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45화 (345/561)

#37. 금기와 욕망 (7)

한국전쟁 당시 산악지대에서의 고속기동으로 연합군을 엿 먹였던 중공군 경보병들과 같이, 이곳 수마트라 섬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은 험지와 열대우림을 배후지로 삼아 술타나의 라스카르에게 선과 점에 대한 방어를 강요하고 있었다.

테러리스트와 게릴라들은 내키는 대로 치고 빠질 수 있지만, 지킬 것이 많은 방어자는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기가 불가능하다. 이런 식의 소모전을 치르기 싫었던 인도네시아 정규군이 술타나의 군대에게 불리한 역할을 떠넘긴 셈.

그러나 왕국을 되찾고 싶은 골초 꼰대의 입장에선 독이 든 성배라도 사양할 처지가 아니었다. 기회가 아예 주어지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무엇보다, 성배에 든 독에는 술타나 자신이 기여한 지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잠비에 배치된 내 부하들이 눈과 귀가 되어주고, 수연이 자료를 통합하여 추정한 바, 극단주의 꼴통들이 쓰는 무기들 중 일부는 꼰대의 손을 거쳐 잠수정을 통해 실려나간 물량이었다.

“여는 역병처럼 번지는 혼돈을 소망한다.”라고 했던 인간답게, 고귀한 혈통의 꼰대 사업가는 스스로의 손으로 위기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기회를 창조할 토양이 되어줄 위기를.

그리고 술타나의 계획은 한동안 성공을 거두었다.

내부의 배신자가 적과 내통하여 음모를 꾸미지만 않았던들, 술타나는 내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서도 왕위를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배신자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물고 온 자는 다름 아닌 마무르였다.

“싸장님은 나와 성전연합 동아시아 지부의 유능함에 감탄하도록 하십시오.”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에 대해선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이 인간은, 동남아시아 극단주의 무슬림들의 연합전선에 대한 첩보들을 아주 손쉽게 수집해왔다. 그 과정이 너무 빠르고 신속하여 뭘 어떻게 했는지 짐작도 안 가는 수준이었다.

“배신자의 이름은 아궁(Agung). 아궁 알리 아흐메드 파크루딘. 술타나로의 정식 승급을 희망하는 군벌지도자 칸드라 키라나 파크루딘의 하나뿐인 자식이자 아들이다. 이 배신자는 내부의 작전정보를 빼돌리고 아군을 함정으로 몰아넣는 트롤링을 저질렀어요. 심지어 도망치기 직전엔 어머니에 대한 암살을 모의하기까지 하였다. 참으로 몹쓸 자식이 따로 없습니다.”

“대체 왜?”

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술타나가 왕좌를 되찾은 다음이라면 찬탈을 노려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잖소? 제 어머니의 세력을 무너뜨려서 이득을 볼 게 무엇이 있다고?”

“사랑입니다.”

“……사랑?”

“그렇습니다.”

마무르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리석은 아궁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원래 자카르타의 사창가에서 일하던 창녀였다고 한다. 아궁에 비해서는 아홉 살 연상인데,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낙태 경험까지 있는 죄인이었다는 모양이에요.”

어처구니가 없군.

같은 아브라함계인 기독교와 같이, 이슬람에서도 낙태는 살인에 준하는 중죄로 통한다. 잉태 후 120일까지는 태아에게 영혼이 없다고 하여 낙태를 허용하는 교파들도 있으나, 그런 교파들 역시 낙태를 하겠다는 사람을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소문이라고 할지라도, 대중이 그렇게 믿으면 술타나의 새로운 왕국은 시작부터 추문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골초 꼰대가 이를 용납할 리가 있나. 꼰대 입장에선 낙태 경험의 유무를 떠나 매춘부 경력만으로도 기함을 할 일이다.

하지만.

“북부의 무슬림들도 낙태를 죄로 여기는 건 똑같을 텐데? 연인을 위해서 술타나를 피해 그들에게 붙는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수마트라 북부의 무슬림들은 보수성으로 악명 높은 한발리 교파보다도 더 보수적인 인간들이다. 프라이팬이 뜨겁다고 불 속으로 튀어나간 꼴이 아니냐는 내 의문에, 마무르는 대수롭지 않은 답을 내놓았다.

“여자 쪽은 벌써 죽었어요. 사고사라고 하지만, 정황상 그의 어머니가 손을 썼을 확률이 높다. 적어도 아궁 본인은 그렇게 믿고 있는 듯해요.”

“…….”

조금 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라고 과거형으로 이야기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정보를 입수한 방법을 물으니, 마무르는 자기네 성전연합 동아시아 지부의 구성원들 중에서도 수마트라 북부의 무자헤딘들에게 합류한 인원이 꽤 있다고 설명했다.

“말하자면 일종의 이중국적 비슷한 것이에요. 싸장님이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쪽 바닥에서는 매우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절대로 우리 성전연합이 싸장님을 배반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십시오.”

“알고 있소.”

