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66화 (366/561)

#38. 광장으로 가는 길 (16)

식사를 마친 린페이는 조용한 장소에서 둘만의 내밀한 대화를 희망했다.

나는 멀리 갈 것 없이 최상층의 객실을 잡았다. 그러나 대화를 바로 시작할 순 없었는데, 린페이에게 먹인 양이 워낙에 많았던 까닭이다. 신진대사의 가속은 노폐물 축적의 가속을 의미한다. 객실에 들어선 린페이는 얼굴을 붉히며 홀로 씻고 오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중간에 들어오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남기고서.

복층 구조의 객실은 위로 열린 공간감이 넓었다. 응접실 창가의 테이블 위엔 「인민일보」, 「참고소식」, 「환구시보」, 「해방군보」 등의 주요 신문들이 부챗살처럼 놓여있었다.

중국의 신문들은 공통적으로 중국 내의 혼란상을 축소하고 서구세계의 분열과 갈등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서로 다른 신문들임에도 불구하고, 기사의 게재 순서와 내용, 논조 등엔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증가하는 샤리아 구역」, 「극단적 난민 범죄 증가」, 「나날이 심화되는 유럽의 종교갈등 - 이슬람은 21세기의 마교인가?」, 「유럽 주요국 정상들, 뜨랑푸(特朗普, 트○프의 음차) 미 대통령의 계속되는 경제·외교적 압박에 힘을 합쳐 저항할 것을 결의」, 「유럽 정계의 급격한 우경화 우려」 등등. 기사의 표제들만 모아 봐도 유럽은 중국보다 훨씬 더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남향으로 트인 전면유리창으로는 전승기념일 행사가 거행될 중앙대로(长安街)가 내려다보였다. 대로변엔 공안부, 베이징 철로공안국, 상무부 등의 주요 관공서들이 줄줄이 늘어서있었다.

상무부 근처의 체육센터와 공원에선 무림풍을 표방하는 몇몇 엽사집단들이 행인들에게 공개적인 대련을 선보이는 중이었다. 단체의 홍보를 겸하여 새로운 단원을 모집하기 위한 쇼.

체면이 목숨보다 중하다고 믿는 자들의 나라에서 자유대련은 거의 행해지지 않는 금기에 가깝다. 상대의 명성을 똥통에 처박아주겠다고 작정한 게 아닌 이상, 대련은 사전에 합을 맞춰놓은 친선대련이어야 한다.

초식준학(招式准确)과 절주일치(节奏一致). 모든 초식은 정해진 투로를 따라야 하고, 대련에 임하는 쌍방은 공방의 리듬을 정확하게 맞춰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원칙.

내 관점에선 그냥 좀 그럴듯하게 행하는 프로레슬링이 아닌가 싶지만, 어쨌든 중국의 대중들은 이런 걸 좋아했다.

베이징의 너른 시가지를 조감하며, 나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듯 열병식과 테러의 진행을 그려보았다. 몇 번이고 반복하며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계획상의 허점을 찾는 사고실험.

거대한 시가지를 보고 있으려니 불현듯 묵직한 피로가 몰려온다. 단순히 잠이 부족해서 느끼는 피로가 아닌, 정신적인 의미의 탈진감이었다.

내가 불태울 이 도시가 런던이었다면.

나는 나 자신을 다스렸다. 긴 마라톤은 이제 확실하게 후반에 들어섰다. 아직 체감하기는 어려울지라도, 런던의 불길은 그렇게까지 먼 미래에 있지 않을 터였다.

린페이의 위치와 행동은 굳이 돌아보지 않고서도 청각만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숨겨진 감시 장비가 없음은 입실할 때 이미 확인했다. 사고실험을 끝낸 나는 일전에 그레이스와의 술식 교환으로 얻은 「환시(幻視)」를 회로에 장전했다.

