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409화 (409/561)

#43. 고래사냥 (2)

재정비를 위해 한국의 본사로 돌아온 나는, 회장 직무를 실질적으로 대행했던 수연으로부터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한 대면보고를 받았다.

이러한 대면보고는 본디 주요 간부들의 이반 징후를 파악하기 위한 절차이기도 했다. 역심의 색채라는 게 아무런 전조 없이 나타나는 건 아니니까. 대형 사고에 관한 하인리히의 법칙은 인사(人事) 관리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이 녀석은…….’

나는 내가 보는 앞에서 제 감정의 더께를 한 꺼풀씩 벗겨내던 수연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 본 적이 없는 수준의 탁월한 자기제어능력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상할 만큼 경계심이 들지 않아, 생각이 미칠 때마다 의식적으로 환기를 해줘야 할 지경이다.

수연은 내가 준 장신구들을 차고 있었다. 특히 윤혜원의 영육을 갈아 넣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처음 선물해준 이래 몸에서 떼어놓은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

내 응시가 길었던지, 수연이 머뭇거리며 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더듬는다. 무언가 묻은 게 있나 싶었던 모양. 일전에도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던 것 같은 기시감을 주는 광경이었다.

나는 모르는 척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없는 동안 수연이 국안부의 경감들에게 넘긴 첩보들 중엔 샤히디 그룹과 동 투르키스탄 이슬람 당(ETIM)의 협력관계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자문서에 첨부된 한 사진 속에서, 샤히디는 ETIM의 지하디즘 독립 운동가들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샤히디가 머금은 밝은 미소엔 흉중에 감춰둔 음습한 살의와 흉계가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우수한 민족지도자의 소양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기력이 그새 또 향상되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이 사진은 내가 샤히디에게 찍어 보내라고 지시했던 것.

내가 짠 시나리오 속에서, 샤히디 그룹과 ETIM은 예전부터 합동전선을 구축해온 관계여야 했다. 그래야 ETIM의 간부들을 차례차례 처단할 국안부의 경감들이 충분한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

두 무장단체의 밀회를 담은 사진은 한 장이 아니었다. 샤히디는 어차피 죽을 놈들에게 관대한 양보를 해주었고, ETIM의 간부들은 그 호의를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무기, 자금, 차량, 은신처, 주요 후원자들과의 만남 및 무장 조직원들의 합동 훈련 등. 이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다 사진으로 찍혀있다.

이 모든 사진들은 무명회사의 거래선과 내가 일찍부터 건설해온 위구르인 첩보망을 통해 입수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혹시 경감들이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나?”

내 물음에 수연이 차렷 자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오슈센 서기 생전부터 시작된 기만이잖습니까. 그들이 보기엔 그간의 투자가 성과를 거두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점입니다. 그들은 우리 조직의 역량에 환상을 품고 있으니까요.”

내가 광저우에서 위구르인들의 신병을 확보할 때, 가오슈센에게 둘러대었던 명분 중 하나가 바로 휴민트(인적첩보자원) 체계 건설이었다. 경감들 역시 이를 알고 있는 만큼, 현 시점에서 제공하는 첩보의 개연성은 충실하게 갖춰져 있는 셈이었다.

무엇보다-

‘사람은 믿고 싶은 것을 믿지.’

주식시장에서 세력의 작전에 당하는 개미들이 단적인 예다. 작전이 진행되면서 온갖 부정적인 징후들이 나타나지만, 이미 신앙 수준으로 편향되어있는 개미들의 인지는 그런 징후들을 맹렬한 공격성으로 거부한다.

그들은 주가가 폭락하고 나서야 비로소 꿈에서 깨어 현실을 직시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현실을 부정하는 부류도 많긴 하지만.

그러나 경감들의 입장에서 무명회사의 주가는 폭락할 일이 없다. 내 거짓된 대자들은 앞으로도 줄곧 기분 좋은 꿈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보고서엔 경감들이 전해준 중국 국가주석의 분노와 독촉에 대해서도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다.

경감들이 우리에게서 받아가는 사진들과 위구르 무장 독립운동단체들의 내부 동향들로 말미암아, 주석은 내가 후원하는 경감들만이 착실히 성과를 내고 있다고 믿는 중이었다.

이에 따라 경감들은 위구르 공포분자(恐怖份子/테러리스트)들에 관한 사안에 대해서는 주석에게 수시로 직보(直報)를 올리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기회는 기회이되, 주석의 채찍질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나는 보고서를 읽으며 말했다.

“샤히디에게 비통하게 우는 연기도 틈틈이 연습하라고 전해둬야겠군.”

“예?”

“그래야 ETIM의 독립운동가들이 죽었을 때 중국 주석의 복수심이 좀 해소되지 않겠나.”

“아.”

