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홀로 벗어난 자의 애도 (5)
일본이 추진하던 고래 사냥 계획은 중국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연기되었다.
중국은 미·영·일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 연합함대가 인접국가의 영해에서 대대적인 연합작전을 전개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물며 그 연합작전은 핵무기 다수의 실사용을 포함하는 전대미문의 군사행동이지 않은가. 어떤 이유를 갖다 붙인다 하더라도, 핵으로 무장한 대규모 함대가 중국 본토와 가까운 곳에서 활동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중국이 취약해진 시점에서 잠재적 적성 국가들이 그런 작전을 전개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무력시위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했다. 베이징 테러의 배후에 서구세계의 지원이 있었다고 믿는 중국 극우세력은, 일본의 고래 사냥이 중국 본토 침공 작전의 위장에 불과하다고 떠들어댔다.
「생각을 해봐라! 일개 테러리스트 그룹이 어떤 지원도 받지 않고서 중국의 심장부를 강타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를!」
「그날의 베이징엔 군경과 민병을 합쳐 백만이나 되는 인력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우리 중국의 자랑인 감시체계는 또 어떠한가? 무식하고 열등한 알라쟁이 위구르인들에겐 그런 경비를 뚫을 능력이 없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흑해자당 쓰레기들도 결국은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조종한 꼭두각시들일 뿐이다! 중국의 진정한 적은 미국과 영국을 위시한 제국주의 세력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악한 것들 말고 다른 배후가 있을 수 없단 말이다!」
중국 내부의 여론이 이러하니, 고래 사냥에 핵무기를 제공하려던 영국과 미국으로서는 우발적 핵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경계하는 게 당연했다. 미영 양국은 이미 83년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으니까.
83년 11월 7일, 미국과 나토 국가들은 「에이블 아처 83」이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에이블 아처 자체는 냉전기 내내 연례행사로 실시한 훈련이었으되, 에이블 아처 83은 몇몇 사건들로 말미암아 소련의 예민함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규모를 키우고 보안을 강화하여 실시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 미국의 신형 중거리 탄도탄 유럽 배치. 소련의 감시를 회피한 대규모 함대 이동. 레이건 행정부의 강경한 대소정책들. 마지막으로 자동화된 소련 조기경보체계의 오작동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난 후 전례 없던 규모의 군사훈련이 실시되자, 소련은 이를 선제핵공격을 위한 위장작전이라고 판단하고 자국의 핵전력을 모두 발사준비상태로 돌려놓았다. 유사시 선제공격을 허가한다는 명령은 덤이었다.
그때 소련 지도부가 조금만 더 과민하게 반응을 했다면, 혹은 미국과 나토가 조금만 더 자극적인 행동을 했다면, 인류 문명의 오늘은 사뭇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미국과 나토 국가들은 이러한 사실을 소련이 붕괴하고 나서야 비로소 확인했다.
작금의 대치국면엔 확실히 그때를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다. 베이징 테러로 신경이 곤두선 중국의 과민반응 앞에 영미 양국이 일단 한 발짝 물러나기로 한 이유였다.
몸이 달아오른 일본 정부는 긴급성명을 발표했다.
「고래 사냥에 핵무기를 사용하는 건 맞다. 그러나 그 핵무기들은 핵폭뢰와 핵어뢰처럼 수중환경에 특화된 것들이라 중국 본토엔 위협이 되지 않는다. 고래 사냥을 위한 태스크포스 함대엔 단 한 발의 핵미사일도 실리지 않을 것을 일본 정부가 보증한다. 주일미군이 보유한 핵미사일도 잠시 철수하도록 요청해보겠다.」
「원한다면 우리 일본의 함대에 중국 측 관전무관들이 탑승해도 좋다.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작전내용을 공유해주겠다.」
「각성체 고래들의 존재는 인류문명의 미래를 중대하게 위협하고 있다. 중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성숙한 연대의식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일본이 이렇게 저자세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동중국해 해상에 항모전단을 전진배치하며 군사적 긴장의 수위를 끌어올렸다.
