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금기와 욕망 (5)
술타나 칸드라 키라나를 지원하기 위한 타격대를 편성할 때, 수연은 내게 메리옘과 그 동생들을 데리고 가라고 상신했다.
“임무경험을 축적하고 전력화를 진전시키는 건 제 아래에서도 가능한 일입니다만, 그들은 광신도입니다. 전장에서 형님께 직접 지시를 받는 상황을 충분히 경험시켜줄 필요가 있지요.”
여기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이런 면역이 부족한 상태에서 결정적인 싸움에 투입된다면, 메리옘 그룹의 작전능력은 종교적 흥분으로 쉽게 마비되고 말 겁니다. 형님께서 친히 이끄시는 싸움은 궁극의 성전이고, 형님께서 내리시는 지휘명령은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하나가 계시와도 같을 테니까요.”
이는 나 역시 일찍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바. 수연의 조언은 내게 그것을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이런저런 사안들을 복잡하게 처리하다 보면, 시일을 확정지어 놓지 않은 일은 잊고 넘어가기 십상이니. 비서실장의 가장 기본적인 소임이다.
인도네시아로 향하기 전, 나는 수연에게 윤혜원의 죽음을 전해주었다.
원래는 윤혜원에게 더 긴 시간 동안 고통을 준 연후에 선물을 완성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윤혜원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경태 녀석은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을 것을 제안했다.
“형님의 정성이 들어가는 건 물론 좋지만, 너무 많이 들어가면 누님에겐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나 때문에 형님께서 이렇게까지 시간을 허비하셨구나. 이럴 시간을 아껴 잠을 더 주무셨으면 좋았을 걸…….」 하고요.”
가하는 고통 대비 들이는 품을 최소화하긴 했어도, 어쨌든 내 시간을 잡아먹기는 하는 일이다. 수연 녀석을 격려하기 위해서라면 시간을 더 들여도 아깝지 않으나, 경태의 말에 일리가 있었으므로 나는 이 일에 그만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윤혜원은 산 채로 불태워서 죽였다.
불길에 휩싸이기 전, 윤혜원은 내 가명을 부르짖으며 구해달라고 절규했다. 미쳐버린 정신세계 속에선 의외로 내가 희망의 끈이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선창의 어둠을 뚫고 자신을 구하러 오는 환상이라도 꿈꾸었던 것인지.
윤혜원의 숨이 끊어지는 찰나, 나는 흩어지려는 영혼을 뽑아 제례검에 보관했다. 불타버린 시체에선 탄소를 추출하여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빚어냈고, 세공을 거친 다이아몬드에 마법을 새긴 윤혜원의 영혼을 정착시킴으로써 아티팩트를 완성했다. 외관상 아티팩트와 세트를 이루는 장신구들도 추가로 제작했고.
전말을 듣고 기록영상까지 확인한 수연은, 이렇다 할 반응을 내비치지 않은 채 가만히 눈만 깜박였다. 그저 “그랬군요.” 한마디를 입 밖으로 내었을 따름.
정적인 외면과 달리 수연 녀석의 신경계에선 복잡한 색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여러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이루는, 방향성이 불분명한 난류. 이따금씩 긍정적인 쪽으로 해석 가능한 색채가 강한 빛을 발하는 순간들이 있었으되, 길지 않은 명멸은 곧 젖은 길 위에 내린 눈처럼 스르르 녹아 다른 감정들의 복잡한 흐름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평소 수연의 감정을 헤아리기 어렵게 만드는 게 바로 이 복잡성이었다. 단편적인 감정들은 그간 이 녀석을 가까이에 두었던 시간들에 힘입어 구분해낼 수 있으나, 서로 다른 감정의 층위가 중첩될수록 하나하나의 감정들은 해석의 선명도가 낮아진다.
“혹시 내가 괜한 일을 한 건가?”
내 물음에 수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형님께 말씀드렸던 그날 이래, 저는 단 한시도 저와 제 오빠가 당했던 수모를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날의 기억이 사무칠 때마다 저는 윤혜원을 고통스럽게 죽이는 제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지요.”