“연합의 일부 혈기 넘치는 형제들이 지금은 일시적으로 지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을지라도, 그들과 중간 연락책들 사이의 관계가 청산된 것은 아닙니다. 전술·전략적으로 민감한 정보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알아볼 수가 있어요.”

예전에도 한번 이슬람 테러조직들의 생리를 곱씹었던 바, 종교적인 충성맹세의 도미노는 이슬람 테러조직들 특유의 급격한 세력 확장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진 초국가적 세력은 자연히 봉건적이고 분권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마무르가 성전연합의 동아시아 지부장이라고 해도, 서로 다른 나라에 흩어져있는 말단 세포(Cell)들까지 일일이 다 통제를 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반대로 말해, 이곳에서의 싸움은 성전연합이 머릿수를 늘리고 통제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줄 수도 있다.

“이제부터 나는 싸장님과 무명회사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를 하려고 해요.”

마무르는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이 땅의 무자헤딘들에게 가세한 용병들은 지하드(성전)를 하겠다고 바다를 건너온 열성적인 믿는 자들이다. 그들을 죽여 없애는 건 싸장님에게 아주 쉬운 일이겠지만, 싸장님에겐 이 마무르가 있으니 더 유익한 방식의 승리를 거두는 것도 가능해요.”

“싸움과 회유를 병행하자는 제안이겠지?”

“호우! 싸장님 당신은 영명한 불신자! 맞습니다. 그들에게 압도적인 힘과 실력의 차이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쪽으로 전향하면 더 개쩌는 지하드를 할 수 있다고 설파해야 합니다. 그러면 싸움을 거듭할 때마다 아군이 늘어나는 은혜로운 기적이 완성될 것이다!”

“자신은 있소?”

“물론이에요.”

마무르는 보란 듯이 턱을 치켜세웠다.

“내가 누구입니까? 알라의 총애를 받는 언어의 천재다. 천재인 내가 열정적으로 구사하는 뜨거운 신앙의 언어는 전사들의 심금을 울리고 그들의 영혼을 맑게 합니다.”

“그러시겠지…….”

“이로써 싸장님과 우리 성전연합은 중공 빨갱이들과의 성전에서 조공으로 소모할 인력을 풍부하게 확보 가능해요. 악독한 무신론자들은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전방위적인 교란 공세에 홀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빨갱이들을 죽입시다. 빨갱이들은 나의 원수.”

이는 내가 마무르를 끌어오면서 기대한 바의 하나이기도 했다. 원래부터 성전연합의 소속이었던 인력들을 소모품으로 쓰자고 하면 반발이 있을 테니까.

“그보다 싸장님.”

안색을 바꾼 마무르가 술타나를 입에 담았다.

“돌아가는 사정을 보니 싸장님은 술타나를 자칭하는 미망인과 우애가 깊은 듯해요. 그렇다면 이 마무르를 그 미망인에게 소개해줄 순 없겠습니까? 나는 그녀를 위한 최고의 남편감이라고 자부한다.”

“……남편감?”

“그렇습니다. 여자에게는 자신을 보호해줄 남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아직 네 번째 아내의 슬롯이 비어있어요. 다른 사내를 거친 미망인이라는 점이 아쉽긴 하나, 생각해보면 예언자 무함마드께서도 유부녀와 미망인들을 좋아하셨다. 내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면 우리의 동맹은 더욱 강고하게 거듭날 것이에요.”

“술탄국의 부활을 꾀할 만큼 야망 넘치는 사람이 겨우 네 번째 아내 자리에 만족할 거라고 보는 거요?”

“그건 상관없습니다. 믿는 자의 아내들은 공평히 사랑을 받고 동일한 권리를 누리며, 또 나의 빛나는 지성과 사내다운 매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기에.”

“자신감이 대단하시군.”

“자신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이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매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요. 왜냐!”

마무르는 다시 한 번 턱을 치켜들며 지껄였다.

“나는 잘생겼습니다. 그리고 고추가 커요.”

나는 이 같잖은 요청을 무시했다. 나를 거치지 않는 연결이 달갑지도 않거니와, 이 인간은 그냥 소개해주는 것만으로도 나에 대한 술타나의 평가를 깎아먹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무슬리마(믿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대해 꽉 막힌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근본주의 광신도는 골초 꼰대 앞에서도 거침없이 헛소리를 내뱉을 터였다.

산맥과 밀림, 그리고 광활한 기름야자 플랜테이션 농장에 웅거한 게릴라들을 소탕하는 건 어려울 게 없는 일이었다. 내가 직접 공중기병 전투단을 끌고 수색격멸을 행하면 잠비 지역(Provinsi) 전체를 한 차례 쓸어내는데 채 하루가 걸리지 않을 터.

그러나 그러기 전에 술타나와 의견을 조율하는 건 필수였다. 사업기반을 안정시키려면 내 활동이 곧 술타나의 공로로 직결되어야 하거니와, 적중에 꼰대의 혈육이 있음을 알았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도 술타나의 속내가 어떠한지 탐색을 해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핏줄은 참으로 부조리한 약점이다.

