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광장으로 가는 길 (3)
임마누일은 자신이 아직 르완다에 머물고 있다고 밝혔다. 나는 이것만 듣고도 임마누일의 용건을 짐작할 수 있었다. 브라츠키 크루그의 핵심간부쯤 되는 인간이 나와의 일을 마무리 지은 지 오래인 지금까지도 검은 대륙에 남아있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주술사 왕의 영역 확장으로 말미암아 기존에 깔아놓았던 사업기반들이 위태로워진 것이겠지.
임마누일은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솔직하게 답해주게. 바딕 자네, 주술사 왕과 거래하고 있지?」
솔직하게 답해달란다고 솔직하게 답해주는 건 병신이다. 나는 일단 부정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대가리에 총 맞았나?”
「어허. 나한테 이러기야? 이제껏 우리가 같이 비운 보드카가 몇 병인데!」
“몇 병인데?”
「……몰라.」
큼큼 헛기침을 한 임마누일이 예리한 말을 꺼낸다.
「감춰봐야 소용없어. 다 알고서 연락한 거니까. 르완다 정보보안국에서 파키스탄의 총기장인들이 주술사 왕의 군영에 가담한 사실을 확인해줬는데, 우리가 협조 요청을 받고 추가로 알아보니 그 과정에 극동회사가 관여했다는 정황증거가 나오더란 말이야.」
“금시초문일세. 대체 무슨 정황을 말하는 건가?”
「시치미 떼기는. 우리 브라츠키 크루그엔 말이야, 어? 왕년에 KGB에서 한가락 했던 친구도 있고! 해외정보국이랑 연방방첩청에서 일하다 넘어온 후배들도 있고! 지금도 정부에서 외주 받으면서 유지하는 현직자들과의 친분도 있고! 우리가 사업을 하면서 자체적으로 만들어놓은 정보망도 만만치 않고!」
“자네 조직이 만만치 않은 거야 잘 알고 있으니, 취해서 맛이 간 게 아니면 요점만 말해보게. 대체 어떤 정황증거를 가지고 생사람을 잡는지.”
「기술자들의 동선을 역으로 추적해봤더니, 그들이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닷길에 자네 회사의 소유로 추정되는 선박들이 끼어있던걸?」
“추정이라는 단어가 한 문장에 두 번이나 들어가 있네만.”
이렇게 말하며 나는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아무리 브라츠키 크루그라도, 극동해역 이외의 바다에서 활동하는 내 회사 소유의 선박들에 대해선 아는 게 없지 않나?”
나는 내 조직의 비밀유지능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 아무렴, 내가 얼마나 공을 들여 구축한 시스템인데. 이는 내 생존성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브라츠키 크루그는 극동해역에서 오가는 배들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야 정상이다.
감 좋은 주정뱅이가 당당하고 뻔뻔하게 대답했다.
「물론! 전혀 모르지!」
“그런데 무슨 근거로?”
「흔적을 지워놓은 수법이 너무 과도하게 철저하더라고.」
“……수법?”
「그래, 이 편집증 걸린 친구야.」
수화기 너머의 임마누일이 큭큭거리며 웃는다.
「이 동네는 기본적으로 2부 리그일세, 2부 리그. 오가는 상품과 돈의 규모를 떠나, 선수들에게 요구되는 조심성이 1부 리그만큼 엄격하지가 않단 말이지. 이건 능력의 문제이기 이전에 경영의 합리화와 이익의 극대화에 관한 문제라네. 그래서 우리 조직도 이쪽 동네에선 그냥 남들 하는 것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보안을 유지할 뿐이고. 그러나-」
나는 다음에 나올 말을 짐작하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보안과 흔적 지우기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누군가는 절대로 그렇게 타협을 하는 법이 없지! 하하!」
“…….”
「자네도 알겠지만, 비용을 도외시하고 항상 최고의 보안성을 추구하는 조직은 그리 흔하지가 않아. 우리 브라츠키 크루그 같은 조직간 연합체와 달리 의사결정권이 완벽하게 집중되어 있어야 하고, 그 의사결정권자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밀어붙여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인걸. 이 분야에선 내가 아는 한 극동회사가 최고야.」
“단지 그것만으로?”
