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미로 속의 여인 (5)
청와대 미래전략수석은 나이가 환갑이 넘은 노인이었다. 늙수레한 공무원은 면목이 없는 표정으로 사과했다.
“개마의 안호준 부대표님 되시지요? 늦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서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음에도 없는 말로 사과를 받아주었다.
“나랏일을 하시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요. 앉으십시오.”
아직 유행병이 도는 시기인지라 악수는 주먹을 툭 부딪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내가 도로 자리에 앉자, 수석은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고서 내 맞은편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제 옆자리엔 들고 온 서류가방을 내려놓았다.
나는 가방 속 서류의 내용을 훑어본 후 가벼운 한숨을 삼켰다. 딴에는 성의껏 준비했을 협상조건들이 눈에 띄었다.
주문은 독실을 잡은 시점에서 벌써 들어가 있었다. 어차피 나오는 건 코스 요리였으므로, 종업원은 택일이 필요한 메뉴를 물었을 따름이었다. 종업원을 물리려던 수석이 아, 하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혹시 반주는 하십니까?”
“아니오. 술은 정신이 흐려져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호. 훌륭하십니다.”
수석은 종업원이 나가고서부터 바로 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오늘 부사장님을 청한 이유는 이미 알고 계실 거라 봅니다.”
“예. 공문은 잘 읽어봤습니다. VIP께서 우리 컨소시엄에 속한 공능법인들의 기업공개를 원하신다고.”
공능법인 개마는 조직 산하 공능법인들이 모여 이룬 GHSS 컨소시엄의 대표기업이고, 나는 형식상 컨소시엄 전체의 협상권자로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이었다. 컨소시엄에 속한 개마, 휘영, 석영, 성화 네 개 공능법인은 조직 내의 1선급 인력들로 구성된 전투집단들이었다.
그리고 외부인들이 보기에 개마는 컨소시엄에 속한 모든 법인들의 뿌리였다. 무장공비 브이로그 사태 당시 보훈유공자가 된 개마의 엽사들 일부가 회사를 나가 휘영, 석영, 성화를 창설한 것으로 되어있는 까닭이다.
이는 명성이 높은 국가유공자를 위장기업 대표로 삼아 이득을 보기 위한 조치였다.
수석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우리 정부가 지금까지 21세기형 수렵경제 구축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왔고, 또 그렇게 노력을 기울인 만큼의 성과도 있었습니다만,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는 역시 주요 공능법인들을 자본시장에 확실하게 정착시킬 필요가 있지요.”
“요컨대, 현 정부의 집권기간 동안 얼마짜리 공능법인이 몇 개가 탄생했다고 홍보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허허허. 꽤나 직설적이십니다.”
선선히 인정하는 미래전략수석.
“누구나 다 짐작할 만한 일을 가지고 발뺌을 하는 것도 우습겠지요. 예. 분명히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정치인에게 유권자들이 던지는 표만큼 중요한 것도 드무니 말입니다.”
“하는 김에 우리 같은 법인들에게 목줄도 채우시고.”
“음, 목줄이라는 표현은 좀 그렇군요. 국민을 위한 정책이고, 또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한데……. 역시 헌터 분들께서는 정부의 스튜어드십 코드가 달갑지 않으신가봅니다.”
“그걸 달가워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달갑지는 않을지언정, 어느 나라의 어느 거래소에서 상장을 하더라도 불가피하게 마주해야만 하는 현실입니다. 혹시 「개마」를 비롯한 법인들이 아직까지 비공개 기업으로 남아있는 게 이 문제와 관련이 있는지요?”
“부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이라…….”
찻물을 들이키는 수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현 시점에서, 고위험 수렵업계의 기업공개에 입찰하는 투자자들 가운데 순수하게 금전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재무적 투자자(Financial Investor)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대부분은 지분을 무기 삼아 경영에 간섭하려는 전략적 투자자(Strategic Investor)들.
이는 일찍이 「파이오니어 사냥꾼 여단」의 여단장 라이언 C. 닐슨도 내게 상담했던 고민거리다. 투자를 받는 건 좋지만, 그 투자자들이 죄다 각자의 이익을 위해 여단의 활동을 통제하려 든다고. 돌이켜보면 그때의 통화는 오늘의 예고와도 같았다.
여기서 이익의 주체는 다양하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생활권의 안전을 원하는 지역주민들의 협동조합, 경쟁이나 적대적 관계 방지를 꾀하는 동종업계의 다른 업체들, 대주주의 영향력을 이용해 고위험 수렵 부산물을 우선적으로 공급받고 싶어 하는 경매·유통업체 및 기타 기업과 연구기관들 등.
이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건 역시 각국의 중앙정부들이다. 연기금이나 공적자금을 투입한 지분확보 경쟁은 국가 간 각성능력자 확보경쟁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었다. 헌터들에 대한 장악력 확보와 고위험 수렵 부산물 확보는 능력자 확보의 뒤를 잇는 부차적 목표들이다.
