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79화 (379/561)

#40. 미로 속의 여인 (3)

임마누일은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였다.

「이제 와서 하는 소리지만, 우린 솔직히 그쪽에 깔아놓은 기반을 절반만 건져도 최악은 면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왕의 군대가 국경에 전진배치되는 걸 보고 있으려니 정신이 아찔해지더군. 내가 이런 일을 겪으려고 마피아가 되었나 하는 자괴감도 들었고.」

「그런데 세상에! 협상이 지금처럼만 흘러간다면 수익성이 오히려 큰 폭으로 향상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공인이 아닌 사인(私人)으로서의 충성서약과 서약의 대가로 주어지는 봉작(封爵)이라니. 시대를 몇 세기쯤 거슬러 올라간 듯한 이야기인데, 가만히 곱씹어보면 이게 또 말이 안 될 건 없단 말이지. 이래서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 건가?」

「왕의 관료들이 그러더래. “그대의 나라와 접한 노흐 키부(Nord Kivu)를 영지로 내리고, 장차 부룬디와의 통일도 지원해주겠다. 영지 내에 왕의 직할령으로서 「왕의 강과 왕의 숲」을 두겠지만, 거기서 나오는 모든 산물의 내륙운송은 그대의 몫이 되리라. 영지에 웅거한 도적의 무리는 그대의 뜻대로 처결하라. 왕을 섬기는 숲의 전사들이 그대를 도울 것이다.”라고.」

노흐 키부는 콩고민주공화국의 동북 3개주 중 하나인 북 키부 주를 의미한다. 내가 지난날 공중침투를 감행했던 화산지대가 이 지역의 남단에 있으며, 킨도키 중의 킨도키, 머리가 금빛으로 빛나는 악령의 소문도 이 일대가 배경이었다.

「왕의 강과 왕의 숲」이란 필시 소문의 중심인 밤부티 족(族)의 영역을 뜻할 터였다. 미친 무당년의 정보력이 그 일족에게까지 닿았던 걸 보면, 그레이스는 일찍부터 해당 부족을 수하로 거두어 놓았던 것이었겠지.

‘그들에겐 그레이스가 진정 구세주일지도 모르겠군.’

밤부티는 흔히 피그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자들이다. 현생인류와는 다른 종족처럼 느껴질 만큼 키가 작고, 노화도 매우 빨라 나이 서른이면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잡히는 이질적인 인종 집단. 이러한 이질성이야말로 이들이 오래 전부터 요정 취급을 받으며 주술적 식인에 희생당해온 원인이다.

이들을 가장 많이 잡아먹은 포식자 집단 중 하나가 바로 르완다 대통령이 눈엣가시로 여기는 후투족 무장단체들이다. 밤부티의 숲엔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규모의 황금 광맥이 깔려있기에, 후투족 반군집단들은 그 광맥들을 빼앗아 파먹으며 겸사겸사 심심풀이로 사람도 잡아먹었던 것이다.

그러니 르완다 대통령이 ‘도적의 무리’를 쓸어버리려 한다면, 주술사 왕을 섬기는 ‘숲의 전사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거들어줄 터.

사람은 태생적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동물이다. 직접적으로 잡아먹든, 자본주의적 착취의 피라미드로 고혈을 빨아먹든. 이런 동물들의 세상에서는, 그레이스 같은 미친년도 드물게 매미 유충들의 여름이 되어줄 수 있었다.

「신성왕국 측 협상단의 대표가 자네의 기여를 콕 집어 언급했다고 들었네. 이번 협상은 그대들의 친구가 아니었으면 시작되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래?”

「어. 그래서 대통령이 나한테 물어보던걸. 중재를 부탁하겠다는 말은 들었는데, 대체 누구에게 부탁을 했던 거냐고. 그 ‘친구’의 정체가 뭐냐고. 그래서 자네라고 말해줬지. 잘했지?」

“잘하기는. 그걸 뭐 하러 알려주고 그러나. 나중에 필요할 때 알려줘도 무방한 것을.”

「아, 왜! 잘했다고 해줘! 나를 칭찬하란 말이야! 이 진실한 모냐(Верный Моня)를!」

“……자네, 지금 술 마시고 있지?”

「물론!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좋은 날? 아직 협상이 끝난 것도 아닌데?”

「그럼 끝날 때까지 매일매일이 좋은 날인 걸로 하자구! 어차피 타결이 유력한데 뭐 어때! 우울한 일이 있어도 보드카를 마시면 좋은 날이 되긴 하지만!」

나는 마피아의 술주정에 지겨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한숨을 쉬자 무릎 위의 김춘식이가 끄응-?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갸우뚱 한다. 임마누일이 이 소리를 듣고 반응했다.

「방금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났는데? 거기 뭐가 있나?」

“개일세.”

「개? 먹을 거야?」

“먹긴 뭘 먹나.”

「안 먹어? 설마 기르는 건 아니겠지?」

“내가 아니라 파블릭이 키우는 사냥개라네.”

경태의 개라고 알려주자, 마피아 주정뱅이는 굉장히 뜬금없는 실망감을 드러냈다.

「왜지?」

“뭐가?”

