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홀로 벗어난 자의 애도 (1)
추석 연휴가 끝난 다음 날. 청와대 수석을 만나고서 엿새째인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절기인 추분이었다.
나는 지난 연휴 내내 집안 단속과 팽창한 조직의 내실 다지기에 힘썼다. 이제 마지막으로 각지의 사업장을 점검하고 나면 다시 해외로 나갈 준비가 끝난다.
국내의 일정을 마무리 지은 후 가장 먼저 가봐야 할 곳은 북미였다. 「전율하는 거인」과 「레이디 아밀라리아」에게 무언가 새로운 지혜가 깃들지는 않았는가, 혹은 내가 앞서 엿보았던 기존의 지혜들이 더 나은 형태로 발전하지는 않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한 길지 않은 여정.
본래대로라면 북미행의 목적은 이것이 전부였을 터이다. 그러나 나는 「레이디 아밀라리아」에 대해 매우 신경 쓰이는 보고를 받았다. 최근 그 균사의 왕국에 들어간 사람들이 기이한 환각을 경험하는 일이 늘었다는 보고를.
보고서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본디 「레이디 아밀라리아」와의 접신을 통해 진입하는 환각상태는 「거룩하신 레이디 아밀라리아의 교회」 신도들이 사제가 집전하는 의식의 현장에서만 제한적으로 경험하는 것이었으나, 이제는 평범한 여행객들도 아무런 매개의식 없이 환각을 보고 듣는 경우가 생기고 있음.」
「이러한 여행객들이 증언하는 환각의 내용엔 공통되는 부분이 존재함. 그저 보기만 해도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는 어느 도시의 실루엣임.」
「여행객들은 “어둠에 잠긴 도시 속에서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서운 무언가의 꿈틀거림을 느꼈다.”, “안개로 흐릿한 도시 안에는 괴물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존재감이 너무도 선명했다.”, “바람에 유황 냄새와 시체 썩는 악취가 함께 실려 왔다.”, “도시의 사람들이 라틴어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Quis similis bestiae, et quis potest pugnare cum ea?」 라고. 나는 라틴어를 모르는데도 이 말을 알아들었다. 두렵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그 도시엔 묵시록의 짐승들이 있다. 인류는 이 짐승들을 찾아 죽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아는 세상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등등의 진술을 남김.」
「환각을 경험한 자들은 말수가 줄고 경계심이 강해진 경향을 보인다고 함.」
「본 보고서가 작성된 날짜를 기준으로 SNS 및 언론 등을 통해 확인된 사례는 총 1733건에 달하나, 그 모든 사례가 사실인지는 검증할 방법이 없음. 「레이디 아밀라리아」가 있는 멀루어 국유림엔 가보지도 않은 자들이 그저 관심을 끌기 위해, 혹은 영리적인 목적이나 흥미 본위로 거짓을 꾸며낸 경우가 일부 확인되었기 때문임.」
「주 정부나 연방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대응은 아직 없음. 이와 관련된 위 더 피플(We the people) 국민청원에 대하여, 백악관은 “종교에 빠진 마약중독자들이 묵시록적인 환각을 경험하는 건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다. 정부도 이 사건을 주시하고는 있으나, 지금으로선 보다 중요도가 높은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다.”라는 요지의 답변을 남김.」
「주류 학계의 입장도 일단은 종교적 집단 히스테리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음.」
보고서를 받아든 나는 당연하게도 그레이스를 의심했다.
‘다른 걸 다 떠나, 시기가 너무 공교롭단 말이지.’
내가 「접신」의 술식을 넘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현상이 시작되었으니, 관련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노릇이다.
마녀는 분명 이렇게 말했었다.
「내게는 아무래도 이 ‘인간의 메아리’를 남긴다는 개념이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말이야. 버섯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불타는 버킹엄 궁과 무너져 내리는 런던 브릿지의 환각을 보여줄 수 있다면, 알아서 증식하는 광신도들이 원탁의 주의를 분산시켜주지 않겠어?」 라고.
메아리를 남기려면 필연적으로 복제체의 대량 소모가 뒤따른다. 딸들을 그런 식으로 소모하는 건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충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친 마녀는 기어이 미친년다운 프로젝트를 가동한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레이스에겐 이게 그리 큰 부담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메아리를 남길 용도로만 ‘최적화된’ 딸들을 생산한다면, 생산속도가 내 예상을 능가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복제체를 낳기 위해 존재하는 복제체의 수는 과연 얼마나 될까. 생산물의 결함을 감수할 경우, 「생명」을 이용한 성장가속과 기억이식의 효율은 어디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까.
그러나 생산속도와 성장가속의 효율이 내 예상을 능가한다 해도 여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아무리 품질이 낮다지만, 어쨌든 약한 출력으로나마 마법술식의 선택적 구사가 가능한 마법사들이 아닌가. 찾아보면 더 나은 사용처가 있을 게 분명하다.
