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진노의 날 (7)
원탁의 마스터 섀빙턴은 빛과 마소의 관계에 천착했던 인간이다.
마소를 정제한 마력이 이 세상에 작용하는 모든 형태의 힘으로 변환될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힘의 근원에는 마소가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
논리적 비약이 종교적인 수준으로 들어간 이 추측에 기초하여, 과거의 섀빙턴은 다시 한 번 논리의 비약을 시도했다.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자의 간절한 염원이 깃든 비약을.
「그렇다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물리적 힘을 마소로 역전시키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섀빙턴은 그 ‘순수한 힘’이 빛에 깃들어있노라고 믿었다.
빛을 마소로 바꾸는 방법을 찾아 마법의 암흑기를 극복하겠다는 섀빙턴의 구상은 한때나마 원탁내각 대의원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원탁내각의 대의원들 역시 마소 고갈을 극복할 방법이 절실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리하여 섀빙턴은 「발화」를 정제하고 발전시켜 순수한 빛을 빚어내는 술식을 만드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일단 마소를 빛으로 바꾸는 술식부터 완성해야, 그 술식을 뒤집어 빛을 마소로 바꾸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섀빙턴이 아무리 공을 들여 개량해도 「발화」는 그저 「발화」일 따름이었다. 적어도 크로우허스트가 보기엔 그러했다.
애초에, 그가 닿고자 하는 순수한 빛이라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과학적으로 빛은 그냥 전자기파일 뿐이잖은가. 그런 의미에선 「발화」보다는 「방전」이 오히려 순수한 빛에 닿기 쉬운 술식일지 몰랐다.
빛이 전자기파라는 건 원탁이 세워지기도 전인 1888년에 증명된 사실이다. 당시엔 전자기파가 아니라 헤르츠 파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긴 했으나, 개념 자체는 원탁의 대마법사들도 이해하고 있었다.
섀빙턴은 의문을 제기하는 동료 대의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순수한 빛은 순수한 빛이다. 위대한 마소가 그렇듯이, 순수한 빛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 그대들도 알지 않는가? 열등한 것들로 우월한 것을 설명하기는 불가능한 법이다. 현생인류의 존재만으로는 황금기의 인류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게는 영혼의 지침이 있다. 나는 이 지침이 가리키는 방향에 빛이 있을 것을 믿는다. 원탁의 동지들이여, 나와 함께 암흑시대의 어둠을 벗어나 광명으로 나아가자.」
그를 제외한 원탁의 대의원들은 검증을 요구했다. 계속해서 내각 전체의 지원을 받고 싶다면 이제까지 개량해온 술식을 완전히 공개하라고. 그 술식이 평범한 「발화」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얼마나 더 빛에 가까워졌는지를 검토하여 지원의 지속 여부를 결정하겠노라고.
당연하게도, 섀빙턴은 술식의 완전한 공개를 거부했다.
결국 빛에 대한 원탁의 추구는 한때의 열병과도 같은 해프닝으로 그쳤다. 섀빙턴은 이후로도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으나, 스승새끼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의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확신에 찬 연구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을 지켰을 따름이다.
어쩌면 공중전투함에 탑재된 전열화학포엔 섀빙턴의 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발화」를 정교하게 다루는 기량은 장약의 연소제어에 도움이 되는 것이니까.
지상에선 가늘게 떨리며 높아졌다가 낮아지는 패턴의 경보음이 두 차례 반복해서 들려왔다. 경보음 뒤에 이어지는 건 일본 정부가 구축해놓은 전국순시경보시스템(全国瞬時警報システム)의 메시지였다.
「항공공격정보. 항공공격정보. 당 지역에 항공공격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옥내로 피난 시 테레비와 라디오를 켜주시기 바랍니다.」
늦어도 너무 늦은 경고발령이다. 고래의 공습과 공중전투함의 폭주가 재난 매뉴얼에 기재되어있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 싶었다. 이 상황에 옥내로 대피하라는 녹음 메시지가 과연 도움이 되는가도 의문이었을 테고.
「드드드드드드-」
가까운 아츠기 해군비행장(厚木海軍飛行場)에서 이륙한 미 해군 항공대의 헬기들이 줄지어 북쪽과 서쪽으로 도주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미익에 붙은 식별문자(NF)를 보건대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 소속의 대잠헬기 비행대였다.
같은 기지에서 출격한 해상자위대의 기체들도 대부분은 저마다 살길을 찾아 떠나느라 바빴다.
그러나 소수의 대잠헬기들은 민간인 구조에 나섰고, C-130 수송기 한 대는 기지로 몰려든 민간인들을 수용하고자 활주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며, 폭탄창에 어뢰와 폭뢰를 적재한 대잠초계기(오라이언)는 폭주하는 공중전투함을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마침 공중전투함의 함교가 완전히 내 지배 아래로 떨어진 참이다.
불빛이 깜박이는 함교 무전기는 놀랍게도 아직 외부 안테나로 이어지는 배선이 살아있었고, 전력계통의 퓨즈가 죄다 터져버린 지금은 함교 내의 다른 콘솔들과 마찬가지로 무정전 전원장치(UPS)로부터 비상전력을 공급받고 있었다. 현시점에선 이 배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통신기기였다.