「어째서 자네가 키우는 애완견이 아닌 거냐구. 나 순간 기대했단 말이야.」

“대체 뭘?”

「자네도 드디어 나랑 비슷해지기 시작하나 하는 기대. 솔직히 그만큼 나이를 먹었으면 슬슬 좀 달라질 때도 됐잖아? 그래가지고 언제 좋은 아빠가 되고 좋은 할아버지가 되고 하겠느냐 이 말이야. 자네를 위해 하는 말이니까 잘 새겨들으라구.」

“…….”

딱히 대꾸해줄 가치가 없는 헛소리였다. 인도네시아의 꼰대가 떠오른다. 나는 세균이 많은 혀로 내 턱을 핥으려 드는 개를 눌러놓고서 통화를 본론으로 되돌렸다.

“그래서 전화한 용건이 뭔가? 단순히 중재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려고?”

「그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다른 것?”

「내가 예전에 CIA 하청의 야한 냄새가 나는 어느 초짜 브로커에 대해 이야기했던 거 기억해? 그 어수룩한 놈이 우리한테 「이름 없는 회사」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다고. 그래서 자네가 그랬잖아. 기회가 닿으면 나중에 그 브로커랑 연결해달라고.」

“기억이야 하네만……. 그 브로커가 왜? 설마 내 조직의 단서가 노출된 정황이 있나?”

「아니.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에는 없어. 지들이 지금 어느 조직의 창구를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얼뜨기들인걸. 랭글리가 이쪽으로는 어지간히 투자를 안 하나봐.」

“그런데?”

「다만, 그놈이 이번엔 샤히디 그룹의 정보를 묻고 다니더라고. 그래서 자네에게 알려줘야겠구나 생각했지. 자네 앞마당과 가까운 데서 전대미문의 초대형 테러가 터졌는데, 거기에 자네 회사가 엮여있지 않을 확률은 낮다고 봤거든. 최소한 미사일 하나 박격포탄 한 발 정도는 극동회사 유통망을 타고 들어가지 않았으려나 싶었지.」

“흠. 알려줘서 고맙군.”

「그래서, 실제로는 어떤데? 지하디스트들에게 물건을 대준 사람이 자네인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겠네.”

「이러기야? 난 CIA 하청 이야기도 그냥 해줬잖아!」

“정말로 몰라서 그래. 내 회사가 취급하는 물량이 얼만데 그 종착지와 사용처를 일일이 파악하고 있겠나. 우리도 가능한 범위 내에서 확인해보는 중일세. 괜히 유탄을 맞을지도 모르니까. 멋모르는 얼뜨기들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중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임마누일은 내 발뺌을 못미더워했다.

「이-상하다. 내 직감은 아니라고 하는데.」

“그놈의 직감은 술 취했을 때만 강해지나?”

「응. 보통 그러더라구.」

“헛발질 그만하고 그 하청 이야기나 더 해보게. 팀의 규모는 얼마나 되는가?”

「현장에서 발로 뛰는 건 네 명. 후방지원인력까지 합쳐도 열은 안 넘을걸? 이번에도 정보료는 딱 백만 달러만 부르더라. 활동자금의 한계가 그 정도밖에 안 되나봐. 불쌍하게도. 보나마나 평생헌신을 서약한 은퇴자가 전관예우로 일감을 받아내는 업체의 직원들이겠지.」

미국 정보기관의 관계자들은 현직에서 물러날 때 자연스럽게 기밀열람권한을 상실한다. 그러나 평생헌신(Lifetime commitment) 서약서를 작성한 특별 케이스는 은퇴 이후에도 현직 시절의 열람권한을 보유한다.

이는 본디 노령의 은퇴자가 젊은 현직자들에게 조언을 제공해주기 위해 마련한 장치다. 별다른 대가를 받지 않고, 오로지 애국심만으로 죽는 날까지 헌신을 이어나간다는 개념.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게만 돌아갈 리가 없지.’

국가운영의 중요한 영역을 민영화할 땐 반드시 폐해가 뒤따른다. 폐쇄성이 높은 첩보 분야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미국 정보기관들이 인적 첩보자원 운용업무를 하청으로 떠넘기기 시작하면서, 평생헌신 서약은 퇴직자들이 자기 사업체를 차리거나 다른 퇴직자가 있는 기업으로 들어간 후 전관예우를 받아먹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이런 시스템 아래에선 일선 인력들이 예전 같은 대우와 존중을 받을 수가 없다. 권한이나 근무환경도 열악해지긴 마찬가지.

경감들에게 먹여주기엔 딱 적당한 사이즈다. 위험의 외주화를 추구하는 원청은 하청업체의 손실을 하나하나 신경 쓰지 않을 테고, 천안문 광장 테러의 배후에 미국이 있으리라 의심하는 편집증 환자들은 하청 노동자들의 가치를 실제보다 높게 평가할 게 분명하다.

“그것들을 우리 쪽 창구로 유도해주게나.”

「뭐하려고?」

“비싸게 팔 수 있을 때 팔아넘기려고. 작으나마 불안요소를 제거할 겸 해서.”