동지들의 잇따른 죽음에 비분강개하여 끝내 눈물을 쏟고 마는 샤히디의 모습은, 중국 주석에게는 복수심의 충족을, 해외 위구르 디아스포라에게는 슬픈 공감을 선사할 것이다. 후자는 샤히디가 ETIM의 잔여 세력과 오랜 지지기반을 부드럽게 흡수하도록 해줄 재료였다.

그 전까지는 계속해서 주석의 분노를 키워 감정의 낙차를 만들어놓아야 한다.

샤히디는 내 부하들의 PI(President Identity) 컨설팅에 따라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었다.

최근 일주일간 가장 반응이 좋았던 이미지 메이킹은 이것이었다.

「우리가 베이징 의거 당시 중국 주석을 공격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로 그를 공격하면 함께 있던 외국 정부 수반들이 덩달아 휘말릴 것이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의거를 개시하는 시점에서 그가 천안문의 누대에 올라있었던 까닭이었다.」

「나와 내 형제들은 무차별적인 학살과 파괴를 벌이는 테러리스트들이 아니다. 위구르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성전에 목숨을 바치기로 서약한 알라의 전사들이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전쟁과 무관한 나라들의 관계자들을 죽이기 싫었고,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을 훼손하기도 싫었다.」

「중국국가박물관에 화력을 투사하지 않은 이유도 이와 같다. 우리는 그곳으로 많은 인민해방군 생존자들이 도망쳐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나, 차마 그곳에 안치된 유물들을 훼손할 수 없어 그쪽으로는 포탄 한 발 총탄 하나조차 날려 보내지 않았다.」

「위구르 민족의 이름으로 성전을 수행하는 우리가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을 파괴한다면, 그것은 곧 위구르 민족이 온 인류를 대상으로 죄를 저지르게 하는 꼴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SNS를 통해 수행한 최근의 프로파간다 중 가장 뜨거운 호응을 얻은 부분이었다.

이에 한 무슬림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바미안 석불 파괴를 어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달았고, 샤히디는 다시 한 번 내가 붙여놓은 컨설턴트들의 지도를 받아들여 답변했다.

「우상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은 우상 그 자체가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알라께서는 우상을 파괴하는 것보다 그런 우상을 두고도 일체의 흔들림이 없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기뻐하실 것이다.」

「다시 말해, 믿음이 굳건한 자들에겐 그 석불이 그저 특이한 경관이자 관대하게 놓아두어도 무방한 역사적 조형물에 불과했을 터이다.」

「흔들리는 믿음은 길가의 돌멩이를 보고도 무너질 수 있다. 나와 내 형제들은 지난날의 탈레반이 그 석불을 파괴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던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저 SNS를 통해 짧은 입장을 밝힌 것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은 세계 각지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슬람 난민 갈등이 심각한 유럽의 진보언론들이 샤히디의 발언을 높이 평가했다.

「알림 샤히디 - 세상은 바로 이런 이슬람 지도자를 기다려왔다!」

「이슬람 신앙과 합리주의의 놀랍고도 아름다운 조화!」

「위구르 땅에도 봄은 오는가?」

중동 발(發) 난민 위기에 대한 유럽 진보진영의 이념적 지향은 이슬람에 대한 다원적 존중과 역사적 책임을 고려한 최대한의 난민 수용이다. 나날이 심화되는 종교 갈등과 난민 문제의 홍수 속에서 애타게 눈 돌릴 곳을 갈구하던 진보언론들에게, 샤히디는 자신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백마 탄 초인과도 같았다.

샤히디에 대한 지지가 뜨거워지면 뜨거워질수록 중국 국가주석의 속은 뒤집어졌다.

이 와중에 테러리스트들의 비공식적 후원자라고 해도 무방할 미국 대통령은 샤히디의 멘션에 다시 한 번 ‘좋아요’ 버튼을 눌러 중국 정부의 복장을 터트렸다. 항의를 받은 백악관 미치광이는 이번에도 존재조차 하지 않는 고양이 핑계를 대었다.

세간에선 「백악관의 고양이」가 관용어구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그 의미는 ‘상대를 조롱하기 위해 하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중국의 SNS 서비스에선 고양이 이모티콘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나는 국안부의 경감들을 통해 중국 주석이 원형탈모에 시달리고 있다는 무가치한 극비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정보가 아무 이유 없이 내게로 온 것은 아니었다. 경감들은 내게 다소 어이없는 부탁을 해왔다.

‘가능하다면 주술사 왕의 발모제를 구해달라니…….’

그레이스가 발행하는 기적태환권 레헤마 페드하(레페)는 주술의 장막 바깥의 세상에선 요즘 발모화폐라는 이명으로 불릴 때가 많았다. 미국의 어떤 돈 많은 대머리가 탄자니아로 가 레페를 환전한 후 탈모치료를 받고 돌아온 사건이 크게 화제가 된 까닭이었다.

주술사 왕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은 그것이 기적이 아니라 어떤 약의 효과이리라고 추측했다. 경감들이 내게 괴상한 부탁을 해온 배경이었다.

