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고래사냥 (1)
마르띠네즈 제독은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연락을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을 때, 나는 제독에게 한 가지 작은 선물을 추가로 안겨주었다.
“이게 뭐요?”
“보시면 압니다.”
하드케이스 서류가방을 건네받은 제독은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가방을 열어보았다.
가방 안에 들어있는 문서는 로스 제타스 북동부파의 통신내역을 인쇄한 것이었다. 거의 빨려 들어가다시피 내용을 살핀 제독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걸 무슨 수로 구하셨소?”
“약간의 행운이 있었다고 해두지요.”
“가짜…… 일 리는 없겠군.”
“내가 뭐 하러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하겠습니까.”
지난날 잠수정 설계도를 거래하러 휴스턴의 동쪽 근교를 찾았을 당시, 나는 ‘군수장교’ 리까르도의 집 응접실에 앉아 북동부파의 위성통신 주파수와 그들의 암호체계를 베껴놓았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흘렀으나, 이번 멕시코 행을 결정하면서 확인해본 결과 그들은 여전히 같은 주파수와 같은 암호체계를 사용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값비싼 시스템을 갖춰놓아도, 쓰는 사람들의 보안의식이 철저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이렇게 누수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누수의 원인이 투시능력을 가진 대마법사라는 점은 규격 외이긴 하지만.
이 사실을 안 경태는 키득거리며 이렇게 평했다.
“딱히 놀라울 것도 없죠, 뭐. 핵 가방 암호가 오랫동안 0 여덟 개였던 나라도 있는 마당에……. 그 왜 한국군 최고 기밀이 1q2w3e4r!라는 농담도 있잖습니까.”
나와의 거래 이후, 북동부파의 세력은 지속적인 성장과 확장을 거듭해왔다. 대분열 이래 저마다 자기네야말로 로스 제타스의 적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해온 3대 파벌은, 이제 북동부파를 중심으로 한 재통일을 앞두고 있었다.
3대 파벌의 하나인 올드 스쿨(라 비에야 에스쿠엘라)은 오랜 갈등과 교섭 끝에 북동부파의 수위권을 인정하기로 했고, 나머지 하나인 브라보 그룹(그루포 브라보)은 전방위적인 패배를 목전에 둔 상태.
이런 북동부파의 비밀통신에 대한 감청은 팔랑헤 데 후앙이 멕시코 북동부에서 대중의 지지를 확보할 재료를 제공해줄 수 있었다.
나는 제독에게 말했다.
“당신께서 앞으로 일을 잘 해주시면 괜찮은 건수가 걸릴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넘겨드리겠습니다. 그걸 그때그때 당신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먹여서 그들이 앞으로도 당신에게 충실한 당여(黨與)로 남도록 하십시오.”
이는 내가 국안부의 세 경감들에게 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일이었다.
내 말을 들은 제독은 못내 미심쩍어하는 기색으로 질문했다.
“당신, 혹시 랭글리나 뭐 그런 데서 일했던 사람이오?”
랭글리는 CIA 본부가 있는 곳이다. 나는 실소를 꾸미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믿어도 되겠소? 그쪽 퇴직자들이 요즘 다른 일들을 많이 알아본다던데…….”
“정말로 아닙니다.”
헤어지기 전, 나는 제독에게 스바랄스카 중령의 근황을 물어보았다. 내가 제독에게 나와 거래를 틀고자 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제독의 명령을 받고 내 앞에서 상의를 탈의했던 항만보안대의 지휘관.
“그는 죽었소.”
제독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의 유가족은 충분한 연금을 받고 있지. 내가 사적으로 조성한 기금을 통해서. 이 정도면 답변이 되었소?”
“물론입니다.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내가 던진 물음은 제독의 내면을 관찰하기 위한 시금석이었다. 부하를 아끼는 제독의 됨됨이가 변하지는 않았는지, 또 나와의 거래를 통해 이룬 것들에 대하여 얼마만큼의 성취감을 느끼고 있는지.
마르띠네즈 제독은 여전히 품질이 우수한 인간이었다.
제독과 갈라진 다음엔 휴식을 겸하여 잠시 도시와 해변을 산책했다.
처음 도착하면서 살폈던 것과 같이, 이 항구의 관광산업은 자국 내의 피난처(Safe Haven) 관광수요에 크게 의지하여 명맥을 잇고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 당시 피난처 관광수요가 늘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 안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푸에르토 바야르타와 가까운 바히아 데 반데라스(Bahia de Banderas) 만(灣)은 멕시코에서 손에 꼽는 고래관광의 명소다. 자연계의 거대한 것들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두려움만큼이나 커진 요즘, 이런 쪽의 관광수요는 지역경제에 꽤 도움이 될 만했다.
