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고래사냥 (13)
내게서 공중전투함들의 배치계획 첩보를 처음 전달받았을 때, 그레이스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일군의 해적함대 충각선단을 필리핀과 파푸아 뉴기니를 향해 출항시킨 것이었다.
필리핀과 파푸아 뉴기니는 예전부터 악마숭배자들이 교세를 넓히기에 적합한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나라들이다. 지역사회의 배타성과 고립도가 높고, 원시적인 주술신앙이 뿌리 깊게 박혀있으며, 중앙정부는 극도로 부패했거나 무력하여 지역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해적함대가 비밀스러운 기항지들을 확보한 것 자체는 썩 놀라운 일이 못 되었다. 아마 칠각기사단이 예전부터 밀수와 도피를 위해 건설한 선교거점들이었을 것이다.
해적함대 원정전단은 3세대와 4세대 마르깝 다압(충각선)이 주력이었다.
3세대 이후의 충각선들은 통신 기능이 강화되었다. 르완다 대통령이 주술사 왕의 제후가 되면서, 관련 기술력과 생산능력을 보유한 르완다 기업(마라 그룹)이 주술사 왕의 군대에 통신장비를 대량으로 공급하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르완다 기업의 기술력이라는 게 대단치는 않다. 핵심부품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제조기술도 다른 기업들이 보유한 특허들을 정식 계약을 통해 이용하는 것뿐이다. 즉, 무역제재를 당한다면 당장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되어있다.
그러나 주술의 장막에 대한 무역제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전적으로 미국 대통령의 공로였다.
「무우-여억-제에-재애? 우리가 왜 그렇게 손해 보는 짓을 해야 합니까?」
샤히디의 가장 유명한 SNS 팔로워는 공식석상에서 당당하게 턱을 들어올렸다.
「그건 오직 유럽에게만 도움이 되는 일이에요. 그들은 정의를 핑계로 정치·경제·외교 등의 분야에서 교묘한 이득을 보고 싶어 하죠. 유럽 국가들의 이기주의는 이제껏 그들이 자행해왔던 안보 무임승차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내가 한 가지만 물어보죠. 우리가 중국에 무역제재를 가할 때, 그들은 우리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까?」
이어 대통령은 몇 장의 편지를 자랑스레 들어 보였다. 그레이스가 주술사 왕의 이름으로 보낸 친필 서한이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술사 왕이 나에게 보낸 멋진 편지입니다. 그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고, 우리가 호혜적인 관계로 발전하기를 바란다고도 적었습니다. 미국이 먼저 적대적으로 행동하지만 않는다면 아프리카 연근해를 항해하는 미국 선박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내용도 있고요.」
「내 생각엔, 그와 친구 관계가 되는 게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전함 미주리의 전쟁포로 송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든, 우리 미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든 말이죠.」
미국 대통령은 예전에도 북한 김○은 국무위원장으로부터 ‘멋진 편지(Nice note)’를 받았다며 자랑을 했던 전적이 있다. 이번엔 아예 실물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야당으로부터 외교문서를 함부로 공개했다는 비난이 나오자, 대통령은 입술을 삐죽이며 비아냥거렸다.
「당신들은 주술사 왕의 왕국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이게 어떻게 외교문서가 됩니까? 하나만 하십시오, 하나만! 위선자들!」
그레이스가 편지에 당신이 좋다고 쓴 건 농담이 아니었다. 그레이스는 내게 이 대통령의 광기가 사랑스럽다고까지 말했다.
「주술사 왕의 왕국은 저렴한 노동력과 잠재력이 큰 시장, 그리고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훌륭한 무역상대입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다소 불행한 일들이 있긴 했어도, 우리는 아마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유럽이나 중국보다 더 좋은 친구가 말이죠.」
「우리는 함께 돈을 벌고 함께 부유해질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을 주는 관계엔 자연스럽게 평화가 깃들게 되어있어요. 이것이 바로 미국의 정신입니다.」
미국 대통령의 파천황적 행보는 혐오스러운 섬나라를 포함한 유럽 각국의 정상들이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내게는 아주 형편이 좋은 흐름이었다.
이런 흐름을 타고 개발된 4세대 마르깝 다압엔 고정포탑 곡사포나 대함미사일 같은 본격적인 무장들이 탑재되었다. 더는 충각이 주 공격수단조차 아니게 된 것이다. 대함미사일은 겨우 한 발이 실릴 뿐이지만, 반잠수정 선단이 대함미사일을 갈기고 도망칠 능력을 확보했다는 건 유럽 국가들에게 몹시 골치 아픈 일이었다.
해적함대의 곡사포와 대함미사일은 이란에서 들여온 밀수품들이었다. 즉, 아직은 숫자가 그리 많지가 않다. 이것만으로도 그레이스는 나름 귀중한 전력을 파견한 셈이다.
거기에 이어, 이번에는 핵 이야기까지 나왔다.
