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48화 (348/561)

#37. 금기와 욕망 (10)

황금기의 눈을 활용한 전장감제에 전향자들을 심문하여 보강한 첩보가 더해진 결과, 사흘째의 우리는 주전장인 잠비 일대(Jambi Provinsi)를 쓸어버린 후 북으로 1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적의 핵심 근거지까지 타격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중간에 포착한 모든 게릴라 집단을 궤주시켰음은 물론이다.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나이든 자들이지만 싸우다 죽는 것은 젊은이들이다.」 라는 경구는 무슬림들의 지하드에도 어김없이 들어맞는 것이었다. 성전도 전쟁은 전쟁이고, 모든 전쟁은 권략행위의 연장선상에 존재하니까.

전선으로부터 정신없이 패전보가 밀려드는 가운데 세력의 발원지까지 공중강습을 두들겨 맞는 지경에 이르자, 나이든 자들은 항전보다는 협상을 시도하는 쪽을 택했다. 성전의 명분으로 내건 이슬람 신정국가 건설보다 자신들의 목숨과 핏줄의 안위를 확보하는 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가능하다면 가지고 있는 자산도 보전하고.

이는 나이든 자들의 호출을 받고 집결하는 다수의 각성능력자 집단들을 빠른 순서대로 각개격파한 직후의 일이었다.

이 집단들의 실제 병력손실은 대체로 10% 언저리에 머물렀으나, 전술적으로 볼 때 10%의 단기손실은 해당 집단의 전투수행능력을 마비시키고도 남을 만큼 강력한 충격이다. 하물며 그 집단들의 실체가 본거지를 지키는 최정예 무자헤딘 각성능력자 부대들이었음에야.

적 수뇌부는 사실상 무방비로 발가벗겨진 상태에서 협상을 결정한 것이었다. 협상 테이블로 나오지 않았으면 내가 머리채를 붙잡아 끌고 나왔겠지.

다만 지하드의 특성상, 내가 수치를 주는 방식으로 협상을 강요했으면 오히려 뒤처리가 더 귀찮고 지저분해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부조직들이 충성맹세(بَيْعَة)를 철회해버리거나 아예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거나 하면 뒷맛이 깔끔하지 못하게 된다.

협상 의사를 접수한 건 먼저 적의 심장부에 들어가 있던 마무르, 그리고 마무르의 감시자를 겸해 동행으로 붙여놓은 메리옘 그룹의 일원이었다.

“오, 친애하는 나의 싸장님. 살람(سلام)~ 살람~”

믿는 자들 사이에선 사신을 죽이는 법이 없고, 알라의 뜻이 아닌 이상 자신이 죽을 리도 없다며 비무장으로 적진에 들어갔던 마무르는, 소파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여유롭게 손을 흔드는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자, 먼저 인사부터 나누세요. 이쪽은 이맘 자파르 마흐무드 알리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우스타드(고위 법학자) 이스마일 카림 이브라힘이고, 그 옆은 사령관 우스만이에요. 그리고 또 그 옆은…….”

마무르는 저쪽에서 나온 16인의 대표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나는 그들 하나하나를 향해 오른 손을 왼쪽 가슴에 대어보이며 눈인사를 건넸고, 그들 또한 내게 같은 인사를 돌려주었다.

분위기는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궤멸의 위기를 맞아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던 와중에, 이쪽에서 협상을 제안한 것 자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모양.

술타나는 별다른 단서를 달지 않고 협상의 전권을 위임해주었다. 나는 참석자들의 얼굴과 내가 사전에 술타나로부터 전달받은 인적정보를 대조해본 후, 대역이 없음을 확인하고서 입을 열었다.

“요구사항을 말하겠소. 하나. 술타나 칸드라 키라나 파크루딘에 대해 내려진 기존의 모든 적대적 파트와를 철회하고, 이후 그녀의 혈통에 근거한 왕위 주장과 술탄국의 재건에 대하여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을 것.”

울라마(이슬람 법학자)들의 대표로 보이는 우스타드 이스마일은 절제된 한숨을 한 번 내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리다. 파트와를 철회하는 파트와는 협상이 끝나는 대로 발표될 거요.”

교리해석 겸 종교판결인 파트와는 오직 그것을 내린 사람만이 철회할 수 있다. 무작정 다 죽여 버리는 게 정답이 아니었던 또 하나의 이유. 법학자의 죽음으로 박제된 파트와는 두고두고 술타나의 골치를 썩일 극단주의자들의 명분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이어서 요구사항들을 나열했다.

하나. 반역자 아궁의 신병을 인도할 것.

하나. 이제까지 사로잡힌 포로들의 처우는 오직 술타나의 처결에 따를 것.

하나. 술타나의 영역에서 납치해간 민간인들을 즉각 송환할 것.

하나. 아장-아장은 「아마(Amah/아버지)」를 포함한 전원이 성전연합의 동아시아 지부에 충성을 맹세하고, 지도자인 아마는 지부장의 휘하에 들어올 것.

이러한 조건들 중에서 아장-아장에 관한 부분은 마무르가 요구한 것이었다. 자기가 심문을 해본 바, 이들이야말로 소모품으로 쓰기에 최고일 것 같다던가.

