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54화 (354/561)

#38. 광장으로 가는 길 (4)

8월 5일. 내가 베이징에서 한창 굴착작업을 이어가고 있을 때, 영국 왕립해군의 프리깃 HMS 서덜랜드가 각성체 고래와 교전을 벌인 끝에 반으로 갈라져 침몰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프리깃은 일찍이 내가 격침시켰던 웨스트민스터의 자매함으로, 본래의 임무는 남중국해에서 다른 함선들과 함께 항행의 자유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각성체 고래의 접근경보가 전파되자, 어찌된 영문인지, 이 배는 침묵을 우선시하는 대응수칙을 어기고 고래에게 선공을 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경위는 아직 발표된 바가 없었다. 생존자가 전무한 데다 항해기록장치(VDR)도 회수하지 못했기 때문. 다만 영국 언론에서는 함장이 형제의 복수에 눈이 멀었던 게 아니었겠느냐는 추측성 보도를 내놓았다. 먼저 침몰한 웨스트민스터에 함장의 동생이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언론의 보도는 설득력이 많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함장의 권위가 아무리 높고 강하다지만, 아랫사람들이 미쳤다고 고래를 공격하라는 명령에 따랐겠는가. 그보다는 우발적인 사고나 집단 히스테리의 결과였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정확한 경위야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고래는 ‘영어를 쓰는 자들’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진 모양이었다. 서덜랜드가 침몰한 당일, 일곱 척의 영국 무장여객선과 두 척의 호주 원양어선이 추가로 공격을 받은 게 그 증거.

공격의 강도는 높지 않았다. 사상자는 없고, 선체가 파손된 선박들도 간단한 데미지 컨트롤을 실시하는 것만으로 침몰을 면했으니까. 각성체 고래들의 행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를 고래가 전하는 경고로 해석했다.

그러나 앞서 내가 고래로 위장하여 행한 공격들이 있는 터라, 영국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졸지에 같이 덤터기를 쓸 처지에 놓인 영어권 국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국 총리는 공개석상에서 극단적인 조치를 거론했다.

「우리는 이제 고래에 대한 핵공격을 진지한 옵션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측근 비리와 스캔들, 그리고 해외에 파병한 영국군의 지속적인 손실 등으로 인해 지지율이 하락한 총리는 강한 지도자의 면모를 과시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바꿔보려는 듯했다.

그리고 이 발언이 아무 배경도 없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 이미 계획을 다 세워놓고 핵보유국과 국제사회의 도움을 호소하는 국가가 있었으니까.

바로 일본이다.

「우리 정부는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사전 교감이 있었는지, 영국 총리의 발언이 보도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을 열어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이동이 빠르고 은밀한 각성체 고래들은 핵으로도 잡기가 쉽지 않은 괴물들입니다. 최근 염동력까지 각성한 것으로 확인된 「와다츠미 키요우타마히코」는 더더욱 그렇지요.」

「나날이 성장을 거듭하는 힘, 소음 수준이 극히 낮은 고속 이동, 초능력을 활용한 다층적인 방어기술, 한곳에 일정 시간 이상 머무르지 않는 신중함, 수심 9천 미터 이하까지 자유롭게 내려가는 잠영 능력, 인간의 무기체계와 전술을 학습하여 대응하고 저와 제 무리에 대한 추적을 수시로 차단하는 교활함 등.」

「이런 규격 외의 괴물을 잡으려면 그에 맞는 준비가 갖춰져야 합니다. 우리 일본이 국운을 걸고 탐지체계를 보강해온 일본 근해는 바닷속 인류의 적을 광범위하게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전장이라고 자부합니다. 특히 세토 내해(內海)와 도쿄만(灣), 이세만(灣) 등의 해역은 지형구조상 대대적인 몰이사냥을 시도하기에 적합하지요.」

「또한 우리 일본은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고래들의 언어를 일부 해독해내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대화를 시도하기엔 역부족일지언정 교란과 유인에는 쓸모가 있으리라는 게 연구진과 담당자들이 내린 판단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인 우리 일본에게는 핵폭탄이 없습니다.」

「해상자위대 또한 지속적인 소모를 겪었기에, 국제사회와 우방국들의 도움이 있지 않고서는 더 이상 고래와의 전쟁을 지속해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도움과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주십시오. 국제사회가 하나 되어 악에 맞선다면, 심해의 공포로부터 바다를 되찾는 성전은 우리 인류의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이 성명이 발표된 직후 외무상이 영미 양국의 대사를 초청해 장시간에 걸쳐 진지한 논의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고래들의 해상봉쇄로 인해 말라죽어가던 열도는 핵공격에 대한 찬반논쟁으로 들끓어 올랐다.