“그런 것치고 별로 기뻐 보이진 않는구나. 네게 어떤 빚도 지우지 않는, 그저 내가 너를 위하는 마음만으로 행하는 응징이면 네게 좋은 선물이 되리라 여겼다만……. 네 손으로 직접 죽이지 못해 아쉬운 거냐?”
수연은 이 질문에 대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혜원의 죽음 자체는 후련하게 느껴집니다. 오랫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돌 하나가 가벼워진 기분……이라고 해야겠군요. 형님께서 제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셨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합니다. 라즈베리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쓰신 것도 저에 대한 형님의 배려였겠지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윤혜원의 죽음이 과거를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니 가슴을 짓누르던 돌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만 가벼워질 뿐. 심장 깊숙이 새겨지는 상처란 바로 그런 것이다. 나는 그런 녀석들을 숱하게 보아왔고, 또 거두어왔다.
눈을 내리깐 수연은 뜸을 들인 끝에 느리게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윤혜원을 죽이려 하지 않았던 이유는, 사실 형님께 사람의 목숨을 빚지고 싶지 않다는 것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그게 뭐지?”
“오빠의 당부입니다.”
“……수혁이의?”
“예. 오빠가 그랬지요. 잊어버리자고.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잊어버리도록 하자고. 내게는 세상에서 네가 가장 소중한데, 그날의 기억에 대한 집착이 너를 점점 좀먹어 들어가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고.”
“…….”
“오빠는 다시 말했지요. 언제까지고 과거에 사로잡혀 아파하는 건, 저 스스로 혜원이가 저를 계속 괴롭히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잊고, 용서하고, 그 사람보다 더 행복해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복수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고. 너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그만 잊어줄 순 없겠느냐고…….”
여기까지 회고한 수연은 나직한 한숨을 끼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오빠의 부탁이었고, 제가 오빠와 나눈 약속이었지요. 실제로 기억과 원한을 지워 없애기란 불가능했지만, 약속을 지키려는 노력은 언제나 하고 있었습니다. 오빠가 죽은 다음에도, 말입니다.”
나는 못내 난감한 심정을 느꼈다. 죽은 수혁이 이 녀석의 안에서 얼마나 큰 의미로 자리 잡고 있는지를 아는 입장이었으니까.
수연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의 제게는 오빠에게 했던 약속보다 형님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러냐.”
“싱가포르에서도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는 오래전부터 저를 위해 살고 있었노라고. 그 말은, 이젠 형님께서 곧 제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수연은, 나를 조용히 응시하다가, 무슨 생각에선지 두 눈을 감고 긴 호흡으로 스스로를 다스렸다. 미간을 간헐적으로 조금씩 찡그리는 품이, 무언가를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애쓰는 듯한 모습이었다.
“봐주십시오.”
그리고 나는 수연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았다. 층층이 겹쳐 관측을 어렵게 하던 감정의 더께들이 한 꺼풀씩 벗겨져나가는 과정을.
이는 천천히 빠져나가는 썰물과도 같았다. 잔잔한 파도가 몰려왔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백사장과 바다의 경계는 느리지만 착실한 후퇴를 이어나간다.
이로써 수연은 자신을 최대한 읽기 쉽게 만들었다. 마치 내게 보여주고 싶은 감정을 제외한 나머지를 차근차근 정리하고 의식적으로 내려놓으려는 듯이.
비록 이런 노력이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으되, 나는 투명도가 개선된 수연의 내면에서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감정들의 색채를 포착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얼마나 집중을 했는지,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 수연이 지친 느낌으로 긴 날숨을 뱉었다.
“어땠습니까?”
어땠느냐는 질문 뒤엔 조금 자신감 없는 부연이 따라붙었다.
“형님께서 유독 저 하나를 읽기 어려워하시는 듯하여, 때때로 제 가장 깊은 속을 보여드리기 위한 연습을 해보았습니다만…… 그 연습이 의미가 있었는지는 모르겠군요. 저는 제가 황금기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알지 못하니까요.”
사람의 애정은 하나의 분류가 아니다. 친애(親愛), 연애(戀愛), 경애(敬愛)의 구분은 가장 기초적이면서 알기 쉬운 경계 짓기일 뿐.