같은 무슬림들을 일회성으로 소모해도 괜찮은 거냐고 묻자, 마무르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어차피 그들은 천국으로 가요. 그리고 나는 그들이 치르는 성전의 티어(Tier)를 끌어올려 더욱 좋은 천국으로 보내주려는 선량한 사람이다.」

「싸장님과 이 마무르가 거두어 쓰지 않는다면, 저들은 같은 신앙의 형제자매들을 과도하게 죽여 대는 심해의 성전을 치르다가 브론즈 등급의 천국으로 가버릴 것이에요. 그러므로 싸장님과 나는 오히려 감사의 인사를 받아야 할 입장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알라 후 아크바르.」

미친놈이 지껄일 법한 미친 소리였지만, 평소와 같은 일관성은 나를 납득하게 만들었다.

수마트라 북부의 극단주의 연합진영 자체에 대한 평가도 냉정하긴 매한가지였다. 「이슬람 국가 운운하며 감히 칼리파를 세우려는 멍청이들은 좀 맞아도 싸요. 알라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밀수꾼인 싸장님이 마음껏 두들겨 패십시오. 나는 싸장님의 편이에요.」라고.

아장-아장의 다 자란 고아 새끼들을 거두는 문제에 대해 술타나의 양해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른 싸움에서 연막용 고기방패로 쓸 작정이라 밝히자, 꼰대는 내 뜻대로 하라는 답을 돌려주었다.

“……마지막은 금전적인 보상에 관한 내용이오. 잠비 일대에서 당신네들이 살해한 사람 하나당 낙타 백 마리의 값을 배상금(ديات)으로 지불할 것. 여기서 낙타의 값은 금일 사우디아라비아의 낙타시장에서 거래된 비각성체 낙타들의 평균 거래가가 기준이고, 남녀의 차이는 없소.”

성지 메카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으니, 이는 곧 성지가 있는 땅의 가격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었다.

골수 이슬람 꼴통들은 이 대목에서 눈을 찌푸리며 반발했다.

“잠깐! 남녀의 차이가 없다니? 율법에 따르면 여자의 목숨 값은 남자의 3분의 1이오!”

“…….”

나는 마소에 대한 지배력을 소폭 강화하여 꼴통들을 위압하는 동시에,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말투를 달리하여 물었다.

“다들 지금 상황판단이 안 되시나? 술타나가 여자의 몸으로 옛 왕국의 중시조(中始祖)가 되려는 마당에, 끝까지 여자와 남자는 동등하지 않다는 암시를 남기려고?”

“으음…….”

그저 위압을 당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런 속내가 없지 않았던 까닭인지, 꼴통들은 수염을 쓰다듬거나 헛기침을 하거나 하며 눈을 돌려 내 시선을 회피했다. 신경신호의 양상과 화학적 변화의 색채를 보건대 답은 후자일 가능성이 높겠다.

이것들이 이제껏 술타나를 인정하지 않은 핑계 중 하나가 바로 술타나의 성별이었다.

술타나에게 듣기로 이 나라의 역사 속에서 여군주가 없었던 건 아니나, 보수적인 법학자들은 여군주의 권위에 적법성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던가.

한 번은 메카에서 내려온 파트와 하나가 군주의 실권을 날려버린 적도 있었다고.

이는 어디까지나 원래 있던 군주의 정적들이 파트와를 명분 삼아 일으켰던 사건이긴 하다. 그러나 왕국이 부활한 후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정황상 부정적인 암시를 읽어낼 수 있는 파트와는, 추후 나타날지 모를 술타나의 적들에게 종교적인 힘을 실어줄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하여간 무슬림들의 세계란…….’

나는 내심 혀를 차며 자세와 말투를 처음으로 되돌렸다.

“당신들이 체면상 술타나의 왕정을 정식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알고 있소. 그러면 하다못해 우회적으로라도 우호적인 암시를 넣어줘야 하지 않겠소? 표면적으로는 술타나가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법률을 존중한 것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고.”

꼴통 법학자들은 한숨을 쉬며 머리들을 주억대어 내키지 않는 동의를 표했다.

“강간을 당했거나 상해를 입은 자들, 강제결혼을 당한 자들, 그리고 기타 유무형의 손실을 겪은 자들에 대한 보상 또한 샤리아 율법을 기준으로 하되, 마찬가지로 남녀의 차이는 없는 것으로 합시다. 여기에도 동의하시오?”

“……동의하외다.”

“그럼 여기까지로군. 지금까지 논의한 바의 성실한 이행을 보증하는 차원에서, 여기 계신 우스타드께선 보상이 완료되는 날까지 술타나의 보호를 받아주셔야겠소.”

“뭐라?!”

“싫다면 협상은 무효요.”

나는 턱짓으로 협상장 바깥을 가리켰다.

“돌아가서 무기를 들고 기다리고 계시오. 우리가 곧 찾아갈 테니.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요.”

통역을 전해들은 우스타드 이스마일은 수염을 떨며 공포와 충격과 수치가 섞인 노여움을 드러냈으나, 내가 지긋이 쏘아보자 결국 시선을 떨어뜨리곤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였다.

