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400화 (400/561)

#41. 홀로 벗어난 자의 애도 (16)

라일라는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은 지대로 올라온 터라 상대적으로 낮은 방향의 시계(視界)가 다소 넓어진 상태였고, 낮게 갈린 안개 속의 색상과 형체들을 흐릿하게나마 구분할 수 있었다.

“뭔가…… 좀 지저분해.”

에베레스트의 정상과 등정로에 온갖 종류의 쓰레기들이 널려있는 것처럼, 거인의 영지 외곽지대에도 21세기의 로알 아문센을 꿈꾸었던 탐험가들과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채집꾼들의 흔적들이 얼룩처럼 널려있었다.

대부분의 얼룩은 파괴된 장비나 합성섬유 의복과 배낭, 텐트 따위였고, 그 수는 내가 작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많았다.

주인을 잃은 장비들의 색채는 밝기가 밝아 눈에 잘 띄었다. 이 마경(魔境)에 도전한 패스파인더들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시인성(Visibility)을 높이는 데 힘쓴 탓이었다.

라일라는 오는 길에 습득한 전자시계를 조명에 비추어보았다. 나침반 기능과 위치신호 송수신 장치가 내장된 탐사용 시계였는데, 아직 전원이 남아있기는 했으나, 가만히 들고만 있어도 액정에 표시되는 방위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원인은 간단했다.

칙-! 즈즈즈즈즈즈-!

사방에서 푸르스름하게 타오르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방전의 빛들. 그럴 때마다 포플러 숲은 어둠을 벗고 창백한 쪽빛으로 물든 흐릿한 풍경을 드러냈다. 예전처럼 안개 속에서 도깨비불 같은 발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나와 라일라의 주변으로도 1분에 한두 줄기 꼴로 방전이 일어났다. 그런 방전 줄기들은 내가 마력장의 경계면에 펼쳐둔 도파관 채널을 타고 지면으로 내리꽂혔다.

이렇듯 요란하게 전자기교란이 일어나는 환경에서 나침반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리가 있나.

하늘에 펼쳐진 공간굴절 때문에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확신하기도 곤란하다. 실체가 없는 집광렌즈는 초점이 균일하지도 않았다.

고로 탐험가들은 소형화된 정밀 INS(관성항법장치)와 지도에 의지하는 게 보통이었다. 나침반이나 GPS 좌표계는 INS가 오작동할 경우에 대비한 보험일 따름이다.

수관 사이로 들어오는 별빛의 일렁임을 보던 라일라가 한숨을 내쉬듯이 중얼거렸다.

“여긴 정말 문자 그대로의 이계(異界)구나……. 596번 자매는 어떤 마음으로 이런 곳에 은신처를 마련했던 걸까.”

그레이스-596이 살아있을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험악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나는 라일라의 착각을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감정적인 몰입에 도움이 되는 착각이니까.

라일라가 쉬는 동안 나는 코드가 개선된 침식을 응용하여 마력장을 전개하는 연습을 수행했다. 전율하는 거인의 압도적인 마력장을 중화하고, 중화한 만큼 내 마력장의 범위를 넓히는 연습이었다.

「우웅-」

탐색의 파동이 밀려올 때마다 마력장을 거두고, 파동이 지나가면 재차 마력장을 펼치는 과정을 반복할 때마다, 내 마력장의 한계범위는 조금씩 조금씩 더 늘어났다. 이는 멀루어 국유림에서 보냈던 나흘의 시간이 기대보다 훨씬 더 유익한 것이었음을 알려주는 결과였다.

분명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탐색의 그물에 걸리는 게 없자, 전율하는 거인은 파동을 보내는 간격을 계속해서 줄여나갔다. 만약 거인이 사람이었다면 나는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침식의 회로점유율을 늘리면 탐색의 파동 자체를 중화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이게 가능하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라일라가 평소보다 무력한 상태에서 내게 물리적으로 의지하는 상황이 계속되어야 이상적이기에.

10분 정도가 흘렀을 때, 오도카니 앉아 내 연습을 지켜보던 라일라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 이제 다 쉬었어. 다시 출발해도 돼.”

우리는 숲의 더욱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패스파인더들의 흔적은 가면 갈수록 드물어졌고, 눈에 띄는 것들도 오래된 티가 많이 났다.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틈틈이 휴식을 취하며 이동하기를 약 두어 시간. 나는 바닥에서 녹슨 수류탄을 주워들었다.

