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진노의 날 (8)
궁지에 몰린 귀족의 품위 있는 최후는 대개 자살로 수렴한다.
마스터 섀빙턴은 자결했다. 대마법사답게, 스스로의 마력회로를 파열시키는 방식으로. 영혼은 산산이 깨어져 흩어졌고, 육체는 내장과 신경계가 손상되어 가치가 급락했다.
하나의 싸움이 끝나고 하나의 싸움이 남았다. 나는 사냥의 성공이 불러온 희열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인류의 미래가 어둡다, 라.’
원탁이 말하는 마법의 암흑기와 인류의 암흑기는 엄밀한 의미에서 서로 구분되는 개념이다. 마법의 암흑기는 이 세상에 마소가 돌아오면서 끝이 났으나, 진정한 인류의 부활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인류의 암흑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현생인류는 인류라고 불러주기도 아까운 암흑시대의 찌꺼기들일 뿐.
그러니, 원탁의 세계관으로는 원탁의 마스터들이 한 사람씩 쓰러질 때마다 인류의 미래엔 암운이 드리우는 게 된다. 모든 마스터들이 죽고 나면 인류는 영원토록 계속될 암흑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순수하게 가능성만을 놓고 본다면, 그들이 말하는 인류의 부활은 묵시록의 탕녀 그레이스나 원탁의 배반자 크로우허스트- 즉, 나에 의해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원탁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다.
「쿠궁-!」
둔중한 진동이 HMS 아비터의 선체를 뒤흔들었다. 이제 완전히 내 지배 아래 떨어진 공중전투함이 느리게 하강하여 주택가에 내려앉은 것이다. 수십 채의 주택들이 생체 전투함의 중량에 짓눌려 무너졌다. 도망치는 대신 집 안에서 가족끼리 모여 벌벌 떨고 있던 사람들은 건물의 잔해와 전투함의 함체에 깔려 으스러졌다.
내게는 다음 전투를 치르기 전에 최소한의 정비를 행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비터의 자매함 HMS 트라운서는 가까운 저공에 머물며 이쪽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는 중이었다.
「꿀럭- 꿀럭-」
조립식 아기들의 소화기관들이 그물처럼 엮여 만들어진 영양공급관에 점성이 높은 유동식이 꿀럭거리며 밀려들었다.
공중전투함의 연료를 대신하는 이 고열량 유동식은 선체 곳곳의 냉장 연료탱크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탱크에서 균열이 발생하는 바람에, 남은 양이 넉넉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균열을 통해 새어나간 유동식은 피와 고름과 토사물의 홍수에 섞여 거의 다 유실되고 말았다.
가축에게 먹이는 사료에 보통 항생제가 혼입되는 것처럼, 조립식 아기들에게 먹이는 유동식에도 역시 감염 예방을 위한 항생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더불어 유사시 주입할 더욱 강력한 약제들도 구비되어 있었고.
따라서 전투함의 생리적 기능들을 정상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확장회로 내에서 폭주하던 역병의 트로이목마를 비활성화해도 이미 만들어진 페스트균까지 사라지지는 않지만, 그 균들은 연료에 포함된 항생제로 처리가 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절대적인 열량 자체가 부족한 감이 있다는 점.
당장 전투함의 기능을 정상화할 양은 있으나, 연료탱크들을 모조리 비워버리면 나중에 긴급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대처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렇다고 조립식 아기들에게 피고름을 빨아먹도록 하는 건 최선의 방법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전투함에게 달리 먹일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나는 전투함 외부에서 대체 연료를 찾아냈다.
우선은 도로변에 듬성듬성 자리한 음식점들의 주방과 창고부터 털었다. 주방과 창고에 보관되어있던 식재료들이 염동력에 실려 전투함을 향해 날아왔다. 음식점들 다음으로는 편의점과 가정집들의 순서였다.
물은 터진 소화전과 수도관을 통해 보충했다. 같은 방법으로 선체를 세척하기도 했다.
이러는 동안, 조립식 아기들의 빠른 소화 과정에서 나온 대량의 배설물들이 선체 하부의 오폐수 관을 통해 배출되었다. 소변과 대변이 하나로 섞인 더러운 액체가 부서진 주택들 사이로 작은 냇물을 이루며 흘러내려갔다.
