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금기와 욕망 (6)
경로와 신분을 세탁하여 인도네시아로 향하는 비행은 프라이빗 제트를 이용해도 12시간 가까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타격대를 나누어 분산이동 후 집결하는 방식을 택했으므로, 가장 멀리 도는 경로를 타는 그룹은 15시간까지도 소요될 것이었다.
그래도 1만 킬로미터가 넘는 이동거리를 감안하면 별것 아닌 시간소요였다. 금빛 꼰대가 합법적인 활동을 통해 잠비의 실세로 등극했으니, 먼젓번처럼 피곤한 방식으로 격오지의 사업장을 찾아갈 필요도 없다.
탑승자 모두가 각자 편한 대로 휴식을 취하는 조용한 기내에서, 경태는 뒤늦은 아쉬움을 입에 담았다.
“역시 눈알은 따로 뽑아서 보관해둘걸 그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눈알은 당연히 죽은 윤혜원의 눈알을 뜻하는 것이었다. 전자결재문서를 읽던 나는 태블릿으로부터 시선을 떼어 경태를 바라보았다.
“눈알은 왜?”
“포르말린 병에 담아서 누님에게 주었으면, 이후 그날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유리병 속의 눈을 들여다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
아무리 그래도 선물로 눈알은 좀 아니지 않나? 나는 수연이 마지막에 보여주었던 미소를 떠올렸다. 경태의 말처럼 눈알을 따로 빼어두었다면 과유불급이 되었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가까운 자리에 앉은 메리옘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인다. 눈알을 뽑아 선물로 삼느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별 느낌이 없다는 듯이. 하기야 동형동태(同形同態/키사스)의 샤리아 율법에 익숙한 무슬리마에게 안구 적출 정도의 형벌이 대수겠는가.
메리옘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수줍은 듯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산 채로 고목처럼 말라가는 듯했다더니, 회복이 빠르군.’
수연의 지휘통제를 받는 강상전단 소속으로 경계근무·보급호송·위력정찰 등의 실전경험을 착실하게 축적하는 동안, 좀처럼 나를 볼 기회가 없었던 메리옘 그룹의 구성원들은 산 채로 서서히 말라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연이 이런 표현을 사용했으니, 비유적인 표현을 넘어선 사실증언이라고 봐야 할 터.
이번에야말로 나를 시위하게 되었음을 처음 접했을 때, 메리옘 그룹은 종교적인 황홀경 속에서 단체로 감격의 눈물을 쏟아냈다.
이를 두고 경태는 “형님성분을 보충하여 개같이 부활” 운운하는 괴상한 소리를 했다. 나와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모양새가 저가 기르는 개 춘식이를 닮았다는 것이다.
그 김춘식이도 지금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틈틈이 치료를 행하여 불사암으로부터 완치시켜놓은 이 개는, 내가 저의 생명을 연장해주었음을 아는지 명목상의 주인인 경태보다 나를 더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경태는 이를 두고 “과연 너는 이 김경태가 선택한 아쎄이다.”라며 기뻐했다.
비정상적인 이름을 지닌 개에 대한 생각은 684의 이름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름을 뭐라고 지어줘야 하나.’
처음엔 그냥 대충 아무 이름이나 붙여주면 그만이겠거니 했으나, 왠지 모르게 점점 더 신경이 쓰이는 문제였다. 내게서 생명을 얻은 대상에게 이름을 준다는 게 뭔가 꺼려지는 것도 여전했고.
그러나 계속해서 내 의식의 효율을 잡아먹도록 내버려두기보다는, 생각이 미쳤을 때 해결해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나는 큰 기대 없이 경태와 메리옘에게 조언을 구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메리옘이었다.
“생명을 주시는 분(المحيي)께 이름까지 받는다니 참으로 은혜가 넘치는 일입니다. 당신께 닿아 새로운 생명으로 꽃피었으니, 어울리는 의미를 가진 꽃의 이름을 골라 본뜨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경태는 또다시 독특한 정신세계에서 나오는 소리를 내뱉었다.
“음, 저는 사람한테 꽃의 이름을 주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왜?”
“꽃이라는 게 실은 식물의 생식기관이잖습니까? 사람으로 치면 향기로운 거시기 같은 거죠. 그러니 사람을 꽃의 이름으로 부르는 건, 글쎄요……. 개인적으로는 사람을 “거시기야, 거시기야.” 하고 부르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 든단 말이죠.”
“…….”
자주 느끼지만, 요즘 젊은 세대의 사고방식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메리옘 또한 조금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위구르인에게도 문화장벽이 느껴지는 발상인 모양.