사실 내 말엔 약간의 블러핑이 섞여있었다. 극단주의 무슬림들의 구심점을 완전히 분쇄해버리는 건 술타나에게도 달갑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술타나의 사병대가 인도네시아 정부를 상대로 계속해서 우세한 발언력을 유지하려면, 적대진영으로서의 이슬람 극단주의 반군이 일정한 세력을 유지해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다 죽여 버리는 게 최선의 답이 아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술타나가 부모자식의 연을 끊은 아들 아궁은 같은 편이라 여겼던 자들의 손에 붙잡혀 저주를 퍼부으며 끌려왔다. 잡혀오는 순간까지도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 앉아 어머니에 대한 낯 뜨거운 루머를 풀어놓고 있었다고.

경태는 그 루머의 내용을 듣고 깊은 감탄을 표했다.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자기를 상습적으로 추행했고, 자기 애인을 암살청부로 죽인 것도 사실 질투가 원인이었다, 라……. 와. 이 새끼 이거, 어머니를 엿 먹이겠다는 독기가 진짜 대단합니다, 형님.”

아궁은 그동안 줄곧 술타나를 공격하는 적대적 프로파간다의 중심이었다. 아궁이 생산하는 온갖 종류의 프로파간다를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아들이 어머니를 헐뜯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술타나의 명예를 실추시키기엔 충분했다.

“Kurang ajar kau!”

포박당한 아궁은 침을 뱉고 성난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았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둥근 안경을 쓴 아궁은 제 어머니와는 사뭇 다른 소심한 인상이었다.

우리는 아궁을 술타나의 주둔지로 압송했다. 극단주의 꼴통들이 전사들의 아내로 주기 위해 납치했던 여자들도 함께 이송되었다.

미리 통보를 받은 술타나는,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처형장을 만들어놓고 주민들을 불러 모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이 오자마자 죽여 버리겠다는 결의가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처형장이라고 해서 대단한 준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사흘간 비축한 전범들의 목을 보기 좋게 동심원 형태로 배열해놓고, 그 중심엔 말뚝을 박아 족쇄를 하나 연결해놓았을 따름.

그리고 말뚝 옆엔 술타나가 서있었다. 입과 코를 마스크로 가리고, 눈에는 보안경을 쓰고, 목이 긴 장갑을 낀 손에는 그라목손이 찰랑이는 유리병을 하나 쥐고서.

굳은 표정의 라스카르 병사들이 우리에게서 역적의 신병을 인도받았다. 자신의 죽음이 어떠할지 알게 된 아궁이 주저앉다시피 박박 땅을 밀어대며 저항했으나, 각성능력자 병사들의 힘을 당해낼 순 없었다.

병사들은 우리에게 양해를 구했다. 사형수가 발버둥을 쳐서 정확한 무게를 재기가 여의치 않으니, 죽은 후의 무게에 5푼을 더하여 보상을 계산하도록 하자고.

그깟 보상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사업상의 파트너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다. 나는 술타나에게 다가가 물었다.

“당신이 직접 손을 쓸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크툿 위자야가 내 말을 통역하려 하자, 술타나는 남는 손을 저어 그를 물러가게 했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며 결코 입에 담는 법이 없었던 영어로 대답했다. 스승새끼의 기억에 비추어도 손색이 없는 퀸즈 잉글리시(Queen’s English)의 억양이었다.

“벗이여. 부모 자식의 인연은 말로만 끊는다고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는 오늘 여기서 여의 안에 남아있는 역적을 마저 죽이려 하느니. 그로써 여는 사람이 끊을 수 없는 것을 끊어내는 군주의 냉혹함을 보일 것이야.”

이렇게 이르는 술타나는 평온한 외면과 소용돌이치는 내면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안팎의 부조화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위태로움을 자아냈다. 뜨거운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모습은 각성능력자를 기준으로도 정상과 거리가 멀었다.

이건 내가 뭐라 말하든 흔들릴 결의가 아니다.

철컥. 역적의 발목에 족쇄가 채워지고, 두 명의 라스카르가 죄인을 무릎 꿇린 뒤 어깨를 짓누르고 얼굴을 붙잡아 고정시켰으며, 대기 중이던 또 한 명의 라스카르는 깔대기가 달린 고무관을 죄인의 식도 깊숙한 곳까지 밀어 넣었다.

대기 중이던 시종이 다가와 공손히 쟁반을 내민다. 둥그런 쟁반 위엔 작은 찻잔이 올려져있었다. 칸드라 키라나는 쥐고 있던 병을 열어 찻잔을 채웠다. 그리고 병과 잔을 바꿔들어 깔대기 안으로 그라목손을 부어넣었다.

겉으로만 보면 우아함이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운 동작.

칸드라 키라나와 그녀의 병사들이 물러나서 지켜보기를 잠시. 사흘 전 칸드라 키라나가 언명했던 바 그대로, 죄인은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어대기 시작했다.

한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어머니는, 마치 그림자로 시간의 경과를 알리는 해시계의 바늘처럼 보였다.

왕국이 부활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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