드르르-
아까 나갔던 종업원이 다른 종업원과 함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 종업원이 반찬과 곁들여 차리는 전채(前菜)는 하얀 청포묵을 채 썰어 무친 탕평채였다. 내가 각성능력자임을 고려하여 주문을 넣었는지, 양은 내 쪽이 배 이상 많았다.
두어 번의 젓가락질로 자신의 접시를 비운 수석이 젓가락을 내려놓고서 말했다.
“공능법인 개마는 한국의 수렵경제를 대표하는 핵심기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나라 최초의 공능법인이면서 실력과 실적으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1위 기업이지 않습니까. 포브스 선정 ‘가장 경쟁력 있는 100개 이능 기업’에서 30위 안에 이름을 올린 한국 법인은 개마가 유일합니다.”
그 목록이라면 나도 경태가 가져온 것을 봤다. 이런 순위가 무의미한 등수 매기기로 보일지라도, 공연한 주목을 받는 단초가 될 수 있으니 아예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순위를 평가하는 기준엔 규모·전력·자산·장비·실적·이익률과 미래의 발전 가능성이 모두 포함되었다. 고로 실적이나 이익률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머릿수가 많고 화력이 강하면, 혹은 성장 잠재력이 커 보이면 높은 순위에 매겨지곤 했다.
그런 평가 기준으로 말미암아, 1위는 의외로 몽골의 국책기업 「망구드 오르다(Мангуд орда)」가 차지하고 있었다. 강화계수가 높은 각성체 전마를 9천 기나 굴리는 반 정규군 반 용병집단이니 순위가 낮으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었다.
세계에서 각성체 전마를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는 몽골이 아닌 미국이다. 그러나 미국은 몽골처럼 고 강화계수 전마를 국가가 독점 선매(先買)하는 정책을 펴지 않았다. 다만 전략물자로 지정하여 수출을 통제했을 뿐.
같은 맥락에서, 목록의 상위권엔 의외의 국적을 지닌 법인들이 여럿 포진하고 있었다. 개마는 이들 사이에서 29위를 기록했다. 규모에는 손색이 있으되, 아프리카에서의 활동을 통해 증명된 바 실적과 작전능력은 최상위를 다툰다는 평가였다.
‘법인을 일찌감치 쪼개두기를 잘했지.’
아니었다면 주목을 받을 일이 여러모로 더 많았을 것이다.
내가 투자한 「파이오니어 사냥꾼 여단」은 57위에 이름을 올렸다. 눈에 띄는 해외활동은 없으되, 미국 내수시장에서는 굉장한 성장세를 보이는 기업이라고. 창업자의 싹수를 보고 즉흥적으로 결정했던 투자가 아주 큰 성공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정부는 여러분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수석이 말했다.
“여러분은 이 나라 국민들의 자부심이고, 국가 경제의 중요한 성장 동력이며, 국방·안보·치안·사회 안전의 증진에 폭넓게 기여하는 뛰어난 역군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금 이대로는 불안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붙잡아두고 싶은 게 당연하지요. 그걸 두고 목줄을 채우려 든다고 하시면, 솔직히 할 말은 없습니다. 본질은 같고 관점이 다를 뿐이니까요.”
나는 담담히 대꾸했다.
“애국심에 호소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남다른 정직함과 충실함만으로도 국가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요. 기업공개는 오롯이 기업이 결정할 사안이며, 경영권에 대한 간섭은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범죄조직의 장이 고위공무원 앞에서 정직함을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나, 세금이든 뭐든 책잡힐 일을 일절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선 내 조직의 계열사들이 이 나라의 너절한 기업집단들보다 훨씬 더 깨끗하다고 자부한다.
충실함도 마찬가지. 당장 아프리카 전역에서 다른 중무장 용팔이 집단들이 어떤 모습들을 보여주었던가. 외교부든 국방부든 우리에 대한 평가는 나쁠 수가 없다.
법인에 속한 개개인들을 위법으로 걸고넘어질 구석이 없다면 정부는 철저하게 을의 입장에 놓인다. 공능법인의 시작과 끝은 거기에 속해있는 엽사들이고, 정 아니다 싶으면 법인을 해체해버린 후 해외에서 다시 모여 새 법인을 결성하면 그만.
억지 혐의를 씌우겠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다.
‘한 나라를 대표한다고 봐도 좋을 헌터들이 무더기로 망명 신청을 하는데, 이걸 받아주지 않을 대사관이 있나?’
이는 또한 한국에 대해 외교적 압박을 가할 좋은 건수가 된다. 세계적인 각성능력자 쟁탈 경쟁에서 유력한 경쟁자 하나를 골탕 먹일 구실이 생기는 것.
