는 새지 않는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원탁의 대마법사가 입에 담은 관용은 지독한 위화감을 선사했다. 그러나 저쪽이 나를 말살하려 들지 않는 것은 그보다 더한 위화감을 주는 일이었다.
포격을 가할 때마다 바스러지듯 떨어져나가는 조립식 아기들의 덩어리. 낮아지는 고도. 줄어드는 마력장.
저쪽이 승리를 확신할 근거는 충분했다.
나는 일단 대화에 응해보기로 했다. 해서 손해를 볼 건 없겠다는 판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