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금기와 욕망 (9)
위성인터넷 단말을 탑재한 지휘통신용 제트 바이크의 존재는 오지 한복판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영상통화를 가능케 했다. 나는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두고 앉아서 물었다.
“잘 보이나?”
「응, 잘 보여!」
액정 속의 684가 나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짓는다.
당초 하루 한 번 통화를 약속해놓고 두 번이나 세 번을 해주는 날이면, 684는 몹시 받고 싶었지만 기대하지는 않았던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반응하곤 했다. 횟수가 거듭되어도 빛이 바래지 않는 순수한 기쁨이었고, 이럴 때의 684는 주인을 보고 조건 없이 기뻐하는 강아지를 닮아있었다.
이름은 아직 전하지 못했다. 이름을 정하고 나서 바로 알려주려 했었지만, “네 이름을 정했다.”라는 말을 들은 684는 「잠깐!」하고 곧바로 머리를 흔들며 내 말을 가로막았다.
「내 이름은 직접 얼굴을 맞댄 자리에서 듣고 싶어. 이렇게 전화상에서가 아니라…….」라는 시시한 이유에서였다.
그러므로 684는 아직 684였다.
의례적으로 문진을 행한 나는 다시 의례적으로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어떤 음식이 입에 맞았는지, 쉬는 시간엔 무엇을 했는지, 다른 부하들과 어울리기가 어렵지는 않은지, 적응하는 데 달리 애로사항은 없는지 등등.
684는 시종일관 밝게 대답했다. 처음 하루 이틀 정도는 못내 낯선 환경에서의 불편함과 어색함이 있기도 했으나, 시각을 조금 바꾸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는 것이었다.
「이 배는 당신의 배고, 같이 있는 사람들은 당신의 사람들이잖아. 당신의 소유물 안에서 당신의 보호를 받으며 당신의 사람들과 같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많이 편해졌어.」
“그런가.”
「응. 알고 보니 여기 있는 모두가 나랑 비슷한 경험을 했던걸.」
“비슷한 경험?”
「당신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하던데.」
“아, 그거.”
「다르더라.」
“다르다니. 무엇이?”
「내가 원래 있던 곳과 당신이 만들어낸 이 조직이.」
여기서 684는 미소를 조금 지우고 그만큼의 진지함을 더했다.
「너무나 달라. 당신의 조직이 돌아가는 방식, 그 안에서 자신의 소임에 충실한 사람들을 보면서 당신이라는 사람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어. 누군가를 알고 싶다면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라는 말도 있잖아.」
“살펴보니 어떻던가?”
「많이들 그러더라. 당신은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그걸 듣고 새삼 깨닫게 됐지. 아, 내가 진짜로 구원을 받았구나…… 하고.」
아버지? 나는 미간을 조금 좁히며 적당한 말로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고맙다니.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숨을 고른 684가 조금은 수줍어하며, 그러나 단단한 결의를 내비친다.
「당신은 내 구원자야, 웨인. 당신과 당신이 만든 이 조직의 원칙대로, 나 또한 당신에게 목숨을 빚졌으니 내 삶의 남은 시간들을 모두 당신을 위해 쓰겠어. 그게 내가 여기서 새로운 삶을 찾을 길이기도 하겠지.」
나는 느리게 끄덕였다.
“뜻은 알겠다만, 그래도 현장에 나오는 건 아직 금지다.”
「아잇, 이게 안 되네…….」
스텔라 포르투나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684는 나를 따라 현장에 나오고 싶어 몸이 잔뜩 달아있었다. 내가 뭐라고 답할지 뻔히 알면서도, 통화를 할 때마다 나 있는 곳으로 가면 안 되겠느냐고 한 번씩 물어보는 이유였다. 방금도 그런 말을 꺼내고자 분위기를 잡는 기미가 보여 사전에 차단해버린 것이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던 684는, 곧 가까이에서 연속으로 울리는 총성을 듣고 대번에 눈매를 날카롭게 만들었다.
「방금 그건 뭐였어?」
“별거 아니다. 주민들 틈에서 적 패잔병들을 솎아내어 사살하는 중이지.”
「아아.」
짙은 살기를 띠었던 684의 눈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부드럽게 이완되었다.
「설마 그곳에 대마법사를 해할 만한 존재가 있진 않겠지만, 그래도 조심해. 당신이 잘못되면 나도 따라서 죽을 거야.」
“쓸데없는 소리 마라. 그건 무가치한 죽음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부하들에게 계약의 최종이행을 요구하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계약당사자인 내가 이미 숨을 거둔 다음이라면 부하들에게는 더 이상 어떤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뒤따르겠다고 목숨을 끊는 건 무가치한 자원낭비일 따름.
내 복수를 하겠다고 날뛰는 것도 마찬가지다. 복수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필요한 행위이니까.
「무가치하다니…….」
내 단호한 일축에 어깨를 움츠리는 684.