「구질구질하게 왜 이래! 아마추어 리그에서 프로가 뛰고 있으면, 그 프로가 아무리 습관을 잘 감추고 복면까지 쓰고 있어도 티가 난다고, 티가. 그런데 최근 이쪽 동네에 관심을 보인 세계 정상급 프로가 하나 있네? 잡았다 요놈! 이렇게 되는 거지.」
“아니라고 해도 안 믿겠군.”
「고럼! 순순히 인정하는 게 자네한테도 좋을 거야. 왜냐?」
꼴깍꼴깍. 수화기 너머에서 술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윽- 하고 트림을 한 주정뱅이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는 비상이 걸렸거든! 자네가 아니라고 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전력을 다해 정보를 수집할 수밖에 없어. 중재자가 되어줄 사람을 찾기 위해서라도 말이지. 그런데 배후에 있는 게 역시나 자네 회사라면, 언젠가는 서로 민망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있지 않겠나?」
없다고는 못하겠지.
내 조직은 지금 그레이스가 차린 위장창구로 무기와 정밀기기를 들여가고 원자재를 빼오는 밀거래를 중개하고 있다. 무기야 중간중간 잠수정으로 경로를 세탁할 수 있으나, 중량과 부피가 막대한 원자재는 그렇게 취급하기가 불가능했다.
임마누일은 내가 비용을 도외시하고 보안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아프리카 방면의 원자재 중개무역에 한해서는 사정이 다소 달라진다. 이 무역을 통해 축적하는 자본은 유사시 그레이스의 왕국에 대적할 힘의 하나이기 때문.
보안은 결코 허술하지 않다. 허나, 그럼에도 브라츠키 크루그쯤 되는 조직이 굳은 심증을 토대로 장기간에 걸쳐 도착적인 정보 수집에 나서는 건 달갑잖은 노릇이다. 공연히 조직의 역량을 낭비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
“만약 내가 주술사 왕과 거래를 튼 중개상인이라면, 자네는 내게 무엇을 부탁할 셈인가?”
이렇게 묻자, 임마누일이 한층 진지한 목소리를 낸다.
「주술사 왕이 파키스탄 장인들을 고용한 건 당연히 자체적인 총화기 제조역량과 무기개발역량을 배양하기 위한 것이었겠지?」
“그렇다 치고.”
「그럼 말이야, 이쪽에서 크로아티아 기술자들을 소개해줄 테니 신성왕국 관계자하고 자리를 좀 만들어줘.」
“크로아티아 기술자들?”
「있잖아 왜. 부그렉과 데글린의 직계들. 오로플렛이나 트보르니카 자룰리야에서 경력을 쌓은 친구들도 있지. 이고르 미쿨치크랑 같이 손을 맞춰봤다고 하는 원로들도 몇 명 있다고.」
임마누일이 댄 이름들은 모두 유고슬라비아 내전-크로아티아 독립전쟁 시기에 명성을 얻었던 불법총기 제작자들이었다.
철공소 주인, 가구 수리업자, 철물가공공장, 조명기구 제작업체와 거기서 근무하던 전기기술자 등이 저마다의 능력과 기반을 가지고 민병대를 무장시킬 총화기를 찍어내었던 것.
비록 시작은 무기개발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의 노력이었으되, 극한의 내전 상황에서 고독(蠱毒)처럼 숙성된 기술들은 수준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지금은 크로아티아의 군경도 그들의 작품을 제식화하여 쓰고 있을 정도.
「내가 딱히 파키스탄 기술자들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네만, 그치들은 굉장히 완고한 면이 있잖아. 옆에 더 좋은 도구가 있어도 여간해서는 손에 익은 도구를 바꾸는 법이 없지. 그들이 보유한 기술은 가문과 부족의 정체성 같은 거고, 또 기술자 개개인의 전문성은 집단의 일부로서만 기능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전통을 중시하는 집단에선 혁신이 쉽게 일어나질 않아.」
“그게 문제가 되나?”
