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진노의 날 (10)
「환시」를 이용한 귀신놀음은 조사대의 퇴출을 적당한 선에서 억제해주었다. 그레이스가 생존을 위해 창안해낸 술식은 원탁이 알지 못하는 지혜이며, 따라서 베테랑들이 보고하는 초상현상(超常現象)은 원탁의 지식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것.
나는 이 무지가 시간을 버는 데 도움이 되리라 기대했다. 「장엄한 황금의 책」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에 대하여, 상대 대마법사가 당혹감과 탐구욕을 느끼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세상에 계획대로만 돌아가는 일은 없다. 인류의 장구한 전쟁사엔 작전계획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전투들이 얼마든지 널려있다.
HMS 트라운서의 전열화학포 두 문과 선체 하부 레이저 포대 네 문은 처음 접근할 때부터 줄곧 이쪽을 조준하고 있었다. 나는 레이저 포대들과 연결된 커패시터들이 활성화되는 것을 보고 내 계획의 죽음을 직감했다.
「콰아아아-!」
고출력 레이저 광선들이 내가 지배하는 생체전투함을 긁는 굉음. 강렬한 연소반응은 한 점에 집중된 폭발과도 같았다.
다만 그 폭발이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커패시터가 활성화되는 순간 나 역시 방어를 준비한 까닭이었다. 방어의 수단은, 위에서 관측이 불가능하도록 땅 아래의 수도관으로부터 끌어올려 선내 일부 구획에 채워두었던 물의 방출.
「푸화아아아악!」
내가 아비터의 소화(消火) 시스템을 이용해 방출시킨 물은 바깥 면에서부터 두꺼운 수증기의 벽으로 팽창하여 레이저 공격을 산란시켰다. 물과 광선이 부대끼는 지점마다 맹렬한 열 폭풍과 함께 찬란한 무지갯빛 난반사가 발생했다. 전기 공급이 끊겨 어둠에 잠겨있던 주변 주택가가 어지러운 색채에 젖어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진다.
아직 아비터 내에 있는 조사대는 트라운서로부터 들어온 무전을 받고 절규하듯 되물었다.
“공격을 개시할 테니 알아서 탈출하라고?! 그게 뭔 개 같이 미친(Batshit crazy) 소리야!”
요는 이거였다. 너희가 있는 곳은 피해서 공격하겠다. 그러니 자력으로 탈출해라. 행운을 빈다.
조사대원들의 현재 위치는 바깥과 가까웠다. 따라서 트라운서의 통보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설령 내 배가 갑작스럽게 날아오르더라도, 염동력을 보유한 조사대원들은 바깥으로 뛰어내릴 수만 있으면 어떻게든 생환이 가능하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고서 신속하게 조사대원들의 처분을 결정했다.
“벼, 벽이?! 벽이 밀려온다! 사격! 사격! 사격!”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영양적인 의미에서도 그러했다. 지금 새로 인형을 만들 여유까진 없으니, 조사대원들은 조립식 아기들에게 먹일 전투식량으로 삼는 게 최선이었다.
「카카캉! 카카카캉!」
선내에서 연쇄적으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조사대원들의 사격은 모두 염동장막에 막혀 살상력을 잃었다. 사방으로 총질을 해대는 조사대원들은 더 이상 공포를 억누르지 못했다.
“Fuck, Fuck, Fuck, Fuck! 이건 배 자체랑 싸우는 꼴이잖아!”
“오, 주여!”
“도와줘! 끌려간다!”
“헨리, 안 돼!”
길게 자라난 조립식 아기들의 혀가 총을 낚아채거나 조사대원들의 목과 팔다리를 묶어 끌어당겼다. 한 가닥 한 가닥의 혀는 그리 두껍지 않았으나, 걸려있는 생체강화의 수준은 하늘을 나는 고래를 능가한다. 근육량 대비 힘의 크기가 크다보니, 사지에 각각 서너 가닥씩만 얽혀도 마력장이 억눌린 고 강화계수 각성능력자를 찢어죽이기에 충분했다.