가까운 곳엔 터지지 않은 섬광탄도 얕은 흙에 묻힌 채로 남아있었다. 화약 속에 들어있는 질소산화물 때문인지, 위치는 내가 기억하던 것과 차이가 있었지만.

“이게 아직도 있군.”

“그게 뭔데? 수류탄이잖아.”

“596이 던졌던 거다.”

“아.”

라일라에게는 내가 선공을 가했다고 말했으나, 불발탄을 포함한다면 선공을 가한 쪽은 오히려 596이 된다. 다만 더 이상의 교전의사 없이 도망치는 596을 쫓아간 사람은 나였고, 먼저 유효타를 낸 쪽도 나였기에 실질적으로 내가 선공을 가했다고 이야기했을 뿐.

이렇게 이야기하는 편이 더 호소력이 강하리라는 계산도 있었다.

라일라는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럼 여기가 596번과 만났던 곳이야?”

“그래. 나를 보더니 수류탄과 섬광탄을 던지고서 도주했지.”

“…….”

“따라와라. 조금 더 가면 유해를 수습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가며 길을 찾았다. 달아나던 596이 「열화」 발사체를 쏘아 보냈던 자리를 지나, 596이 제압사격을 가하다가 손가락을 잃었던 엄폐물을 거쳐, 마침내 두 자루의 총기가 버려져있는 장소에 도달했다.

하나는 개머리판이 제거된 단축형 러시아제 돌격소총이었고, 다른 하나는 약실이 터져 596의 눈알 하나를 갈아버렸던 대구경 수렵용 라이플이었다.

라일라에게 들려주었던 상황 설명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증거물들.

죽은 자리에 방치해두었던 596의 유해는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오랫동안 작용한 인력이 피로파괴(Fatigue failure)로 뼈를 부수고 골수마저 뽑아내어, 이제는 정말로 뼈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렇게 남은 뼛조각들은 나무뿌리나 밑동 등에 들러붙어있었다. 거인의 구속력이 칼슘과 인에 대해서도 발휘되는 까닭이었다. 다량원소와 미량원소에 대한 거인의 지배력은 전에 보았을 때보다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유골을 한데 모으는 데엔 일이 분 남짓한 시간으로 족했다. 모은 유골은 사전에 준비해온 아세테이트 보(褓)에 담았다.

“이것이, 596번…….”

매듭지은 보를 품에 안고 조심스레 어루만지던 라일라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 동경은 정말로 환상에 불과했구나. 죽음을 앞두었던 내가, 만나본 적도 없는 자매에게 제멋대로 덮어씌웠던 환상.”

“슬픈가?”

“잘 모르겠어.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인지. 그냥 이상해.”

“이상하다?”

“말했잖아. 콜레로의 뱀이 되고, 또 당신을 만나기 전까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기분이라고.”

골수가 빠지고 작은 조각들이 유실된 유골의 중량은 채 1킬로그램에 미치지 않았다. 라일라는 유골을 담은 보를 자신의 슬링 백에 집어넣었다. 체력이 남는 내가 들겠다고 했으나 라일라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느리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가자. 596번의 은신처로. 그곳을 더욱 보고 싶어졌어.”

우리는 분분히 날리는 종자솜털 사이를 걸었다. 추락한 무인기의 잔해, 오래전에 흩어진 또 다른 유골들, 숲에 삼켜진 별장과 나무줄기에 꿰뚫려 허공에 떠있는 다수의 캠핑카들, 조각조각 들뜨고 부서진 왕복 1차선 도로, 조여드는 뿌리에 압착당한 녹슨 자동차 등이 순서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웨인. 봐. 콜라가 있어.”

라일라가 찾은 것은 손잡이에 체인을 걸고 자물쇠를 채워놓은 냉장고였다. 아마 가게 주인이 대피를 할 적에 손을 써둔 것이겠지.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가까운 곳엔 냉장고가 있었을 통나무 건물이 무너진 흔적이 있었다. 냉장고가 어떤 작용으로 여기까지 밀려왔는지 모를 일이다. 바닥에 나뒹구는 간판은 내가 처음 거대한 것들을 둘러보던 무렵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레이크사이드 스토어」

「별장 임대·캠핑카 주차·마리나·잡화·기념품·낚시 미끼」

「연중무휴(Open year round)」

라일라는 냉장고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려 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까딱이는 고갯짓으로 허락을 내주었다.