스르륵-

통상시야를 기준으로, 눈높이로 들어 올린 오른손이 물에 녹는 설탕처럼 지워졌다. 손을 그대로 두고 보는 각도를 달리하자, 잔뜩 일그러져 원형을 알아볼 수 없게 된 상(像)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유화(油畫)로 사람의 손을 그린 후 물감이 마르기 전에 한바탕 휘저어놓은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이번엔 이리저리 손을 움직여본다. 팔뚝까지 두른 투명화 장막은 투명함을 잃고 마약중독자의 환각처럼 물결치는 상을 빚어냈다. 상이 녹아내리듯 번지는 범위는 투명화 장막을 전개한 범위와 동일했다. 황금기의 눈으로 보는데도 제법 어지럽게 느껴지는 시각정보.

‘지금 이대로도 기대보다 쓸 만한 술식인데.’

그레이스의 말처럼 완전한 투명함은 정적인 상태에서만 구현 가능하다. 그러나 장막을 두르고 격렬하게 움직이더라도, 빛이 번지는 범위가 넓어 나를 노리는 사격의 명중률을 큰 폭으로 저하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나를 정조준으로 겨냥하기는 불가능해진다. 면(面)을 제압하는 화력으로 확률적 명중탄을 내려 든다면 또 모를까.

완전한 투명화를 배제하고 시각적 교란에만 집중한다면, 단방향이 아닌 전방위 교란 술식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듯했다. 술식이 잡아먹는 회로점유율 역시 낮아지겠지.

우선은 술식에 대한 이해와 숙련도를 끌어올리는 게 먼저일 테지만.

가시광선이 왜곡되는 구조를 눈으로 보면서 술식을 조율할 수 있다는 건 나만이 가지고 있는 강점이었다. 나는 몇 번을 더 반복한 끝에 린페이가 응접실로 향하는 기척을 느끼고 장막을 거두었다.

옅은 화장만을 하고 나온 린페이는, 저가 입은 가운 자락을 꼭 쥐고서 창가에 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소파를 향해 손짓했다.

“우선 앉지.”

“네에.”

린페이는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착석했다. 입매를 꿈틀거린 끝에 힘겹게 머금는 미소. 나는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 가볍게 턱짓했다.

“이제 말해봐라. 비밀히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뭐지?”

“…….”

숨을 들이쉬고 몇 차례 입술을 달싹이던 린페이는, 갑자기 감정이 북받치는지 눈시울에 그득하게 눈물이 차올랐다. 린페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오빠. 저, 오빠랑 같이 떠나면 안 돼요?”

나는 눈을 살짝 찌푸리며 되물었다.

“떠나다니? 어디로?”

“어디든. 중국이 아닌 다른 곳으로. 어디라도 좋으니, 제가 오빠를 위해서만 살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세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네가 나를 위해서만 살 수 있는 곳이라니?”

“알잖아요.”

서러운 흐느낌으로 어깨를 들썩이는 린페이.

“오빠가 모를 리가 없어요. 저는 오빠를 묶어두기 위한 도구라는 거.”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뭐라 대답하기가 마땅치 않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자, 린페이는 손등과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마냥 좋았어요. 사랑은 사랑대로 하고, 애국은 애국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오빠를 사랑하는 마음은 계속해서 커지기만 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제가 애국이랍시고 해야 하는 역할이 몸서리쳐지게 싫어진다구요.”

“…….”

“나날이 깊어지기만 하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하면 좋아요? 제가 오빠의 족쇄라는 사실이 점점 더 목을 조여 오는 기분이에요. 숨이 막혀요. 저는 오로지 오빠만을 위해 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는 현실이 너무도 숨 막히게 느껴져요.”

이 여자가 이렇게 사랑한다는 나는 낮게 잡아도 절반 이상이 가공의 인물이다. 지금처럼 직접 만나 서로의 얼굴을 볼 때를 제외하면, 주고받은 대화, 간직하고 있는 사진, 알고 있는 행적 등이 전부 다 부하들이 꾸며낸 허상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알면 이 여자는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이 나라에 있는 한 저는 온전히 오빠의 소유가 될 수 없어요. 오빠의 마음속에도 항상 최소한의 거리가 존재하겠죠. 저는 제 모든 걸 다 바치고 싶은데. 다 맡기고 싶은데. 다 기대고 싶은데…….”