“아아악! 으아아아아악!”
높게 매달린 채 비명을 지르던 조사대원 하나는 이내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에서 피를 뿜으며 찢어졌다. 으지직 끊어진 팔다리가 춤을 추듯 튕겨져 나갔다. 벽과 바닥과 천장에 돋아난 입들이 인체의 잔해들을 씹어 먹었다.
「빠득빠득빠득빠득빠득-」
한 대원은 몸통에서 머리가 뽑혀 죽었다. 조립식 아기들의 입은 강화에 힘입어 인간의 두개골까지 빠득빠득 씹어 먹었다. 이렇게 알뜰하게 섭취한다면, 조사대원 한 사람당 적어도 15만 kcal 이상의 열량 보충을 기대할 수 있다. 육체단련에 힘쓴 최정예 군인들은 일반인에 비해 단백질 함량이 높은 고단백 영양식이었다.
「콰앙! 콰우-웅!」
상공에서 천둥을 닮은 포성이 터져 나왔다. 화광이 번뜩인 직후 푸르스름한 전광이 뒤를 이었다. HMS 트라운서가 전열화학포 포격을 가한 것이다.
레이저를 이용한 절단 이상의 공격을 시도하는 걸 보니, 이쪽이 적이든 아니든 무장해제부터 시켜놓고 보자는 판단이 선 모양새였다.
두 발의 철갑탄은 망가진 레이저 포대 두 문을 파괴하고도 모자라 선체를 완전히 관통하기까지 했다. 장갑판이 멀쩡하게 남아있었어도 방어가 불가능했을 위력. 아니, 장갑이 남아있었더라면 오히려 파편으로 인해 피해가 더 커졌을 터였다.
그러니 차라리 깔끔하게 관통당하는 편이 피해가 적다. 염동방어를 시도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어중간하게 막았다가 포탄이 깨지기라도 하면 이쪽만 손해를 본다. 그렇다고 염동방어에만 집중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생체 전투함이 입는 관통상은 「생명」으로 아물게 하면 그만이며, 떨어져나간 살점들은 다시 아기들에게 먹여 부분적인 열량 회복을 꾀하면 된다. 굳이 레일건 효과를 더하겠답시고 철갑탄을 쏜 게 저쪽의 실수였다.
‘더는 무리인가.’
이쪽에 물이 있는 한 레이저 공격은 언제까지고 방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시간을 끌어서 얻을 이득보다는 손해가 더 컸다. 상대의 경각심이 빠르게 높아지고 있잖은가.
상대가 거리를 벌리기 전에 교전을 개시해야 한다.
「쾅! 콰쾅!」
또 한 쌍의 철갑탄이 극초음속으로 내리꽂혔다. 먼저의 포격은 레이저 포대를 파괴했으나, 이번 포격은 무의미하게 승조원 거주구역을 꿰뚫었다. 레이저 공격으로 만들어진 두꺼운 수증기층이 정확한 관측과 조준을 방해하는 탓이었다.
나는 아비터를 기습적으로 이륙시켰다.
투둑- 투두둑-
이륙하는 공중전투함 아래에서 부서진 건물들의 잔해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이를 목격한 HMS 트라운서는 즉각 상승하며 뒤로 빠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동에 사전준비와 방향전환이 불필요한 공중전투함다운 기민한 반응성이었다.
당연하게도 레이저 공격과 포격은 계속되었다.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공중전투함은 정지사격과 기동간 사격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전투함의 외부 균열을 통해 가열된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소나기가 휩쓸고 지나간 열대의 여름과도 같은 습한 뜨거움이었다. 레이저 공격을 물로 방어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열의 덩어리들.
