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금기와 욕망 (12)
“새로운 후계를 생산해야 한다.”
짧게 흐르던 정적은 다시 칸드라 키라나에 의해 깨졌다.
“그대가 여에게 안겨준 완벽한 승리는 술탄국의 부활을 확정짓는 마지막 쐐기와도 같았느니. 여가 군림하는 질서는 이제 누구도 감히 실존을 부정하지 못할 단계에 올라섰노라. 그러나 후계가 없는 왕국은 일대의 영화에 불과할진저.”
여기까지 말한 칸드라 키라나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여는 한 철의 꽃처럼 피고 질 부질없는 꿈을 꾸어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 아니야.”
한숨을 쉬고 싶은 건 내 쪽이다.
자식을 보자니.
신경질적인 거절의 말이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왔으나, 한순간의 짜증으로 술타나의 체면을 뭉개놓으면 일이 더 귀찮아질 게 뻔하다. 이 나라의 꼰대들은 자신의 체면이 상한 일을 중국인들보다 더 음습한 원한으로 가슴에 새겨두곤 하니까.
그러니 여기선 존중하는 티를 내며 거절해두는 편이 좋겠지.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만…… 나는 무슬림이 아니고, 고귀한 혈통을 물려받은 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부모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고아 출신이지요. 이런 내가 중시조의 국서(國壻)가 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술타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세상 어느 혈통에 처음부터 고귀함이 있었으리?”
“…….”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모든 고귀한 혈통들의 시작엔 스스로 고귀함을 증명한 시조가 존재함이라.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를 높인 자와 그저 조상을 잘 두었을 뿐인 탕아 중 더 고귀한 것은 과연 어느 쪽이겠는가?”
“그래서, 당신 눈엔 내가 고귀해 보입니까?”
“아무렴.”
단호한 대답.
“싸우기 전에 승리를 구한 치밀함은 필부로서는 닿지 못할 영역의 지모이고, 그 지혜로써 세운 군략을 전장에서 실천한 능력은 범인의 상상을 넘어선 무용이며, 목전의 이익에 흔들리지 않고 그 너머의 사람을 논하는 진중함은 실로 남다른 인군(人君)의 기품이라.”
이렇게 긴 찬사를 늘어놓고서, 술타나는 자신의 명치 어림에 손을 올렸다.
“그대는 내가 아는 자들 가운데 가장 왕에 가까운 자다.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여조차 그대 앞에선 절로 겸허한 마음이 들건만, 하물며 지옥에서 불타고 있을 전남편과 비교할 바이겠는가. 그는 혈통이 부여하는 고귀함의 반례와도 같은 자라.”
“전남편이 죽었습니까?”
“찾아서 죽였다. 아내와 자식을 버렸으면 벌을 받아야지.”
“과연.”
“좋은 말로 돌아올 기회를 주었지만 거부하더군. 자기는 이미 새로운 가정을 꾸렸으며, 자기는 더 이상 해묵은 구태에 얽매이지 않겠노라고. 그러니 나도 이제 오래된 사슬을 끊고 내 삶과 자유를 찾으라고. 적당히 자란 자식이야 아직 명이 붙어있는 가문의 어른들에게 떠넘기면 될 거라면서.”
젊은 꼰대는 경멸 어린 조소를 머금었다.
“참으로 우습지도 않은 희언이었지.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어찌 그런 무책임한 소릴 할 수 있단 말인가. 두 가정을 다 취하겠노라 했어도 의무가 큰 쪽을 우선한다면 참아줄 요량이었는데, 그 역겨운 인간은 여가 관대하게 그어놓은 선마저 넘어버렸어.”
“외람된 말씀일지도 모르겠으나, 아들이 아버지를 닮았던 모양입니다.”
“그 씨가 어디에서 왔겠는가. 연을 끊은 역적의 이야기인데 외람될 건 또 무엇이고. 이런 경험이 있기에 여가 더더욱 그대를 바라는 것이야. 아르주나의 재림과도 같은 그대를.”
은근히 외람되게 느껴지기를 바라며 건넨 말이었음에도, 자식을 죽인 어머니의 내면엔 기대만큼의 파문이 일지 않았다. 그저 퇴락한 슬픔의 빛이 일렁이다 잦아들었을 따름.
가볍게 수긍한 술타나가 펼친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여는 그대에게 왕국의 절반을 내어 주리라. 새롭게 일어날 왕통의 계보에 그대의 피를 섞도록 허락해주기만 한다면. 그대의 피엔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 여가 생각하기로, 술탄의 가계에 흐를 그대의 유산은 왕국으로 하여금 천년을 꿈꿀 수도 있게 해줄 밑천이야.”
