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헤드헌팅 (6)
식인돼지의 기민함은 일본에서 잡았던 식인호랑이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시베리아 대호는 방아쇠 당겨지는 소리를 듣고 근거리에서 사선을 회피하는 기예를 보여주었으나, 몸집이 두 배인 티-호그는 그저 지그재그로 튀며 달리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호랑이처럼 3차원적 입체기동을 할 유연성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방어력만큼은 호랑이를 압도했다.
추정중량이 2천 파운드(약 9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고 강화계수 각성체라 할지라도, 50구경 이상의 대구경탄에 피탄당하면 운신이 불가능할 만큼의 중상을 입어야 정상이다.
엘 세르도타도는 그렇지 않았다. 분명 교차하는 사선들을 몸으로 뚫었음에도 불구하고, 몸뚱이에 제대로 박힌 탄이 단 한 발도 없었던 것이다.
지상과 연결된 무전망이 혼란스러워졌다.
「엿 됐다(Ya valió gorro)! 뚫린다!」
「막아!」
티-호그가 땅을 박찰 때마다 둔중한 산울림이 일어난다. 발굽에 차인 흙이 대각선 방향 허공으로 십 수 미터씩 솟구쳤다. 돼지가 능선 하나를 넘는 데 걸린 시간은 10초 미만. 능선을 따라 배치된 사냥꾼들의 화력은 돼지를 저지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상하다. 저게 왜 안 죽지?”
경태가 의아해하기에, 나는 돼지가 쓰는 꽤 고급스러운 염동방어기술을 알려주었다.
경태는 탄성을 흘리며 감탄했다.
“와……. 그게 됩니까?”
“되니까 쓰겠지. 나도 저런 식으로 염동을 쓸 생각은 못 해봤다.”
“신기하네요. 이걸 자연의 신비라고 해야 하나……?”
식인돼지가 쓰는 염동의 응용기는 점탄성(Viscoelasticity) 방어라고 표현하면 적절할 듯했다. 염동력이 실제로 점탄성을 띤다는 게 아니라, 술식과 힘의 작용 방식에 전단농화(剪斷濃化/Shear thickening)를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식인돼지가 저의 육체 주변에 둘러놓은 염동역장 술식은 그 자체가 일종의 독립적인 자율신경처럼 작동하여, 강한 외력(外力)이 가해지는 곳에 자동적으로 힘을 집중시키도록 되어있었다. 여기에 휘말린 총탄은 마치 물을 뚫고 들어간 것처럼 급속도로 운동에너지를 상실했다.
평소엔 점성을 띤 액체 상태를 유지하지만, 강한 충격을 받으면 탄성경화를 일으키는 점탄성 물질의 작용을 현상적으로 비슷하게 모방하는 결계라 하겠다.
근래 방산업체들이 점탄성 물질을 이용해 유연성을 확보한 액체방탄복을 연구하고 있기도 하니, 지금의 식인돼지는 반경 십 미터 가량의 방탄층으로 보호받는 상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부드러운 바람은 통과시키고 총탄은 저지하는 유연한 방탄층으로.
여기까지만 보면 굉장히 훌륭한 방어술식이다.
그러나 자연의 산물답게, 식인돼지의 탄성경화 방어결계는 중대한 결함을 품고 있었다. 모든 방향에 대해 균일한 방어를 제공하지도 못하고, 돼지에게 가해지는 부담도 너무 크다.
‘경화가 발생할 때마다 과부하가 걸리는군.’
기본 코드부터가 리소스 최적화를 고려하지 않고서 기능만 어찌 구현해놓은 프로그램 같거니와, 그런 프로그램을 돌리는 회로의 성능 역시 한계가 뚜렷했다.
게다가 술식의 작동이 자율적이고 결계의 반경이 넓다 보니, 내버려둬도 빗나갈 탄환들에 대해서까지 염동력의 탄성경화 반응이 일어났다.
그 결과물이 언제 파열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태가 악화된 돼지의 회로였다. 돼지의 코와 입에선 핏물 섞인 점액질이 흘러나왔다.
쐐애애애액-!