돌연 계절이 바뀐 듯한 감각 속에서, 나는 기능을 복원한 냉각수 펌프를 가동시켰다. 땀샘이 제거된 아기들은 공기 냉각이 아니면 냉각수가 흐르는 관으로만 체온을 조절할 수 있었다.
「파아아아-!」
증기 구름에 꽂힌 레이저 광선들이 굉음을 발한다. HMS 아비터의 가용 화력은 모조리 하부에 몰려있었으므로, 상대에게 근접하거나 같은 고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반격을 가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기동과 교전을 개시하고 나서부터는 레이저 방어에 들어가는 물의 양이 급증했다. 나 스스로 수증기를 뚫고 돌출해 나아가는 꼴이었으니까.
선내에 채워놓은 물의 양은 무한하지 않았다.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가벼운 편이 유리하니 무작정 많이 채워놓을 수도 없었다.
나는 아비터의 전면에 「환시」를 역방향으로 전개해보았다.
「파칫-! 치치치칫-!」
증기가 아까보다는 덜한 기세로 불규칙하게 폭발하는 소리.
파괴적으로 작렬하던 레이저 광선들이, 각각의 광선을 이루는 전자기파의 스펙트럼 대역에 따라 다채로운 방향으로 휘어진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환시장막의 표면을 따라 2차원의 평면상으로 갈라진 광선들은 어두운 하늘에 새로운 빛의 향연을 펼쳐냈다.
「환시」는 본디 적으로부터 내 모습을 감추는 술식이다. 이 말은 즉, 내 위치로부터 적이 있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특정 주파수 대역의 전자기파를 차단하거나 굴절시킨다는 뜻.
그러므로 이를 역방향으로 전개하면, 적으로부터 내가 있는 방향으로 쏟아지는 전자기파를 차단하거나 굴절시키는 일이 가능하다.
물론 이걸로는 완전한 방어가 불가능했다. 내가 개량한 환시 술식으로도 전자기파의 모든 주파수 대역을 커버하진 못하는 까닭이다.
고로 트라운서의 레이저 공격은 피복이 방사형으로 벗겨진 전선의 형상으로 내리꽂혔다. 장막에 걸러지지 않은 잔여 광선의 출력만으로도 어지간한 군용 레이저 무기체계를 능가하는 느낌. 장갑판이 많이 벗겨진 아비터에게는 이것도 큰 위협이나, 그래도 물의 소모를 크게 줄인다는 점에선 의미가 있었다.
「트라운서에서 아비터에게! 지금 즉시 정선하라. 반복한다! 지금 즉시 정선하라! 본함은 귀함의 기동 일체를 위협으로 간주하겠다!」
엉망이 된 함교에 지직거리는 무전이 들어온다. 늦어도 한참 늦은 경고였다. 경고를 할 거라면 처음 레이저를 쏘기 전에 했어야 한다.
아직 고도에서 우세한 적의 전열화학포 3차 포격이 임박했다. 철갑탄이 장전된 함포 두 문이 스르르 포구를 돌려 이쪽의 함포 탄약고와 화력 통제용 레이더를 노린다. 나는 급히 또 한 겹의 환시장막을 펼쳐, 정방향의 장막과 역방향의 장막이 중첩되도록 만들었다.
「콰콰쾅!」
관통력 과잉인 철갑탄 두 발은 원래 노리던 지점을 꿰뚫지 못했다. 환시 이중장막에 회피기동을 더한 덕분에 조준이 엇나간 것이다.
이번에도 적의 포격은 깔끔한 관통흔을 남기고 사라졌다. 전투에 어두운 상대가 저지력이고 뭐고 포탄에 더 강한 힘을 싣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어서 다행이었다. 대마법사의 자존심이 영국군 나부랭이들의 조언을 깔아뭉개고 있거나, 의사소통 자체가 일방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는지.
상대가 마스터 콜리어라는 전제 하에, 자신의 주특기 중 하나인 「방전」에 대한 자부심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겠다.
