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미로 속의 여인 (2)
거자일소(去者日疎).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주종관계에도 적용된다.
물론 윗사람이 직접 모습을 보이지 않더라도 아랫사람들로 하여금 윗사람의 존재감과 은혜를 되새기게 할 방법은 많다. 그러나 오로지 그런 방법만을 취해서는, 아랫사람들의 입장에서 윗사람이 점점 더 피상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것을 막기 어렵다.
하여 한동안 밖으로만 나돌았던 나는 본사로 복귀하고 나서부터 조직 내부를 살피는 데 시간을 투자했다. 조직은 내 모든 활동과 생존전략의 기반이다. 먼 곳만 보다가 당장 발아래에 금이 가는 걸 몰라서야 쓰나.
시무식과 같은 정기 행사, 그리고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은 조직원들에 대한 표본검사를 실시하기에 좋은 때다. 조직의 핵심간부들은 기본이고, 유의미한 수의 일반 조직원들을 무작위로 추출하여 살펴보면 조직 전체의 건전성과 충성도를 알 수 있다. 이는 내 눈으로 직접 봐야 비로소 안심이 되는 영역.
이제 이틀 후면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전자결재로 사무를 보던 나는, 잠시 숨을 돌리는 틈에 조직원들과 준 조직원 취급의 피고용인들이 이용하는 복지몰에 접속해보았다. 조직원들의 밥상머리 물가는 정기적인 보고로 면밀히 파악하고 있는 바이나, 서면의 글줄과 실제 현실 사이엔 괴리가 끼기 쉬운 법.
「양광백포」 등을 통한 자체적인 물량 조달에 더해, 일체의 유통마진을 빼고 품목별 지원예산까지 따로 편성하면서 공급하는 식자재들의 가격은 일반 시장의 소비자가에 비해 평균적으로 절반 이하 수준에 머물러있었다.
당연하게도, 개별 품목들의 구매 후기는 온통 호평과 찬사로 가득했다.
「항상 그랬듯이 별점 다섯 개 박습니다. 요즘 같은 때 이렇게 저렴하게 식재료를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회사엔 언제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그렇잖아도 싼 가격인데 명절이라고 할인 쿠폰까지 주시면 남는 게 있나요? 사는 입장에서는 좋으면서도 걱정이 될 정도예요.」
「또 특가 판매……. 하하. 여기서 물건을 살 때마다 회사가 직원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되새기게 됩니다. 세계 최고의 직장입니다.」
조직을 회사라 칭하는 건 기본적인 보안교육의 결과였다. 또한 조직원과 준 조직원의 열람권한에 차등을 두어, 만에 하나라도 있을지 모를 보안 사고를 예방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정식 조직원이 아닌 자들 중엔 자신이 일하는 회사가 범죄조직으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임을 모르는 경우도 많으니까.
나는 이들이 남긴 글에서 내가 유도했던 자부심과 소속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매일같이 물가상승을 떠들어대는 뉴스, 그리고 거리를 오가며 자연스럽게 접하는 상점의 가격표들이 조직에 대한 애착을 일상의 영역에서 강화해주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복지 시스템은 조직원들과 기타 고용 인력들의 됨됨이를 파악하여 인사행정에 반영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견물생심이라. 이만큼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되는 재화가 있으면, 당연히 전매(轉賣/되팔이)로 이득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싹트기 마련. 지속적으로 비정상적인 구매이력을 보이는 자는 인사과의 검증대상이 된다.
작은 이익을 위해 시스템을 악용하는 자들은 사용에 주의가 필요한 도구들이다. 간단히 배제하지는 않더라도, 그런 결함이 있다는 건 알고서 써야 한다.
끼이-
경첩의 미세한 마찰음과 함께 집무실의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문을 밀고 들어온 건 털이 까만 중형견 한 마리. 방탄판이 들어있어 무게가 제법 묵직한 문이었지만, 각성체인 데다 내가 회로를 손봐주기까지 한 사냥개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헥헥헥-
타닥타닥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 김춘식이는 내 앞에 주저앉아 꼬리를 흔들었다. 갈색 눈이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
개가 들어온 문은 바로 앞이 비서들의 공간이었으되, 수연을 위시한 참모들은 개의 출입을 가로막지 않았다. 못 지나가게 막으면 끙끙대며 앓거나 구슬피 우는 소리를 내는 까닭. 주인인 경태는 목줄을 채워 묶어두기를 거부했다. 형님을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지 않느냐면서.
왠지 모르게, 경태 녀석에게 모종의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 녀석만이 이해할 수 있고 그 녀석에게만 의미가 있는 괴상한 꿍꿍이가.
김춘식이는 내가 수연에게 준 다이아몬드 장신구들과 동격의 선물이다. 그러니 두들겨 패거나 전기로 지져서 겁을 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고환을 떼면 그때는 나를 싫어할까 싶기는 했다.