이런 일들이 있은 후, 미국 대통령은 이와 관련된 질문을 던지는 기자들 앞에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 일관성 있는 광기를 기억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핵을 쏘면 그들도 같이 쏘면 되잖습니까? 그러라고 있는 핵무기일 텐데요?」
「이게 바로 상호파괴보증인지 상호확증파괴인지 뭔지 하는 개념입니다.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요. 나는 오래 살고 싶고, 중국의 후 주석도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아, 후 주석이 아니라고 했던가? 아무튼.」
「중요한 것은 경제입니다. 우리는 핵을 팔아 고래를 죽이고 우리 친구 일본의 경제를 되살릴 것이며, 그럼으로써 우리 미국의 기업들이 일본에서 돈을 더 잘 벌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미국의 기업들이 돈을 많이 벌면 미국 시민들의 생활도 더 나아지겠지요.」
이 같은 갈등국면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일본이 아주 끝장나버리면 중국도 심대한 타격을 받는 까닭.
미국의 핵심동맹국 하나가 박살이 나는 건 좋다. 그러나 현시점의 중국 경제는 일본 붕괴가 야기할 공황을 감당할 만한 상태가 못 되었다.
적을 박살을 내면 뭐하나. 내가 죽어버리는데.
인민들의 격앙된 감정과 별개로, 중국 지도부는 냉정하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국안부에 박혀있는 거짓 대자들은 내게 자신들이 보고 들은 공산당 지도부의 뜻을 흘려주었다.
「주석께서는 미·영·일 3개국이 우리 중국의 양해를 구하는 이 상황을 흡족해하고 계십니다. 서구세계가 먼저 머리를 숙이는 그림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대내외적으로 당과 국가의 위신을 충분히 세운 다음엔 협상이 시작될 겁니다. 미·영·일 연합임무부대가 우리 중국군의 엄정한 관리감독을 받으며 작전을 해야 한다고 하면 우리 인민들도 통쾌함을 느끼겠지요.」
「물론 경제적으로도 일정한 양보를 받아내는 건 필수입니다. 우리가 분노로 눈이 돌아가 버린 척 변연정책(边缘政策/벼랑 끝 전술)을 고수하면 저들이 뭘 어쩌겠습니까. 더 아쉬운 쪽이 굽힐 수밖에요.」
요컨대 중국공산당의 분노는 협상에서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연기라는 뜻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고래 사냥은 결국 이루어질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자연각성체라 한들 핵의 파괴력을 견뎌낼 재간은 없다. 바다라는 환경적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추적을 지속하며 핵폭탄을 쓰고 또 쓰다 보면 오래지 않아 유효타가 나오지 않겠는가. 일단 한 번 유효타가 나오기만 하면 사냥은 그날부로 종료될 확률이 높다.
그 거대한 자연각성체의 최후를 상상해본 나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꼈다.
‘별일이군.’
탄자니아 앞바다에서 있었던 불시의 조우가 내 안에 그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고래 앞에서 온 신경을 다 곤두세운 채 고래의 호곡을 연주했던 경험은, 지금 돌이켜봐도 가슴이 조금 선득거리는 것이었다.
고래 사냥이 이루어질 땐 나도 가서 주워 먹을 게 있는지 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일본은 필시 그간 고래에 대해 연구해온 모든 것들을 쏟아낼 테니, 일본 정부와 계약한 헌터 집단의 관계자로서 그 데이터를 공유받을 수만 있다면 이후의 고래 흉내에 좋은 양분이 되어주겠지. 그러는 김에 영국 해군이나 헌터들을 공격할 기회를 노려봐도 좋겠고.
장시간의 비행은 조용하게 이어졌다.
