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광장으로 가는 길 (8)
현 주석 취임 이래의 중국 고위 관료사회엔 이러한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충성이 절대적이지 않으면 그것은 절대로 충성이라고 할 수 없다.(忠誠不絶對 絶對不忠誠)」
톈진 당위원회 서기 리훙중(李鸿忠)의 입에서 처음 나온 이래 출세를 바라는 모든 중국 관료들의 금언(金言)으로 거듭난 이 말은, 현 주석의 핵심 친위세력에 속하지 아니한 자가 새로이 친위세력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었다.
1급 경독과 3급 경감 사이의 벽은 높다. 그리고 같은 3급 경감이라도 성(省)급 자치구의 부장과 중앙정부 국무원 직할 국가안전부의 처장 사이엔 상당한 힘과 권력의 격차가 존재했다. 후자는 사실상 장성급 인사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
어느 나라든 장성으로의 진급은 실력과 실적 이상으로 정치력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정치력엔 소속된 계파에 따른 정치적 사전조율이 포함된다. 국안부 같은 핵심 중앙부처에서 경감을 달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 주석의 계파에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세 경독이 무작정 “절대적 충성을 맹세합니다.”라며 줄을 갈아타려 들 경우, 꽌시의 결정체인 중국 고위관료사회 내에선 “저런 의리도 없는 자라새끼들을 봤나.”라며 손가락질을 받기 십상이다. 중국 고위관료사회에서 의리에 대한 집착마저 사라지면 그땐 완전한 혼란만이 남을 따름이므로.
따라서 세 경독이 문제없이 승진을 하려면 셋 중 하나의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원래 속해있던 계파로부터 배신을 당했거나, 속해있던 계파 자체가 붕괴해버렸거나, 그것도 아니면-
‘소속된 계파의 후견인에게 모든 부채를 청산하고 양해를 구하는 데 성공했거나.’
가오슈센의 죽음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 이 나라에선 의리로 맺어진 관계들도 암묵적인 상속자산의 일종으로 간주되니까. 이는 계파에 따라서는 회칙이나 정관에 의해 명문화된 권리로 보장되기도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나라는 진즉에 정치적 살인교사범들의 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서로를 은밀하게 죽여서 ‘의리’를 해소하는 것만큼 간편한 방법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여하간,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세 경독은 경독 딱지를 떼어버리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국 관료사회에서는 중요한 능력으로 통했다.
통화를 시작할 때 후샨량이 처음 꺼낸 이야기도 이에 관한 것이었다.
「새로운 취엔즈(圈子)에 들어갈 재료는 이미 한참 전에 선납을 끝냈습니다. 당신께서 지난번에 연결해주신 아프리카의 거래창구들이 워낙 큰 건수였으니까요. 여기저기 공로를 나눠주고 또 상납하고 나서도 저희 몫으로 남는 게 많았습니다. 거기에 이번 쿤룬 싱웨이 호 폭발사건까지 더해졌으니……. 어쩌면 2계급 특진까지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취엔즈는 울타리라는 문자(圈) 그대로 계파나 꽌시로 묶인 모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가오슈센 서기가 족쇄다?”
「예……. 그분의 양해가 없는 한 저희의 진급상한은 언제까지고 1급 경독으로 고정되어 있을 겁니다.」
언젠가 광둥 지역에 기반을 둔 가오슈센의 계파가 통째로 무너질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행운이 근시일 내로 찾아오기를 바라는 건 무리다.
나는 가벼운 아쉬움을 느꼈다.
‘일이 계획보다 더 빨리 풀릴 수도 있었건만.’
본래의 구상에서 경독들이 경감을 다는 건 베이징 테러가 터진 이후의 일이었으되, 나와 그레이스의 협력이 성립한 덕분에 의도치 않게 진도를 더 빼게 되었다.
일단 경독들을 경감으로 밀어올린 다음이면, 중국이 영국과 런던에 깔아놓은 첩보자원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해도 무방할 터.
국제정보국, 대외보방정찰국(对外保防侦察局), 종합정보분석국의 요직에 각각 자리 잡은 경감 셋은 중국이 보유한 거의 모든 첩보자산에 대한 무제한 자유이용권이나 다름없다.
물론 그렇다 한들 지켜야 할 선은 분명히 있겠으나, 공작을 벌이다 들켜도 짱깨 새끼들에게 덤터기를 씌우면 그만이라는 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영국 방첩당국 또한 중국의 배후에 또 다른 세력이 있을 가능성까지는 고려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냥 ‘또 중국 놈들인가?’ 생각하고 말겠지.
“서기가 나와 그대들의 관계를 얼마나 눈치챈 것 같소?”
「지금에 이르러선 웬만큼은 다 짐작하고 계시겠지요.」
후샨량은 내 물음에 곧바로 대답했다.