화상 속의 그레이스는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었다. 화면 너머에서 사륵사륵 소리가 전해져온다. 나는 짧게 침묵한 후에 질문했다.
“파란 고양이를 여기서 쓰자는 말인가?”
「음, 쓸 기회가 생긴다면?」
“핵폭탄의 통제권을 나에게 넘기겠다고?”
「그래야 기회가 생겼을 때 놓칠 일이 없겠지?」
“과연 그런 기회가 생기리라고 보나?”
「이미 로더필드를 죽인 당신이잖아. 그런 당신이라면 남다른 감각으로 기회를 포착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당신이 바란다면 이틀 이내로 수령할 수 있을 거야.」
“이틀?”
「처음부터 해적함대 원정군에 실어 보냈다는 뜻이야. 물론, 고양이가 마지막 은신처를 벗어나느냐 마느냐는 당신의 결정에 달려있는 일이지만.」
“…….”
「부담스러워할 것 없어. 우리는 동맹이고, 당신은 그동안 거듭해서 동맹의 신의를 증명해왔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땐 내게 폭탄을 돌려주면 되는 거잖아? 카드를 쥐고 있어서 나쁠 게 뭐가 있겠어?」
이 바다에서 핵폭탄은 계륵이다. 하늘에 떠있는 두 마리 검은 고래들에게 핵분열 작살을 꽂아 넣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연합임무부대의 방공망만 놓고 봐도 돌파하기 어려운 장벽인데, 검은 고래들의 주변엔 독립적인 방공구역이 설정되어있기까지 하다. 이 방공구역에 대한 왕립해군의 방어는 편집증적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렸다.
그나마 긍정적인 요소를 찾으라면, 지금은 검은 고래들이 시현(示現)을 목적으로 비교적 낮은 고도- 대략 1천 피트 언저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 정도가 있겠다.
그러나 공격자의 입장에선 그 낮은 고도조차도 까마득한 간격이다.
파란 고양이는 핵무기 치고는 위력이 많이 약한 축에 들었다. 게다가 지금은 노후화로 인해 설계위력을 다 내지도 못하는 상태다.
예상되는 폭발화구의 반경은 최대로 잡아도 70미터 이내. 충격파에 의한 파괴반경은 2백 미터까지 잡을 수 있겠으나, 공중전투함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대마법사를 죽이려면 지근거리에서 고양이를 기폭시켜야 한다.
8면 고정 이지스 레이더의 탐색능력, 그리고 확장회로에 연결된 대마법사의 마력장 감지능력을 감안하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레이스라고 해서 이런 사정들을 모를 리는 없다. 나는 그레이스가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수중에 있는 유일한 핵무기의 통제권을 넘겨준다는 건, 일단은 대단한 신뢰의 표현이지 않은가. 그레이스는 폭탄이 어차피 제 수중으로 돌아오리라는 생각으로 계산적인 호의를 베풀어 내 경계심을 흐려놓으려는 게 아닐까.
마녀의 눈이 짓궂게 가늘어졌다.
「당신, 뭔가 상처가 되는 눈으로 바라보는걸?」
“기분 탓이다.”
「글쎄? 아내로서 남편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맞춰볼까?」
기분 나쁘게도, 그레이스의 입에서는 내 속내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경태 녀석에게 속내를 읽혔을 때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불쾌감이 엄습했다. 이 와중에 사륵사륵 하는 의복의 마찰음은 아직도 느리고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그레이스의 말을 잘랐다.
“그만. 내가 사과하지. 아니라고 해도 안 믿을 테니.”
「굳이 사족을 붙이는 게 귀엽네. 그리고 사과할 필요 없어. 난 당신이 그러는 게 오히려 즐겁거든. 뿌리 깊은 동질감이 느껴져서 말야.」
“동질감?”
「응, 동질감. 난 당신에게서 나와 비슷한 점을 발견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
이렇게 말하면서, 그레이스는 막 풀어서 손 집게로 들고 있던 브래지어를 보란 듯이 툭 놓아버렸다. 통화를 갓 시작했을 때부터 한 꺼풀 한 꺼풀 느리게 옷을 벗은 탓에, 이제 남은 거라곤 국부를 가리는 속옷과 스타킹이 전부였다.
“매번 그러는 것도 슬슬 질릴 때가 되지 않았나?”
「설마. 매 순간 재미있어. 할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고.」
“퍽이나 그렇겠군.”
「진짜야. 여기 젖어있는 걸 봐. 아, 이런. 어느새 소파까지 물들어버렸네.」
“이만 일 이야기로 돌아가지.”
「오늘은 매도를 해주지 않는 거야? 아니면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봐준다거나.」
“나는 인간이고, 학습이라는 것을 한다.”
그레이스는 소리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해적함대 원정전단의 갑작스러운 일본 남방해역 출몰에 당위성을 갖춰주기 위하여, 그레이스는 주술사 왕으로서 신탁을 겸하는 왕명을 선포한 상태였다.