LCJ에 속한 제트 바이크 두 대가 고속으로 날아와 돼지의 진로에 사격을 퍼부었다. 속도가 조금 떨어지는 드론 바이크들도 여기에 합류했다. 전체 숫자는 얼마 안 되지만, 경쟁자가 많고 지켜야 할 곳도 많으며 억제해야 할 카르텔도 많은 LCJ가 먼 곳으로 원정 보낼 수 있는 최대 규모의 항공 전력이었다.
공중기병이 가하는 사격은 같은 구경이라도 지상에서의 사격보다 관통력이 높다. 총탄에 기체의 속도가 더해지니까.
하늘로부터 총탄이 빗발치자, 식인돼지는 제 회로에서 불완전한 방어결계를 덜어낸 후 흙먼지의 회오리를 일으키며 방향을 꺾었다. 아쉽게도 연막차장의 근원인 땅으로부터 떨어질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꺾는 방향마다 새롭게 형성된 저지선이 있었다. 미끼를 배치한 지형 자체가 돼지에게 불리한 함정이었고, 공중기병들의 견제로 말미암아 돼지의 이동경로가 제한되었으며, 그에 반해 사냥꾼들은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했던 덕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식인돼지는 기지를 발휘했다.
나는 돼지의 회로에서 생체강화의 점유율이 줄고 염동력의 점유율이 증가하는 것을 보았다.
이에 따라 돼지의 속도는 느려지고, 반대급부로 흙빛 회오리의 규모는 거대해졌다. 연막을 키우는 건 좋지만 이대로라면 포위망이 더욱 견고해질 상황.
염동력의 회로점유율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티-호그는 회오리에 쏟던 힘을 끊고 쭉 미끄러지며 멈추어 섰다. 여운처럼 남은 상승기류의 관성이 흙빛 불투명함을 느릿하게 밀어 올린다. 이 불투명함 속에서, 돼지는 제 주변에 투명한 힘의 고리를 만들어냈다.
다음 순간, 지상 채널에서 경고성이 터졌다.
「조심해! 충격파다!」
돼지를 중심으로 원형의 충격파가 뿜어져 나왔다. 생체질량이 근 1톤에 달하는 각성생명체가 전력을 다해 압축해서 방출한 강력한 힘의 파동이었다.
「콰아아아!」
일찍이 열도에 상륙했던 대호가 염동충격파에 파편을 담아 공격수단으로 삼았듯이, 돼지가 방출한 원형 충격파는 메마른 고산지대의 날카로운 돌조각들을 전 방위로 비산시켰다.
물론 그래 봐야 돌조각은 돌조각이고, 대호의 그것처럼 집중된 공격도 아니었으며, 결정적으로 티-호그와 헌터들 사이의 간격이 상당한 탓에 위험한 공격까지는 못되었다. 다친 사람도 없고 망가진 장비도 없다.
그러나 군데군데 뿌리내린 각성수들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한순간 해일처럼 일어난 모래폭풍 속에서 각성수들이 저마다 지닌 마력을 제각각의 특이현상으로 빚어내자, 사냥꾼들의 주의는 짧은 시간 환경에 매몰되었다.
돼지의 회로로는 이런 충격파를 연속으로 쓰기가 불가능하다. 설령 가능하다 쳐도, 그렇게 써댄다면 머리 위의 불투명함이 사라져 공중기병의 화력에 무방비해질 것이었다.
식인돼지는 전장의 안개가 사라지기 전에 신속하게 움직였다. 소리 없는 윈드 러닝으로 달려가는 목적지는, 파편을 뿌림으로써 정확한 위치와 능력을 파악한 각성수의 그늘.
‘허, 제법…….’
각성수의 마력장에 자신의 마력장을 숨기는 행동까지는 예상한 범위였다. 술타나와 함께 잡았던 수마트라 호랑이도 그런 기교를 부렸고, 이외에도 헌터들 사이에서 숱하게 목격담이 나오는 사례였으니까.
그러나 땅의 우묵한 부분에 몸뚱이를 넙죽 깔고는 주변의 흙과 모래, 마른 나뭇가지 등을 염동력으로 긁어와 스스로를 덮어버리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염동력에 끌려온 돌과 가지들이 돼지의 몸에 자석처럼 들러붙었다.
충격파를 발산한 것. 소리 없는 이동을 한 것. 마지막으로 눈과 코만 내놓고 제 몸뚱이를 파묻은 것. 이 모두가 염동력을 활용한 일이라 회로를 조율하는데 들어가는 시간이 최소화되었다.