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라는 측과, 아무리 그래도 일본 근해에서의 핵 투발은 용납할 수 없다는 측의 치열한 대립. 민간에서는 아무래도 반대 의견이 조금 더 우세했다. 후쿠시마의 그림자도 아직 다 걷어내지 못한 나라의 여론이었다.

이를 진화하는 것은 일본 총리의 역할이었다. 총리의 기자회견은 관방장관의 성명 발표로부터 불과 8시간 후에 시작되었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티가 나는 기민한 대응이었다.

대응의 좋고 나쁨이 반드시 기민함과 비례하는 것만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가면 일본은 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고, 일본이 바뀌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한데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일본은 바뀌어야 합니다.」

「핵공격은 할 수만 있다면 해야 합니다. 방사능은 잠깐의 영향일 뿐이고 그 영향으로 죽는 사람도 없겠지만, 불황은 실제로 많은 일본인들을 죽이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장기적인 관점에서 현명하고 냉정한 시각으로 사태를 봐주십시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멀리까지 보이고 근시안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까운 곳까지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근시안적인 관점은 섹시하지 못합니다.」

「고래를 죽이면 경기가 좋아지고 경기가 좋아지면 반드시 불경기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방사능은 잠깐의 영향이 맞습니다. 핵폭발의 잔류 방사능은 49시간만 경과해도 99% 흩어져 무해한 수준까지 희석될 테니까요. 예? 49시간의 근거가 뭐냐고요? 아아…… 실루엣이 떠올랐다고나 할까요? 어렴풋이 떠올랐어요. 49라는 숫자가요. 전문가들도 여기에 동의했습니다. 더 이상의 촌스러운 설명은 불필요할 것 같네요.」

「우리 정부는 가면라이더처럼 위기를 극복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들도 함께해 주십시오. 후쿠시마 사고 때도 그랬듯이 말이죠.」

핵폭발의 잔류 방사능이 7의 제곱에 해당하는 시간마다 십 분의 일 언저리로 감소하는 것은 사실이다. 7시간이면 십 분의 일. 49시간이면 백 분의 일. 343시간이면 천 분의 일.

그러나 이건 폭탄이 대기 중에서 터졌을 때의 이야기이고, 수중폭발의 경우 그 영향의 양상이 사뭇 달라진다. 일본 총리도 이를 알기에 특유의 얼간이 같은 화법으로 말을 흐렸던 것이겠지. 설마 진짜로 얼간이일 리는 없으니까.

짧은 간격을 두고 미국 백악관에서도 브리핑이 열렸다.

「괴물 고래가 영어를 쓰는 선박들을 특정하여 단시간에 연속으로 공격을 가했다는 뉴스가 뜨고 난 후, 이 나라의 주요 주가지수들은 줄줄이 급락을 해버렸습니다. S&P 500은 자그마치 5%나 빠졌더군요. 단 하루 만에! 나는 이 보고를 받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여러분,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뭐가 문제라서 다들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있지요? 그 사고 이후 아직까지 미국 선박은 공격을 받은 적이 없고, 미국 경제는 아주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다들 안심하십시오. 제가 백악관에 있는 한 앞으로도 미국은 괜찮을 것입니다.」

「나는 이 나라를 수호할 책임을 진 사람으로서 미국 경제를 위협하는 불안정성을 제거하겠습니다. 마침 일본인들에게 괜찮은 계획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우리는 그걸 조금 도와주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그들이 적절한 비용을 지불하기만 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미국의 핵을 써줄 용의가 있어요.」

「중요한 건 돈이지요, 돈. 우리 미국의 핵폭탄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핵폭탄입니다. 이렇게 뛰어난 상품은 그에 어울리는 값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국 시민들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핵폭탄은 결코 무료로 제공되어선 안 됩니다.」

「소위 진보라는 사람들은 환경을 보호해야 한답시고 핵공격에 반대하는데…… 일본 근해는 후쿠시마 터졌을 때 이미 망한 거 아니었습니까?」

「말 함부로 하지 말라니, 영문을 모르겠군요.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거기는 뭐 방사능 오염수도 막 방류하고 그러던 바다잖아요? 그런 바다에 핵폭탄 몇 발 더 터트리는 거 가지고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떨 이유가 뭐지요? 일본인들은 방사능을 많이 먹어서 적응이 됐을 겁니다.」