「아, 이 사람. 언제까지 그렇게 의뭉스레 굴 셈인가? 내 말은 파키스탄 기술자들하고 크로아티아 기술자들이 거시적인 분야는 같아도 세부적인 층위가 다르다 이거야. 크로아티아 기술자들은 컴퓨터 수치제어선반(CNC) 같은 문명의 이기하고도 친숙하잖아. 두 집단을 함께 고용하면 시너지 효과가 폭발할 거라고.」
여기까지 이야기한 임마누일은 은근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가 말이야, 짚이는 구석이 있어서 북한에다가 CNC 대량구매 문의를 넣어봤거든? 그런데 누가 벌써 재고를 싹 쓸어갔을 뿐만 아니라 향후 1년치 생산물량까지 선구매 계약을 해놨다는 거 아니겠어? 그게 과연 누굴까? 누~구~?」
이 인간은 맨정신일 때가 거의 없는 주제에 왜 이렇게 촉이 좋은지. 정말로 술에 취하면 정신이 맑아지기라도 하나?
「그쪽 동네랑 우리 사이엔 소련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오랜 인연이 있지. 게다가 원래부터 신용하고는 담을 쌓은 인간들이기도 하니, 우리가 웃돈을 주겠다고 하면 기존의 선구매 계약 따윈 미련 없이 던져버릴걸? 뭐, 자네랑은 상관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래!」
그레이스에게 정밀공작기계를 대량으로 공급하려면 북한에서 제작하는 CNC만큼 적합한 물건이 없다. CNC 선반은 어떤 나라에서든 전략물자로 관리하는 수출품이고, 생산기술을 보유한 국가도 한정되어 있으니까.
조달처를 다른 나라로 바꾸자면 먼저 복잡한 우회수입경로를 추가하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 이는 중국산 CNC를 조달한다고 쳐도 마찬가지. 이름난 대기업도 아닌 주제에 한 곳에서 대량발주를 할 순 없으니, 유령회사의 숫자는 많아야 하고 각 회사의 국적도 달리해놓아야만 한다. 그래야 정보기관의 추적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을 테니.
예산이야 추가로 지출할 여력이 넘쳐난다. 그러나 인력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입찰경쟁을 벌이기도 뭣하고.’
우리와 러시아 놈들이 치킨 게임에 돌입할 기미를 보인다면, 신용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북한 놈들은 계속해서 양쪽의 간을 보며 거래를 미룰 게 뻔하다.
그러다가 가격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중국의 귀에도 소식이 들어가겠지. 북한 내부에 중국의 눈과 귀가 좀 많은가.
3인의 경독은 만능의 도구가 아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전 세계의 음지에서 새로운 시대의 산업혁명이 꿈틀거리며, 또 새로운 시대의 군벌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 지금, CNC는 과거 이상으로 수출입 통제가 엄격한 전략물자가 되어있었다.
그 하위호환인 NC(수치제어선반)도 감시를 받기는 마찬가지.
계속해서 사다리를 걷어차려는 선발주자들의 노력엔, 최근 주술사 왕의 군세에 대한 경계심까지 더해졌다.
“주술사 왕에게 무엇을 바라나? 단순히 기존의 이권들을 유지하는 것?”
내가 묻자, 임마누일은 애매한 긍정으로 답했다.
「어, 일단은 그게 목적이기는 한데…….」
“한데?”
「기왕이면 우리의 친구 르완다 대통령도 어떻게 구명을 해보려고 해. 그 사람이 없는 르완다는 결코 지금까지와 같은 이익을 뽑아내지 못할 땅이 될 테니까.」
“대통령 본인은 숙이고 들어올 의사가 있고?”
「음, 그게 말이지…….」
말끝을 흐리며 입맛을 다시는 임마누일. 나는 몇 초간의 침묵을 경청한 뒤에 입을 열었다.
“알 만하군. 좋은 조건을 먼저 마련해놓고서 투항을 권유할 요량인가?”
「투항보다는 동맹? 협력? 그런 형식이었으면 하는데.」
주정뱅이가 투덜거렸다.
「이게 참 골치가 아파. 주술사 왕은 완전한 종속 이외의 방식으로는 받아주질 않는다고 그러고,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자주독립이 아니면 죽음이 있을 뿐이라면서 버티고 있고……. 그 왜, 이런 유형의 지도자들이 다 그렇잖아. 본인이 이제껏 이뤄놓은 성과들을 자기 자신이랑 동일시하지. 그러니까 그 모든 것들의 지배권을 남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고.」
국가경제를 사유화해놓은 대통령은 항복을 하면 잃어버릴 것도 많다. 대륙 규모의 총력전을 꿈꾸는 그레이스가 대통령의 경제권을 건드리지 않을 리가 있나. 르완다라는 나라의 정체성마저 형해화될 터인데.