「국안부의 작전 내용과 성과는 가오 서기도 쉽게 접근하지 못할 기밀이지만, 그럼에도 저희가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영구적인 비밀로 할 순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거두는 성과들이 저희들만의 능력일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실 분이 바로 가오슈센 서기님이십니다.」
과거 세 경독을 휘하에 거느렸던 사람이 가오슈센인 만큼, 그가 옛 부하들의 역량에 깜깜할 리 있겠느냐는 게 후샨량이 하는 말이었다. 본인의 업무적 무능과 무관심을 실무진에게 기대어 만회하던 인간이 아니었나.
내 짜증을 단숨에 돋우는 개소리가 나온 게 바로 이 대목에서였다.
「이런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뭐요?”
「혹시 린페이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보실 마음은 없으십니까? 어, 그러니까, 인공수정과 대리모를 이용하는 편리하고도 확실한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놈의 자식, 자식, 자식. 내 핏줄에 욕심을 내는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은가. 그동안 겪어온 일들이 일들이다 보니 치밀어 오르는 짜증의 강도가 상당했다.
「동사장님께서는 벌써 다 알고 계시겠지요. 전번에 린페이의 자택에서 동침하실 적에도, 은밀히 배치된 감시수단들을 낱낱이 간파하고 애들 장난처럼 농락해버리셨던 분이시니……. 가오 서기께서는 의로 맺어진 형제의 가정과 핏줄을 손닿는 곳에 두고 열과 성을 다해 보살필 수 있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아랫것들에게 의형제의 정사(情事)를 엿보라 지시한 머저리를 나와의 사적인 대화에서까지 높여 부를 필요는 없소. 다 아는 의도를 굳이 좋은 말로 돌려서 표현하려 애쓸 필요도 없고. 내가 그간 많이 참아주었음을 그대는 알 것이오.”
「앗, 예.」
말이 보살핌이지, 그 인간은 결국 내 가정과 혈육을 중국 땅에 잡아두어야 마음을 놓으리라는 말이다. 내 말이 다소 날카롭게 나간 탓에 후샨량은 흠칫하는 반응을 보였다.
「다소 늦었지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 당시의 일을 저희가 주관한 것은 아니었어도, 정보를 들어서 알고는 있었으니까요. 미리 귀띔을 해드렸어야 했는데…… 당시엔 살펴야 하는 눈이 많았기에…….」
말은 이렇게 하지만, 세 경독들 또한 내가 중국에 긴밀하게 묶일수록 마음이 편해질 입장들이다. 린페이와 나 사이에 애가 생기기를 바라는 게 가오슈센 한 사람만은 아닌 것이다. 상대가 반드시 린페이일 필요는 없겠지만.
어쨌든 세 경독은 자신들의 가족을 내게 볼모로 맡겨둔 입장이었다. 안전보장과 볼모의 차이가 한 끗이기는 할지언정.
“됐고, 핵심은 내가 후계를 봤으면 한다는 거 아니오?”
「그, 그렇습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살짝 잠겨있다. 긴장도가 많이 올라간 티가 난다.
「린페이를 진심으로 아끼시고, 또 후계를 만드시는 데 거부감이 없으시다면…… 빠르게 결실을 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는지요? 그렇게만 된다면 가오 서기님, 아니, 가오 서기도 저희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일에 더는 민감하게 굴지 않을 겁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보필하는 동안에는 서기가 함부로 강짜를 부리지도 못하겠지요.」
환장하겠군.
「린페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이미 자발적으로 난자냉동시술을 받아놓은 상태입니다. 우리 중국의 인공수정 기술은 세계 최고이니, 당신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거의 백 퍼센트 확률로 후계를 생산할 수 있지요. 여러 난자를 동시에 수정시켜 가장 우수한 아기를 선별하여 낳는 것도 가능합니다. 요즘 여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게 유행이라더군요.」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선별이니 유행이니 하는 표현들은, 출산에 관한 중국 기득권층의 물질적인 인식과 그에 기초한 대리출산 문화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선택받지 못한 태아들은 폐기된다. 3개월 이내의 폐기이므로 소위 인권선진국이라 하는 나라들의 낙태 기준을 들이대더라도 문제 삼을 여지가 없다. 어차피 그런 태아들의 법적 지위는 인간 미만의 무언가에 불과하지 않은가?
「임신 기간 동안 애첩의 몸을 쓰지 못하시는 것, 그리고 출산으로 애첩의 육체적인 가치가 상할 게 걱정이셨다면, 저희가 알아봐둔 자궁임대업자를 통해 대리모를 쓰시면 됩니다. 저는 우크라이나나 미국 여자들이 그렇게 인기라고 들었습니다.」
“그만.”
자궁임대업이라는 표현이 노골적이고 천박하기는 하나, 영리 목적의 대리모 사업은 중국 이외에도 다수의 나라에서 합법이다. 캘리포니아와 뉴욕에서는 미국 시민권과 대리모의 자궁을 하나로 묶어 패키지 상품으로 거래하는 게 보통이니까.
원탁과 그레이스가 인간의 재생산능력과 아기들을 도구적으로 취급하는 태도는,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내재되어있던 본연의 가능성을 꽃피우고 발전시킨 결과물에 불과했다.