수율이 낮은 대게처럼 생체질량이 감소했던 HMS 아비터는 다시금 살이 꽉 차오르기 시작했다. 섀빙턴의 발악으로 인해 영구적으로 상실한 질량과 영혼들까진 수복할 수 없어도, 라일라 때처럼 영적인 결손 부위들을 봉합 처리하는 건 가능했다.
어두운 함교의 무전기에서 수신을 알리는 불빛이 깜박거렸다.
「아비터. 아비터. 여기는 트라운서. 귀소 측의 0A는 무사한가? 귀함은 이제 조함 능력을 회복한 것인가? 귀함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혹시 별도의 지원이 필요하지는 않은가? 각각의 질문에 대하여 신속한 응답을 요망한다. 5분 이내로 응답이 없으면 귀함에 조사대를 승선시키겠다.」
작은 까마귀 섬에서 그러했듯, 제로 알파(0A)는 이 배에 탑승한 대마법사를 지칭하는 호출부호일 것이었다. 트라운서 측은 아비터가 외부로부터 물과 영양을 조달하는 광경을 보고 마스터 섀빙턴이 함선에 대한 제어능력을 회복한 게 아닌가 하는 희망을 품은 모양이었다.
5분이라.
전투함 내엔 다수의 생존자들이 남아있었다. 죽은 섀빙턴의 가신들과 영국군 승조원들. 몹시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나는 먼저 스승새끼를 흉내 내어 섀빙턴의 가신들에 대한 회유를 시도했다.
「마스터 섀빙턴을 섬기는 기사들은 들어라.」
스피커 대신 아기들의 입을 빌려 내보내는 선내방송. 흩어진 동료를 찾고, 부상자를 구호하고, 전열을 재정비하는 등 바쁘게 움직이던 기사들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기사들의 표정은 슬픔과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공중전투함의 폭주가 멎고, 더 이상 피와 고름이 흘러내리지도 않는 가운데, 그들의 주인이 아닌 자가 조립식 아기들의 입으로 목소리를 낸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너희들의 주인은 죽었다. 영의 회로를 파열시키는 자살이었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것임에도, 기사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절망을 드러냈다.
「나는 영혼을 다루는 마법의 거장 크로우허스트다. 이 배는 이제 내 것이며, 배 안에 있는 너희는 죽음으로도 내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음을 알라.」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기사가 힘없이 머리를 떨어뜨렸다. 나는 계속해서 스승새끼의 기억에 의지해 원탁의 배신자를 연기했다.
「주인을 잃은 기사들아. 언약을 상실한 백성들아. 내 너희에게 분노가 아닌 자비로서 이르노니, 이제는 내게 구하라.」
원탁의 교리는 기독교의 그것을 뼈대 삼아 왜곡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구절을 차용하는 건 광신도들의 의지를 꺾기에 효과적인 방편이었다.
「나 역시 사람의 아들이다. 내게도 승천의 언약을 나눌 권능이 있음을 너희가 알 것이다.」
「나는 웨스트버튼을 죽였고 로더필드를 죽였으며 이젠 너희의 옛 주인마저도 죽였다. 왼쪽 눈의 사서 본브릿지를 제외해도 나와의 대결에서 쓰러진 대마법사가 셋이나 되지.」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지는 구세주를 진정한 구세주라 할 수 있는가? 누가 최후의 순간까지 살아남을 사람의 아들인가? 패배자들의 원탁에 누가 있어 나를 제치고 먼저 승천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러니 기사들아. 내게서 구하여라. 참된 주인을 경외로 섬기고 몸을 떨며 즐거워하여라. 그리고 사람의 아들의 발에 겸허히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나의 진노를 받은 너희는 승천의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리니, 그 진노가 너희의 영혼을 질그릇처럼 깨어 부수리라. 약속을 찾아 주인에게 귀의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으리라.」
「복이 있으리라. 복이 있으리라. 복이 있으리라.」
몇몇 기사들에게는 이것이 먹혔다. 내게는 그 기사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흔들림이 보였다.