나는 보고서의 어느 한 부분에서 수연에게로 눈을 돌렸다.

“CIA 하청업자들 건은 좀 더 규모를 키워보자고?”

“예.”

“가능하겠나?”

“국안부 경감들의 협조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는 일의 순서를 조금 조정하는 편이 좋겠지요. ETIM 간부 하나나 둘 정도를 앞당겨서 처리해준다면, 숨통이 트인 경감들은 기꺼이 협력할 겁니다.”

수연이 보고서에 포함시킨 기안엔 CIA 하청업자들을 경감들의 1회성 공적으로 소모하지 말자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들을 경감들에게 넘겨 공적으로 삼는 것까지는 당초의 계획대로 진행하되, 우리 조직이 중국을 위한 2중 간첩 역할을 해준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신병을 재차 넘겨받자는 것.

이 경우 CIA 하청업자들을 등쳐먹을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그들이 찾아 헤매던 「이름 없는 회사」는 일찍부터 그들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있었고, 그때부터 그들을 역으로 감시해왔으며, 그들이 국안부에 잡혔음을 확인한 시점에서 국안부 고위직 꽌시를 활용해 거래를 하고자 접근한 것이다.

「너희는 이곳에서 살아서 나가는 대가로 얼마까지 지불할 용의가 있는가? 적어도 백만 달러보다는 더 많이 불러야 할 것이다.」라고.

작성한 사람이 사람인지라, 기안의 내용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수연 녀석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기안에도 적어두었습니다만, 우리에게는 그들과 거래할 재료가 많습니다. 중국 내부의 정보, 샤히디 그룹과의 연결, 그리고 전함 미주리의 포로송환 협상 중개까지. 특히 마지막 것은 CIA가 혈안이 되어 매달릴 만한 사안이지요.”

해적함대에게 나포당한 전함 미주리의 승조원들은 아직까지도 포로 상태로 남아있었다.

백악관 미치광이가 이 문제에 대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승조원 장병들의 가족들이 백악관 앞에서 무기한 시위를 이어가고, 이 시위가 수시로 방송에 나가는 건 미치광이로서도 무시하기 어려운 부담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해적제독은 미국의 협상 시도에 시종일관 미온적으로 대응해왔다. 해적함대의 기함이 된 미주리를 사실상의 불침전함으로 만들어주는 게 바로 고기방패 역할을 해주는 포로들의 존재였기 때문.

그레이스의 하나뿐인 동맹인 나는 그 송환 협상을 중개해줄 능력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수연의 기안은 그 부분에 주목한 것이었고.

“장기적으로는 하청업자들을 치워버리고 우리 스스로가 CIA의 주요 협력업체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특히 주술의 장막 너머에 휴민트를 구축하는 의뢰는 큰 파이를 가져올 수 있겠지요. 그레이스의 꼭두각시인 김연화와 2강 체제를 이루어 교차검증의 최소요건을 충족시킨다면 다른 모든 경쟁업체들을 도태시켜버리는 일도 가능합니다.”

우리가 오로지 중국의 내부정보만 흘려줄 경우 CIA도 이중간첩의 가능성을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게 아주 큰 해가 되는 샤히디 그룹 관련 의뢰를 수행하는 시점에서, CIA는 「이름 없는 회사」가 중국과는 별개의 독립적인 이익집단이라고 판단할 터.

중국과 관련성이 없거나 희박한 주술사 왕 관련 의뢰 역시 의심을 희석시켜줄 요소다.

그렇게 신뢰를 쌓다 보면 CIA의 주요 협력업체가 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예산을 아끼는 랭글리는 휴민트 분야에서 의외로 허술한 구석이 많은 집단이었다.

나는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내 말은, 네 업무 부담이 너무 오랫동안 과중한 상태로 유지되는 게 아니냐는 뜻이었다.”

“아…….”

“괜찮겠나?”

이렇게 묻자 수연은 찰나간 표정이 흔들렸다. 내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자, 수연은 빠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압니다. 그런 게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런 게 아니면?”

“…….”

뜸을 들이던 수연은 미세하게 낮아진 톤으로 말했다.

“형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제 삶의 유일한 보람입니다. 다만, 근래 들어 형님을 바로 곁에서 보필할 기회가 드물어진 듯하여 잠시 아쉬운 마음이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가.”

수연과 나 사이엔 짧은 정적이 감돌았다. 가만히 눈을 깜박이던 수연은 서너 호흡의 침묵 끝에 머리를 숙였다.

“별것 아닌 일로 신경 쓰시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잘 말해줬다.”

이 녀석을 본사에 두어 얻는 건 업무관리효율 향상, 그리고 조직 최상위 의사결정권자의 분산에 의한 리스크의 저감이다. 달리 말해, 일정한 업무효율 저하와 리스크를 감수하면 수연을 데리고 다니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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