린페이가 절절하게 토해내는 감정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전보다 더 깊어진 것이었다. 부하들이 일을 지나치게 잘 해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일을 자주 살피지 않고, 또 보다 명확한 지침을 내려주지 않은 내 책임이 크겠지만.

“그러니까, 제발, 저를 데려가주세요. 제가 오빠만을 바라봐도 좋은 곳으로. 저를 가지고 오빠를 이용하려 드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중국과 관련이 없고 중국의 적도 아닌 그런 나라였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해주실래요?”

“그럼 네 가족들은 어쩌고?”

가족을 언급하자 린페이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내비치는 감정은 명백한 혐오와 경멸이었다.

“가족들은 필요 없어요.”

“필요가 없어?”

“네. 가족들에게 제 애국은 곧 통장에 꽂히는 돈이에요. 제 성공도 돈이 들어오니 기뻐할 일이고, 오빠를 향한 제 사랑도 돈을 벌어들이는 수단에 불과하고! 얼굴을 볼 때마다 그저 돈, 돈, 돈, 돈! 돈 이야기를 안 할 때는 오직 청탁을 할 때뿐이죠! 누구를 소개해 달라, 누구 일자리를 좀 알아봐 달라! 이젠 정말 지긋지긋해요!”

린페이는 창백한 낯빛으로 몸을 떨었다.

“가족들은 변했어요. 아니, 어쩌면 제가 그저 착각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일지도요. 그 사람들은 원래 그런 쓰레기들이었는데, 멍청한 저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거예요. 저를 칭찬하고 떠받들어주는 가족들과 친척들의 사탕발림에 취해서…….”

“…….”

“무엇보다 역겨운 건 오빠를 철저히 도구처럼 생각한다는 점이에요. 오빠를 향한 제 사랑도 마찬가지죠. 전, 전 이제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요. 이 싫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리고, 저를 오빠 앞에 떳떳치 못한 사람으로 만드는 이 나라에서.”

이러는 동안, 바로 아래층의 조금 덜 호화로운 객실에선 근육질의 대머리 각성능력자 하나가 중년의 여성과 떡을 치는 중이었다. 침대 주변에 흐트러진 옷가지 사이에선 예스러운 무복과 소림공부(少林功夫) 네 글자가 수놓인 검은 띠가 눈에 띄었다.

객실의 등급과 여자가 끌러놓은 장신구들의 광채를 보건대, 어느 공산귀족가문의 안주인이 소림사의 무승을 불러 밀회를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아래쪽을 의식적으로 시야에서 배제했다.

가짜 빨갱이들이 극한의 물질주의를 배양해놓은 이 대륙에서, 소위 ‘진정한 사랑’이라 이르는 감정은 다른 어떤 나라에서보다 더 희소성이 높은 정신질환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정신질환을 무겁게 앓는 린페이가 가족들을 역겹게 여기게 된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몰랐다.

“자, 보세요.”

자리에서 일어선 린페이가 떨리는 손으로 사륵사륵 옷을 벗어 내렸다.

“오빠가 좋아하는 저예요. 오빠만이 볼 수 있고, 오빠만이 만질 수 있고, 오빠만이 가질 수 있는 여자예요.”

가운과 속옷을 벗는 건 금방이었다. 나신을 드러낸 린페이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울면서 엎드려 빌었다.

“그러니 저를 완전하게 소유해주세요. 오빠와 저 사이에 더는 어떤 벽도 존재하지 않을 곳으로 데려다주세요. 오빠를 그리고 오빠를 기다리며 오빠를 사랑하는 생활 외엔 아무것도 없는 그런 곳으로……. 이렇게 부탁드려요. 부디, 제발…….”

안 될 말이다. 린페이는 가오닝후이가 인수해야 할 가오슈센의 자산 가운데 하나였으니까. 빨갱이 귀족들의 사고방식이란 다 그 나물에 그 밥이어서, ‘내가 사랑하는 여자’ 정도 되는 볼모가 없으면 언제나 날선 의심과 불안으로 나를 귀찮게 만들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그 인간에겐 살아 숨 쉬는 약점이 존재한다. 조카에게 탁란한 자신의 딸이. 그러니 내게 제 급소가 노출되어있는 가오닝후이로선 저울의 균형을 맞추는 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양광백포」의 지분과 경영권은 계속 가져가야지.’

