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68화 (368/561)

#38. 광장으로 가는 길 (18)

미적미적 시간을 끌다가 결국 데드라인을 넘겨버린 가오슈센은 복수도 타협도 불가능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남은 선택지라곤 모든 걸 숙부의 아량에 맡기는 무조건 항복 하나가 전부였던 상황에서, 이 겁쟁이는 놀랍게도 전격적인 미얀마행을 감행한 것이다.

아무런 예고도 조짐도 없이, 내가 사후에나 보고를 받을 수 있었을 만큼 신속하게. 국안부에 있는 경감들조차 가오슈센이 움직이고 나서야 겨우 상황을 파악한 행보였다.

“갔다고? 그놈이? 정말로?”

용기인지, 발악인지. 아니면 사고능력이 마비된 인간이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했을 따름인지. 내가 미심쩍어하며 묻자, 보안회선으로 연결된 화면 속의 미주는 면목 없다는 낯으로 머리를 숙였다.

「예. 이미 맹룡기(猛龙旗)와 함께 네피도에 도착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미리 파악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아니다. 아마 나간 본인도 저가 이렇게 나갈 줄 몰랐을 텐데, 네가 모르고 있었던 건 당연한 일이지.”

「…….」

“그래, 그 인간이 끌고 나간 건 맹룡기 하나가 다인가?”

「그렇습니다. 화맹의 나머지 제대(梯隊)들은 뒤늦은 명령을 받고 후속할 준비를 서두르는 중입니다. 전체적인 이동과 배치엔 최소 보름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맹룡기는 가오슈센이 「화성맹룡대」 구성원들 중에서 특별히 가려 뽑은 정예 사병들이었다. 강화계수의 평균치가 높고 장비 수준이 좋으며 훈련도 아주 잘 되어있지만, 실전경험은 빈말로도 풍부하다고 하기 어려웠다. 가오슈센이 항시 가까이에 두고 병정놀이하듯 애지중지해왔기 때문이다.

명목상으로는 급변사태에 대비해 전략예비로 둔 쾌반부대(快反部队/신속대응부대)라 하나, 실질적으로는 전투병단이라기보다 귀족사회에서 위세를 겨루기 위한 의장대 내지 근위경호대에 더 가까울 집단.

이런 집단만 끌고서 미얀마로 갔다는 건, 가오슈센의 전장행이 지극히 충동적인 도피행위였음을 방증하는 바다. 어쩔 수 없이 위험한 전장으로 가야 한다면, 가오슈센은 동원 가능한 모든 전력을 편집증적으로 긁어모았어야 정상인 인간이지 않은가.

‘미주에게조차 귀띔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그렇지.’

어쨌든, 가오슈센의 맹룡기는 미얀마의 행정수도인 네피도의 교외에 전투 전개를 완료한 상태였다. 신속대응능력을 중시한 이능보유자 집단답게 자체적인 공중수송 및 공중기동 역량이 우수했고, 또 항시 출동대기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덕분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미주가 묻기에, 나는 여상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죽여야지.”

가오닝후이 감찰주임의 청부를 받을 때만 해도 설마 이 청부를 이행할 순간이 오겠는가 싶긴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찾아보면 분명 다른 수가 있긴 하겠지. 그러나 가장 빠르고 간편한 건 역시 죽여서 치우는 방법이었다.

경감들 또한 변화한 상황에 맞춰 대응할 준비를 마쳤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연결고리가 되는 사람을 죽여 계파와의 관계를 청산하는 건 공산귀족사회의 금기이지만, 그 사람이 전장에서 횡사한 것으로 꾸밀 수만 있다면 그런 금기 따윈 아무래도 좋다.

숙부가 조카의 가정에 탁란을 한 것은, 대외적으로 알려질 경우 가해자인 숙부만이 아니라 피해자인 조카의 체면까지 시궁창에 처박힐 스캔들이다.

고로 체면이 중한 두 중화귀족은 자신들의 갈등을 최대한 비밀스럽게 덮어놓고 있었으되, 다른 귀족들 모두를 상대로 가오 가문에 내홍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은폐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감출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내홍의 원인뿐이다.

따라서 작금의 사태를 지켜보는 다른 공산귀족들은, 가오슈센의 갑작스러운 미얀마행을 가오 가문의 집안 문제와 연관 지어 받아들일 터.