인천에서 시애틀까지는 9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덕트 팬 엔진을 쓰는 새로운 시대의 여객기는 종래의 터보팬 제트 여객기에 비해 최대속도가 낮았다. 그러나 실질적인 운항속도는 전자가 근소하게 더 빨랐는데, 후자는 연비를 고려하여 순항속도를 조절하는 반면 전자는 순항고도에서 무조건 최고속도를 내는 까닭이었다.
각성능력자로부터 동력을 얻는 상업용 항공기에 대하여, 2인 이상의 동력공급자와 2배율의 충전량을 의무적으로 갖추도록 한 한국의 항공사업법은 항공 사고 예방을 위한 국제규약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즉,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국제규약을 준수하는 상업용 항공기엔 언제나 여분의 동력이 남아돈다. 최대속도와 순항속도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이유였다.
나는 원격으로 사무를 보기도 하고, 마법사로서의 묵상에 매진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창밖의 풍경이 어두워질 무렵부터 마법적인 수면유도를 활용하여 한 시간 가량 눈을 붙였다. 프라이빗 제트도 아닌 기체에서 잠을 자는 건 바람직하지 않으나, 경태가 깨어있는 한 무방비한 습격을 받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얼마 안 되는 일등석 승객들의 각성여부와 소지품을 다 확인해놓기도 했고.
짧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자기 자리에서 팔걸이 위로 상체를 내민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라일라와 시선이 마주쳤다. 라일라는 움찔 놀랐다가 이내 수줍게 얼버무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뻑뻑한 눈을 몇 번 깜박이고서 물었다.
“……뭐하는 거냐?”
“웨인을 보고 있었어.”
“그러니까 왜?”
“그냥.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둥실둥실해져서.”
옆에서 경태가 아이고 소리를 냈다. 돌아보면 이쪽은 눈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하는 짓을 보고 있으려니 어째서인지 김춘식이가 떠오른다.
나는 수마의 여운이 남아 무겁고 둔한 머리로 생각했다.
‘자면서 꿈을 꾸는 티를 내진 않았나 보군.’
자각몽에 대한 나의 지배력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자각몽 속에서의 수양과 연구도 그만큼 효율이 높아졌다. 꿈결의 어두운 그늘엔 항상 스승새끼의 유해가 웅크리고 있었으나, 꿈에 대한 스승새끼의 영향은 언제나와 같은 주절거림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도 가끔은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악몽이 찾아오곤 했다.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숨고 또 숨기만 하던 입장에서 벗어나 투쟁과 사냥의 길로 접어든 것은 악몽의 빈도를 결정적으로 감소시킨 긍정적인 요인이었다. 무력감은 사람의 정신을 좀먹는 질병이니까. 고로, 런던 공략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이 착실하게 쌓이고 또 쌓일수록 악몽이 드물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질 나쁜 꿈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얻기에 부족했던 모양이다. 악몽의 내용과 형태가 과거에 비해 다소 다채로워지긴 하였으되, 자각몽 이외의 꿈이 무조건 악몽이라는 건 정상이라고 볼 수 없다.
사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원탁의 마스터들은 아직도 반 이상이 건재하지 않은가. 하나를 더 죽이면 그제야 절반이 된다.
물론 현시점의 생존자들은 다 뭉쳐도 로더필드 한 사람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담이 작은 놈들이지만, 대마법사의 가치는 일신의 전투능력으로만 정해지는 게 아니다. 룰러 급 공중우세 초계함의 존재가 증명하듯이.
그 초계함의 존재를 알게 된 이래, 나는 「콜레로의 뱀」을 다루면서 얻은 깨달음들을 갈고 닦는 데 꾸준히 시간을 투자했다. 어쩌면 이게 도움이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여기면서.
“음료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아홉 시간이 넘는 비행에서 기내식은 두 차례에 걸쳐 제공되었다. 승무원의 질문을 받은 경태 녀석은 별생각 없이 주류를 요청했다.
“혹시 브랜디 있습니까?”
승무원은 조금 난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실례지만 손님께서는 안전보증 유형으로 발권을 받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탑승 시에 의무사항을 안내받지 않으셨는지요?”
