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67화 (367/561)

#38. 광장으로 가는 길 (17)

가오슈센이 숙부와의 대결에서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비록 복수의 각오를 세우지는 못했을지언정, 여차하면 행동에 돌입할 수 있게끔 자신의 세력을 결집시켜놓기는 한 것이다. 국가 간의 전쟁으로 치면 동원령을 발효시키고 일선 부대들을 전진배치하는 단계까지는 진행해놓은 셈.

꽌시의 특성을 고려할 때, 근대적인 동원령에 비유하기보다는 봉건군주가 휘하의 제후들을 소집했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일단 세력을 결집시켜놓았으면 다음 행동이 신속하게 이어져야 한다. 과거를 묻고 넘어가는 걸 전제로 협상을 하든, 아니면 정말로 들이받아버리든.

그러나 가오슈센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시간만 끌었다. 흘러가는 모든 촌각들이 천금과도 같은 중요한 시기에.

사령관의 우유부단함은 휘하 군세의 불안과 동요를 낳는다. 낮은 승산을 점치면서도 꽌시가 강제하는 의무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싸울 준비를 마쳤던 가오슈센의 제후들은, 조카를 쳐내기로 한 숙부가 차근차근 고지를 점하는 와중에도 아무런 추가지시가 없는 사령관에게 의혹의 시선을 보내었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상에 존재하며, 정쟁과 전쟁은 많은 면에서 유사하다. 임전태세는 갖추는 시점에서부터 적성세력에 의한 관측과 정보유출의 가능성을 감수하는 것. 그 상태로 길게 시간을 끌면 새어나가는 정보는 점점 더 많아진다.

낮아지는 사기와 새어나가는 정보가 이루는 상승효과는, 숙부가 조카의 제후들을 회유하거나 선제적으로 제압하기 쉬운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이러는 동안 가오슈센은 여전히 미주에게 농락당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일이 길어지면서 슬슬 현실을 직시할 때가 되었음에도, 가오슈센은 그놈의 ‘진정한 사랑’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했다. 열병에 걸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경태는 이렇게 평했다.

“이쯤 되었으면 가슴 속으로는 본인도 알고 있다고 봐야죠. 그저 인정을 안 하고 있을 뿐이지. 어쩌면 자기 인생에 남은 게 이것밖에 없다고 느끼고 있을지도요.”

나와 연락이 닿은 가오닝후이 감찰주임도 비슷한 소감을 남겼다.

「나는 내 조카가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소.」

파렴치한 숙부는 억울한 조카의 세력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으되, 조카의 때늦은 순정에 대해서는 감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1차적으로는 내가 가오슈센에게 할당한 비밀 연락채널의 보안이 그만큼 철저하게 유지되는 까닭이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가오슈센의 행동이 상궤를 한참 벗어나있다는 게 문제였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지.’

나이가 불혹을 넘어 지천명에 더 가까운 고위 귀족이, 한낱 연애사업에 정신이 팔려 맛이 가버리다니. 첩을 수십씩 두고 수시로 갈아치우기가 예사인 공산귀족들의 사회에선 덜떨어진 얼간이 취급을 받을 일이었다.

나는 주임에게 듣기 좋은 말을 돌려주었다.

“저는 그가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온전치 못하다…….」

“예.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과 같은 일들을 벌였을 리 있었겠습니까? 듣기로 그가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마다 번번이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던데, 그런 당신을 축출하고 가문의 권력을 독점하려 드는 게 제정신인 사람이 할 짓은 아니겠지요.”

「허허.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구려.」

“의로 맺어진 형제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으면 바로잡아주는 게 사람의 도리입니다. 저는 아픈 마음으로나마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자 합니다.”

나는 경감들의 방어논리와 거의 동일한 내용을 읊었다. 이는 체면을 챙기면서 의형제를 치는 명분이며, 감찰주임에게 경감들과 나 사이의 상관관계를 상기시키는 수단이었다.

「내 조카가 과분할 만큼 훌륭한 인연을 맺었구려.」

가오닝후이 감찰주임은 내 능력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주임과 나의 꽌시는 명목상으로는 가족과도 같은 깊이였다. 비록 서로 얼굴도 본 적 없는 사이이긴 하나, 지난날 가오슈센이 “당신은 나와 숙부님의 형제로 대우받게 될 거요.”라고 말했던 배경엔 가오닝후이 주임의 확고한 의사가 깔려있었을 테니까.