그로 말미암아 가오슈센이 죽는다면, 국안부의 세 경감과 가오 가문의 관계는 누가 보더라도 서먹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잠시 조용하던 미주는 결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부탁해왔다.

「형님. 가능하다면 그는 제 손으로 죽이고 싶습니다.」

“네가 직접?”

「예.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되물었다.

“혹시 그놈에게 미안함이라도 느끼는 거냐?”

「……예?」

아무리 됨됨이가 못나고 모자라다지만 그토록 좋다고 매달리던 사내를 죽이는 일이다. 그러니 줄곧 구애를 받아온 미주로서는,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과는 별개로 조금은 찜찜한 마음이 들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배려를 해줘야 하나 생각하며 질문을 던졌더니, 미주는 굉장히 끔찍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 살찐 변태새끼가 정말로 싫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고 역겨운 인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정해라. 혹시나 해서 확인차 물어봤던 거다.”

「……죄송합니다.」

강한 적개심을 여과 없이 드러냈던 미주는, 자신의 짧은 흐트러짐을 사과한 뒤, 짧은 한숨을 쉬고서 가오슈센에 대한 감정을 입에 담았다.

「처음엔 인간적인 측면에서 좋은 점을 찾아보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서갑수 부장이 목숨을 바쳐 살려낸 인간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기를 바랐으니까요. 그러나 그 인간 언저리가 한심하고 얼빠진 언행을 보일 때마다, ‘부장님은 겨우 이런 쓰레기를 위해 죽은 건가?’라는 생각이 깊어지는 걸 막을 수가 없더군요. 그 쓰레기가 형님과 조직의 이익에 기여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뭐, 인간적인 경멸이라는 게 그런 거지.

「저는 쓸모를 다한 돼지가 절망과 자기혐오 속에서 숨이 끊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역시 제 손으로 죽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겠지요. 놈이 저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인 것 같으니까요.」

그렇다면야. 나는 가볍게 승낙했다.

“알았다. 그럼 같이 한번 다녀오도록 하자.”

미주는 약간 당황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형님께서 친히 움직이십니까?」

“음. 가오닝후이의 업보를 조금 더 무겁게 만들어둘까 싶어서 말이다. 그러려면 내가 가는 편이 확실하겠지.”

「아아…….」

가오슈센 하나만 저격해 죽일 요량이면 특작조 하나 꾸려 보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쪽엔 서묘포파의 내부정보를 손바닥처럼 들여다볼 수단이 있으니까. 만전을 기한다 쳐도, 경태의 재량에 맡겨 필요한 모든 자원을 끌어 쓸 권한을 내어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가오슈센은 물론이고 맹룡기까지 싹 쓸어버릴 참이었다. 내가 발휘하는 잔혹함은 곧 조카에 대해 손을 쓴 숙부의 잔혹함이 될 테니까.

내 수중엔 이미 가오슈센과 그 부인의 통화를 녹취한 파일들이 있다. 내 거짓된 대자들이 감청하여 넘겨준 녹취의 길이는 도합 7시간가량. 여기엔 아내가 토설한 탁란의 내막이 낱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만 해도 가오닝후이의 정적들을 열광케 할 재료인데, 세 경감들은 가오슈센이 의뢰한 유전자검사 결과의 데이터까지 추가로 확보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내가 화룡점정으로 도가 지나친 잔혹함을 연출해주면, 청부자인 가오닝후이 입장에선 제 행적이 드러났을 때의 뒷감당이 더욱 부담스러워질 터.

“별다른 일이 없다면 금일 19시에 출발하기로 하지. 합류 지점은…… 남방에 있는 석벽호표의 거점이나 강상전단 기함 중 하나가 좋겠군. 네 생각은 어떠냐?”

해질녘에 떠서 이른 새벽에 복귀하는 야간출장이면 일을 끝마치고도 남으리라는 게 내 예상이었다. 당혹감을 수습한 미주는 잠시 숙고한 후 대답했다.

「그보다는 화성무련의 자산을 이용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무련의 기함 만경창파(萬頃蒼波)가 동아프리카 해역에서 돌아온 이후 줄곧 별다른 임무 없이 선전 항에 정박 중인데, 제가 련주의 권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장소들 중에선 보안성이 가장 우수합니다.」

“그런가?”