내가 과반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농업회사 「양광백포」는 대 아프리카 농산물 무역에도 발을 걸친 유용한 도구가 되어있었다.

주술사 왕이 지배하는 영역인 「제5세계」, 혹은 「주술의 장막」은 1세계로부터 다양한 층위의 무역제재를 받고 있었다. 이럴 때 원래 자기 잇속만 챙기기로 악명이 높은 중국의 무역회사는 주술사 왕의 왕국에 판로를 제공하기 좋은 수단이었다.

1세계의 적의는 중국이 다 받아주고, 나와 그레이스의 진영은 이익만 챙기면 된다. 이는 또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 나에 대한 신성왕국의 경제적 의존성을 심화시키는 방안이기도 했다. 경태가 말하는 ‘짱깨방패’의 유용함이었다.

“미안하지만 너는 이 나라에 남아있어 줘야겠다. 그러는 편이 내게 도움이 돼.”

내 말이 아래로 떨어지자, 린페이의 떨림이 한층 더 심해졌다. 말이야 도움이 된다고 했어도, 실제 의미는 “나 또한 이익을 고려하여 너를 여기에 두겠다.”였으므로. 중국에 머무르지 않는 린페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린페이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이 말했다.

“그거 아세요? 저, 난자냉동 시술을 받았어요.”

“그랬나?”

모르는 척 되묻자, 린페이가 연신 눈물을 훔치며 슬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결코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어요. 쫓기듯이 내린 결정이었죠. 집에 돌아올 때마다 제 우편함에만 난자냉동시술 안내문이 꽂혀있고, 수시로 상담전화가 걸려오고, 제 주변에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늘어나고, 가족들도 은근히 눈치를 주고……. 이렇게 압박이 노골적인데 어떻게 시술을 안 받을 수가 있었겠어요?”

후샨량이 말했던 ‘자발적인 결정’의 실체였다. 뭐, 공산귀족들이 하는 일이 다 이렇지. 애당초 가짜 빨갱이들의 나라에 개인의 자유가 어디에 있나.

“이날 깨달았죠. 아, 이 사람들은 나와 오빠 사이에서 태어날 아기마저 오빠를 옭아맬 도구로 삼겠구나……. 그렇게 깨닫는 순간,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역겨움이 확 올라오더라고요. 가족들에 대한 환상이 완전히 깨진 것도 이때였어요. 아예 몰랐던 일이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전까지는 제대로 실감을 못 하고 있었으니까요.”

이게 왜 이렇게 심하게 고장이 났는지 이해가 가는 경위였다.

나는 다시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음은 이해한다만, 나는 너를 이 나라에서 꺼내줄 수 없다.”

“……흑.”

잠시 입술을 꾹 물고 있던 린페이는, 이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커다란 소리를 내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숫제 통곡에 가까운 오열은 수분고갈이 우려될 만큼의 시간 동안 이어졌다. 목이 쉬고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 되어서야 울음을 그친 린페이는, 탁하게 빛을 잃은 눈을 내게 고정시킨 채 내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왔다.

그러고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목소리로 부탁해왔다.

“그냥, 안아주세요. 머릿속에 더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잠시만이라도 모든 걸 잊을 수 있도록. 어차피 오늘은 안전한 날이니까…….”

“그러지.”

나는 린페이의 수명연장을 위해 침대로 이끌었다. 이게 오래 지나지 않아 고장이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인간 세상에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드물다. 그런 문제가 있다면 대개는 더 많은 돈이 해결책이다. 나는 린페이에 대한 물질적 보상을 강화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한화로 대충 백억쯤 일시불로 던져주면 이 무거운 정신질환의 증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병의 깊이가 깊어 보이니 완전한 해소는 바라지도 않는다. 쓸모가 다할 때까지만 제 기능을 발휘하기를 바랄 따름.

이제 가오슈센만 처분하면 모든 준비가 완벽해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