은총화폐 레페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걸 보면 대통령은 주술사 왕이 행하는 기적들을 불신하는 쪽인 모양이다. 아니면 자신이 일군 국가를 오롯이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이 주술에 대한 외경이나 영생에 대한 욕망보다 더 큰 것이거나.
사람은 때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을 수 있는 존재다. 미주에게는 그것이 사랑이었고, 대통령에게는 그것이 자기애와 하나 된 권력욕 및 독점욕의 좌절이 아닐는지.
“협상에 쓸 지렛대는 있나?”
「주술사 왕에게도 경제제재를 피해서 자원을 수출할 창구는 있어야 할 거 아닌가. 그 일을 르완다 방면에선 우리가 맡겠다고 하면 어때?」
“그냥 하던 일을 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네만.”
「그거야 뭐, 수익분배 비율에서 양보를 하거나 해야지. 아예 없어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리고 원자재 판매대금을 꼭 돈으로 전해줄 이유는 없는 거 아니겠어?」
임마누일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내가 건너건너 들어보니 우리나라 대외정보국(СВР)이 주술사 왕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참이라더라고. 미국과 유럽을 견제하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이용해먹던 상대가 지나치게 커졌다 이거지. 왕의 군대가 지금까지 가시나무(Терновник) 위장막으로 재미를 쏠쏠하게 봤다던데, 우리가 대외정보국의 뒤를 이어 그런 희귀물자를 공급해주겠다고 그러면 주술사 왕 쪽에서도 솔깃하지 않을까?」
“꽤 위험한 짓을 하는군. 소량이라면 모를까, 대야 할 물량이 만만찮을 텐데.”
「어쩔 수 없잖아. 걸려있는 돈이 돈인걸. 평소보다 위험을 감수해보는 수밖에. 높으신 분들에게 뇌물을 많이 먹이면 괜찮을 거야.」
“혹시 전파흡수 도료도 공급 가능한가?”
「어…… 소련 시절에 나온 물건이라면 어떻게든?」
그렇단 말이지.
레이더 전파를 흡수하는 스텔스 페인트는 북한에서도 반잠수정에 칠하는 용도로 생산하는 게 있지만, 그보다는 소련 시절에 나온 게 훨씬 더 가볍고 성능이 좋고 신뢰성도 높을 것이었다.
사실 다중 스펙트럼 위장막이나 스텔스 도료 등은 내가 받아서 공급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정보기관들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용도로는 괜찮겠어.’
주정뱅이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바닥에서 비용을 도외시하고 보안성을 추구하는 조직은 흔치 않다. 그렇다면 르완다에서 뽑아내는 이익이 감소할 브라츠키 크루그는 과연 어떠할까.
브라츠키 크루그는 덩치가 굉장히 큰 연합조직이다. 주술사 왕의 수출입 창구를 조사하던 서구권의 정보기관들- 특히 영국의 비밀정보부도 이 커다란 미끼에 홀려 엉뚱한 데서 여력을 낭비할 가능성이 높겠지. 마피아로 전직한 구소련 시절의 방첩관계자들은 오랜만에 주특기를 되살리며 아름다웠던 냉전 시절을 추억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면 들어둘 가치가 있는 보험이지 않을까.
“좋아. 따로 자리를 만들 것까지도 없이, 내가 한번 설득을 해보도록 하지.”
「그래주겠나? 고마워! 완전 고마워! 대가는 어떻게 지불하면 좋을까? 총 거래액에서 퍼센트로 수수료를 떼어줄까?」
“아니. 백지수표를 받겠네. 자네가 일전에 그랬듯이.”
「오우, 이거 무서운걸?」
“싫은가?”
「싫기는.」
“그럼 받아들인 걸로 알고, 이만 끊지. 지금은 내가 좀 바빠서.”
「알았어.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라구.」
나는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은 후 통화를 종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