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금기와 욕망 (4)
발다싸레는 내 지시를 충실하게 이행했다. 나와 내 부하들은 고성(古城)이 있는 언덕 아래의 외진 1차로에서 시체인형들을 적재한 트럭을 넘겨받았다. 인적이 끊기고 사방이 어두워진 늦은 시간의 일이었다.
본디 나는 일을 다 마친 다음엔 베네벤타노 부자를 죽여 없앨 심산이었다. 살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킬 이유가 어디에 있나.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베네벤타노 가문에 원탁과 인형술사에 관한 사소한 단서들이 남아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하다못해 일기장에 적힌 기록 한 줄이라도. 구성원의 실종에 의문을 품은 기사단(OSML)과 프로파간다 두에가 조사에 착수했다가 그런 기록을 마주하게 되면, 이후의 흐름에서 유의미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런 단서들을 일일이 찾아 없애자니 들어갈 시간과 인력이 아깝다. 왕국 시절부터 세력을 쌓아올린 귀족 가문의 거점이 달랑 저택 하나가 전부겠는가. 발다싸레가 주도하여 창설한 카라비니에리 사바우디까지도 조사범위에 포함시켜야 한다.
발다싸레가 웨스트버튼이 맞이한 운명에 분노나 슬픔을 드러내지 않으니, 살아서 비밀을 간수하도록 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읽어놓은 발다싸레의 욕망을 건드렸다.
“네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이대로 아들과 함께 돌아간 후 평생을 침묵 속에서 살아가는 것. 혹은, 아들을 볼모로 맡겨놓고 새로운 언약을 구하기 위해 힘쓰는 것.”
“새로운 언약이라 하심은…….”
“네가 생각하는 그것이다. 장차 약속의 날에 승천의 계단을 오르고 싶지 않은가?”
만약 침묵 속에서의 삶을 택한다면 그냥 죽여서 시체인형을 만들어줄 요량이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처럼 정황을 꾸며놓으면 변수가 생길 가능성이 줄어들 테니. 있을지 모를 다른 단서들은 원탁이 무너질 때까지만 발견되지 않아도 족하다.
그러나 발다싸레는 내가 예상한 그대로의 갈등을 보여주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내 부하들에게 붙잡혀 끌려나온 피에르는 울먹거리며 애타는 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파파. 제발……. 나를 버리지 마세요…….”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마라, 피에르. 베네벤토 사내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가 너를 버린단 말이냐.”
애써 냉정하게 대꾸한 발다싸레가 옷깃을 여미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불민한 자식입니다만, 그래도 아버지로서 자식의 고통은 달가울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관대하고 자비로운 처우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볼모를 굳이 학대할 이유는 없지. 너는 원할 때마다 네 아들의 무사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 대답은 정해져있습니다.”
발다싸레는 천천히 엎드려 자신의 선택을 드러냈다. 발작을 일으킨 피에르의 울부짖음은 내 부하들에 의해 억제되었다.
“일어서라.”
나는 발다싸레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 과정에서 사용한 「생명」은 나이든 발다싸레의 손을 젊은이의 그것으로 바꿔놓았다. 이상한 감각을 느끼고 자신의 손을 본 발다싸레는 침을 삼키며 조용히 전율했다.
“제가, 제가 어느 분을 모시게 된 것입니까? 당신께서는 어느 분이 보내신 사도이십니까?”
“너는 아직 그것을 알 만큼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았다.”
웨스트버튼이 이미 밑작업을 해놓은 하수인에게, 스승새끼의 기억에 기초한 언행은 매우 효과적으로 먹혀들어갔다. 발다싸레는 내 말의 차가움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조아리며 이렇게 답할 따름이었다.
“원하신다면 언제든 제게 요구하십시오……. 제 모든 헌신은…… 위대한 분을 위해 열려있을 것이며, 저는 제 믿음과 가치를 증명할 기회를…… 언제든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렇게 맹세하는 발다싸레에게, 나는 다만 입을 단속하며 은인자중 기다릴 것을 주문했다. 철없는 네 아들처럼 아무데서나 승천의 계단을 운운하고 다녔다간 영혼을 뜯어내어 불태워버릴 것이라고.