고래구경을 나가는 관광객들은 대개 헌터들이 운전하는 경량 항공기를 이용했다. 배를 타는 소수는 고래 구경에서 익스트림 스포츠에 준하는 스릴을 느끼고픈 아드레날린 중독자(Adrenaline junkie)들이었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유희지만, 이 세상엔 인증사진을 남긴답시고 마천루의 첨탑을 기어오르는 미치광이들(Rooftopper)도 많잖은가.
아드레날린 중독에 저지능과 관심병이 더해지면 조각배 같은 보트를 타고 각성체 고래에게 접근하는 짓도 즐기는 게 인간이라는 동물이었다.
해변에서 영업을 하는 보트 대여업자들도 그런 쪽으로 판촉을 벌이고 있었다.
「Whale Watch! 당신은 용감한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최고의 모험에 도전해보십시오! 거대한 해양괴수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확성기를 들고 이렇게 외쳐대는 호객꾼 옆엔 붉은 글씨로 주의사항을 적어놓은 입간판들이 줄줄이 서있었다.
「당신의 항해는 모두 영상으로 기록되며, 고래를 공격적으로 자극하는 행위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법을 위반할 경우 최대 10억 페소의 벌금과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으니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고래의 근접관찰활동에 사용되는 선박은 반드시 국제포경위원회(IWC)의 소음영향도 안전기준을 충족해야 합니다. 선박 대여 시 인증서를 꼭 확인하여 주시고, 확인을 거부하는 사업자는 즉시 당국에 신고하여 주십시오. 불법영업 사실이 입증되면 소정의 포상금을 지급해 드립니다.」
「각성체 고래들은 바다의 신이 아닙니다. 공물을 바치거나 인신공양을 시도하지 마십시오.」
이런 경고들은 내가 보기에 아드레날린 중독자들의 입맛을 돋우는 조미료 같은 것이었다.
수평선 안쪽으로 들어온 고래들은 딱히 배를 타지 않더라도 해변에서 관측이 가능했다.
이런 거대한 각성체들의 마력장은 어렵잖게 해변까지 와 닿았다. 나는 내 마력장의 경계를 간질이는 고래들의 장악력을 느꼈다.
생체질량과 영혼의 질에 비례하는 각성확률로 말미암아, 현 시점의 성체 고래들은 열 중 서넛 꼴로 마력회로가 열린 상태였다. 몇 년 더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비율이 열 중 여덟아홉까지 치솟을지도 모른다.
다른 모든 생명들의 각성이 그렇듯이, 강화계수가 높은가 낮은가, 그리고 회로의 발달 및 생체강화가 과연 균형적으로 이루어지는가는 각성 그 자체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지만.
고래가 각성한다고 해서 무조건 「와다츠미키요우타마히코」나 「리바이어던」 같은 개체가 튀어나오는 게 아니다.
“형님. 먼저 고르십시오.”
해변의 가게에서 타코를 잔뜩 포장해온 경태 녀석이 봉투를 내밀었다. 제독과 함께 있을 때 식사를 대접받긴 했지만, 각성능력자에게 이 정도는 간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나는 봉투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트롬포 타코(Taco de trompo)를 하나 집어 들었다. 할라피뇨 소스로 양념을 한 돼지고기 샤와르마에 라임, 고수, 양파, 파인애플 등등을 올려 또르띠야로 싸놓은 음식이었다.
눈을 굴리던 라일라가 내 다음으로 봉투에 손을 집어넣었다.
“나도 웨인이랑 같은 거!”
“매울 텐데.”
“괜찮아. 난 고문저항훈련도 받았는걸.”
쿡쿡 웃던 경태가 막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아, 참. 형님. 저, 가게에서 일본인들을 봤지 말입니다.”
“일본인들?”
“예. 해상자위대랑 잼스텍(JAMSTEC/일본해양과학기술센터) 사람들이요. 연합임무부대(CTF) 관계자들도 같이 있더라고요.”
“흠…….”
중국의 어깃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고래사냥 계획은 착실하게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물밑에선 중국과 연합임무부대 구성국들 사이의 협의가 진행 중이지 않을까 싶었다. 국안부의 경감들이 위쪽의 기류를 잘못 읽은 게 아니라면.
각성체 고래의 활동범위를 고려할 때, 사냥 자체는 일본 영해에서 하더라도 감시활동은 세계 모든 바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고래사냥을 위한 연합임무부대, 통칭 CTF-W2가 푸에르토 바야르타에 전진기지를 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입지만 놓고 본다면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의 고래보호구역(엘 비즈카이노) 내 게레로 네그로(Guerrero Negro)에 기지를 설치하는 게 좋겠지만, 내가 아는 한 그곳엔 군함과 정보수집함을 수용할 인프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변변한 부두 하나조차 없는 곳을 어찌 거점으로 쓰나. 거기 있는 거라곤 작은 공항과 활주로 한 줄이 전부다.
