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고래사냥 (4)
고작 며칠 사이에, 수연은 내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여 항공사 인수에 가속도를 붙여놓았다.
인수합병 양해각서를 체결하고서 본계약으로 넘어가기까지의 가장 큰 난관은 회생법원의 승인과 채권단의 동의다.
이 중에서 회생법원의 승인은 일찌감치 받아 놨다. 채권단 역시 부채탕감 및 출자전환 비율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을 뿐 인수 자체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발을 빼기라도 했다간 몇 년을 더 표류할지 모르는 노릇이고, 매물의 가치는 표류를 거듭할수록 떨어지게 되어있으며, 기약 없는 기다림 끝에 나타난 새로운 인수희망자가 GHSS 컨소시엄만큼 견실한 업체이리라는 보장도 없다.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협상에서 양보를 해주려면 그만한 구실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쪽이 뭔가 문제를 감추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사기 십상이므로.
내게서 지시를 받았던 당일, 수연은 실무진으로 하여금 언론에 입장발표를 내도록 했다.
「세계 항공업계의 경영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격변하고 있습니다. 비록 AAR이 국내 2위의 항공사라고는 해도, 오랫동안 투자가 집행되지 않은 탓에 시대의 흐름에 많이 뒤처져 있는 상태죠.」
「이런 상황에서 흘러가는 하루하루는 그만큼 줄어드는 골든타임과 붉어지는 블루 오션을 의미합니다. 인수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AAR의 성장한계가 낮아질 거라는 말입니다.」
「우리 컨소시엄은 결코 어중간한 각오로 AAR 인수에 나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분야에서든 세계 정상의 자리를 노릴 것이며, 최고가 되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시작을 안 하는 게 더 나으리라고 믿습니다. 왜냐면 지금은 너무도 많은 기회들이 흘러넘치고 있는 시대니까요. 같은 자원과 노력을 들여 어떤 분야의 정점에 오를 수 있는 기회들이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AAR의 인수와 경영정상화를 앞당기기 위해 대승적인 양보를 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 오랫동안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임직원들의 고통을 고려한 결정으로서-」
최고가 되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시작을 안 하겠다는 말엔, 이 양보로 협상이 타결되지 않을 경우 인수 의사를 철회할 수도 있다는 암시가 담겨 있었다.
발표 직후 청와대 비서실에서 급하게 연락이 오는 해프닝이 있긴 했어도, 인수 협상은 순조롭게 급물살을 탔다.
3천억가량의 무상 감자로 인수가격을 낮추고, 전체 부채액수의 10%를 탕감하며, 나머지 부채에 대해서는 단 1년의 거치기간만을 두고 5년 분할로 상환하는 조건으로 타결을 목전에 두게 된 것이다. 출자전환 따윈 아예 요구하지도 않았다.
김재환이는 내게 업무보고를 빙자한 화상전화를 걸어 보고의 말미에 우는소리를 해댔다. 조금만 더 시간을 줬으면 부채의 절반까지는 넉넉하게 후려칠 수 있었던 매물이었다면서.
「그간 재벌들이 나랏돈 들어간 기업과 자산을 날로 처먹는 게 얼마나 부러웠는지 아십니까……? 똑같은 일을 비슷한 규모로 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우리가 슈퍼 갑이고 정부까지 우리 편을 들어주는 협상이었는데…….」
김재환이가 우는소리를 하는 만큼 정부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이는 호들갑으로 가득한 언론의 보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속보를 전해드립니다. AAR의 인수합병이 사실상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소식입니다. 이대로 협상이 타결되면 AAR은 3년에 걸친 표류 끝에 새로운 주인을 맞게 되는데요, 백 퍼센트 고용승계를 보장받은 AAR 노조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중입니다.」
「……장기간 매수자가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 경쟁 항공사들의 저가 공세로 폐업 및 자산매각 이야기까지 나왔던 AAR. 워낙에 악성매물이어서 부채의 절반이라도 받아낼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알려진 협상 내용에 따르면……」
「……역대 최단기간 M&A 기록을 경신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번 인수는, 그 성과와 속도 양면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가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입니다. 정부가 추진해온 21세기형 수렵경제 확장의 첫걸음이 앞으로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이 보도가 나가기 무섭게, GHSS 컨소시엄의 대관(對官) 창구는 정부와 대립하던 제1야당 관계자들의 잦은 전화와 방문에 시달렸다.