나와 라일라가 다가가자 냉장고 안에서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마법적 인력에 당겨져 한쪽으로 부자연스럽게 쏠려있던 음료수 캔들이, 우리의 마력장에 들어오면서 자유를 얻은 탓이었다.

끼릭, 끼긱. 콰창!

녹슨 자물쇠를 염동력으로 열어보려 애쓰다가, 잘 안 되었는지 작은 충격파를 발산해 전면 강화유리를 깨버리는 라일라. 그러더니 두 개의 캔을 꺼내어 와서는 나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둘 다 줘보라는 손짓을 했다. 라일라는 갸우뚱하면서 둘 모두를 내주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미지근한 콜라는, 비록 상하지는 않았으나 탄산이 제법 빠져나간 상태였다. 나는 공기 중 수분의 응축과 기화를 활용해 콜라의 온도를 떨어뜨린 후, 캔을 따고 공기 중에서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주입했다. 염동력으로 압력을 높여가며 이산화탄소를 녹인 결과, 콜라는 막 생산되었을 때와 흡사한 상태로 돌아갔다.

“됐다. 받아라.”

“와……. 고마워. 잘 마실게.”

제 몫의 캔을 받은 라일라는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고마워했다. 마스크를 벗고 캔을 쭉 비운 다음에는 자그맣게 트림을 하고선 입을 가리며 부끄러워했다.

부서진 보트들이 나뒹구는 마른 호변을 지나 십여 분쯤을 더 나아가자, 마침내 초열에 구워진 땅이 나타났다. 전율하는 거인이 자신을 좀먹는 불사암을 파괴하고자 지저와 지상을 동시에 불태워버린 흔적이었다.

라일라의 입이 아연하게 벌어졌다.

“이게, 단일한 발화술식의 결과란 말이지?”

“그렇다.”

“……마치 전술핵이라도 터뜨린 것 같아.”

거인이 퍼부은 열의 총량을 합산하면 실제로 어지간한 전술핵에 필적할 것이다. 순간적인 파괴력이야 전술핵에 못 미칠지라도, 뿌리가 있는 깊이까지 땅을 구워 유리화시켜놓은 열량은 킬로톤 단위의 화약을 땔감으로 써야 나올 수준이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후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이곳에선 거인의 수복이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깊은 곳까지 유리질로 변한 토양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 투자할 자원을 다른 방향으로의 확장에 투자하면 이득이 더 크기도 하고.

어쩌면 거인의 생체질량이 영혼의 격에 걸맞은 수준에 근접하여, 물질적인 팽창이 처음에 비해 느긋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덕분에, 596의 지하 은신처는 무사히 남아있었다.

은신처가 포플러의 오르텟(Ortet/뿌리 연결망)이 형성되는 깊이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거인이 이곳을 완전히 수복했다 한들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테지만.

은신처의 입구는 탄화된 나무줄기들로 잘 위장되어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덮어놓은 모습 그대로다. 위장을 걷어낸 나는 라일라의 손을 잡고 지하로 내려갔다. 이곳도 거인의 마력장에 뒤덮여있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내 마력장에 가해지는 압박은 한결 가벼워졌다.

“머리 조심해라.”

경사진 통로는 허리를 다 펴지 못할 만큼 높이가 낮았다. 596이 생전에 설치해둔 원시적인, 그러나 교묘한 경보장치들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지저의 오존 농도는 외부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마침내 은신처에 들어선 라일라가 마스크를 떼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여기구나.”

다소 먼지가 쌓이긴 했어도, 모든 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테두리에 동화적인 음각이 들어간 벽난로, 벽난로 위의 선반을 채운 수제인형들, 나무를 깎아 만든 가구들과 침대, 탐험가들이 남긴 사진들을 모아놓은 상자와 내가 홧김에 뜯어 내팽개쳤던 모빌 장식에 이르기까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은신처를 살피던 라일라가 떨어진 모빌을 주워들고 의아해했다.

“이건 왜 떨어져있지?”

“…….”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어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상자 속의 사진들을 꺼낸 라일라는, 이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586번이 무엇을 바랐는지 알 것 같아.”

“그런가?”

“응. 나는 어머니 곁을 떠난 596번에게 환상을 품었지만, 정작 596이 꿈꾸던 걸 얻은 쪽은 나였던 거네.”

라일라는 사진을 내려놓고서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워. 정말로 아쉬워. 596번이 당신에게 의탁했다면 참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그랬더라면 우리는 통하는 부분이 많은 자매가 되었을 텐데. 함께 케이크를 먹으면서 웨인 당신과 당신의 조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을 거야.”