발다싸레는 제 아들을 향해 인상을 찌푸려 보였다.
시체인형들을 이탈리아 밖으로 빼내는 데엔 굳이 내 조직의 밀수역량을 끌어올 것도 없었다. 나폴리 일대의 쓰레기 처리사업을 독점하다시피 한 조직 「카모라」에게 분선밀수를 의뢰한 바, 관짝들은 바다에 쓰레기를 투기하러 나가는 배에 실려 공해상으로 운송되었다.
이탈리아는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해상순찰에 혈안이 된 나라였다. 그러나 이는 그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에 불과했다.
더욱이 해상 공중순찰 사업을 수주한 헌터단체들과 보안회사들 중에도 마피아가 차린 사업체들이 즐비했기에, 해상에서 이루어지는 환적을 위협할 요인은 운반을 맡은 마피아들 자신이 유일했다.
나와 내 애들이 동승하지 않았다면 마피아들은 아마 관짝을 뜯어 내용물을 확인해보았을 것이다. 운송비보다 비싼 화물이 들어있을 경우 안면몰수하고 빼돌릴 작정으로.
마피아 조직원들의 우두머리, 아랫것들로부터 카포(Capo/두목)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자는 빙글빙글 웃으며 우리를 송별했다.
“혹시 키스는 필요 없으신가? 아주 진하게 해드릴 수 있는데.”
카모라에서 남성간의 딥 키스는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하는 신성한 행위다. 그러나 이러한 맹세는 오직 조직의 비밀에 대해서만, 그리고 조직원들 사이에서만 비장하게 이루어지는 것. 손님에게 키스 운운하는 것은 그저 질 나쁜 농담에 지나지 않았다.
부하들로 하여금 잔금을 치르도록 한 나는, 가벼운 도약으로 배를 갈아타고서 저질스러운 뱃놈들에게 건조한 작별을 고했다.
“다들 수고가 많으셨소. 조심히들 돌아가시오.”
“쯧. 재미없는 자들이로군. 나중에 또 이용해주시오!”
카모라 측의 책임자는 혀를 차며 어깨를 으쓱인 후 제 아랫것들에게 뱃머리를 돌리라고 지시했다.
두 선박 사이의 거리가 충분히 멀어졌을 때, 수중에서 따라가던 나는 음파공격을 가하여 카모라 놈들이 탄 배의 선복을 분쇄했다. 처음엔 위력을 조절하여 무전으로 구난 요청을 보낼 여유를 주고, 요청이 전파를 탄 다음엔 강력한 추가공격으로 배를 박살내고 살아있는 인간을 남기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전통 있는 다른 마피아 조직들이 가족적 위계질서가 강한 것과는 달리, 카모라는 무수히 많은 클랜들의 수평적이고 분권적인 연합세력이다. 대가리가 수천 개인 히드라라고 해도 좋겠지.
배에 타고 있던 놈들은 하나의 작은 대가리를 채우는 구성원들이었다. 두목이 듣던 카포라는 호칭이 그 증거다. 의뢰를 완수하고서 귀환하는 길에 구난 신호를 보내도록 했으니, 카모라의 다른 클랜들은 침몰한 배가 수행한 마지막 의뢰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시간을 아껴야 하는 나는 갈아탄 선상에서 관을 열어 웨스트버튼의 술식을 분석했다. 죽은 인형술사가 가장 많이 공을 들인 인형은 역시 제 핏줄을 가지고 만든 인형이었다.
관 속의 인형을 본 경태가 몹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처음부터 보아 알고 있었던 사소한 특이사항 때문이었다.
“형님. 이거, 웨스트버튼의 손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근데 왜 치마를 입고 있죠? 겉보기엔 그냥 예쁘장한 여자앤데요?”
“글쎄다.”
눈앞에 누워있는 인형, 웨스트버튼의 제2순위 계승권자 윌리엄은 웨스트버튼이 어지간히 애지중지했던 핏줄이었다.