그들이 보기에 이번 인수는 이해가 가지 않는 구석이 많은 것이었다. 김재환이가 괜히 우는소리를 했던 게 아니니까.
「혹여나 정부로부터 모종의 협박을 받거나 한 건 아닙니까?」
「무리한 요구를 받은 게 있다면 부디 솔직히 말씀해주십시오. 우리 당은 여러분의 편입니다. 위선적인 현 정권이 어떤 보복을 하더라도, 우리 당이 모든 것을 걸고 마지막까지 여러분을 보호해드리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인수와 기업공개를 늦춰주십시오. 정권이 교체되기만 하면 훨씬 더 좋은 조건으로 사업을 추진하게 해드리죠.」
「이렇게 큰돈이 걸린 사업을 조급하게 추진하시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이렇듯 애타게 매달리던 제1야당 관계자들은, 우리의 태도가 영 협조적이지 않자 넌지시 위협을 가하기까지 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속도전의 이면에 현 정권과의 밀약과 밀월관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현 정권은 전망이 그렇게 밝지 않아요. 집값도 올라, 물가도 올라, 실업률도 올라. 이번 일이 현 정권에게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그래봐야 언 발에 오줌 누기일 뿐입니다. 이러다 세상이 바뀌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는지…….」
언제나 그렇듯이, 좌우를 불문하고, 정치인들의 아픈 마음을 치료해주는 특효약은 잘 세탁해서 추적을 불가능하게 만든 현금이었다. 수연 녀석은 돈을 먹여서 설득하겠다며 내 허락을 구했고, 나는 액수를 보고서 그러라고 승인을 내주었다.
주술사 왕과 지하디스트들의 공중 전력을 조기에 건설하기 위한 지출이라고 치면 딱히 아깝지도 않은 돈이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다소 특이한 뇌물이 덤으로 하나 건너가기도 했다.
나는 GHSS 컨소시엄의 창구를 찾았던 제1야당 관계자가 김연화의 친필 부적을 받고 몹시 기뻐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예전이었다면 황당한 일이었겠으나, 인증서가 첨부된 김연화의 부적은 현금화가 용이한 고가의 선물이었다.
부적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고.
‘정치인들은 의외로 미신에 약하단 말이지.’
마법이 돌아오기 전에도 내가 권력을 쥘 상(相)이냐며 역술인을 찾고, 선거에서 부정이라도 탈까 싶은 마음에 무속인들의 조언을 구하던 게 이 나라의 나이 지긋한 정치인들이다.
돌아가는 꼴을 보던 경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어……. 이거 혹시, K-맥아더 아줌마를 데려와서 여야 중진들에게 말 좀 잘해달라고 부탁했으면 돈 한 푼 안 쓰고도 끝날 수 있었던 일 아닐까요? 이를테면 그 뭐냐, GHSS 컨소시엄을 건드리면 대통령 선거에 액운이 따를 것이다! 라고 겁을 준다거나.”
“…….”
나는 경태의 말에서 설득력을 느끼는 나 자신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라즈베리 프로젝트는 완성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개미 왕국의 확산과 그에 따른 질병의 확산을 규격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규격화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 운반용 캐니스터의 개발이었다.
운반용 캐니스터는 기본적으로 어디든 편리하게 설치할 수 있는 기능성 개미사육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기능성이란 개미왕국의 확장을 지연시키고 통제하는 기능을 말한다. 전라도 신안군의 섬에 배치된 내 부하들은 반복적인 실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내 기대를 뛰어넘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이 결과물을 활용하는 데엔 전문적인 운용 노하우가 필요했다.
먹이의 배합과 급여에 따른 개미 개체수의 증가 양상을 통계화된 데이터로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캐니스터의 외부격벽을 개방했을 때 개미의 개체수와 먹이의 공급량 조절에 따른 개미왕국의 확장속도를 계산할 수 있어야 하며, 어느 시점에서 오염된 먹이를 넣어줘야 가장 폭발적인 전염병 확산이 발생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내가 마력을 태우는 불로 섬의 지표 아래를 구워 실험을 초기화하러 방문했을 때, 수연 녀석이 임명한 실무 책임자는 자부심이 엿보이는 태도로 보고했다.
“이젠 개미왕국의 확장실험과 페스트 감염실험을 분리해도 무방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충분한 데이터를 축적했으니, 어느 쪽이든 독립적인 실내실험으로 대체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프로젝트의 보안성을 향상시키면서 회장님의 시간을 아끼는 방안이죠.”