「고래를 죽이면 고래영혼의 저주를 받을 거라느니 뭐니 하는 주술사들의 헛소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정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코리안 맥아더를 불러서 좋은 판(Good Pan)이라도 한 번 해달라고 하지요. 그 여자는 내 명령을 듣는다고 했으니 거절하지 않을 테고, 그 여자보다 못한 주술사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근데 미스 맥아더는 핵이야말로 궁극의 퇴마 수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애초에 핵으로 고래를 물리치는 데 굳이 좋은 판까지 더할 필요가 있나?」

「아무튼, 전 세계의 투자자 여러분들께 고합니다. 와-타-츠-미인지 고-이-즈-미인지 하는 괴물 고래는 곧 죽을 테니 안심하시고 미국 시장에 투자하십시오! 어차피 미국 경제가 망하면 당신네 나라 경제도 망합니다!」

「브리핑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미국을 계속 위대하게!」

이런 일들이 있은 후에, 나는 북미에서 걸려온 그레이스의 전화를 받았다. 마녀는 특유의 간질간질한 교태를 담아 물었다.

「당신이 흉내 내던 고래가 죽으면 아쉽지 않겠어? 앞으로의 수중 파괴공작에 지장이 생기잖아.」

“어쩔 수 없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한동안 고래로 위장하는 걸 그만두었다가, 제2, 제3의 와다츠미가 등장해도 괜찮겠다 싶은 시점에 실존하지 않는 괴물 하나를 만들어내는 수밖에. 어차피 당분간은 고래 흉내를 낼 시간적 여유도 없다.”

고래의 언어가 완전히 해독될 때까지는 아주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 이번 세기 안에 기본적인 의사소통이라도 가능해지면 기적이라 평해야겠지. 그러니 원래 재현하던 호곡(號哭)을 적당히 변주하여 새로운 곡을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흐음. 재미없는 반응이네.」

“그럼 뭘 기대했나?”

「애도?」

“웃기는군.”

「큭큭.」

작게 소리 내어 웃은 그레이스가 원탁의 개입 가능성을 거론했다.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말이야, 이번 일과 관련해서 원탁의 늙은이들이나 그 아랫것들이 원정을 나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어.」

“그들이 왜? 가뜩이나 로더필드가 죽어서 위험을 느끼고 있을 텐데.”

「이미 말했듯이 단순한 예감일 뿐이지만, 오히려 로더필드가 죽었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졌을 가능성이 있잖아?」

“계속해봐라.”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실전을 가정한 검증과 시범운용은 필수적인 절차야. 각성체 고래는 제한적으로나마 대마법사에 비견되는 힘을 지닌 존재이니, 테스트 상대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새로운 무기는 확장마력회로를 말하는 건가?”

「그래. 옥타 테크 OM-KT AV21410. 당신이라면 이게 뭔지 벌써 들어는 봤을 것 같은데. 아니야?」

“기본적인 조사야 해봤다만…….”

「후후. 역시 내 남자라니까. 매번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그레이스는 지랄 맞은 소리를 속삭인 뒤에 말을 이었다.

「조립식 확장마력회로의 예고편을 굳이 비행 모듈의 형태로 선보인 건, 십중팔구 다음에 등장시킬 물건의 외연적 당위성을 미리 갖춰놓기 위함이었겠지.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보면…… 확장마력회로 최초의 무기화는 무제한적인 체공에 중점을 둔 형태이지 않겠어?」

“이번 고래사냥은 안전이 보장되는 무대다 이건가.”

「왜 아니겠어? 고고도에 머무르는 한 외부의 침입은 불가능하다고 볼 텐데. 해군 함정들의 엄호만 받아도 말이지. 지상기지와 항공세력의 보호가 더해지면 더더욱 그럴 것이고.」

“기능적으로 불완전한 시제품을 굴려보기엔 괜찮은 조건이긴 하군.”

「바로 그거야.」

“일단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 있도록 하겠다. 할 말은 그게 전부인가?”

「뭐야. 사랑스러운 아내와의 통화를 그렇게 빨리 끝내고 싶어? 내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듣고 싶지 않아?」

“용무가 없다면 끊겠다.”

임마누일의 의뢰한 중재 건이 있긴 하나, 그건 너무 빨리 처리해줘도 문제가 될 여지가 있었다. 나와 주술사 왕 사이에 매우 깊고 긴밀한 협력관계가 존재함을 암시하는 것이니까.

「남편이 매번 매정하게 굴어서 아내는 마음이 아파…….」

진심이 묻어나지 않는 한숨을 내쉬고서, 그레이스는 본론을 꺼내었다.

「자기. 레이디 아밀라리아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