약자는 기회비용의 낭비를 최소화해야 한다.
이 일에 관해 그레이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 하책이었다. 어차피 거대하고 오래된 것들을 다시 한 번 순방할 때가 되기도 했고.
균사의 왕국이 자리한 국유림에선 과연 어떤 광경을 마주하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쓰고 있는 헤드셋을 통해 부하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목적지까지 앞으로 3분 남았습니다.」
내가 탑승한 헬기의 조종석에서 전하는 안내였다.
청와대 수석을 만나러 북악산 자락으로 갈 적에는 주변에 민감한 시설이 많은 지역이어서 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지만, 지금처럼 다른 지역의 사업장들을 둘러볼 땐 그렇게 굼벵이처럼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조직 산하의 공능법인들은 서울 중심부나 원자력발전소, 원자력연구원 인근의 비행금지구역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공역에서 하늘길을 오갈 권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공항이나 공군비행장 근처를 지날 때도 사전신고를 하고 관제소의 통제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지금 향하는 사업장은 조직 산하 재단이 운영하는 한 종합병원이었다. 병상 숫자는 삼백 남짓에 불과하지만, 시설의 수준과 의료 인력의 질은 정상급이다.
이만한 시설을 등록도 하지 않고 비밀을 유지하며 운영하는 건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까닭에, 병원은 설립 단계에서 정식으로 개설신고를 넣어두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조직에 인력을 수급할 창구를 마련하겠다는 의도도 있었고.
나는 맞은편 자리의 경태에게 물었다.
“경태야. 병원에 있는 예비 입사자가 서른둘이라고 했지?”
「어, 오전에 한 명이 죽어서 이제 서른하나일 겁니다.」
“죽어? 뭐하다가?”
「사냥을 나갔다가 멧돼지에게 치였다더라고요.」
“아깝게 됐군.”
「그러게요. 이제 최종시험만 통과하면 되는 친구였는데. 자기가 잘못되더라도 가족이 먹고살 돈을 벌어놔야 한다는 생각이 워낙 강해서,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나서도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일감을 따내고 수렵행을 다니고 했다는 모양입니다.」
“질이 좋은 인간이었구나.”
「예. 뭐, 형님에 대한 정보를 오픈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붙잡아 두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겠죠.」
병원을 인력수급 창구로 삼는다 함은, 죽음이 임박한 시한부 인생들 중에서 옥석을 가려 새로운 조직원을 뽑는다는 뜻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자신의 죽음보다 세상에 남겨질 가족의 삶을 더 걱정하는 인간이라면, 그만큼 질이 좋은 인적자원을 달리 찾아보기도 어렵다. 또는, 자신의 삶을 도외시한 채 시한부인 가족을 살리고자 모든 걸 바쳐 헌신하는 인간도 마찬가지.
항상 마력이 부족했던 과거엔, 주로 치료를 받을 돈이 없어서 죽는 목숨들을 살려다가 그 본인이나 가족을 부하로 영입했었다.
그러나 마소가 넘쳐흐르는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문자 그대로 죽을 목숨을 살려서 부하로 삼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병원에 배치된 의료 인력들은 환자와 깊은 유대감을 쌓고, 그 유대감을 토대로 환자의 인격에 대한 평가와 주변 환경 조사를 진행한다. 의료진 개개인의 연민과 호의, 그리고 의료재단의 사회공헌정책을 가장한 치료비 할인은 환자들의 마음을 녹이고 빠르게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수단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놈의 선인장은 언제까지 들고 다닐 셈이냐.”
「아, 이거요?」
경태는 저가 만지작대던 작은 화분을 들어 보이며 싱글싱글 웃었다. 화분 하단의 USB-C 단자엔 스마트폰 충전 케이블을 물려놓은 상태였다.
「요거 진짜 귀엽고 기특하지 않습니까?」
“기특해?”
「예. 불빛이 깜빡깜빡하는 게, 요 쪼꼬미가 열심히 일을 한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쪼꼬미?”
「크기가 쪼끄마하니까 쪼꼬미입니다.」
USB 단자 옆에서 깜빡거리는 불빛의 정체는 화분 자체의 충전 표시등이었다. 배터리와 충방전 제어장치가 내장된 화분엔 두 가닥의 나일론 메시 피복 전선이 달려있고, 양 전선 끝의 전극은 선인장의 줄기에 바늘처럼 깊게 박혀있다. 한쪽은 선인장에게 미세전류를 흘려 넣는 선이고, 다른 한쪽은 이중각성체 선인장의 「방전」을 충전기로 흘려보내는 선이다.
미세전류 자극을 받은 선인장은 마력회로를 가동시켜 인풋보다 많은 아웃풋을 내놓는다. 이 같은 에너지 흐름의 양적 되먹임 순환(Feedback loop)을 활용한 화분, 이른바 「루프 화분」은 올 초에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후 세계 각국에서 유사제품이 출시된 물건이었다.