「혹시 샤히디 그룹이랑 연결해주려는 거 아니야?」

“헛발질 그만 하라니까. 대외정보국(ГРУ)에 있는 친구들이 정보 물어오라고 쪼아대나?”

「어떻게 알았지?!」

러시아 음지의 권력과 브라츠키 크루그의 공생관계는 소련의 붕괴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것. 임마누일의 장난스러운 긍정은 애초부터 숨기는 의미가 없었기에 나오는 것이었다. 진지함이 결여된 태도로 미루어, 그쪽에서 내건 보상이 영 시원찮은 모양.

한쪽은 하청업체에게 외주를 주고, 다른 한쪽은 검은돈으로 얽힌 권력친화형 범죄조직에게 의뢰를 넣는다. 이는 어느 쪽이든 샤히디 그룹을 자국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뜻. 내 의도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결과라 하겠다.

각국의 정보기관들은 지금 자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것이다. 사방천지에서 매미들이 기어 나오는 시끄러운 계절이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이쪽에서 적당히 선을 열어주는 방안도 고려해봐야겠어.’

중국 이외의 나라들이 이런 식으로나마 샤히디 그룹을 찾는 건, 어떻게 자기네 유리한 쪽으로 이용해먹을 구석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일 터였다. 성전의 후원자가 되어줄 아랍권의 명사들을 소개인으로 삼는다면 그런 나라들도 만족하지 않을는지.

「그나저나 참 굉장하지 않아?」

“뭐가?”

「샤히디 그룹 말이야. 대체 누구에게 지원을 받았기에 베이징 한복판에서 그토록 엄청난 규모의 테러를 터트릴 수 있었을까?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땐 당연히 미국이 배후 아닌가 싶었는데, CIA 하청들이 어정거리는 꼬라지를 보면 미국이 관여한 건 아닌 듯하고. 그렇다고 영국 같은 나라가 미국의 동의 없이 그런 일을 터트릴 리도 없고. 자네 생각은 어때?」

“글쎄. 위구르 디아스포라가 자체적으로 길러낸 힘일지도.”

「에이, 말도 안 돼.」

“말이 안 될 건 뭔가? 내가 알기로 해외 위구르 공동체들의 인구만 백만이 넘을 텐데. 그만큼의 인구를 잠재적인 배후집단으로 두었다 치면, 그때부터는 그 집단의 잠재력을 모아 터트릴 인물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되지. 가능 불가능을 따질 일이 아니야.”

「오, 위구르 디아스포라의 인구가 그렇게나 많아? 고건 몰랐네. 근데 자네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 혹시……?」

나는 팍 인상을 썼다. 놀란 김춘식이가 몸을 움츠리며 눈치를 본다.

“나라고 이번 일에 관심이 없겠나? 자네 말마따나 내 근거지와 지척인 곳에서 터진 일인데?”

「듣고 보니 그러네?」

“너무 끈질기게 굴지 말게.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하는군.”

「미안.」

“다른 용건이 없으면 이만 끊지.”

「어, 그래. 백지수표는 쓰고 싶을 때 언제든지 말하도록 하고, 명절 잘 보내라구. 올해는 한국의 추수감사절이 성모 탄신일(Осенины)이랑 겹친다고 하던데. 21일 맞지?」

“맞네.”

「늦지 않게 선물 보낼게! 그럼 이만!」

“선물?”

내가 되물었으나, 전화는 벌써 끊어진 다음이었다.

‘또 술이나 잔뜩 보내오겠지.’

임마누일이 때때로 보내는 선물은 대개가 고도수의 술로 수렴되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남도 좋아할 거라 믿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러고 보면 올해는 술을 선물로 보낸 또 다른 인간이 있었다. 이슬람력의 새해 첫날이었던 지난 8월 10일에 인도네시아의 금빛 꼰대가 아락(Arrack)을 한 병 보내온 것이었다.

이슬람의 교리는 술을 금하지만, 대추야자나무의 수액을 증류하거나 열매를 발효시켜 만드는 술에 대해서는 가끔씩 융통성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대추야자 술을 마셨다는 전승이 있는 까닭. 사막을 지나던 중 가죽 부대 속 대추야자가 자연스럽게 발효되면서 생긴 물을 마셨다고 하는데, 이 물의 이름이 바로 아락(ﻋﺮﻕ)이다.

하지만 전승은 어디까지나 전승이고, 인도네시아의 아락은 이름만 아락일 뿐 애초에 대추야자로 빚은 술이 아니었다.

고로 담배는 피워도 술은 멀리하던 이슬람 군주가 하필 술을 선물이랍시고 보내온 것은 제법 뜻밖이라고 할 만한 일이었다. 더욱이, 함께 보낸 서신에서, 꼰대는 자신이 먼저 맛을 보니 나쁘지 않더라는 말을 적어두기까지 했다.

서신의 말미는 이러했다.

「여는 고통에 붙잡혀있지 않을 것이며, 과거에 머물러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대에게 이 술을 보냄은 내가 이러하듯이 그대도 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니 조용한 시간, 술잔에 달과 별을 비추어 홀로 건배하라. 여도 그대를 생각하며 그리하였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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