그렇잖아도 각성능력자 강제동원 문제로 이미지가 좋지 않은 한국이다. 굳이 공식적인 압박을 가할 것도 없이, 이런 일이 있었다는 뉴스만 띄워도, 한국은 각성능력자 인력 관리에 새로운 차원의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었다.
청와대 수석비서관쯤 되는 인물이 직접 행차한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었다.
“그저 애국심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들어온 종업원들이 빈 그릇을 치우고 다음 코스를 올려놓는 동안, 수석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종업원들이 나간 다음에 하는 소리가 이러했다.
“대외비 문서이니 여기서 읽고 돌려주십시오. 내용을 외부에 발설하셔도 안 됩니다.”
이미 볼 거 다 본 문서였지만, 나는 식사를 잠시 미뤄두고 눈높이로 들어 읽는 시늉을 했다. 내가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자, 종이 너머에서 내 쪽을 보던 수석은 입술을 구부리더니 소리 죽인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보시는 건 우리 정부가 K-수렵 대표기업 육성을 위해 제정하려는 「국가공인능력전략산업 특별법」의 초안과, 대표기업으로 선정된 업체들에 대한 비공식적인 지원안들입니다. 다음 국무회의에 올라갈 예정이지요.”
“그렇군요.”
“갑종장비의 무제한적인 운용 허가, 특종장비 심사기준 완화 및 신속처리 특례, 기존 인·허가 대상 목록에 없는 장비에 대하여 기업이 직접 인·허가를 신청할 권한 부여, 국산 장비 및 필수 장비 도입 시 한도 내 비과세 혜택, 연도별 누적 공공의뢰점수에 따른 감세, 고위험 수렵 부산물 거래의 완전 자율화, 수렵기업투자모태조합 펀드 신설, 엽사들의 교육훈련비용 지원, 장비 유지보수비용 지원, 외부감사비용 지원, 해외수주활동 중개지원강화, 경영권 방어를 위한 제도적 보호장치 마련…….”
수석비서관은 문서에 적힌 주요 수혜항목들을 막힘없이 줄줄 읊어댔다. 직위에 걸맞게 머리가 좋은 인간이었다.
“……중국을 제외하면, 이만큼의 혜택을 확정적으로 제공할 나라는 흔치 않습니다. 미국이 헌터들의 천국이라고는 하나 그만큼 경쟁도 치열하지요. 전 세계에서 각성능력자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니, 여러분이 가신다 한들 받을 수 있는 대우엔 상한이 있을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습니까?”
나는 정부의 요구사항이 적힌 페이지를 수석에게도 보이게끔 들어 보였다. 상장 전 지분 판매요구부터 시작해서 법인이 운영하는 모든 갑종·특종 장비의 중점관리대상물자 지정, 공공의뢰 등급제 시행 및 1급 의뢰의 의무수행 할당량 부여 등.
중점관리대상물자 지정은 전시나 재난상황에서 강제 징발할 물자로 지정하겠다는 뜻이고, 공공의뢰에 등급을 부여하고 법인별 수행능력을 평가하여 1급 의뢰의 할당량을 주겠다는 건 강제동원의 교묘한 변형이자 확장이었다.
‘이 나라 대가리들은 강제동원을 못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나?’
설령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노동력을 끌어다 쓴다면 그것은 강제동원이다. 그러나 대가를 후려치는 강제노동과 전체주의적 사고에 익숙한 이 나라의 대가리들은 이 정도도 충분히 건전하고 상식적인 정책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오늘의 회동은 기업공개 전 지분확보를 위한 것인 동시에, 정책 발표 전 사전교감을 통해 반발을 예방할 목적이 있는 것이었다. 정책을 발표했을 때 중량감 있는 공능법인들이 침묵을 지켜준다면 나머지 헌터들의 반발은 국소적이고 일시적인 소요쯤으로 끝낼 수 있을 테니.
반대로, 인지도 높은 공능법인들이 일제히 나라를 뜰 기세로 반발할 경우엔 정권의 지지도가 바닥을 칠 것이다. 야당은 정부의 폭거를 규탄할 테고, 다음 대선은 자연히 야당에게 몹시 유리한 판이 되겠지.
“저도 꽤 민감한 조건들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깍지를 낀 수석이 하는 말.
“속된 말로, 거절하기엔 너무 많은 돈이지 않습니까?”
내 손에 들려있는 문서의 내용엔 정부가 평가한 공능법인들의 기업가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반영한다는 명분으로 과다하게 계산된 기업가치였다.
즉, 지분을 인수할 때 그만큼 많은 프리미엄을 얹어주겠다는 의미. 다수의 정책펀드와 연기금, 산업은행 등이 지분을 분산 취득하여,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나 그래 봐야 2~3조 안팎에 불과한 추가금이었다.
“우리에게 돈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답을 들은 수석은 온화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로 그럴까요?”
나는 느리고 분명한 동작으로 끄덕였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지금부터 알게 해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