대화에 짧은 어색함이 낀 틈에, 주민들 사이로 숨은 패잔병들을 솎아내는 현장에선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통역을 겸하는 라스카르 연락장교가 험악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지목하고, 즉각 도주를 기도하던 그 누군가는 곧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을 쳐대며 메리옘 그룹의 전투원들에게 붙들려 끌려나왔다. 술타나가 목에 플랜테이션 농장들의 지분을 걸어놓은 현상범 중 하나였다.
꼰대의 요청에 따라, 이런 현상범들은 총살이 아닌 참수형을 집행해야 했다. 이슬람 율법의 가장 전통적인 사형 방식이 바로 머리를 자르는 것이기에.
「주님께서 그분의 천사들을 격려하셨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여 믿는 자들을 굳게 세울 것이라. 나는 나를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던지리니. 그런 연후에 그들의 목과 손가락을 쳐 없애리라.”」
골초 꼰대가 형을 언도하는 판사처럼 엄숙하게 읊었던 꾸란의 한 구절.
무슬림들이 사람 목 자르기를 좋아하는 건 하루 이틀 이야기가 아니다. 경전에서는 어디까지나 불신자에 대한 처벌로 참수를 논했으되, 실제로는 중죄를 저지른 무슬림들도 불신자에 준하는 취급으로 목을 잘라서 죽인다. 죄를 저지른 이상 너는 믿는 자가 아니라고 모욕을 주는 것이다. 자세하게는 종파에 따라 해석이 다르긴 해도.
칸드라 키라나는 현상범들의 수급을 받아보기를 원했다. 가장 이상적인 건 후방으로 이송하여 공개리에 처형을 하는 것이지만, 모든 현상범들을 그렇게 처리하는 건 비효율적인 일. 단기간에 빈도 높게 집행되는 공개처형은 또한 반역자 아궁의 처형이 대중에게 주는 충격을 희석시킬 우려가 있었다.
피로 이어진 반역자의 처형은 대중에게 술타나의 서릿발 같은 엄정함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겸사겸사 실추된 왕가의 명예도 되돌려놓고.
하여 칸드라 키라나는 급수가 낮은 현상범들에 대해선 수급을 받아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제트 바이크로 배송하면 냉장창고까지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창고에 모인 수급들은 추후 한꺼번에 전시될 것이다.
곧 목이 떨어질 놈이 각성능력자의 목청으로 울부짖는 소리는 684의 귀에도 들어갔다. 상황을 물은 684는 이어서 호기심을 드러냈다.
「좀 볼 수 있을까?」
나는 노트북을 틀어 사형수가 카메라에 잡히도록 해주었다. 잠시 후 메리옘이 돼지기름을 바른 칼을 휘둘러 사형수의 목을 쳤다. 담담한 표정으로 후- 숨을 내쉬던 메리옘은, 시선이 마주친 내가 고개를 끄덕여주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684가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사람 목 잘 자르는데……. 당신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데…….」
성인의 경험에 아이 같은 순수와 호의가 뒤섞여 자아내는 자연스러운 잔혹함.
“또 그 소리인가. 다시 말하지만, 너무 조급해하지 마라. 내 일을 도울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많을 테니.”
「응…….」
“아무래도 이만 끊어야겠군.”
「앗, 벌써?」
“이 현장은 거의 다 정리되었으니까. 시간 나면 또 전화하겠다.”
「잠깐. 잠깐만!」
“뭔가?”
「끊기 전에 한 번 더 얼굴을 보여줘.」
“…….”
내가 키워놓은 의존성이니 별 수 없다. 나는 노트북을 돌려 나 자신을 카메라에 비추었다. 입을 꾹 다물고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던 684는, 여러 호흡이 지나고 나서야 집중을 풀고 미련 가득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또 전화해줘.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잘 먹고 잘 쉬어라. 사람은 밥을 잘 먹어야 한다.”
「응!」
나는 통화 연결을 종료했다.
무슬림들이 내가 모르는 언어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이티하드(성전연합) 동아시아 지부 직할 각성능력자 인력들을 소집하여 무장시킨 마무르는, 그들을 이끌고 전장을 누비며 고기방패로 쓰기에 적합한 포로들을 골라냈다. 그러한 포로들은 대부분 본디 이 땅에 있던 무자헤딘이 아닌 지하디스트들-경태의 표현에 따르면 ‘성전박이’들-이었다.
마무르는 저가 장담했던 일을 기대 이상으로 해내고 있었다.
적을 박살내는 것 자체는 사흘로 잡았어도 인력 흡수는 당연히 더 시일이 소요되리라는 게 내 예상이었다. 개중에 전향이 빠른 인원들만 차출해도 중국 방첩기관들에게 던져줄 소모품의 수요는 채울 수 있으리라고.