슬슬 머리가 아파온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나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기회에 알라께 귀의하면 그만이지 않나.”
“무거운 일을 너무 가볍게 말씀하시는군요.”
“실제로도 가벼운 일이니까. 국서로서의 새 신분을 만들어 그 신분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라. 그대가 맡을 아버지의 역할 또한 그 정도면 충분하리.”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그대도 그러지 않았는가. 군왕에게는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
“여는 그대에게 믿음을 바라며 애정은 바라지 아니한다. 여의 뱃속에 우수한 씨를 심어주고, 부부가 아니라 피의 결합을 이룬 동맹자로서 서로의 사업과 왕국의 간난신고를 함께하며, 자식이 아버지의 얼굴을 잊지 않을 정도로만 시간을 할애해주면 그걸로 족할 것이다.”
“나는 피로 이어진 자식을 만들기 싫습니다.”
“조건이 부족한가? 그대가 원한다면 다른 여자들을 셋까지 더 두어도 좋고, 그대의 여인들 중에서 여를 첫 번째로 여기지 않아도 좋아. 그대가 국서의 신분을 쓰는 동안에는 다른 여인들의 존재를 비밀로 해주어야겠지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자식을 만들기가 싫습니다.”
그저 대를 이을 수단으로서 자식을 생산하려는 술타나는 자식을 도구처럼 낳아 소모하는 마녀를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었다. 나를 종마로 취급하는 태도 역시도. 여기에 피로 이어진 가족에 대한 내 거부감, 그리고 지금 이 상황 자체에 대한 귀찮음이 더해진 결과,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나도 모르게 딱딱하고 차가워졌다.
온도의 변화를 감지한 칸드라 키라나가 나를 보는 시선을 기울였다.
“보아하니 그대에게도 무언가 사연이 있는 모양이구나.”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지요.”
“하긴……. 그대는 고아로 자랐노라 했지. 역경을 헤쳐 나오면서 험한 굴곡이 없었을 리 있을까. 저마다의 굴곡을 지나온 사람들에게는 서로 다른 고단함이 있기 마련이지.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아, 건드릴 때마다 아픔이 오르는 해묵은 상처가.”
이렇게 납득한 술타나는 이어 이상한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런가.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이유라니, 무슨 이유 말입니까?”
“그대와 같이 출중한 사내가 아직까지도 홀몸인 이유. 그리고 여가 그대에게 결혼을 권할 때마다 미묘하게 반응이 좋지 않았던 이유.”
“…….”
“벗이여. 그대가 어이하여 피로 이어진 자식을 갖는 일에 그런 반감을 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조금 전 그대가 설핏 드러내었던 감정은 참으로 진하고 거친 느낌이었느니. 여는 왠지 모르게 그것이 강한 긍정을 내포한 강한 부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야.”
누가 전근대의 망령 아니랄까 봐, 지레짐작만 가지고 가르치듯 훈수를 늘어놓는 꼴이 한없이 꼰대의 전형에 가깝다.
살아온 세월이 나보다 한참 짧은 꼰대가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는 더 이상 권유하지 않겠다. 다만 숙고해보았으면 한다. 그대 스스로 금기시하는 바가 그대의 내밀한 욕망에 닿아있지는 않은지를. 그 결과가 좋게 나온다면 여도 그대에게 새로이 기대를 걸어볼 수 있겠지.”
“내 마음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일찌감치 대안을 찾으시죠.”
“아니. 여는 기다려볼 것이야. 사람 일은 그 자신도 앞날을 모르는 것이고, 또 여가 그대를 이미 아는데 달리 어느 사내가 여의 눈에 차겠는가? 그리고……”
“그리고?”
“거절의 말을 듣고 나니 더욱 기껍고 욕심이 난다. 그대가 가족을 만드는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대의 진지함은 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바라. 건조하고 냉철하기만 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더니 의외의 면모가 있었구나.”
“…….”
“비할 데 없이 강하고 유능할 뿐만 아니라 피로 이어진 가족의 무게를 아는 사내. 그런 사내가 세상에 얼마나 흔할까. 이미 최소한의 책임감도 없는 이를 겪은 입장에서는 그대의 존재가 빛을 발하는 듯하다. 하여 여의 가임연령이 허락하는 동안에는 기다려보고자 한다.”
“바람직하지 못하군요.”