감찰주임의 입장에서 나는 우선순위가 높은 회유 대상이다. 고로 내가 간접적인 지지를 표명하자 주임 또한 내게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대가 그간 우리 집안에 베풀어온 호의들은 실로 가족의 의리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소. 이렇게 직접 말을 나누는 거야 오늘이 처음이오마는, 그대에게 구명지은을 입었다고 봐도 좋을 나는 내 조카보다도 더 그대를 친애하고 있었다오. 그러니 조카가 마음에 병이 들었다 한들 그대와 우리 가문이 멀어질 이유는 없는 것이지. 그대는 이미 우리 가문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피를 나눈 일가와도 같은 사람이오.」

“저 역시 이제까지의 관계가 그대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일가라면 응당 콩 한 쪽도 나누어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까지의 관계는 당연히 가오슈센과 내가 지분을 나누어 가진 여러 사업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콩 한 쪽도 나눠먹자 함은, 당신이 조카의 지분을 삼키는 걸 거들어주겠다는 뜻인 동시에, 내가 콩 하나만큼의 작은 이권도 포기할 마음이 없음을 암시한 것이었다.

가오닝후이 주임은 기꺼워하는 음색으로 동의했다.

「암. 그것 역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지. 마땅히 그러해야 하고말고. 불감청이었으나 고소원이었던 바요.」

이 인간은 그 욕심 많은 가오슈센과 한 핏줄인 데다 조카며느리와 상간하여 자식까지 탁란한 말종이다. 그런즉 지금 말만 이렇게 해놓고 나중에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지만, 그즈음이면 국안부의 내 거짓 대자들은 최소 2급, 최대 1급의 경감을 달고 있을 터였다.

2급 이상의 국안부 경감이면 실무적 권한과 영향력으로는 한 성(省)의 감찰주임에 뒤지지 않는다. 고로 그런 경감들이 셋이나 내 대자를 자처하는 동안에는 가오닝후이가 쉬이 수작질을 부리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 인간이 조카보다 충분히 영리하다면, 현재 조카가 쥐고 있는 이권들이 많은 부분 나와 내 조직의 대체 불가능한 기여를 통해 유지되고 있음을 파악했을 것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가오닝후이는 불안요소가 전혀 없지는 않을지언정 과한 걱정은 불필요한 거래상대였다. 이 대륙에서의 내 입지와 사업기반은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에.

가오닝후이는 약간의 환담이 오간 끝에 마지막 근심거리를 털어놓았다.

「듣자니 「화맹」의 설립에 그대와 그대의 무명회사가 심도 깊은 자순(咨询/컨설팅)을 제공했다고 하던데, 내 조카가 정예한 가병(家兵)들을 이끌고 미엔디엔(미얀마)이나 아푸한(아프간) 등지로 나아가 무공(武功)과 의로운 이름을 떨칠 공산이 얼마나 될 것 같소?」

「화맹」이라 함은 가오슈센의 사영 이능엽사병단 「화성맹룡대(花城猛龙队)」를 줄여 부르는 말이었다. 가오슈센이 거느린 당내 계파나 공안세력들과 달리, 화성맹룡대의 이능엽사들은 병단이 해체되지 않는 한 가오슈센 개인에게 충성을 바칠 사병집단이었다. 과연 그 충성이 열악한 환경에서까지 유지될지는 의문이어도.

즉 숙부는 궁지에 몰린 조카가 사병대를 이끌고 해외로 도주한 후, 거기서 또다시 인민영웅의 명성을 새롭게 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이었다.

미얀마에 나가있는 친정부 의용군 「서묘포파」는, 말만 의용군이지 실제로는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연합참모부 직할 특별공작조(特别工作组/태스크포스)의 지시를 받는다.

아프가니스탄 쪽의 사정도 대동소이했다. 거기선 의용군이 아니라 개별 병단 내지 사영군사공사(私营军事公司/PMC) 단위로 계약하여 연합참모부의 지시를 받는다는 점이 다를 따름.

어느 쪽이든, 가오슈센이 인민해방군 연합참모부의 그늘로 들어가 버리면 숙부로서는 조카를 처리하기가 난감해진다. 경감들이 제공한 숙청의 구실은 어디까지나 체면과 명분을 챙기는 용도지, 공개적으로 문제를 삼았다간 가문 전체에 피해가 올 수밖에 없으니까.

“염려 마십시오. 화맹의 영용함이 석벽호표에 비할 바는 아니거니와, 제아무리 명검이라도 쓰는 사람이 미숙하면 대나무 하나 자르지 못합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령이 얼마나 합리적인 지휘를 할 수 있겠습니까?”