진실이 무엇이든 이쪽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등골이 서늘했다. 포탄이 뚫고 지나간 구멍 중 하나는 내 본신으로부터 불과 열 걸음 남짓 떨어져있을 따름이었다.
조준이 조금만 더 틀어졌다면, 나는 직전의 공격에 즉사했을지도 모르는 일.
「휘리리리리릿-」
균열을 통해 새어 들어오던 바람소리의 음계가 달라졌다. 새로 뚫린 포탄 구멍의 영향이었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 역시 미세하게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피부에 와닿는 바람의 변화가 생명의 위협을 실감케 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환시장막이 적의 적외선 관측을 차단하고 레이더 전파 일부까지도 교란하여 정밀한 조준을 불가능하게 해주는 것까진 좋다. 잔뜩 뭉개지고 번지고 이지러진 상(像)에 대고 쏘는 포격이 정교하면 얼마나 정교하겠나.
그러나 그것은 곧 내가 눈먼 포탄에 맞을 확률이 그만큼 증가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쨌든 효과는 있으니까.’
나는 중첩된 환시장막을 다섯 방향으로 추가 전개했다.
이쪽이 일방적으로 얻어맞고만 있어서인지, 아니면 영국군 사령관과 원탁의 대마법사의 상황판단이 다른 것인지, 왕립해군과 왕립공군으로부터는 아직 공격이 오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본격적으로 공격을 개시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영국군이 이 배를 표적으로 삼는 순간, 드디어 족쇄가 풀린 자위대 또한 괴물 함선 공격에 가세할 것이다.
고래를 죽이려고 준비한 극초음속 운동에너지 미사일은 그 특성상 전열화학포 이상으로 위험한 무기였다. 적어도 내가 타고 있는 생체 전투함에게는.
그러니 미리 장막을 펼쳐 대비해 두어야지.
환시장막이 잡아먹는 회로의 처리능력은 큰 부담까지는 아니었다. 내가 돌리는 마력회로의 출력은 생체전투함의 질량과 부피에 비례하여 세제곱수로 증가한 반면, 환시를 전개해야하는 면적은 가려야 하는 면의 넓이, 즉 제곱수로 증가한 까닭이었다. 다루는 회로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경제성이 높아지는 술식인 셈이다.
「아비터! 정선하라! 정선하라!」
트라운서로부터 들어오는 무전이 다급해졌다. 나는 노이즈가 섞인 음성에서 공포를 읽어냈다. 육안으로는 안 보이고, 적외선 관측도 불가능하며, 레이더로 보려고 해도 상이 선명하지 않은 유령선에게 쫓기게 된 탓이겠지.
수차례의 포격을 더 맞아가며 추격과 상승을 이어나간 끝에, 마침내 트라운서가 내 레이저와 함포의 사격범위에 들어오는 순간이 찾아왔다.
이 순간, 공교롭게도, 멀리까지 나아간 고래와 두 척의 공중전투함이 하나의 직선상에 놓이게 되었다. 별들의 정렬과 같은 느낌을 주는 우연의 소치였다.
「휘우우우우우-!」
항구와 대형 병원들을 잇는 선을 따라 구불구불 도시를 초토화시키며 움직인 고래는, 지금은 다시 임해지대에 이르러 하네다 국제공항에 진동과 파문의 공습을 가하는 중이었다. 격노한 고래의 공습을 피해 긴급이륙을 감행하는 민항기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슬아슬하게 성공하는 기체들도 있었지만, 깜박거리다가 모든 조명이 꺼지는 공항과 운명을 함께하는 기체들이 더 많았다. 실패한 기체의 승객들은 차라리 공항 건물 내에 남아있는 편이 더 안전했을 것이다. 고래가 지상에 가하는 공격이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완파할 정도는 아니니까.
「콰앙!」
아비터의 선체 하부에서 창백한 발포섬광이 번뜩였다. 내가 발사한 철갑탄은 트라운서의 제트 엔진 연소 체임버를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