“뭐 어떤가.”
칸드라 키라나의 미소에서 우울함이 덜어진다.
“여가 그대가 아닌 사내를 국서로 맞는다면 왕국의 절반은커녕 여의 후광조차 아껴서 나눠줄 터이지만, 그럼에도 그대보다 못난 사내들은 그로부터 비롯될 이익을 두고 승냥이 싸움을 벌일 것이야. 그런즉 그대보다 못한 대안을 구하자면 언제라도 구할 수 있겠지. 이 정도면 한번 기다려볼 만도 하지 않은가?”
“모든 투자는 투자자 개인의 책임이지요. 나중에 실망하지 않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실망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이로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만큼 거북함을 드러내었으면 그만할 때도 되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칸드라 키라나는 머리를 한 번 까딱여 동의를 표했다. 체통을 차릴 때와 달리 몸소 배웅에 나선 칸드라 키라나는, 함께 출구에 이르러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다.”
“뭡니까?”
“그대는 사업이 사람을 얻고 사람을 남기는 일이라 했었다.”
아까 오갔던 대화를 상기시킨 술타나가 나를 돌아보며 맺는 화두.
“하면, 사람의 인생은 어떠한가?”
사람의 사업이 그렇듯이, 사람의 인생도 사람을 남기는 일이라는 소리를 하고 싶은 모양. 무언가 그럴듯하긴 해도 실질적인 쓸모는 없는 화두였다.
술타나가 작별을 고했다.
“살펴 가도록 하라. 그대는 반쯤 농으로 던진 말이었을지라도, 다음에 만나는 여에게서는 담배 냄새가 나지 않을 것이야.”
오래 살고 싶으면 그래야지. 기껏 왕관을 쓸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이로써 인도네시아에서의 일정을 마무리 지은 나는 싱가포르 인근 해상에서 스텔라 포르투나 선단과 다시 합류했다. 탄자니아 앞바다에서부터 출발한 선단은 닷새간의 항해를 거쳐 이제 막 말라카 해협을 통과한 참이었다.
내가 합류할 즈음 선단은 둘로 쪼개어졌다. 군과 헌터, 그리고 민간인 부상자들을 수용한 선박들이 있었기 때문.
나는 항로와 가까운 빈탄(Bintan) 섬의 리조트 하나를 통째로 빌려 부하들에게 하루의 휴식을 부여했다.
해변이 딸린 리조트는 현장지원팀에서 문의를 넣기 전까지 개점휴업에 가까운 상태였다고 들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섬 자체가 각성체 바다악어나 백상아리, 각성능력자들로 이루어진 해적단 따위가 빈번히 출몰하는 해역에 위치한 탓이었다. 그래도 인도네시아 정부와 개별 사업장들이 안전 확보를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던 모양이나, 그 노력들은 얼마 전 이 섬에서 터진 식인악어 사건으로 말미암아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노라고.
이 지역에 발령된 세계 각국의 여행경보는, 뭍으로 올라와 사람을 습격하길 즐긴다는 식인악어가 잡히기 전까진 해제되지 않을 것이었다.
마무르가 이끄는 지하디스트 그룹에게도 리조트 하나를 빌려서 내주었다.
원래부터 성전연합 동아시아 지부에 속해있던 인원들이라면 모를까, 아장-아장을 필두로 하여 수마트라 섬에서 거둬들인 잡것들은 내 부하들과 얽히면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현장지원팀은 바다로 뻗은 하얀 사주를 경계로 삼아 서로가 다른 시설과 해변을 쓰도록 조치해놓았다.
저편의 해변에서, 성전연합 동아시아 지부의 구성원들은 이 순간에도 고기방패들을 조련하는 중이었다.
“전방에 힘찬 함성! 5초간, 발사!”
“알라후앜바아아아아아아아아르!”
성전연합 간부들의 지시에 따르는 아장-아장의 구성원들에게선 억눌린 적개심이나 공격성의 색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1차적으로는 마무르의 혓바닥이 쓸모를 증명한 결과였지만, 고아들이 아버지(아마)라고 높여 부르는 자가 적극적인 협조와 복종을 지시한 덕분이기도 했다. 마무르 본인부터가 뒤쪽의 비중이 더 크다고 이야기했을 정도.
앞서 마무르는 애미 애비가 유별나게 없는 고아들과 그들의 아버지에 대해 자신이 파악한 바를 공유해주었다.