화성맹룡대는 구성원 개개인의 전투수행능력부터가 내 조직의 2선급 전투원들에 미치지 못한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작전수행능력을 비교하면 양자 간의 차이는 더욱 현격하게 벌어진다. 비교의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나 숙부는 더욱 확실한 답을 바랐다.

「나는 조카가 잘못을 깨닫기를 바랄 뿐, 먼 이역에서 비명횡사하기를 바라지는 않소. 녀석이 위험한 땅으로 무리한 원정을 나갔다가 눈먼 흉탄이라도 맞으면 어쩐단 말이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무명회사가 힘을 써줄 수 있지 않겠소?」

가면을 쓰고 체면을 챙기며 의뭉을 떠는 소리.

「미엔디엔이나 아푸한처럼 혼란스러운 땅에서 녀석이 쓰러지면 흉수가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조차 불가능할 거요. 그럼 복수조차 해주지 못하는 내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 듯 아프겠소……? 죽어서 얻는 명예보다는 살아서 누리는 일상이 더 가치 있는 법이오. 피로 이어진 가족들에겐 특히 더 그러하지.」

요컨대 조카가 본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몸을 피할 경우, 가문이 인민영웅을 잃어버리는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조카를 죽여 후환을 없애고 싶다는 뜻이었다.

‘죽은 인민영웅도 남은 핏줄과 가문에 후광을 드리울 수는 있다…… 인가?’

전장에서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 후광에 빛을 더하는 요소. 하물며 그 영웅이 여간해선 전장에 나갈 일이 없는 고위 공산귀족의 한 사람임에야.

냉혹한 숙부는 유사시 그 정도 선에서 만족할 요량인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조카에 대한 숙부의 살인청부를 받아들였다.

“가오 서기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쉬운 길 대신 그렇게 위험한 길을 선택할까 싶기는 합니다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도 사람을 보내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고맙소이다. 녀석을 대신해 감사를 표하오.」

“다만 제가 요즘 벌이는 사업이 많아, 많은 인력을 할애하기는 곤란한 점 양해바랍니다. 제 부하들의 실력이 뛰어나다 한들 소수의 힘만으로는 가오 서기의 신변을 완벽하게 보호하기 어렵겠지요.”

「전장에서 어찌 완벽한 안전을 바라겠소? 실제로 도움이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내가 훗날 크게 사례하리다.」

말이야 이렇게 오고갔지만, 나는 가오슈센처럼 용렬하고 이기적이며 자기보신적인 인간이 험한 전장에 나갈 가능성을 희박하게 보았다. 후방에서만 머문다 쳐도, 각성능력자들이 기동력과 침투력을 발휘하는 전장에서 어찌 백 퍼센트 생존을 확신하겠는가.

현시점의 미얀마는 전후방이 따로 없는 죽음의 밀림이었다. 중국이 기세등등하게 밀어 넣었던 서묘포파는 조직적인 은폐가 필요할 만큼의 소모에 시달리는 중이었고. 그곳의 중국인들은 위아래가 공평하게 죽어나가는 진정한 공산주의를 경험하고 있었다.

물론 미얀마나 아프간으로 나갔다가 또 다른 제3국으로 출국한다는 선택지도 있다. 병단은 병단대로 싸우라고 두고, 자신은 성과가 나올 때까지 안전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그러나 인민영웅 칭호를 가진 인간이 그딴 짓을 했다간 중앙당의 눈 밖에 나버리고 만다. 복수도 재기도 그냥 놔버리는 결정인 것이다.

게다가 서구세계와 중국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는 요즘, 고위 공산귀족이 제3국으로 나가 장기간 체류한다는 건 중앙당의 의심을 사기 십상인 행위다. 베이징의 의심병이 도지면 그때는 국안부의 배신자 처단 프로그램인 여우사냥(獵狐)의 표적이 될 것을 걱정해야 한다.

‘외국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국내 정계에서의 공격에 취약해지지.’

가오슈센의 계파가 멀쩡한 상태라면야 휘하의 귀족과 관료들이 알아서 방어를 해줄 터이나, 숙부와 척을 진 지금은 그런 걸 기대하기 어렵다. 숙부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으려면 정말로 전장에 머물 각오를 다지고서 출국을 해야만 하는 것.

인민영웅이 진심으로 조국에 헌신하는 동안에는 정적들이 함부로 모략을 걸지 못한다. 중앙당의 비호로 인해 역풍을 맞는 수가 있으니까.

연합참모부가 인민영웅을 중히 기용하고 각종 선전매체들이 중앙당의 지침에 따라 영웅의 행보를 띄워주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찬물을 뿌릴 순 없잖은가.

사정이 이러하기에, 궁지에 몰린 가오슈센의 미얀마행은 내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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