나는 짧은 정적을 기다려준 후에 물었다.

“유골은 어떻게 할 건가?”

내게 처음 596의 일을 들었을 때부터, 라일라는 596의 유해를 수습해주고 싶어 했다. 슬링 백에서 유골이 든 보를 꺼내어 든 라일라가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결정했다.

“다른 곳에 묻거나 뿌려주기보다는 이곳에서 안식을 찾도록 해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그럼 그렇게 해라.”

“유골함을 만들고 싶은데, 도와주지 않을래?”

“그러지.”

딱히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은신처 주변에 널려있는 유리질 덩어리들 중에서 색과 투명도가 좋은 것들을 골라, 발화로 다시 녹이고 염동으로 형태를 잡아주기만 하면 끝이었으므로.

596의 유골은 염동력으로 분쇄하여 가루로 만들었다. 인과 칼슘이 많이 빠져나간 뼈들은 큰 출력을 내지 않아도 쉬이 바스러졌다.

유골함에 새길 말이 있느냐 묻자, 라일라는 조금 생각한 끝에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뼛가루를 담은 유골함은 벽난로 선반 위 인형들 사이에 올려두었다.

“그럼 넌 여기서 쉬고 있어라. 나는 숲의 회로를 더 관찰해야겠으니.”

표면적으로, 내가 여기에 온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전율하는 거인의 코드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라일라가 596의 유해를 수습하도록 도와주는 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목적이었을 뿐. 1박 2일 일정이면 발전한 코드들을 확인하기 적절한 시간이다.

내 말을 들은 라일라는, 어째서인지 한국어 존댓말로 답하며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였다.

“다녀오세요, 웨인. 청소해 놓고 기다릴게요.”

“잘 수 있으면 자라. 기다리지 말고.”

“네.”

“배고프면 밥도 챙겨 먹고.”

“네. 걱정하지 마세요. 웨인도 식사 거르면 안 돼요.”

“난 내가 알아서 한다.”

처음 숲에 들어왔을 때가 늦은 밤이었기에, 일정상 계획한 수면시간은 정오 무렵부터 일몰까지였다. 그러나 굳이 나를 따라다닐 이유가 없는, 따라다니면 솔직히 방해만 되는 라일라는 복귀하기 전까지 여기서 시간을 때워도 무방했다.

라일라도 심란함이 좀 정리되었을 테니, 이틀간 못 잔 잠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오가 다 되어 내가 은신처로 복귀했을 때, 라일라는 피로한 모습으로 잠을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여태껏 그러고 있나. 잘 수 있으면 자라니까.”

“그, 우스울지도 모르겠지만…….”

“……?”

“여기…… 혼자서는 잠을 못 자겠어.”

이번엔 또 영어로 하는 소리였다. 나는 라일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내가 재워주기라도 해야 하나?”

“그, 음, 부탁할게. 당신만 괜찮다면.”

“…….”

“안 되……려나?”

나는 약간의 어이없음을 느꼈으나, 라일라의 흔들리는 눈을 보고는 이것도 의존도가 높아져서 생기는 긍정적인 일이라고 해석하기로 했다.

“마법적인 수면 유도는 타인에겐 쓰지 못하는데. 잠들 때까지 옆에서 머리라도 쓰다듬어주면 되나?”

눈치를 보던 라일라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응. 그거 좋아!”

굉장히 춘식이 같은 반응이다.

“알았다. 가서 누워라.”

이후엔 약간의 시간 낭비가 있었다. 라일라가 침대가 하나뿐이니 같이 누워야 한다고 우겨댄 탓이었다. 아니면 내게 침대를 주고 자기가 의자나 바닥에서 자겠다고.

내가 둘 다 거부하자, 라일라는 아쉬워하는 기색으로 나를 보며 옆으로 누웠다. 내가 저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게끔.

쓰다듬는 게 효과가 있는지, 라일라의 눈꺼풀은 빠르게 무게를 더해갔다.

거의 수마에 빠지기 직전의 경계에서, 라일라는 눈을 끔벅거리며 졸음이 한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웨인이 나를…… 왜 여기로…… 데리고 왔는지 알아…….”

나는 잠시 멈칫했다. 라일라의 말이 느리게 이어졌다.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할게……. 죽으라면 죽을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를 버리지 말아줘.

이렇게 말을 맺은 라일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든 라일라의 평온한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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