「‘아버지’는 알라의 전사들을 거느릴 자격이 없는 간교한 이단자입니다. 그는 도구적인 부성(父性)을 능란하게 연기하여 고아 출신 전사들의 결핍을 파고들었고, 경전에도 없는 교리들을 꾸며 스스로를 예언자에 버금가는 존재로 신격화하였다. 그리하여 아장-아장을 아부 사야프로부터 분리시켜 자신의 사병대로 만들었어요.」
「그는 내가 알라의 이름으로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고 천만 달러의 보상을 약속하자 주저 없이 ‘자식들’을 팔아넘겼습니다. 아, 이 천만 달러는 싸장님께 청구할 테니 양해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이것도 다 알라의 총애로 적립된다.」
「아무튼 덕분에 필리핀의 고아들은 내 말을 잘 따르게 되었어요. 죽으라고 하면 기꺼이 죽을 것이에요. 그들의 ‘아버지’가 마지막에 한마디 더 거들어주기만 한다면.」
「그러니 싸장님께서는 이들이 죽을 장소를 정하여 통보하도록 하십시오. 싸장님과 내가 힘을 합쳐 이 가엾고 딱한 고아들을 진정한 천국으로 보내주는 것입니다. 오, 실로 알라께서 기뻐하실 아름다운 선행이다.」
다 좋다. 다 좋은데, 무엇이 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와 자식들이라는 표현은 입안에 씹히는 모래알처럼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통역을 끼고 지하디스트들의 대화를 엿듣는 와중에, 해변에서는 부하들과 메리옘 그룹의 구성원들, 그리고 684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684가 아니지.’
684는 라일라 마르라는 이름을 매우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이름도, 그 안에 녹아있는 의미도 모두 마음에 든다고. 좋은 이름을 지어줘서 고맙다고.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내게 몇 번이나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불러줄 때마다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행복한 미소를 지은 것은 덤이었다.
교련에 임하는 지하디스트들의 대화엔 이렇다 할 특이사항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통역을 맡고 있던 메리옘 그룹의 일원, 주눈 토흐티에게 말했다.
“이만하면 됐다. 너도 이만 가서 쉬도록 해라.”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위구르인은 공손하게 답했다.
“이 세상 모든 영광의 주인이시여. 당신의 곁에 있는 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웨-인!” 슬쩍 돌아보면, 노출이 없는 동방정교회식 수영복을 입은 라일라가 바다를 등지고 크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맨발로 파도를 밟으며 백사장을 거니는 경험 자체가 낯설면서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가볍게 마주 손을 흔들어준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주눈에게 말했다.
“내 곁에 있을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허락한 이 장소와 시간을 온전히 향유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지 않겠나?”
휴식은 원활한 임무 수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제대로 쉴 줄을 모르는 부하는 경태나 수연 녀석 같은 예외적인 소수만으로도 충분하다. 휴식 반납과 초과근무로 충성경쟁을 벌이는 분위기가 확산되기라도 하면 나로선 골치가 아파질 테니.
그것은 조직의 역량을 무가치하게 깎아먹는 불건전한 조직문화다.
“알겠습니다. 그럼 당신의 뜻을 받들어…….”
자리에서 일어선 주눈이 무언가를 기대하듯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기대하는 바는 간단하다. 「고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라. 그것은 선한 행위이니, 신의 이름으로 행한다면 그의 손이 닿는 모든 머리카락에 축복이 깃들 것이라.」
“이리 와라.”
기왕 광신도를 광신도로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에 어울리는 관리는 불가피한 일. 나는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손을 뻗어 주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애젊은 위구르인은 가볍게 전율하며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다다다다닥-!
하얀 모래해변을 가로질러 맨발로 달려오는 발소리. 급하게 달려온 라일라는, 저와 교차하여 지나간 주눈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을 더듬었다.
“방금…… 방금……!”
“방금?”
“쓰, 쓰다듬어주던데!”
가까운 자리의 경태 녀석이 “오우, 삑사리.”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
나날이 깊어지는 의존성은 앞으로의 계획에 긍정적인 요소다. 나는 조금 전보다 한층 더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라일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두건처럼 쓴 베일 위로 슥슥 머리를 만져주니 라일라는 후우- 하고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며 신경을 이완시켰다.
그러자 이번엔 사람이 아닌 개가 다가와서는,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꼬리를 흔들며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경태의 개인 김춘식이였다. 내가 가만히 있으려니, 까만 잡종견은 제 앞발로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과 함께 끄응 끙 앓는 소리를 냈다.
“…….”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지켜보는 경태가 소리죽여 키득거리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