경태가 갖고 노는 선인장은 내가 마샤트에게서 받은 화분 중 하나를 분갈이하여 시험 삼아 각성체로 만들어본 것이다. 이런 물건이 과연 어느 정도의 효용을 보일 수 있는가 하고.
그러나, 황금기의 눈을 가진 대마법사가 직접 생체강화와 방전의 균형을 맞춰가며 최적화를 시도했음에도, 완성된 결과물은 스마트폰 배터리를 완충하는 데 꼬박 하루가 다 걸릴 만큼 형편없는 것이었다. 우선 생체질량이 작기도 하거니와, 되먹임 순환을 만드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갖다 버리라니까 말을 안 듣는구나.”
「에이. 얘를 왜 버립니까? 마샤트 양의 선물이고, 또 아무리 짧아도 형님의 시간이 투자된 녀석인걸요.」
“…….”
「그리고 얘가 이래 봬도 몸값이 제법 비쌉니다. 경매에 내놓으면 최소한 경차 한 대 값은 받을 수 있을걸요?」
“그깟 것이?”
「요렇게 작은 건 실용성보다 소장가치를 더 따지니까요. 요만한 선인장이 0.1와트시를 찍는다고 하면 수집가들이 아주 환장할 겁니다. 우리 애들도 비슷하겠죠. 형님께서 직접 만드신 ‘형님 굿즈’라고 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냥 으와와와와-! 할 테니까요. 가지고 있다가 단체 행사를 할 때 특별포상으로 내걸기 좋습니다.」
“버려라.”
「형님…….」
경태가 과장스레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기내 통신에 작게 웃는 소리가 섞인다. 경태의 옆 좌석에 앉은 라일라의 웃음소리였다. GHSS 컨소시엄의 전투복과 장구류를 착용하고 위장 패턴 쉬마그(Shemagh)를 보안경 아래까지 끌어올린 라일라는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외국인 각성능력자 용병이었다.
경태와 나의 대화는 한국어로 이루어졌다. 나는 라일라를 향해 물었다.
“방금의 대화를 다 알아들었나?”
라일라는 손짓을 곁들여 한국어로 답했다.
“으-음, 거의 다?”
근래 내 조직의 문화와 암묵지를 습득하고 다양한 층위에서 업무협동능력을 배양하는 데 열심인 라일라는 조직의 제1언어에도 관심을 보였다. 원탁의 마스터를 지성으로 감탄케 했던 마녀의 머리를 물려받은 덕인지,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었다.
“웃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만.”
내 말에 라일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얹어 대답했다.
“내용, 상관없어. 나는 그냥 웨인이 말하는 게 좋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이런 라일라에게 경태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라일라 양. 그거 해보세요, 그거.”
“그거?”
“그 왜 있잖습니까. 하면 형님께서 좋아하실 거라고 가르쳐드린 거.”
“아.”
고개를 끄덕인 라일라가 내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진지하게 말했다.
“라일라는…… 응애야…… 아껴줘야…… 해?”
옆에서 “잘하셨습니다.” 하고 물개박수를 치는 경태 녀석. 쪼꼬미라고 부르던 선인장 화분은 허벅지 사이에 끼워놓고 있다. 라일라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보나마나 이것도 내가 모르는 문화적 유행 코드의 하나이겠지. 경태가 종종 내게 전파하려 애쓰는 젊은 세대의 코드. 젊은 세대의 문화적 코드는 때론 마법의 코드만큼이나 난해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경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김경태. 이상한 거 가르쳐주지 마라.”
“이상한 거라뇨. 솔직히 라일라 양, 귀엽지 않습니까? 둘둘 싸매고 가려놔도 새어나오는 이 아우라를 보십시오.”
“귀여우면 총알이 피해가기라도 하나?”
“어, 조금은 그렇지 않을까요? 총을 쏘는 사람에게도 눈이라는 게 달려있다면 말입니다.”
“……그만두자.”
이 자리에 수연 녀석이 있었다면 적당한 선에서 끊고 나무라주었을 텐데. 그 녀석은 본사에서 행정사무를 보느라 바쁘다. 녀석이 안에 있기에 내가 밖으로 더 많이 돌아다닐 수 있는 것. 눈치를 살피던 라일라는 눈꼬리를 살짝 내리고서 물었다.
“웨인, 안 좋아?”
“그래. 안 좋다.”
침울해하던 라일라가 서늘하게 날을 세운 시선으로 경태를 쏘아보았다.
“당신. 나한테 거짓말했어. 어째서?”
“오해하지 마세요. 예상이 빗나갔을 뿐입니다.”
능청을 떠는 경태를 가만히 노려보던 라일라는, 잠시 후 눈에서 힘을 빼고 못마땅한 투로 말했다.
“용서해줄게. 당신은 웨인에게 중요한 사람. 하지만, 또 이러면 화낼 거야.”
나는 이 말을 듣고 속이 살짝 얹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요즘 들어 빈도가 높아지는 원인 모를 불편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