“아, 맞다, 그랬지 참.”
경태는 제 머리를 한 대 치고서 넉살 좋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깜박 잊고 있었네요. 음료는 그냥 물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안전보증(세이프티 개런티) 유형 발권은 각성능력자가 사고 발생 시 가진 바 이능으로 도움을 주기로 약속하고 우대 서비스를 받는 제도를 의미했다. 기내 소요 제압, 비상동력 제공, 승객 탈출 보조 등. 신용평가 등급이 높은 헌터만이 신청 자격을 지닌다.
이걸 신청해야만 개인화기를 휴대한 채 탑승이 가능한 관계로, 나와 내 부하들은 모두 이 유형으로 좌석을 예매했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 제도이기도 하거니와, 프라이빗 제트를 타고 다니는 데 익숙한 경태 녀석이 이를 잊고 실수를 한 것이다.
몇 겹의 격벽 너머에 있는 동력실에선 몸에 제각각의 방식으로 전극을 접촉시켜놓은 방전능력자 넷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은 손가락 한두 마디 길이의 공기절연파괴를 간신히 일으키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 능력자가 넷만 있어도 법규로 정해진 에너지 공급 요구량을 달성하고도 남았다.
내 시선의 방향을 본 경태가 물었다.
“동력실에 뭔가 불안 요소라도 있습니까?”
탑승하기 전 기내 구획을 숙지했을 녀석이니 자연스러운 질문이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냥 전체적인 시스템을 살피던 참이다. 보고서에 적혀있었던 분석과 일치하는지를.”
“직접 보시니 어떻습니까?”
“제법 안정적이구나.”
나는 이 항공사를 빠르게 인수할 결심을 굳혔다. 설령 정부가 제시하는 부채탕감비율이 성에 차지 않더라도 인수에 속도를 붙이는 편이 좋으리라고.
그레이스가 ‘플라잉 니그로들의 대군’을 육성할 뜻을 밝혔을 때, 나 또한 항공 전력을 강화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내가 직접 전투단을 만들기보다는 왕의 군대를 앞세우는 방식으로.
항공사 인수는 조직 경영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이런 쪽으로도 보탬이 될 수 있었다. 한 수를 두어 얻는 여러 수의 이득.
예컨대, 한국 1위의 항공사인 대한항공은 자사가 보유한 기체들뿐만 아니라 타사의 기체와 군의 군용기까지 유지·보수하는 대규모 정비창을 운영하고 있다.
내가 인수하려는 이 항공사는 이런 방면에서 다소 뒤처져있는 업체다.
그러나 지금은 항공업계의 급격한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는 시기인 만큼, 충분히 많은 자금을 투자하기만 한다면, 경영난에 빠진 세계 유수의 항공사들이 패닉 셀로 방출하는 장비와 고급인력을 흡수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는 게 내 계산이었다. 전통적인 기종들의 수요 저하로 어려움에 처한 제조사들 역시 내가 흔드는 돈다발에 눈이 돌아가겠지.
항공기의 유지정비능력은 역설계를 통한 생산능력 확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리고 동력과 추진계통이 달라졌다고 해서 과거의 기술이 전부 쓸모없어지는 건 아니다.
나는 주술사 왕의 왕국에 공군전력 강화에 관한 컨설팅과 기술제휴를 제공할 것이다. 아프리카 현지에서 생산할 기체들의 낮은 성능을 고려할 때, 왕의 공군은 적어도 천 단위의 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그보다 많은 제트 바이크와 드론 바이크를 보유해야 마땅하다.
‘기왕이면 만 단위를 찍었으면 좋겠는데.’
그래. 돈은 이렇게 써야겠지. 설비투자를 그레이스에게 독박씌워 놓고, 생산의 경제성을 달성한 결과물들을 알라의 전사들에게 공급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나는 역사상 두 번째의 영국 본토 항공전과 런던 대공습이 나치가 행했던 첫 번째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고 격렬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