나는 황금기의 눈이 제공하는 통찰을 극대화하기 위해 심리학자들의 이론을 학습한 바 있다. 애정의 구성성분을 친밀감(Intimacy)과 열정(Passion)과 의무감(Commitment)의 3축으로 나누고, 각각이 차지하는 비율에 따라 애정의 종류 및 특성을 정의하는 이론. 그리고 그 구성성분들을 뇌와 신경계의 화학적 작용으로 계측하는 실증적 이론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이론들은 내게 도움이 되었으나, 한편으로 나는 경험을 통해 그러한 연구들이 내 눈의 해상도를 다 뒷받침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방금 수연이 보여준 내면의 바다는 내 지식과 경험으로 분석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있었다.
종류가 다른 애정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이루는 덩어리는 내가 부하들에게서 쉬이 발견하곤 하는 것. 오히려 보기 힘든 게 단순히 경애 하나만 품고 있는 부하들이다. 나와 접촉이 잦을수록 친애가 흔해지고, 연정의 색채까지 혼입되어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세밀하게 살피면 부모자식 간의 애정에도 녹아있는 게 임계점 이하의 연정이지 않은가. 다만 당사자들이 인지를 하지 못할 따름.
나는 수연의 안에서도 다양한 애정들의 커다란 결합체를 보았다. 크기만으로는 경태조차 감히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벗겨지지 않은 부정적인 감정의 층위에 짓눌려 최후의 투명함을 드러내지 못했다.
혹은, 애정들의 덩어리 자체가 부정적인 감정의 근원인 것 같기도 했고.
“너는 왜 죄악감을 느끼고 있는 거냐? 대체 무엇에 대해서?”
내 물음에 수연은 드물게도 쓴맛이 감도는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제가 그것까지 걷어내진 못했던 모양이군요.”
두 손을 모으고 시선을 끌어내린 채로 망설이던 수연은, 내가 이 녀석에게서 들은 적이 없었던 목소리로 양해를 구했다.
“지금 물어보신 것에 대해선 조금 더 나중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형님의 눈에 그렇게 보인다면, 저는 아직도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준비라니? 아직도, 라는 건 무슨 뜻이고?”
“…….”
수연 녀석은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 침묵했다.
나는 생경한 정적이 불편했다. 선물을 주고 격려로 끝낼 요량이었던 자리가 어쩌다 이런 흐름을 타버렸는지.
이 녀석은 자신을 열어 보인다고 나름 애를 쓴 모양인데, 결과적으로 나는 이 녀석을 이해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어버렸다. 그동안 보여주었던 불투명함의 뿌리를 알게 된 것이 그나마 긍정적이라고 해야 할까.
재차 대답을 요구하는 대신, 나는 준비한 아티팩트와 액세서리 세트를 수연에게 내밀었다.
“받아라. 아까 이야기했던 것들이다. 윤혜원의 소사체(燒死體)에서 탄소를 추출하여 제작했지.”
그리고 나는 중심이 되는 아티팩트의 기능을 설명해주었다. 윤혜원의 영혼을 녹여 부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염동」의 성형(成形)을 도와주는 물건이었다.
케이스를 받아들고 눈을 몇 번 깜박인 수연은, 다이아몬드에 시선을 두고 조용한 음성으로 부탁을 내놓았다.
“괜찮으시다면 목걸이는 형님께서 걸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지.”
청을 받아들인 내가 목걸이를 손에 쥐자, 돌아선 수연이 한 손으로 제 목덜미를 쓸어 올려 자잘한 머리카락들을 정리했다. 이때의 수연은 신뢰하는 상대에게 자신의 급소를 노출시킨 순한 동물과도 같은 느낌을 주었다. 평소의 수연과는 많은 괴리가 있는 느낌을.
달칵.
잠금 고리가 걸리자, 다시 돌아선 수연은 악세서리를 받고 남은 손을 목걸이 위로 올렸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평생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수연의 입가엔 아까와는 다른 색채의, 신기루처럼 희미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가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