여기선 나도 잠시 표적 접촉을 상실한 척을 해줘야 자연스러웠다.
조금 전까지는 표적의 이동방향성이 뚜렷했고, 또 지상의 헌터들이 표적의 실제 모습을 눈으로 봐가면서 쏘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헌터들이 통제기에서 조사하는 빔의 정확성에 의구심을 품을 여지가 없었다. 명중률이 높게 나온 건 운이 좋았다고 쳐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런 상황에선 아무리 실력이 좋은 패스파인더 팀이 통제를 맡아도 접촉을 잃어버리는 게 정상이다. 그 누군가가 투시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이상에는.
나는 적외선 빔을 이리저리 돌리며 헤매는 시늉을 하다가 표적지시기의 전원을 꺼버렸다.
모래폭풍의 파도가 가라앉자, LCJ의 까사도르들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머니 마리아시여. 이 저주 받을 돼지새끼가 어디로 사라졌지?」
「각성수 주변을 조심해. 존재감을 지울 방법이 그거밖에 없잖아.」
「벌써 빠져나간 건 아니고?」
「아니야. 놈은 아직 이 주변에 있어.」
「젠장. 냄새 맡기도 힘드네. 이럴 줄 알았으면 개를 끌고 왔을 텐데」
개는 이런 사냥터에 끌고 오기 어렵다. 보통의 몰이사냥이라면 모를까, 매복과 유인을 포함하는 몰이에서는 소음 통제가 까다로운 탓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돼지가 지상 배치 헌터들의 일각에 기습적인 피해를 주고 달아날 개연성이 높다고 보았다. 이 경우 다소 긴 거리의 추가적인 추적과 차단선 구성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내려가서 조금 도와줘야겠군.”
“어떻게 말입니까?”
“레이저를 챙겨라. 너도 같이 가자.”
우리가 가져온 예비 화기들 중엔 「페이저 ML(PHASR ML)」이라는 이름의 휴대용 레이저 소총이 포함되어 있었다. 몇 년 전 미 해군이 프로토타입만 만들고 폐기했던 프로젝트가 방전능력자들을 위한 무기로 부활한 결과물이었다.
개인이 휴대 가능한 레이저 화기는 출력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 전력공급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반사경과 렌즈의 크기가 물리적인 장벽이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현재 헌터들에게 팔리고 있는 휴대용 레이저 화기는 모두가 사냥감의 섬광 실명을 유도하는 비치사성 화기였다. 통칭 다즐러(Dazzler)라고 부르는 무기 분류다.
이런 레이저 화기는 헌터 노릇을 하는 방전능력자들 사이에선 별로 인기가 없었다.
일단 눈을 정확하게 명중시키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일뿐더러, 사냥감의 시력을 완전히 무력화하려면 눈 두 개를 모두 지져줘야 하고, 동력이 무제한이라도 과열 때문에 무제한 조사가 불가능하며, 한 세트에 1만 달러가 넘어가는 비싼 가격도 부담스러운 까닭이다. 살상력이 제로에 가까우니 위기상황에서의 대처능력 또한 제로에 가깝다.
게다가 대인용 실명 레이저의 사용을 금하는 특정 재래식 무기 금지협약은 헌터들의 레이저 화기 획득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다.
헌터들에게 넘어간 레이저 화기가 사람을 상대로 쓰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에, 1세계 기준으로 신용평가등급이 적어도 A-는 되어야 운용허가가 나오는 것이다.
결국 레이저 개인화기는 그 모든 단점들과 자격요건을 감수하고서라도 각성체 부산물의 손상을 최소화하고 싶어 하는 소수의 헌터 단체들이나 운용하는 장비가 되었다.
전극이 내장된 전투복에 동력 케이블을 꽂은 경태가 페이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준비됐습니다. 아래 있는 친구들에게 통보도 했고요.”
“먼저 뛰어라.”
“옙.”
끄덕인 경태는 측면 개폐구를 열고 가볍게 뛰어내렸다. 염동능력자에게나 가능한, 낙하산을 쓰지 않는 노 오프닝(No Opening) 점프였다.
나 역시 뒤이어 개폐구 문턱을 박찼다. 고고도에서의 강하라면 사전에 산소 백 퍼센트 호흡을 해둬야 했겠지만, 상대고도가 채 2백 미터도 안 되는 지금은 그런 준비가 불필요했다.