웨스트버튼의 집착은 기이한 것이었다. 원탁의 다른 마스터들은 가문에 대한 집착은 있을지언정 혈족 개개인에 대해선 큰 애정이 없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하나의 혈족은 다른 혈족으로 대체될 수 있으며, 혈족의 가치는 직계와 방계의 구분, 재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분, 늙은 것과 어린 것의 구분, 그리고 계승권자와 비계승권자의 구분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는 게 내 스승새끼를 포함한 마스터들의 시각이었다.
그렇기에 웨스트버튼과 다른 마스터들 사이에선 곧잘 언쟁이 벌어지곤 했다. 웨스트버튼이 손주 윌리엄의 노화를 지연시키기 위해 정도 이상으로 인간 제물들을 낭비해댔던 탓이다. 대마법사가 아닌 존재의 생명 연장은 대마법사의 그것에 비해 연비가 나쁘다.
그러한 집착과 낭비의 이유를 묻는 마스터들에게, 웨스트버튼은 버티고 또 버티다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다들 이해해주게. 지금의 이 아이는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네. 이것은 기적에 가까워.」
결국 손자에 대한 애정이 사실은 웨스트버튼 본인에 대한 애정이었다는 말.
다른 마스터들은 당연히 이 답에 만족하지 않았다. 대마법사쯤 되는 인물이 시시한 일에 기적을 운운한 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한 번은 뿔이 난 로더필드가 근거도 없이 “내가 보기엔 우리의 친애하는 웨스트버튼 경이 제 아들에게 계승권을 확정지어 주는 대가로 손자를 상납받은 것 같다. 밤중에 웨스트버튼 경의 방문을 열어보면 아마 손자와 열심히 붙어먹고 있지 않을까?” 운운하는 난언을 떠들고 다니다가 싸움이 일어날 뻔한 적도 있었다.
‘인형의 꼴을 보니 그게 사실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자기 자신에 대한 성욕이라…….’
웨스트버튼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더 이상 손자를 끼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 당시 내 스승새끼를 포함한 다른 대마법사들은 ‘저 친구가 이제야 체면을 알게 되었다.’거나 ‘손자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 정도로 여기고 넘어갔다.
그러나 그때 이미 손자에 대한 인형화를 완료한 상태였다면, 웨스트버튼의 제물 낭비가 현저하게 줄어든 것도 설명이 된다.
인형술사는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훨씬 더 적은 제물과 마력의 소모만으로도 손자를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박제할 수 있는 이상적인 방법을.
내가 인형 윌리엄의 회로를 분석하고 있으려니, 경태가 괴상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왜 그러냐?”
“그림이 좀…… 요상해서 말입니다.”
“그림이 요상하다니?”
“머리로는 형님께서 뭘 하고 계시는지 아는데, 그 뭐냐, 겉보기만으로는 여장한 미소년을 그윽하게 바라보시는 것처럼 보여서요.”
“…….”
“그건 그렇고, 원탁의 마스터들은 왜 이렇게 정신 나간 인간들 투성이랍니까? 로더필드가 혹시 원탁 최고의 상식인이 아니었나 싶어질 지경입니다.”
“……권력자들의 일탈과 궤가 같다고 봐야지.”
인간은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동물이다. 또한 금기에 대한 추구는 자신의 특별함을 확인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기로, 중국의 공산귀족들이 사회적 금기들을 범하며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재확인하는 것과, ‘불완전한 인간들의 한계’를 초월했노라 자부하는 대마법사들이 사회적 규율을 즐겨 어기는 것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단지 그게 전부는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처음부터 확인한 바, 인형 윌리엄에겐 「대장균 합성」을 훨씬 더 진보시킨 술식이 내장되어 있었다. 나는 이 술식이 원탁의 다른 마스터들을 암살하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의심했다.
참관인 자격으로나마 원탁내각에 드나들 권리가 있는 계승권자의 육체. 그리고 그 육체에 심어놓은 모종의 유기체 합성 술식.