“김춘식이. 이거 먹고 얌전히 있다가 가라.”
서랍에 있던 애완견용 간식을 까서 던져주자 춘식이는 더욱 맹렬하게 꼬리를 쳤다. 이 간식도 경태가 슬쩍 가져다놓은 것이었다.
나는 육포를 뜯는 개를 내버려두고 모니터로 시선을 되돌렸다.
보던 창을 닫고 다시 띄운 전자문서들 중엔 정부에서 들어온 문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다음 대선까지 반년이 남지 않은 시점에서, 현 정권은 「21세기형 수렵경제 구축」인지 뭔지를 서두르며 정권의 마지막 치적을 만드는 데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이 일이 우리와 무관하다면 좋겠으나, 청와대는 이미 우리를 새로운 정책의 성공 케이스로 만들겠다고 단단히 점찍어놓은 상태였다. 그들은 나름대로 상호간의 이익을 함께 추구하려 하는 것인데, 내 입장에선 참으로 귀찮기 짝이 없는 노릇.
정부가 우리에게 바라는 건 조직 산하 공능법인들의 기업공개와 정부 지분 확보였다.
우리가 계속해서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청와대 정책실 산업정책비서관과 안보실 안보전략비서관이 약속도 잡지 않은 채 공능법인 개마의 본사로 밀고 들어왔다.
막무가내로 찾아온 놈들을 응대한 내 부하들은 고위공직자들 특유의 자신감을 증언했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차관보급 공무원 둘이 쌍으로 시간을 내어 찾아왔는데, 너희가 감히 문전박대할 수 있겠느냐는 자신감을.
‘건방진 것들 같으니.’
물론 그들이 겉으로 보인 태도는 정중한 것이었다. 아마 본인들은 자기들이 무례를 저질렀다는 자각조차 없을 터.
권력을 쥔 자들은 주변인들의 양보와 너그러움에 익숙하다. 그리고 이 익숙함이야말로 권력자들을 좀 덜 떨어진 인간으로 전락시키는 독이었다. 죽은 가오슈센이 그러했듯이.
추석 연휴 전날인 내일 오전엔 미래전략수석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단순히 협상능력만을 고려한다면 수연 녀석을 내보내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래도 중요한 협상장엔 황금기의 눈을 가진 내가 나가는 편이 낫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위장신분의 직급도 고려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 청와대 수석비서관쯤 되는 인간이 수연을 독대하면 공연히 귀찮은 일이 생기는 수가 있었다. 해외의 클라이언트들이야 그 권력이 국내에 미치지 않으므로 질척거림을 관리하기 쉬우나, 국내의 고위공무원들은 그렇지가 않으니까.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공인능력기업청의 청장이나 차기 대선주자들의 참모들로부터도 연락이 들어온 게 있었다. 조직 본사의 사업 환경을 고려할 때 최소한의 대응은 해주는 편이 이로울 상대들이었다.
정부 공문을 검토하고 있는데, 내선 전화 단말기에서 불빛이 깜박거렸다. 비서실의 1번, 즉 수연으로부터 들어오는 신호였다. 버튼을 누르자 스피커에서 수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형님. 『마그놀리야 골라야』로부터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ИКК 33-36이 통화를 희망한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내가 곧 걸겠다고 해.”
「예.」
임마누일이 내게 요청했던 중재는 내가 얼마 전 그레이스에게 말을 꺼내기 무섭게 급물살을 탔다. 마녀는 내가 제시한 중재안을 듣고는 긴 고민 없이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이때의 그레이스는 빠르고 착실하게 진행되는 군비 확충에 고무되어있었다.
「당신은 처음에 내게 최소한 한 개 야전군을 무장시켜주겠다고 장담했었지. 그로부터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도 않았건만, 내 수중엔 벌써 무기와 장비를 통일한 10만의 보병들이 있어. 교육 훈련을 고려해도 앞으로 1년 이내에 최소한의 전력화가 완료되겠지. 두 번째, 세 번째 야전군의 탄생도 머지않았고……. 지금도 당신이 보낸 화물이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을 때마다 가슴이 떨려. 이런 게 애정일까?」
「웨인. 당신은 내 인생에 나타난 가장 달콤한 사람이야. 어제는 당신을 떠올리며 자위를 했는데, 정말로 기분이 좋더라. 그거 알아? 내가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한 건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어.」
「남편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들으니까…… 갑자기 또 몸이 달아오르네……. 음, 잠시, 후우…… 왜 이렇게…… 잘 느껴지는…… 걸까……?」
나는 통화중에 이상한 짓 하지 말라고 타박한 후 일 이야기를 진행했다.