“죽는 자는 열등하고 죽이는 자는 우월하다.”라고 떠들어댔던 로더필드와 동류가 되고 싶은 건 아니지만, 큰 적과 맞서 싸우다 죽는 자를 메시아라고 불러주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의 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거나 악마에게 아예 살해당하거나 했다면 기독교가 어찌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겠나.
나는 흔들리는 자들의 마음에 쐐기를 박아 넣었다.
「언약을 잃은 가문의 일원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너희도 보고 들어서 알지 않는가?」
「내가 너희를 돌려보내준다 한들, 너희의 앞날은 아프리카에서 스러져간 본브릿지의 가솔들과 다르지 않으리. 운이 좋아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 한들, 너희에게 돌아올 언약은 오로지 변덕스러운 자비에 의지해서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정녕 그러한 미래를 원하는가?」
마침내 등위가 없는 평기사들 몇몇이 흐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개중 하나는 자신이 탑승한 전투함 전체를 경배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며 새로운 신앙을 고백했다.
“제 생명을 당신께 바칩니다. 제 영혼을 당신께 바칩니다. 제 모든 것은 이제 당신의 소유입니다. 그러니 부디 이 가엾은 자에게 주의 언약을 내려주십시오. 사람의 아들 되신 마스터 크로우허스트 경께 기도드립니다.”
그러나 등위가 높은 장교기사(4등위)나 기사 사령관(3등위)들은 가문 기사단의 정예다운 광신과 충성심으로 내 유혹을 거부했다.
“닥쳐라, 이 악마! 누가 너 따위를 영혼의 주인으로 섬긴단 말이냐!”
“내 목소리를 듣는 자, 기억하라! 크로우허스트는 이미 언약을 한 번 저버린 전적이 있는 거짓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우리 또한 버려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나!”
“마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게 설령 진실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독을 담고 있는 법! 차라리 죽여라! 주인을 지키지 못한 기사로서 영원한 고통을 감내할 테니!”
내 스승새끼, 크로우허스트에게는 원죄가 있다. 왼쪽 눈의 사서를 살해하고 달아날 때, 자신이 승천의 언약을 나누어주었던 가솔들을 모조리 내팽개치고 떠났다는 원죄가. 이미 언약을 한 번 저버린 전적이 있다는 비난은 바로 이 원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물론 가솔들을 다 챙겨서 도망치려 했다면 다른 마스터들이 일찌감치 배신의 전조를 느꼈을 것이다. 원탁의 마스터들은 서로가 서로의 감시자인 데다, 당시의 스승새끼는 오른쪽 눈의 사서로서 특히 더 중요한 감시 대상이었으니까.
그러나 원탁의 교리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 가솔들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것과 언약을 저버렸다는 건 서로 같은 의미가 아니다.
나는 그 부분을 파고들었다.
「너희는 공연한 의심을 말라. 내가 내 백성들을 두고 떠났다고 하여 그들의 영혼까지 버렸겠는가? 내가 살아있고 나 스스로 부정하지 않는 한 내 언약은 유효하며, 내 백성들의 영혼은 내 자비와 그들 자신의 서약으로 내게 속해있으므로, 그들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련을 통하여 더욱 정결해진 것이다.」
「거꾸로 묻겠다. 너희가 너희의 옛 주인에게서 받은 언약은 어떠했나? 그것은 주인이 기사를 인도(引導) 없는 광야로 내보내는 것만으로 스러질 만큼 허망한 언약이었나?」
「실로 그러했다면 너희의 옛 주인은 메시아가 아니었던 것이고, 그게 아니었다면 나에 대한 너희의 언사는 불경한 신성모독에 불과할지라.」
「이제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에게 답해보아라.」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고위 기사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나타났다. 원탁의 배반자이자 메시아의 살해자에 대한 적개심과는 별개로, 자기들이 믿는 교리상 내 말에 오류가 없음을 아는 까닭일 것이다.
마력회로를 파열시킬 능력이 있는 마법사는 이런 종교적인 유혹이 아니고선 포로로 잡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정말로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도박이라고 해야 할 만큼 성공률이 낮다고 해야겠지.