「예. 무련의 위세를 과시하겠다고 초대형 선박을 개수한 것까지는 좋으나, 체급이 지나치게 커서 경제성 때문에 방치되고 있는 배니까요. 지금 그 배에 관심을 두고 있을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화성무련은 미주에게 국가주석이 직접 보검을 수여할 만큼 주목도가 높았던 엽사연맹이다. 그런 연맹의 기함에 대륙의 기상이 반영되어있는 건 당연한 일. 일단 사업의 크기를 키워야 해먹을 구석도 많아지지 않겠는가.

“손에 쥔 패를 잘 써먹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앗, 예.」

“그럼 19시에 거기서 보는 걸로 알고 있겠다. 네가 직접 전투에 참가할 일은 없겠다만, 그래도 밥은 든든히 먹고 합류하도록 해라. 아니면 조금 일찍 만나서 같이 식사를 해도 좋겠고.”

미주는 조금 머뭇거린 끝에 조금 일찍 만나는 쪽을 선택했다.

함께하는 저녁식사는 내 눈으로 부하의 심리상태를 점검할 기회였다. 미주가 몸가짐을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보이긴 했으되,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본 결과 가오슈센에 대한 적개심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부하들을 잘 먹이고서 미얀마로 출발했다.

경태는 국경을 넘는 비행 도중 이런 말을 했다.

「격세지감이 드네요. 흑해자당이랑 처음 싸울 때만 하더라도 헬기 하나 띄울 때조차 레이더 추적을 의식해야 했는데, 이제는 정류지구 상공을 개별비행으로 통과하면서도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말입니다.」

정류지구(丁类地区)란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구역을 말한다. 정부 공인 엽사병단의 엽사들이라도 별도의 허가를 득하지 않으면 드나들 수 없는 곳. 미얀마와 중국의 국경지대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류지구로 지정되어 있었다.

우리의 비행 기록은 국안부의 경감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말소해야 한다. 비행 스케줄 자체가 그들이 전산시스템상의 권한을 행사하여 허가한 것인데, 기록을 지우지 않고 내버려뒀다간 가오슈센의 죽음과 그들 사이의 연관성을 추궁받게 될지도 모르니까.

국경에서 네피도까지는 제트 바이크로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내전 중인 군부독재국가의 수도답게, 네피도 인근은 방공망의 밀도가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서묘포파 공중호송대의 식별부호가 부여된 상태였고, 그게 아니더라도 구 소련과 러시아제 장비가 주류인 미얀마의 방공망으로는 땅거미 지는 하늘을 저공으로 가로지르는 제트 바이크 편대를 탐지하기가 어려웠다.

위장신분과 내부정보를 이용하여 서묘포파의 후방으로 침투하는 건 손쉬웠다. 경태는 중국인들로 구성된 의용군의 무장수준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크. 당당하게 자주포까지 운용하는 의용군이라……. 이것이 인민지원군의 전통인가?”

보통 의용군이라 하면 정규군에 미치지 못하는 허술한 무장집단을 떠올리기 쉬우나, 근대 이후의 의용군은 현지의 정규군보다 더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강대국이 대리전을 치르고자 자국 정규군을 의용군으로 위장하는 경우. 현지의 유력자가 사재를 동원해 의용군을 편성하는 경우. 그리고 나 같은 사업가가 클라이언트의 의뢰를 받아 용병부대를 편성하는 경우 등.

당장 경태가 언급한 인민지원군-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 빨갱이들의 군대도 명목상으로는 의용군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참전한 것이지 않았나.

그러나 이곳의 초능력 짱깨들은 장비만 우수할 뿐, 전의는 70년 전 인민지원군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기강이 개판이군.’

네피도 인근은 미얀마에서 그나마 안전한 편에 속하는 지역이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안전이긴 하지만, 여하간 이곳에 주둔하는 서묘포파 소속 병단들은 후근부대(지원부대)와 지휘부를 제외하면 모두가 나름의 후광을 가진 것들이었다.

당장 내가 입수한 배치도만 봐도, 주둔지가 도심에서 가까울수록 해당 주둔지를 할당받은 병단 주인의 지위가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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