함교에 돋아나게 한 아기들의 귀가 대잠초계기로부터 들어오는 무전을 잡아냈다.
「당소 후론티아(フロンテイア)-2! 당소 후론티아-2! 왕립공군 초계함 아비터에게 알린다! 지금 즉시 정선하여 쿠로스쟈쿠(クロスジャック)의 통제에 따르라! 반복한다! 지금 즉시 정선하여 쿠로스쟈쿠의 통제에 따르라!」
「일본에 대한 귀함의 적대행위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그리고 현재의 통제 불능 상태가 회복 가능한 것이든 아니든! 즉시 정선하지 않으면 우리는 귀함을 저지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 이에 따르는 모든 결과는 전적으로 귀함의 책임이 될 것이다!」
후론티아는 해상자위대 제511비행대의 호출부호였고, 쿠로스쟈쿠는 자위대 중부방면 항공총대가 사용하는 통합 호출부호였다. 어느 쪽이든 왕립공군 공중전투함에 직통으로 이런 요구를 날릴 위치가 아니었다. 정상적인 명령계통에서 분리되어 독자행동을 하는 중이라는 증거였다.
대잠초계기는 너덜너덜한 공중전투함을 상대로 위협적인 근접비행을 감행했다. 여차하면 동체 충돌을 감행해서라도 이쪽에 타격을 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나는 빠르게 비어가는 아츠기 항공기지를 지나가는 눈으로 훑었다.
‘방사능 물질의 색채는 없나.’
핵을 맞을까 봐 걱정한 게 아니다. HMS 아비터는 지금 도시 상공에 떠있으니까. 다만 내가 나중에라도 노획할 만한 물건이 있을지 확인해봤을 따름.
무전을 보내오는 건 자위대만이 아니었다.
「트라운서가 아비터에! 트라운서가 아비터에! 귀함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제기랄,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응답 좀 해라!」
HMS 트라운서로부터 거듭 들어오는 무전. 주변 공역에선 항공자위대와 영국 왕립공군의 전투기들이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언제 무력충돌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너덜너덜해진 공중전투함의 함교엔 들어오는 무전에 응답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다. 사망자는 많지 않았지만, 생존자들의 상태가 성하지 않은 탓이었다. 다쳤거나, 미쳤거나, 정신을 잃었거나.
함선의 상태를 나타내는 콘솔 화면은 핏물에 젖어 붉은빛을 발했다. 이 붉은 화면에 적색의 경고창이 중첩되었다.
「퍼지(Purge). 퍼지. 구획 분리 경고.」
침입자에게 인간혼합물 확장회로의 지배권을 강탈당할 위기에 처하자, 섀빙턴이 최후의 수단으로 확장회로의 물리적인 분리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전투함의 절반 가량을 산산이 분해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활로를 뚫겠다는 발상.
나는 초조함과 짜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순순히 눌려 뒈지기나 할 것이지……. 누가 원탁의 대마법사 아니랄까 봐 쉽게 죽어줄 생각을 않는다.
「아아아아앙-!」
이젠 배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몰골이 된 함선 표면이 거칠게 물결치더니, 덩어리진 확장회로 뭉텅이들이 긴 아기 울음소리들을 남기며 떨어져나갔다. 한순간에 잃어버린 확장회로의 생체질량은 적게 잡아도 톤 단위였다.
비록 이쪽이 영혼을 다루는 마법의 거장 크로우허스트의 계승자라고는 해도, 이런 손실이 반복되면 영혼들의 누더기를 기워 보수하는 데 한계가 있다.
나는 내가 장악한 확장회로를 최대출력으로 가동하여 전투함을 수직으로 처박았다. 함선 전체에 각성능력자도 견디기 힘들 만큼 파괴적인 중력가속도가 걸리고, 너덜거리던 장갑판들이 거칠게 떨어져나갔으며, 함교에선 즉시 자동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Too low! Terrain! 2450ft! Too low! Terrain! 2200ft! Whoop whoop! Whoop whoop! Pull up! Pull up! Terrain! 1750ft!」
확장회로 저편에서 내 대적자가 기겁을 하는 게 느껴진다. 벼랑 끝 전술에 말린 섀빙턴은 다시금 원래의 싸움으로 끌려왔다.
덕분에 확장회로에 대한 지배력을 조금 상실하긴 했지만, 계속해서 이대로만 가면 승리는 결국 내 것이 될 게 확실했다.
「300ft! 300ft!」
고도가 한참 떨어진 전투함 아래에서는 요코하마 시민들이 자지러지는 비명들을 질러댔다. 장갑이 많이 벗겨져 살덩어리 생체전함의 면모를 드러낸 아비터의 모습을 보고 혼절해버리는 자들도 눈에 띄었다.
전투함 밖 가까운 하늘에서는 섬광이 번뜩였다. 충격파가 HMS 아비터의 함체를 두들긴다.