나는 갈등하는 기사들에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내 너희에게 관대함을 보여주겠다. 너희에게 여전히 망설임이 있다면 조금 더 지켜보고 결정해도 좋다. 잠시 후 나는 새로운 싸움에 나설 것이고, 그 싸움에서 거두는 승리는 내가 참된 메시아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해줄 터.」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므로 먼저 무릎 꿇는 자가 더 많은 총애를 누릴 것이나, 불공(不恭)한 유예를 누린 자들이라고 하여 새 언약을 받지 못하는 일은 없으리라.」
「미혹을 떨치지 못한 어린 양들아. 너희는 그저 육체의 구속과 부자유를 받아들이라. 싸움이 끝나고도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그때는 너희의 생을 스스로 끝내면 될 일이다.」
「그때의 나는 너희가 새 언약을 등지고 영원한 고통의 불길 속으로 자청하여 뛰어드는 어리석음을 막지 않겠노라.」
마력회로를 파열시키는 자살은 막지 못할지라도, 마법사에게 육체적인 구속을 가하는 것쯤은 가능하다. 대마법사가 베푸는 마소 과급(過給)을 받지 못하는 한, 공중전투함의 마력장에 짓눌린 원탁의 기사들은 자력으로는 구속을 풀지 못할 것이다.
망설이던 기사들 대부분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휘어진 금속골조 따위로 운신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눈과 귀는 열어두었으나, 입에는 재갈을 채워 쓸데없는 소리를 떠들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결국 자살을 택한 건 3등위의 기사 사령관을 위시한 다섯에 불과했다.
자신의 영혼을 부수기 전, 기사 사령관은 눈물을 흘리며 라틴어로 된 기도문을 읊었다.
「Rex tremendae maiestatis, Qui salvandos salvas gratis, Salva me, fons pietatis.(위대하고 장엄하신 왕이시여, 자격 있는 자들에게 자비로운 구원을 내려주시는 분이시여, 연민이 샘솟는 샘이시여, 저를 구하소서.)」
포로로서의 중요도가 높은 원탁의 기사들은 이렇게 처리했지만, 영국군 생존자들은 기사들을 회유하는 사이에 시체인형으로 만들어버렸다.
“우극! 컥! 커거걱-!”
승조원들 가운데 아직 사람으로 남아있는 마지막 하나. 공중에 매달린 탄약병이 소변을 흘리며 버둥거렸다.
나는 마스터 섀빙턴이 먼저 시체인형 제작을 시도할 때 만들어놓은 도구를 활용했다. 그 도구란, 조립식 아기들의 식도를 길게 늘여 근육과 합성시킨 생체기관이었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속이 비어있는 촉수에 가까웠다.
이 촉수를 입을 통해 위장까지 밀어 넣고, 내부에서 전기충격을 가해 심장을 정지시킨다. 마력장 방호를 두른 각성능력자를 최대한 온전한 상태로 감전사시키는 요령이었다. 심장이 멎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영육은 시체인형으로 만들기 좋은 상태가 되었다.
이 상태로 「소생」 술식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푸아그라용 거위를 살찌우듯 인형의 위장에 공중전투함의 연료를 쏟아부었다. 전투함의 연료는 조립식 아기들을 위한 유동식인 만큼 사람이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 성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꾸륵- 꾸르르륵-!”
연료가 일부 역류해 나오긴 했으나, 인형은 빠르게 질량을 늘려갔다. 육탄전으로는 어지간한 하급기사와도 붙어볼 만한 체급의 생체 괴물을 제작하는 과정이었다.
다수의 시체인형들을 찍어내며, 나는 눈을 조금 찌푸렸다.
‘예상보다 까다롭군.’
확장회로의 힘을 손에 넣으면 보다 강력한 마법을 쉽게 구사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었으나, 실제론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다루는 힘이 워낙 거대해진 탓에, 마법을 섬세하게 구사해야 할 땐 내 본신만으로 마법을 구사할 때와 큰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기사들을 회유하고, 시체인형을 제작하고, 확장회로와 전투함을 수리하는 등.
5분의 여유는 알뜰하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