「행정력, 이라.」
내가 제안한 중재안의 핵심은 르완다의 대통령이 지니고 있는 탁월한 국정운영능력에 있었다. 그런 불세출의 인재를 강대강 대치로 날려버리느니, 조금 사정을 봐주고서 행정가로 영입하여 주술사 왕 동군연합 체제의 효율 제고에 써먹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첫 신성왕국의 출범이 탄자니아 연방정부의 행정조직들을 흡수한 다음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레이스는 주술사 왕으로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강역의 잠재력을 충분히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비효율은 동군연합에 합류하는 국가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더 높아질 게 뻔했다.
그레이스야 군제·장비·보급 및 동원체계만 통일할 수 있으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는 입장이나, 내가 보기에 이는 낮은 행정능력으로 말미암은 불가피한 선택일 뿐이었다. 칠각기사단에겐 거대한 대륙과 수많은 부족들을 체계적으로 지배할 행정력이 없다.
「그렇지만 왕의 질서에 예외를 만들면 왕의 권위에도 영향을 줄 텐데.」
이러한 우려에 대하여, 나는 르완다라는 나라를 복속시키는 대신, 대통령 개인을 제후로 봉하라고 권고했다. 대통령이 집착하는 르완다의 자주독립과 주술사 왕의 지배질서를 공존케 할 방안으로서. 그레이스는 내 권고를 흥미롭게 곱씹었다.
「내가 지배하는 강역에 작위와 봉토를 만들고 르완다 대통령을 제후로 올려라?」
봉토의 통치권은 르완다의 경제와 대통령의 권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 대통령으로서는 자존심이 조금 상하더라도 받아들일 만한 조건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군주국 기사단의 작위가 우방국의 국가원수에게 주어지는 것과 유사한 면이 있으니까.
거기에 민족적 동질성이 높은 부룬디와의 통일까지 덤으로 제시해주면 차마 거부하지 못할 제안이 될 테고.
「능력도 없는 버러지들이 나도 같은 대우를 해달라고 할 것 같아서 꺼려지긴 하지만……. 당신이 하는 말이니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할게. 이후의 확장이 조금 번거로워지더라도, 그 이상으로 내실을 다질 수만 있다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르완다에 대한 공작은 조금 미뤄둘 걸 그랬네. 이제 와서 이런 말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아아, 무슨 공작을 가했느냐고? 사람을 보내 감옥에 수감되어있던 그의 정적을 암살했지. 정치적 반대파의 불만이 폭발하게끔. 내부가 적당히 곪기를 기다려서 들이치면 보다 간단히 흡수할 수 있을 거라 여겼거든.」
그레이스가 부하들에게 시켜 암살했다는 정적은 다름 아닌 호텔 르완다의 주인공, 폴 루세사바기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루세사바기나가 옥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대통령이 손을 쓴 건 아니리라 짐작하긴 했으나, 그 배후에 그레이스가 있다는 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대통령을 죽이는 편이 낫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레이스는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나는 바보가 아니야. 그자의 유능함 자체는 나도 일찍부터 주목하고 있었는걸. 그 고집쟁이 독재자가 없는 르완다는 적당히 곪는 정도가 아니라 구석구석이 썩어 문드러져버릴 테지.」
「한 번은 내가 직접 나서서 마음을 꺾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어.」
「그렇지만, 알잖아? 자영농과 노예의 노동효율엔 차이가 있다는 거. 특히나 그 고집쟁이처럼 자아가 강한 유형은 더더욱 차이가 크지. 능력 발휘가 곧 자아실현인 유형이니까. 정신이 흐리멍덩해지면 원래의 능력이 안 나온단 말이야.」
「응? 이건 사이비 교주로서의 경험이냐고? 글쎄……. 어떨 것 같아? 한번 맞춰봐. 정답이 나오면 내가 상을 줄게.」
나는 상 같은 거 필요 없으니 검토나 제대로 해보라고 대꾸했다.
임마누일이 연락을 해온 것은 필시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었다.
헥헥헥-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려던 나는 나를 바라보던 김춘식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
반복적으로 겪어봐서 아는 바, 개가 사람을 이렇게 빤히 쳐다보는 건 무언가 바라는 게 있어서다. 미간을 좁힌 내가 간식이 든 서랍을 열자, 개는 제 주둥이를 앞발로 꾹 누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김경태 이 녀석은 제 개를 어떻게 교육시켜놓은 걸까. 나는 서랍을 닫으며 물었다.
“뭘 바라나?”
마치 사람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양, 까만 개는 제 앞발로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내가 손을 내밀자 개는 반갑게 와서 제 머리통을 들이댔다. 그대로 몇 번 쓰다듬어주니, 기분이 좋아진 개는 숫제 내 무릎 위로 올라와 몸을 말았다.
“내려가라.”
내 말에, 개는 나를 빤히 응시하며 다시금 제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해 보였다.
“…….”
밀어낼까 하는 생각도 잠시. 바보가 된 기분에 한숨을 쉰 나는, 한 손으로 대충 개 대가리를 쓰다듬으며 남은 손으로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