새삼스럽게 자각하는 바, 오직 나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는, 내가 긋는 자기만족의 선은 가늘고 희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내 자녀계획에 대해선 더 이상 거론하지 마시오. 내 대자(代子) 된 그대들을 위해서도, 중국의 국익을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나을 거요.”
「앗, 예. 송구합니다.」
“다른 대안은 없소?”
대안이 없다고 한다면 나는 이것들의 무능함을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내가 거둔 3인은 그렇게까지 무능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다소 위험부담은 있지만, 가오 서기를 궁지에 몰고 저희가 힘을 모아 구명을 해주는 식으로 빚을 갚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궁지에 몰다니? 어떻게?”
「근래 가오 서기의 가문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처음 듣소만.”
중국 지사에선 관련된 보고가 올라온 적이 없었다. 물론 중국 지사의 실질적 책임자인 미주가 한동안 아프리카 전역(戰域)에서 활동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할 터이나, 그렇더라도 중국 지사에서 감지하지 못한 정황을 경독들이 아는 것은 역시 국안부의 힘이자 국안부 내에서 자리를 잡은 경독들의 노력이라고 봐야 할 것이었다.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가문의 큰 어른 역할을 누가 맡느냐를 두고 가오닝후이 주임과 가오슈센 서기 사이에서 마찰이 빚어지고 있다는 모양입니다.」
가오슈센의 숙부, 광둥성 감찰위원회 가오닝후이 주임은 광저우 소요 당시 가오슈센의 활약으로 사형을 면하고, 내가 제공한 제로 데이 보안 취약점을 공로로 삼아 완전한 복권에 성공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복권 과정에서 가오슈센의 기여가 아무리 컸다고 한들, 권력의 균형은 여전히 숙부이자 정치적 후견인인 가오닝후이에게 기울어있는 게 정상이다. 숙부가 조카의 덕을 본 것보다는 조카가 숙부의 덕을 보아 관로(官路)에 오른 것이 더 크니까.
숙부의 후광이 없었더라면, 나를 만나기 전의 가오슈센은 그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가오 서기가 왜 갑자기 패륜아가 되기로 한 거요? 그런 식의 싸움에 승산이 있나?”
「승산을 따지기 이전에, 싸울 수밖에 없는 내밀한 사정이 있어서입니다.」
“싸울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니?”
내 물음에, 후샨량은 짐짓 목소리를 낮추며 답했다.
「이 일은 표면적으로는 그저 가문 내 주도권 다툼으로 보일 뿐입니다만…… 그, 가오슈센 서기가 애지중지하던 외동딸이, 실은 서기의 친자가 아니었다는 신빙성 높은 정보가 있습니다.」
“……설마 숙부가 조카며느리와?”
「예. 아마도.」
이건 또 무슨 짐승의 왕국인가.
「이 일에 관여하려면 신중한 줄타기가 필요합니다. 가오닝후이 주임의 담당부서가 감찰부인지라 저희가 힘을 실어주기 좋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가문의 치부가 관련되어있는 사안이다 보니 기껏 도움을 줬는데도 수모와 수치의 앙금을 남기는 수가 있지요.」
“그래서 계획이 뭐요?”
「중요한 건 명분입니다. “가오 서기가 스스로의 파멸을 향해 달리고 있음은 명백하다. 의리를 빚진 우리는 어디까지나 주인의 잘못을 바로잡는 충신의 마음으로, 서기의 살길을 열어주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정도로 둘러대면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사건의 진정한 내막은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말입니다.」
“그걸로 가오닝후이 주임을 납득시킬 자신은 있고?”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만……. 당신께서 바라신다면 해내야지요. 가지고 계신 이권들도 힘닿는 데까지는 최대한 지켜내 보이겠습니다.」
말은 쉽지 않은 일에 도전해보겠다는 투로 하고 있으나, 내 귀에는 그저 손실을 암시하고 어려움을 과장하여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는 얄팍한 화술로 들릴 따름이었다. 혹은, 이 일이 이렇게 어려우니 린페이와의 자녀계획을 재고해보라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거나.
경독들 입장에선 본인들의 앞날이 걸린 일이다. 그러니 내 이익을 논하기 이전에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전력을 다해야겠지.
“그럼 그렇게 해보시오.”
나는 이어서 당근을 제시했다.
“그대들이 경감을 달면, 해외에 있는 가족들은 그 즉시 내가 준비한 승진 축하선물을 받을 수 있을 거요.”
일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승진 축하선물일 뿐. 내가 아니라 너희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암시.
대화가 일단락되자 후샨량은 쿤룬 싱웨이 호 폭발사건에 대한 국안부 내부의 분위기를 전했다. 나에 대한 칭송과 아첨을 잔뜩 곁들여서. 폭발의 결과로 발생한 피해는 2톤짜리 닻이 1킬로미터 이상 날아가 여객 터미널 천장을 부수고 들어간 게 전부라고.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지나가는 듯한 말로 베이다이허에서 후속 테러가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후샨량은 뚝 끊어지는 침묵으로 경악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