이어 책임자는 지금부터 런던에 캐니스터 매설을 시작할 것을 권고했다.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있긴 하나 그 정도가 크지 않고, 미리 묻어놓더라도 단백질 공급량 조절을 통해 폭발 직전의 개체수를 장기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책임자를 칭찬해주었지만, 내적으로는 예전에 미뤄두었던 망설임이 전보다 더 강하게 머리를 드는 것을 느꼈다.
‘이 보험을 정말로 들어놔야 하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의 측면에서, 원탁의 제국주의자들과 나 사이엔 그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내가 그어놓은 자기만족의 선은 오직 나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나, 그렇기에 내게는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 중요함의 무게가 생존보다 무겁진 않다. 내 욕망에 존재하는 명백한 종착점은 제국주의자들과 나 사이를 갈라놓는 또 하나의 선이다.
그럼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망설임이 강해진 데엔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상황의 탓도 있었다.
그레이스가 동원할 주술사 왕의 군대. 그리고 내가 끌어다 박을 성전박이들의 군대. 이 두 거대 전투 집단의 규모는 내가 처음 런던 공략과 라즈베리 프로젝트를 구상할 때 계산에 넣지 않았던 바다. 당시 일이 이렇게 풀리리라 예상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애초에 보험이라는 게 쓸 일이 없어야 좋은 것이긴 하지.’
사람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며 살아야 한다. 보험의 본 기능을 고려할 때, 실제 사용 가능성이나 개인적인 호오와는 별개로 언제든 쓸 준비를 해두는 게 정답일 것이다.
나는 10월 두 번째 주와 세 번째 주에 걸쳐 일본의 고래사냥계획 진행 상황을 주시하며 본사에 머물렀다. 이는 다양한 프로젝트들의 지휘감독 및 마법사용 역량 향상에 투자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내가 집중한 일 중 하나는 「부패」의 숙련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엔 「부패」를 통해 마법적으로 합성되는 병원균을 대장균 이외의 다른 것으로 교체해보려는 시도가 포함되었다.
내가 최종적으로 목표하는 바는 개선된 부패술식의 코드를 외부확장회로에 집어넣어 독립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어쩌면 일본에 가서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를 기술.
내 발상을 들은 경태는 흥미로워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말하자면 다른 컴퓨터를 해킹해서 악성코드를 심어 넣는 거랑 비슷하군요. 자체적으로 바이러스를 만들어내는 악성코드를 말입니다.”
이는 내가 스승새끼의 지식을 계승하고 발전시켰기에 비로소 시도해볼 수 있는 일이었다.
여기에 참고가 될 만한 샘플이 바로 이탈리아에서 회수해온 시체인형, 윌리엄 웨스트버튼이었다. 인형술사가 제 손자를 재료로 제작한 이 고급스러운 시체인형은 마녀의 부패술식보다 효율적인 병원균 합성 코드를 내장하고 있었으니까.
내 수중으로 들어온 이래, 윌리엄 웨스트버튼은 줄곧 처음의 그 관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굳이 꺼내서 유지관리를 번거롭게 만들 이유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제는 꺼내야 할 때였다.
인형을 시험적으로 가동하고자 고른 장소는 조직 산하 병원의 음압격리구역이었다.
인형에 내장된 병원균 합성 코드는 독립적인 활성화가 가능하여 크게 위험한 구석이 없었다.
다만 내가 실험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생물학적 오염이 발생할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었으므로, 장기적으로는 이곳에 인형을 두는 편이 이로웠다. 내가 항상 인형을 끼고 다니기도 곤란한 노릇이니.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인형이 합성해내는 병원균이 페스트의 한 변종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미 더 강력한 페스트 균주를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는 입맛이 쓴 일이었다.
하기야, 생물병기로 쓸 만한 병원균 중에 가장 표본을 입수하기 쉬운 게 페스트이긴 하다. 이 인형이 제작된 시기를 고려하면 웨스트버튼에게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시체인형을 수술대에 올리자 PPE(개인보호장구)를 착용한 경태 녀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미처 생각을 못 했는데, 갈아입힐 옷이라도 준비해올걸 그랬지 말입니다.”
“뭐 하러?”
“고추 달린 놈한테 계속 여자애 옷을 입혀놓는 건 좀 변태 같잖습니까.”
“그냥 시체일 뿐이다.”
“이제 곧 말하고 움직이기 시작할 시체인걸요.”