「왕은 이르노라. 일본인들이 와다츠미키요우타마히코라고 부르는 고래는 위대한 바다 정령의 화신체다. 정령의 죽음은 이 세상의 운명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리니. 정령을 해하여 인간과 자연의 균형을 파괴하는 자들에게는 재액이 있을 것이며, 정령을 지키고 균형을 수호하는 자들에게는 내세에서의 영원한 복락이 있을 것이다. 짐의 가르침을 따르는 주술사와 전사들은 이를 명심할지어다.」라고.
주술사 왕의 가르침과 명령은 전 세계에 그 영향력이 미친다. 주술사 왕의 자발적인 추종자들이 전 세계에 분포하는 까닭이다.
나는 그 추종자들 가운데 당연히 극단주의 환경전선의 일각이 포함되어있으리라 여겼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너는 오래전부터 녹색 테러리스트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고 추종자를 늘리는 데 힘써왔을 거다. 그렇지 않은가?”
그레이스는 선선히 인정했다.
「맞아.」
“가능하다면 그쪽의 정보를 좀 공유해줄 순 없겠나?”
「아, 그거. 그렇잖아도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어.」
“이게 준비에 따로 시간이 필요한 일인가?”
「자기. 날 너무 부끄럽게 만들지 마. 남편의 밥상에 완성되지 않은 요리를 올리는 건 현숙한 아내의 수치란 말이야.」
그레이스는 제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다양한 국적의 분산된 조직들이 국가 차원의 감시를 피해 연락망과 연합전선을 구축한다는 게 원래 쉬운 일이 아니잖아? 그게 타지로 원정을 나가서 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내가 직간접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단체는 일부에 불과하고.」
“흠…….”
「게다가 연락망 구축엔 현지 협력자들의 도움이 필수적인데, 당신도 알겠지만 지금의 일본에선 그런 협력자들을 찾기가 어려워. 사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다들 잔뜩 위축되어 있거든. 그러니 조금 시일이 걸릴 수밖에.」
“이해했다. 재촉하는 꼴이 되어서 미안하군.”
「아니야, 아니야. 당신으로서는 당연한 요구지. 우리는 전쟁을 하는 중이고, 적들의 행동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걸.」
전 세계의 행동주의 에코 파시스트들은 CTF-W2의 활동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포경 문제를 두고 일본정부와 오래전부터 악연으로 엮여온 씨 셰퍼드만 하더라도 이미 총력을 다해 고래사냥을 저지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니까.
그들이 일으킬 혼란을 해적함대의 공격으로 증폭시킨다면, 희박한 확률이지만, 그레이스가 말했던 기회를 포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건 어디까지나 기회를 만들 가능성이 보일 때의 이야기이긴 하다만, 유사시 해적함대 원정선단은 완전히 소모해버려도 좋은가?”
「얼마든지. 당신에게 주는 내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써버리도록 해.」
나는 투자상품의 위험을 고지하는 은행원의 심정으로, 반쯤 의무감에 가깝게 말했다.
“실패하면 아깝지 않겠나? 뭔가를 시도해보기도 전에 핵공격 한 번으로 다 지워져버리는 수가 있다.”
반잠수정 충각선이니 뭐니 해봐야, 상대는 고래사냥을 위해 세 자릿수의 핵무기를 준비한 다국적 정규해군 연합함대다.
해적들에게 핵공격을 가하는 건 화력과잉을 넘어서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을 만한 짓이지만, 전장의 혼란이 가중되어 공중전투함에 대한 보호에 균열이 생긴다 싶으면, 영국 놈들은 지체 없이 핵을 쓸 공산이 크다.
보유한 핵무기의 형태가 폭뢰와 어뢰로 제한되고, 원탁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 정작 공중전투함에는 핵무기를 탑재하지 않았으나, 이런 사실들이 딱히 이쪽의 승산을 높여주는 건 아니다.
이는 내가 해적함대 원정전단의 전술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이유였다.
이렇게 기대치가 낮은 데 반해, 예상되는 손실은 문자 그대로의 전손(全損)이다.
해적함대에서 충각선보다 귀한 것은 충각선에 탑승하는 각성능력자들이다. 이들은 충각선이 파괴될 경우 선창 해치를 열고 수중으로 탈출하는 게 보통이었다. 간단한 추진 장비만 챙겨도 어지간한 어뢰 이상으로 빠른 수중기동이 가능한 발화능력자들은, 해적함대가 지닌 끝없는 생명력과 빠른 숙련도 상승의 원천이다.
그레이스가 이 바다에 허술한 초짜들을 보냈을 리도 없는 만큼, 아무런 이득도 없이 베테랑 해적들만 갈아버리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레이스는 간결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상관없어.」
그러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당신이 판돈을 걸어보기로 했다면, 그건 분명 걸어볼 만한 판이 만들어졌기 때문이겠지. 부부는 원래 성공만이 아니라 실패도 함께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