반응에 아랑곳 않고 머리를 굴리던 경태가 제안했다.
“다시 태어난 장소의 이름을 따서 스텔라는 어떻습니까?”
“너무 무성의하지 않나?”
“그래도 뜻은 좋은데요. 별이잖습니까. 반짝반짝. 아니면 그 뭐냐, 가톨릭 세례명 중에 스텔라랑 어원이 같은 게 있지 않습니까? 마리스텔라였던가?”
이번에는 메리옘도 경태의 취지에 동의했다.
“은총을 입은 때와 장소를 이름으로 삼음은 귀하신 분의 은혜로움을 마음에 새기는 아름다운 방편이라 사료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라일라(ليلى)라는 이름은 어떠하신지요? 이는 곧 신성한 밤을 의미하오니, 어두운 시간에 당신께 생명을 받은 이에게 어울리는 이름일 것입니다.”
이렇게 조언하는 메리옘은 눈에 띄게 들뜨고 상기되어 있었다. 간만에 내게 조언을 올리는 것, 그리고 사소한 일이나마 내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기쁜 듯한 모습이다.
‘그래도 나쁘진 않군.’
은총이니 은혜로움이니 하는 번잡한 말들을 쳐내고 보면 이름 자체는 느낌이 괜찮았다. 일단 라일라를 이름으로 삼고, 성씨로는 마리스텔라의 한 어근인 마르(מר)를 가져다 붙이면 적당하겠다. 발음을 알파벳으로 옮기기만 하면 스코틀랜드 계 백인들에게도 흔한 성씨(Marr)인즉, 편의를 위한 위장신분 작성에 불편은 없을 터.
라일라 마르. 밤과 바다.
나는 684의 이름에 대한 고민을 일단락 지었다.
“경태야.”
“예, 형님.”
“라즈베리 프로젝트를 접한 녀석들의 경과관찰은 어떠냐?”
라즈베리 프로젝트는 여전히 조직 내에서도 아는 이가 한정된 기밀로 취급되고 있었으되, 그걸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마지막 전장에 투입할 가능성이 있는 전투인력들만큼은 프로젝트의 존재와 내용, 그리고 목적을 숙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라즈베리 프로젝트의 산물을 프로젝트의 원 관계자들만으로 설치하고 관리하고 또 가동하는 일이 가능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계획 운용의 탄력성이 떨어진다. 실전에서는 언제든 대체인력이 예비되어있어야 마땅한 것.
아무리 만약을 대비한 계획이라도 준비가 부족하면 의미가 없다.
처음 계획을 세울 때와 형편이 달라진 부분도 있었다.
‘주술사 왕의 군세가 대거 상륙하고 나면, 한 줌에 불과한 동양인들은 딱히 주의를 끌지 못할 거란 말이지.’
최초 라즈베리 프로젝트를 구상할 당시엔 내게 동맹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녀와의 협동전선이 성립한 지금, 나는 당초보다 넓은 범위의 전력투입을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경태로 하여금 경호실 인력들을 대상으로 라즈베리 프로젝트의 내용을 공유하도록 했다. 지속적인 관찰과 정신교육을 병행하며 단계적으로 진행한 프로젝트 공유는, 아직까지는 별다른 잡음을 자아내지 않고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경호실에 속한 부하들의 충성심과 정신무장이 남다르고, 거기에 경태의 부하 관리가 더해진 덕분이라 해야 할 터.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여전히 별문제 없습니다.”
경태가 춘식이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제가 쭉 면담을 해보니까 말입니다, 원탁의 아기공장이랑 684 아가씨의 예전 몸뚱이가 우리 애들한테 생각 이상으로 큰 영향을 줬더라고요. 원탁을 무너뜨리는 게 저희에게도 좋은 일일 거라는 형님의 말씀을 제대로 실감하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런가.”
“예. 대체로, 라즈베리 프로젝트를 극단적인 상황에 필요한 극단적인 보험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습니다. 마녀 아줌마를 견제할 수단으로서도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요. 뭐, 어느 정도는 제가 그렇게 유도한 것도 있지만요.”
극단적인 시기는 극단적인 조치를 불러온다(Drastic times call for drastic measures)는 경구의 가벼운 변용.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정당화 논리. 이것이 이대로 집단사고를 통해 강화되면 더 이상 불안요소는 없어진다.
집단사고는 개개인의 비판적인 사고를 막아 조직의 내적 건전성을 저해하는 위험한 요소이긴 하나, 강한 독도 잘만 쓰면 약이 되는 법이었다.