“…….”
굳이 옷을 갈아입힌다면 나중에 환자복이나 가져다 입혀놓으면 될 것이다. 실험이 장기화될 경우 위생에 문제가 생길 테니까.
나는 경태의 말을 무시하며 제례검을 쥐고 「침식」을 회로에 올렸다.
시체인형의 제작에 쓰는 「소생」엔 주인(명령권자)을 각인시키는 과정이 포함된다. 이제부터 나는 그 각인을 초기화하고 내 각인을 새길 셈이었다. 이토록 완성도 높은 인형의 지배권을 실전 상황에서 빼앗아오는 건 불가능해도, 시간을 두고 회로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을 선행한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
시체인형을 만드는 기술로는 내가 죽은 웨스트버튼을 따라갈 수 없으되, 이미 완성되어있는 인형의 영혼과 회로에 간섭하는 기술은 내 쪽이 웨스트버튼을 포함한 그 어느 대마법사보다도 우위에 있을 것이다.
덜컹-!
회로에 대한 간섭을 개시하자, 인형 윌리엄의 몸이 순식간에 가사상태에서 벗어나며 괴기스러운 움직임을 보였다. 팔다리에 구속구를 채워놓았으므로, 인형은 자연히 허리가 위로 휘어지는 자세를 취했다. 인형이 입을 쩍 벌리고 번쩍 뜬 눈으로는 흰자위를 드러내니 경태가 다시금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오우. 이 진한 엑소시스트 감성…….”
덜컹덜컹덜컹덜컹-!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발작의 격렬함을 더해가던 인형은, 내가 십여 분에 걸쳐 각인 갱신을 완료한 시점에서 실이 끊어진 것처럼 푹 가라앉았다. 위로 말려 올라갔던 눈동자도 스르륵 내려와 제자리를 찾는다.
인형술사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완성했을 고급 인형은 여느 시체인형과는 완연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일단 뇌에 흐르는 신경신호부터가 질적으로 우월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는 안정적인 흐름. 이것만 보더라도 이 인형의 정보처리능력과 명령인식능력은 다른 인형들보다 한참 우위에 있을 게 분명했다.
초점이 잡힌 눈을 깜박이던 인형은, 눈알을 옆으로 굴려 나를 보더니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할아버님?”
할아버님이라.
생전의 기억을 재료 삼아 유사 지능을 구축해놓은 인형에게 있어 주인이란 곧 할아버지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 호칭엔 적잖이 거부감이 든다. 나는 잠시 생각한 끝에 기억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 법한 명령을 내렸다.
“가주님이라고 불러라.”
“우리 가문의 가주님은 할아버님이에요, 할아버님.”
“그러니까 가주님이라고 부르라는 말이다.”
“예, 할아버님.”
“…….”
“그런데, 할아버님……이에요?”
저능아가 따로 없다. 뇌의 신경신호 흐름을 보고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인형술사 필생의 역작이라도 결국 시체인형은 시체인형인가.’
그래도, 이 정도 품질이면 아마 특정한 상황에 한해서는 살아 있는 사람에 가까운 말과 행동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인형술사에게나 가능한 경이로운 완성도였다.
“이상해요. 할아버님이 아닌데 할아버님이야…….”
인형의 표정에서 혼란은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각인의 작용이 있다 한들, 나는 인형이 기억하는 웨스트버튼과 너무 다르게 생겼으니까. 인형이 내 생김새와 내 목소리를 수용하는 데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아무래도 조금 더 무의미한 대화를 이어가야 할 것 같다.
혼란스러워하던 고급 인형 윌리엄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구속구로 인해 실패했다. 인형은 몇 번 더 팔다리를 움직여본 후 나를 응시했다.
“오늘은 이대로 하나요?”
“무엇을?”
“섹스요. 이대로는 자세가 안 나와요.”
수술실 한쪽에서 요란한 기침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이제부터 그런 건 하지 않는다.”
“왜요?”
“필요 없으니까.”
“필요가 없어요?”
“그래.”
“무슨 말씀이세요, 할아버님. 손자가 여장을 하고 할아버지에게 항문을 대줘야 한다는 건 귀족사회의 상식이잖아요?”
“…….”
인형술사 이 미친놈은 대체 뭘 만들어놓은 거지?
내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사레가 진정된 경태 녀석이 아연한 목소리로 괴상한 탄식을 내뱉었다.
“아이고…… 웨스트버튼 게이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