그것이 개인의 생존능력을 얼마나 저해하는지.

칸드라 키라나와 나는 기름야자 숲 한가운데의 팜유 공장에서 재회했다.

바이오 연료 발전시설과 섬유 가공시설까지 한데 모여 있어 지역 경제에 매우 중요한 장소 중 하나인 이곳은, 내가 발을 디뎠을 땐 가동이 완전히 중지된 상태였다.

공장부지 한쪽엔 녹색 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노동자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아니, 방치하는 선을 넘어 위험물 취급하듯 모두가 거리를 두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울부짖는 가족들은 라스카르 병사들에게 제지당했다. 냄새를 맡은 경태가 눈을 찡그리며 몸서리를 쳤다.

“어우, 저거 그라목손 중독 아닙니까?”

“맞다.”

그라목손(파라콰트)은 기름야자 농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제초제이자,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안겨주는 독극물의 하나였다. 아무래도 극단주의 무자헤딘 놈들이 농약창고를 털어 노동자들에게 먹이기라도 한 모양.

우리를 안내하는 라스카르 장교가 무표정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놈들은 노동자들을 상대로 협박장을 뿌렸습니다. 봉기를 일으켜 시설을 점거하고 자신들의 보호 아래로 들어오라고. 그러지 않으면 알라의 진노를 받아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게 되리라고. 그러더니 공장을 습격해서 노동자들을 사로잡고 음독을 강요한 거지요. 살아서 몸부림치는 경고들을 남겨두고 떠난 겁니다.”

해독제도 없는 독극물에 당한 피해자들은 차라리 그냥 죽여주는 편이 인도적일 터. 그러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선 그렇게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왔는가, 벗이여.”

꺼질 듯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돌아보는 술타나는, 예의 그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물고 조용한 한숨에 연기를 녹여 흘리는 와중이었다.

“반가움을 말하기에 앞서, 환영이 소홀하여 이런 곳에서 맞이함을 사과한다. 주둔지에서의 대접이 부족하진 않았나 모르겠군.”

난 통역이 끝나기를 기다려 적당한 말을 돌려주었다.

“내가 태어난 땅엔 「군왕에겐 부끄러움이 없다(君王無恥).」는 말이 있습니다. 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위하는 것은 그 밖의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하므로, 그 과정에서의 사소한 부끄러움들은 결과로서의 대의에 의해 조각된다는 뜻이지요.”

“그대의 이해에 감사를 표하는 바로다. 그래. 장차 여가 품어야 할 백성들이 도적 떼에게 시달리고 있는데, 시간을 내어 그대를 맞이하러 가기는 어려웠음이야. 잠시 같이 걷도록 하지.”

꼰대는 담뱃대를 쥔 손으로 길을 가리켰다. 길은 기름야자 플랜테이션 농장 속으로 뻗어있는 한 줄기의 비포장도로였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기름야자 숲은 과거의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무의 크기에 상한이 존재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굵기와 높이가 격이 다른 나무들이 곳곳에서 커다란 존재감을 과시했다.

본래대로라면, 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내리는 이 시기는 숲에 불을 지르고 새롭게 식목을 하여 이듬해의 수확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그러나 각성수들의 존재는 농법을 바꿔놓았다.

술타나는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처음엔 그저 불태우고 폭파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느니. 무지와 그 무지가 자아내는 불안의 소치였다고 해야 할 것이야.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되었지.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길이 있다는 사실을.”

계절을 초월해 버찌를 떨구던 조직 사유지의 왕벚나무와 같이, 생장이 빠른 각성수 기름야자들은 닷새나 엿새에 한 번씩 열매를 맺는 화수분들이었다. 수확에 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따르기는 해도, 어떻게든 열매를 걷을 수만 있다면 농장의 생산성이 말도 못 하게 높아지는 것.

각성능력자들의 노동력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요소였다. 그리고 각성수의 가지를 쳐서 열매를 따는 건 각성한 맹수나 인간과 싸우는 것보다는 안전한 일이었다. 자루를 아주 길게 늘인 낫과 끌을 붙잡고 멀찍이 서서 휘두르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하여 그렇잖아도 설 자리를 잃어가던 평범한 이들은 더더욱 일을 구하기 어렵게 되어버렸어. 여는 그들을 구호하며 새로 짓는 공장들로 유도하는 중이지. 각성능력자들의 불과 전기, 그리고 넘쳐흐르는 바이오 연료를 동력으로 삼는 공장들로.”

“새 시대의 산업혁명이군요.”

“왕국의 미래지.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었어. 모든 것이……. 그러나 부활할 왕국의 적이 외부에만 있는 건 아니더군.”

새로이 투자처로서의 매력을 어필한 술타나는, 나를 돌아보며 다시금 미소를 머금었다. 기쁨, 슬픔, 고통, 분노를 한데 다 담아내는 인도네시아 사람의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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