대안으로 바하칼리포르니아 만(灣)의 입구에 있는 마사틀란 항(港)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곳은 시날로아 카르텔의 중요 근거지 중 하나.
이곳에 거점을 두면 연구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렵다. 고래사냥에 반대하는 에코 파시스트들이 카르텔에게 살인청부를 넣지 말란 법도 없잖은가?
결국 남는 건 원래부터 해군기지가 존재하며 치안도 매우 안정적인 푸에르토 바야르타뿐이다.
멕시코 해군본부가 마르띠네즈 제독을 소장으로 진급시키고 나서도 푸에르토 바야르타에 박아둔 명분이 여기에 있었다. 기존의 분함대(Escuadrilla)에 정보수집함을 겸하는 원양초계함 한 척과 초계기 석 대를 추가 편성한 후 고래감시 및 CTF-W2 지원임무를 떠맡긴 것이다.
“읏……!”
타코를 두어 입 베어 먹은 라일라가 작게 신음하는 소리.
“콜록, 콜록…….”
매운 기침을 하는 라일라는 살갗이 얼굴에서 목덜미까지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나는 이럴 줄 알고 미리 살얼음이 끼도록 식혀놓은 물을 건네주었다.
“그러게 매울 거라고 하지 않았나.”
“괜찮, 아……. 그냥 조금 사레가 들려서 그래…….”
말은 이렇게 해도 나를 보는 눈시울이 살짝 붉다. 경태는 다시 한 번 쿡쿡 웃고서 물음으로 대화를 이었다.
“마녀 아줌마의 정보가 사실일까요?”
“아비터와 트라운서?”
“예.”
어젯밤의 일이다. 그레이스는 실무자들의 연락채널을 통해 칠각기사단이 입수한 첩보를 하나 전달해왔다. 그 내용은, 룰러 급 공중초계함의 초도함 HMS 아비터와 2번함 HMS 트라운서가 고래사냥을 위한 연합임무부대에 합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 말인즉슨 두 명의 대마법사가 본거지 밖으로 나온다는 뜻이다.
“사실일 수도 있겠지.”
“나온다 치면 목적은 시현(示現)이겠군요.”
“아마도.”
이는 나와 그레이스가 공통으로 추론한 바이기도 했다. 첩보를 전달받은 후의 통화에서, 우리는 별다른 토의 없이 의견일치를 보았다.
빛과 진리의 원탁은 영국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지만, 그 지원이 아무런 제한도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국은 어쨌든 민주주의 국가이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 모르게 국고를 쓰는 데엔 한계가 있기 마련.
애초에 외부확장 마력회로의 개발을 사기업의 불사암 비행모듈 개발로 포장하여 세상에 공개한 이유가 무엇이었겠나.
첫 번째는 물론 공중전투함을 등장시키기에 앞서 개연성을 확보하는 과정이었을 터이나, 두 번째는 국민들에게 정부투자의 성과를 시현함으로써 정부의 예산운용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고 더 많은 예산편성의 자유를 얻기 위함이었을 것이며, 세 번째는 기업공개 자체로 투자금을 끌어 모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일찍이 테슬라가 미래의 기대가치만으로 얼마나 많은 자금을 모았던가. OM-KT AV21410의 개발사인 옥타 테크는 벌써부터 세계 시총 19위의 기업으로 올라선 상황이다.
그레이스는 이를 두고 가볍게 푸념했다.
「사기극 한 번으로 3천억 달러를 모으다니.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자기랑 내가 그것들과의 격차를 좁히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데.」
나는 그레이스에게 면박을 주었다. “우는 소리 하지 말고 왕국이나 잘 정비해라. 놈들도 지금쯤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을 테니.”라고.
유능한 행정가- 고독의 완전체를 재상으로 영입한 주술사 왕의 동군연합은 놀라운 속도로 체제를 정비해나가는 중이었다. 원탁의 대마법사들이 내키지 않는 광대 짓을 하면서까지 영국의 힘을 끌어내려 할 이유라 하겠다.
여하간, 룰러 클래스 공중우세초계함이 정말로 고래사냥에 합류한다면 그건 정치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봐야 한다.
‘그렇잖아도 일본에 한번 가볼 생각이긴 했지만…….’
당초의 목표는 일본이 쏟아내는 고래연구 데이터를 주워 먹고, 겸사겸사 영국의 전력을 축낼 기회를 노려보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대마법사가 탑승한 공중전투함들이 온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하다못해 황금기의 눈으로 관측만 해도 얻을 게 얼마란 말인가.
나는 그레이스의 첩보가 사실이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