파라라라락-!
급속한 하강과 고산지대의 바람이 맞물려 세차게 나부끼는 옷자락. 점차 가속도를 붙이며 확대되는 지면의 모습이 가벼운 호흡곤란을 선사했다. 나는 중간중간 가벼운 제동을 걸어가면서 10초 가량을 떨어진 후 속도를 줄여 땅에 발을 디뎠다.
나와 경태는 냄새를 쫓는 척, 정직하지 않은 경로로 돼지를 향해 다가갔다. 나는 경태에게 주의를 주었다.
“표적이 구분되나?”
“형님께서 짚어주시니까 겨우 보이네요. 돼지 주제에 위장을 진짜 잘했습니다.”
“충격파에 주의해라.”
“예. 제가 왼쪽 눈을 지지죠. 음, 형님 기준으로는 오른쪽이요.”
“알았다.”
몰래 웅크린 식인돼지는 또 한 번의 충격파를 장전하고 있었다. 은신이 발각당했을 때, 혹은 인간들의 허를 찌르기 좋은 시점에 충격파를 방출한 후 반전을 꾀할 요량일 터였다.
“셋을 세겠다. 셋. 둘. 하나.”
방아쇠를 당기자, 페이저의 몸체가 가볍게 진동했다. 우우웅- 하는 울림은 직후에 터져 나온 돼지의 비명과 충격파의 소음에 파묻혔다. 흐트러진 충격파는 아까 보았던 것과 같은 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뀌에에에엑-!」
돼지의 발광은 주변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무차별적으로 뿜어내는 염동력과, 덩달아 자극을 받은 각성수의 가세.
모래와 자갈이 섞인 거친 바람 속에서 경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후, 돼지 멱따는 소리.”
나와 경태 모두 초탄명중이었다. 돼지가 곧바로 머리를 틀어버리는 바람에 완전실명까지는 가지 않았으되, 지금은 몇 분 남짓한 시력상실이라도 충분히 치명적이었다.
“저기다!”
마침내 식인돼지를 포착한 LCJ의 헌터들이 몰려들었다.
돼지 혼자서 지랄을 해도 어지러울 마당에 각성수까지 혼란을 더하는 판이라, 돼지가 시력을 잃었음을 모르고 보면 제법 박진감이 넘칠 광경이었다. 멕시코인들의 헤드캠과 바디캠에선 아주 쓸 만한 프로파간다 소스들이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돼지는 탄성경화 결계를 전개하며 마지막까지 발악을 해댔다. 쏟아지는 사격을 다 받아내며 이리 들이치고 저리 들이받는 모습은 넓은 땅에 악명을 떨친 식인괴물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미 내가 파악한 바와 같이, 돼지의 결계엔 유독 방어가 약해지는 각도들이 존재했다.
식인돼지는 몸에 관통상 하나가 뚫린 시점에서부터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때부터 마력회로에도 누수가 발생하여, 결계의 방어효율 또한 꺼져가는 생명처럼 하락했다. 나는 돼지가 필사적으로 유지하는 결계의 코드를 꼼꼼하게 눈에 새겼다.
후들거리던 돼지의 다리가 아래로 꺾이자, LCJ의 지휘관이 사격중지를 명령했다.
“Deja de disparar!”
중지 명령이 수차례 반복된 끝에 모든 총성이 잦아들었다. 각성수의 신경질적인 마력투사가 이어졌으므로 바로 정적이 찾아오지는 않았으나, 죽어가는 돼지의 신음소리가 들릴 만큼은 조용해졌다.
「꾸익…… 꾸이익…….」
제 피가 고인 웅덩이를 밟고 선 돼지는 주둥이로 불그스름한 타액을 쏟으며 인간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지며 무거운 머리를 떨어뜨렸다. 무게가 무게인지라, 쿵 하는 묵직한 울림이 퍼졌다.
이 죽음이 위장인지 아닌지는 피 웅덩이의 흐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피가 나무뿌리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본 멕시코 헌터들은 서로에게 악을 써대며 급하게 달려가 자신들의 마력장으로 돼지 시체를 덮어 보호했다.
멕시코 북부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식인괴물 엘 세르도타도의 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