「콰콰쾅!」
폭발을 일으킨 것은 위협적인 근접비행을 일삼던 해상자위대 대잠초계기 후론티아-2였다. 폭발의 원인은 HMS 트라운서의 레이저 공격. 고출력 레이저 광선은 초계기를 단숨에 관통하여 무장창에 실린 어뢰와 폭뢰들을 유폭시켰다.
트라운서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자위대와 왕립공군 사이에 즉각적인 충돌이 빚어지진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레이저가 대잠초계기를 너무 순식간에 파괴해버린 탓에 공격사실을 증명하기가 까다롭다는 점. 후론티아-2가 상부의 명령 없이 독자행동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싸움을 걸기엔 멀쩡하게 남아있는 한 척의 공중전투함이 너무 강력하다는 점 등.
이유가 무엇이든 나로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다.
궁지에 몰린 마스터 섀빙턴은 대응이 점점 더 비효율적이고 난잡하게 변해갔다. 아무리 대마법사의 기량이 있다 한들, 그 기량을 대범하고 침착하게 발휘할 정신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로더필드가 죽어서 다행이지.’
만약 내게 맞서는 대적자가 섀빙턴이 아니라 로더필드였다면 지금처럼 수월하게 승기를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영혼을 다루는 능력이 내가 더 우월하면 뭐하나. 대마법사의 탈을 쓴 그 야만전사 새끼는 정말로 같이 죽어보자고 전투함을 꼬라박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으면 ‘역시 나는 우월하다’고 웃음을 터트렸을 테고.
전투함 내부 곳곳에 수백 수천의 눈알들이 기습적으로 만들어졌다.
천장에서, 벽에서, 그리고 피와 고름이 냇물처럼 흐르는 바닥에서. 내장재가 떨어져나간 곳이라면 어디든 나타나 갈라지는 눈꺼풀들.
황금기의 눈을 가진 나와 달리, 전투함 내부 상황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는 섀빙턴이 조립식 아기들에게 눈을 빚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목적은 아마도 자기가 보낸 기사단 공격조의 소재 파악. 그리고-
“으아아아악! 아악! 아아악!”
무수한 아기 눈알들의 주시를 받게 된 영국군 생존자들이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발작을 일으켰다.
각성능력자들의 위치쯤은 확장회로의 마력장 감지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 그 능력자들이 원탁의 기사인지 아닌지는 눈으로 보아야 비로소 알 일이다. 또한 마법을 정확하게 투사하려고 해도 시각적인 포착이 필요했다.
섀빙턴은 부상을 당한 자기 기사들을 치료하고 그들을 다시 집결시키는 한편, 영국군 생존자들을 죽여 시체인형으로 만들고자 하고 있었다.
지금 같은 열세에서 행하기엔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짓.
그러나 급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일수록 삽질을 하기 쉽다. 전쟁은 잘 싸우는 자가 아니라 삽질을 덜 하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섀빙턴의 지배력을 밀어내어 다수의 인형 제조 시도들을 좌절시켰다. 이어질 HMS 트라운서와의 교전을 고려하면, 나 역시 인형으로 삼을 인간들을 일정 수 이상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확장회로에서의 힘겨루기가 종막에 들어섰다. 흩어지고 부상당한 기사들은 싸움이 끝나기 전엔 내 위치에 도달하지 못할 게 확실했다. 내가 확실하게 승기를 잡은 지금, 기사들이 온다고 딱히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섀빙턴은 다시금 구획 분리를 시도했으나, 확장회로에 대한 지배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에서는 무의미한 발악에 불과했다. 사냥이 막바지에 이른 만큼 일이십 톤 안팎의 질량 상실은 감내 가능한 범위였다.
목전으로 다가온 승리가 내 본신의 혈관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머리가 뜨거워져서 판단력이 저하될까 봐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단순히 죽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혼합물의 외피에 돋아나는 귀들이 사냥감을 향해 내달렸다. 나는 사냥꾼으로서 사냥감이 내는 최후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 소리를 뇌리에 새겨두면,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온 악몽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
섀빙턴의 육성이 아기들의 귀로 들어왔다.
“항복하겠다! 항복하겠어! 그러니 제발 그만해라!”
원탁의 마스터는 창백하게 질리고 땀에 젖은 낯으로 숨을 헐떡이며 소리 질렀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뿐이지! 크로우허스트 경! 나를 포로로 잡아라! 원탁의 마스터에게 어울리는 대우를 해준다면, 나 역시 사람의 아들의 명예를 걸고 신의를 지킬 것을 서약한다! 듣고 있나?! 나를 포로로 잡으란 말이다!”
대마법사를 심문할 기회가 유혹적이기는 하나, 곧바로 또 다른 대마법사와의 싸움을 치러야 하는 입장에서 전투함 내에 불안요소를 남겨둘 순 없었다.
나는 묵묵히 보이지 않는 지배력 확장을 이어갔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던 섀빙턴은, 이윽고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는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추악한 배신자에게 또 다른 의인이 스러지는구나. 빛과 진리의 적들은 어찌 이리도 강대하단 말인가…….”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유언이 될 말을 읊었다.
“오, 인류여! 그대들의 미래가 어둡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