내가 라즈베리 프로젝트를 위해 만들어낸 페로몬 대응 술식이 낮은 요구마력과 미시적 작용으로 말미암아 대마법사의 감각으로도 감지하기 어려운 수준인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대량의 미세한 유기물들을 합성해내는 마법은 대마법사들이 알아차리기 어려운 암살수단이 될 수 있었다.
관건은 질병의 위력.
마소가 고갈되었던 마법의 암흑기엔 평범한 역병으로도 대마법사를 죽이는 게 가능했겠으나, 지금은 역병 감염만 가지고선 대마법사의 죽음을 도모하기 어렵다.
마소의 농도가 라즈베리 프로젝트를 처음 구상할 무렵에 머물러있었다면야 한 번쯤 해볼 만한 일이었겠지. 당시는 다른 모든 대마법사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기는커녕 회로 조율에 한창이었을 때이기도 하고.
나만 하더라도 변화한 마소 농도에 맞춰 회로를 조정하는 데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가.
현실이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는 건 흔한 일. 인형 윌리엄이 금고 속에 얌전히 잠들어있었던 이유를 다르게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경태는 인형의 제작목적에 대한 내 추측을 듣고서 물었다.
“오, 뜻하지 않게 새로운 생물병기를 입수할 수도 있겠군요. 그 코드가 어떤 병원균을 생성하는지 확인이 되십니까?”
“아직은.”
“술식을 직접 써보시면 되지 않을까요? 형님이 모르시는 병원균이라도 샘플을 보내서 분석을 의뢰하면 되는 거니까요.”
“그것도 아직은 안 돼.”
문제는 웨스트버튼이 해놓은 마법적인 최적화였다. 인형을 구동하는 기본 술식과 생물학적인 합성의 술식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후자만을 분리해내면 여기저기가 비어있는 불완전한 코드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레이스에게 받은 지혜를 토대로 빈 여백들을 채우는 건 가능하겠으나, 그러자면 마법사로서의 묵상에 시간을 꽤 투자해야 할 것이었다. 다른 술식들의 연구 및 개량과 병행하려면 제법 시일이 소요될 테지.
다만 웨스트버튼의 합성술식이 과거 원탁이 수주했던 생물병기 실험의 직접적인 산물일 경우, 합성으로 만들어질 병원체의 후보군을 좁혀볼 수는 있었다.
‘페스트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페스트라면 이미 라즈베리 프로젝트로 확보해놓은 균종들이 많다. 나 자신을 언제든지 역병의 기수로 만들어줄 힘은 물론 매력적이지만, 페스트보다 강력한 병원균을 손에 넣는다면 더 만족스러울 것이다.
설령 내가 라즈베리 프로젝트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동하지 않는다 쳐도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는다. 치사율이 높고 발현이 빠른 질병을 손에 넣으면, 대마법사간의 전투가 장시간의 추격전으로 비화할 경우 쓸 만한 카드가 되어주지 않겠는가. 또한 숙주를 빠르게 죽이는 병원균은 그만큼 전파능력이 떨어지니, 페스트처럼 전염성이 높은 것보다 훨씬 더 부담 없이 써먹을 수 있다.
강력한 질병은 대마법사가 쓰는 「생명」의 효율을 저해할 수단이 된다. 나처럼 황금기의 눈을 가지고 병원균에 대한 인지능력과 지식, 그리고 대응 요령을 축적해왔다면 모를까, 다른 대마법사들로선 단시간에 병을 완치시키기가 어려울 게 뻔하다. 「생명」과 생체강화로 증상을 없애는 건 쉬울지라도.
나로선 딱 그 정도의 부담을 줄 수만 있어도 족하다. 로더필드와 치렀던 싸움이 증명하듯이, 작은 소모라도 꾸준히 누적시키면 결국은 결정적인 우위가 완성되는 법.
같은 대마법사를 죽이는 것은 원탁 최대의 금기다. 나는 금기를 범하고자 한 웨스트버튼의 욕망이 아주 강력했기를 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