경태가 말한 유도가 바로 이것을 뜻했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사용한 케이스부터가 좋았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직 내에서 이 김경태보다 인망이 더 좋은 수연 누님의 원한을 풀어주는 데 쓴 것이잖습니까? 프로젝트의 첫인상이 호의적일 수밖에 없죠.”
“그래도 계속해서 지켜봐라. 혹시 모르는 일이니.”
“옙. 맡겨놓으십시오.”
메리옘 그룹에 대해서는 이런 걱정을 할 이유가 없었다. 내 뜻이 무조건적으로 옳으며, 내 행동엔 오류가 없다고 믿는 광신도들이니까. 비밀을 공유받았다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알고 벅찬 가슴으로 비밀을 지킬 인력들이기도 했다.
앞서 메리옘은 제 감상을 묻는 내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야기했다.
“죄인들은 어차피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을 자들입니다. 입술은 가위로 자르고 등에는 채찍질을 가하며, 물에 빠뜨리는 죽음과 돌로 쳐 죽이는 죽음과 높은 곳에서 던져지는 죽음을 무한히 겪을 예정인 자들이지요. 그 고통의 작은 조각을 조금 앞당겨서 겪도록 해주는 게 무슨 큰일이겠습니까?”
684가 벗어놓은 허물은 정신교육용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교보재였다. 이 교보재를 보고 그에 얽힌 사연을 접한 메리옘 그룹의 구성원들은, 나에 대한 믿음이 더 깊어질 수도 없을 만큼 깊어졌다.
신화적인 괴물과 싸우고 그 안에 갇혀있던 영혼을 구원한 것이 구세주(마흐디)의 행보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고.
계속해서 믿음을 확장해나가며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메리옘이 내 허락을 받아 가르치는 교리에 따르면, 빛과 진리의 원탁은 하나이자 여럿인 거짓 선지자(알-마시 앗-다잘)들이 모여 이룬 악의 권세였다.
그 권세의 보호를 받는 거짓 선지자들의 백성들에게 연민 따위를 품을 리가 있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하고, 전자문서를 결재하고, 눈을 붙여 휴식을 취하며 시간을 보낸 끝에, 프라이빗 제트는 잠비 시내의 술탄 타하 샤이푸딘 공항의 활주로에 착륙했다.
이 공항은 본디 본관으로부터 5백 미터쯤 떨어진 동물원과 시설을 합친다는 계획이 있었던 곳이라 했다. 그러나 마법이 돌아오면서 재정난과 각성체 관리 등의 문제로 확장계획이 무산되어, 공항과 동물원 사이의 공간은 부지 매입이 중단된 상태로 방치되게 되었다.
마중을 나온 크툿 위자야는 이러한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고서 말했다.
“술타나께서는 우선 이곳을 주둔지로 쓰시면 된다고 전하셨습니다. 요청하신 장비들도 미리 마련해두었습니다.”
“술타나께선 어디에 계신가?”
“전하께선 그분의 라스카르와 함께 북쪽의 기름야자 가공공장에 나가 계십니다. 오전까지만 해도 귀한 벗인 당신을 몸소 맞이할 채비를 하고 계셨으나, 그분의 보호를 받는 공장이 아장-아장의 습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우셨지요.”
“아장-아장?”
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북부의 무자헤딘들이 필리핀에서도 용병을 끌어온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바팍 아노니미타스. 이능이 없는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예배 시간의 메스지드(모스크)까지도 공격하는 사악한 자들의 무리입니다.”
아부 사야프 산하의 특공대가 여기까지 진출을 했을 줄이야. 그런 잡것들까지 불려왔을 정도면 수마트라 북부의 적성세력은 동남아시아 극단주의 이슬람 단체들의 다국적 연합군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이것들만 박살내면 이 동네는 한동안 평화를 누릴 것이다.
경태가 말했다.
“전에도 생각했던 건데…… 아장-아장이라는 이름, 테러리스트 특공대의 명칭치고는 어감이 꽤 귀엽지 않습니까? 무슨 뜻일까요?”
이에 크툿 위자야가 공손히 답했다.
“제가 알기로 아장은 술루크 무슬림들의 말로 고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바팍.”
“오.”
경태는 짧은 감탄사를 뱉고서 다시 물었다.
“그럼 아장-아장은 고아-고아가 됩니까? 좀 이상한데?”
“아닙니다. 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것은 그 단어의 의미를 강조하는 용법이지요. 그러니-”
크툿 위자야는 인도네시아 사람에게서 보기 어려운 노골적인 경멸감을 드러냈다.
“아장-아장은 고아들 중의 고아들, 애미 애비가 유별나게 없는 놈들이라는 뜻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