그러나 교전개시 후 불과 이틀째인 오늘, 실제 전향율과 흡수율은 내 예상치를 크게 웃돌았다.
나는 가축을 고르는 상인처럼 아직 살아있는 포로들 사이를 거니는 마무르를 응시했다.
‘저 새끼, 진짜 이상하게 유능하단 말이지.’
아니. 이상하게 유능하다기보다는 내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있는 영역의 유능함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성싶다. 원리주의 무슬림들의 세상엔 내가 아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법칙이 흐르며, 마무르는 그 법칙에 통달한 달인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단순히, 그 ‘더 개쩌는 지하드’의 유혹이 그만큼 강렬하게 먹히는 것이거나.
이쪽으로 전향하는 인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마무르가 선별한 인원들이 새로 전향을 결심하는 속도도 빨라졌다. 스노우 볼이 구르고 있는 것이다.
국제적 연대를 위해 모인 지하디스트들의 언어는 다양했다.
소통의 근간이 되는 건 꾸란의 언어인 표준 아랍어였으나, 성전에 목숨을 바치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표준 아랍어를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 간혹 끼어있었으므로, 마무르가 하는 모든 말들은 또 다른 성전연합의 전사에 의해 영어로도 통역이 되었다. 아마 필리핀 남부에서 온 것들을 위한 통역일 터였다.
포로들의 뺨을 쳐서 기를 죽이기도 하고,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로 윽박을 지르기도 하고, 경전의 경구들을 섞어 열정적인 선동을 하기도 하고.
조금 전까지는 가축을 다루는 장사치 같던 마무르는, 어느샌가부터 연설가와 군대의 교관을 반반씩 섞어놓은 품새가 되었다. 인상을 휙휙 바꿔대는 모양새는 그 자체로 광기의 일면이라 할 만했다.
내가 다가가자, 마무르는 이번에도 인상을 휙 바꿔 평소의 능글맞은 인간으로 돌아왔다.
“오, 싸장님. 나에게 용무가 있습니까?”
“시간을 아껴야 하니 우리는 먼저 다음 타격지점으로 이동하겠소. 추후 좌표를 통보할 테니, 여기 있는 것들을 마무리하고 따라오도록 하시오.”
“알았어요. 안심하고 선행하시라는 거예요.”
“그럼 수고하시오.”
“아, 참.”
마무르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손가락을 퉁겨 따악 울리는 소리를 냈다.
“잠깐 대기하십시오. 싸장님에게 예전부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하던 전사들이 있다.”
“감사? 내게? 당신네 지부 사람들이?”
“그렇다는 거예요. 나만큼이나 지능이 높은 싸장님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기억하고 계실 것. 당시 싸장님은 나의 권고에 따라 자카트를 베풀어 알라의 총애를 적립하였다. 싸장님 당신은 갸륵한 불신자.”
“…….”
내게 엄지를 척 세워 보인 마무르가 근처에서 서성대며 기웃거리던 성전연합의 전사들을 손짓으로 불러들였다. 그렇게 불려와 내게 감사를 표하는 자들 중엔 아들이 백혈병 환자라는 테미르 사기드라마눌리 아흐멧베코프라는 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렴풋이, 마무르에게 이름을 들었던 기억이 나는 인물.
“내 아들이 살아있는 건 당신 덕분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전사들도 자기 자신이나 가족이나 친인척이 당신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테미르는 눈시울을 붉힌 채 황송해하며 내 손을 맞잡았다.
“그래서 이제 당신의 자비로움 이티하드의 모든 전사들이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나의 영광입니다. 당신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당신을 이 세상에 내려주시고 이 만남을 이끌어주신 하나님께는 찬미를 바칩니다. 신은 위대하십니다. 알라 후 아크바르.”
아버지가 아들을 구해준 자에게 표하는 감사. 내가 여기서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이게 불신자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벌일 수도 있는 극단주의 지하디스트의 감사이기 때문이겠지.
나 역시 사람이라 일반화된 인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고, 테미르의 순박함은 지하디스트에 대한 내 무의식적 차원의 인지와 어긋나있었다.
내가 마무르를 바라보자, 마무르는 다시금 엄지를 세우며 말했다.
“걱정을 중단하십시오, 싸장님의 명성은 보안이 확실해요. 싸장님이 밀수꾼이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는 것 외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이 마무르가 파악한 수준의 행적도 오직 소수의 간부들 사이에서만 공유되었을 뿐.”
일단 베이징에서 테러가 터지고 나면, 아무리 샤히디 그룹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다 한들, 성전의 후원자인 내 명성이 이슬람 세계 전체로 퍼져나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내가 제한적으로 의도하는 바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 전까지는 내 존재감이 수면 위로 드러나선 안 된다.
마무르는 내가 쳐다보는 것만으로 무슨 말을 꺼낼지 짐작하고 바로 대답을 한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유능하긴 유능한데 참 아니꼽게 유능한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