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41화 (341/561)

#37. 금기와 욕망 (3)

발다싸레는 내 지시에 따라 저택을 빠져나왔다. 전화를 끊지 않고 차량에 탑승하는 과정에서, 발다싸레가 제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에게 조용한 수신호를 보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택을 지키던 각성능력자들은 지하의 비밀통로를 통해 인근의 농장으로 나온 후, 안쪽에 방탄판을 덧댄 차량들을 타고 그들의 가주를 은밀하게 뒤따랐다.

비상연락망은 시내에도 깔려있었다. 나는 체내에 아드레날린의 색채가 감도는 무장인원들이 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한 것을 확인했다. 수화기를 막고 이 움직임들을 알려주자, 경태는 지도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에 따른 대응계획을 잘 짜놓은 놈들이군요. 오래된 비밀결사답다고 해야 할까요?”

비밀결사 프로파간다 두에의 공식적인 역사는 채 한 세기가 되지 않았으나, 결사의 탄생에 양분을 제공한 기사단(OSML)의 역사는 이탈리아 왕국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왕파 장교들과 첩보기관 책임자들까지 가담한 비밀결사는 탄생의 순간부터 충실한 군사전통을 보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발다싸레를 성당으로 불러냈다. 트라야누스 개선문과 고대의 원형극장 사이에 끼어있는 주교좌 성당으로.

그러고는 시간에 맞춰 베네벤토로 이동한 후, 부하 한 명에게 계좌카드와 피에르의 손가락 하나를 주어 성당으로 보냈다.

예배석에 앉아 나를 기다리던 발다싸레는, 내 부하로부터 아들의 손가락을 받아들고 이를 꽉 깨물었다. 담을 용기를 따로 구하거나 만들기가 귀찮아, 비닐로 둘둘 말아서 대충 빵집 종이봉투에 담아 보낸 손가락. 이 손가락엔 일찍이 내 주의를 끌었던 예의 그 황금 인장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는 말투를 바꿔 서늘한 말을 건넸다.

“꼬리가 너무 많아. 내가 분명히 혼자 나오라고 하지 않았던가?”

「혼자서 나온 거요!」

“재미없는 농담이로군. 저택에서부터 따라온 방탄차량이 석 대에, 무장한 각성능력자가 열아홉인데. 주변에 깔린 동네 양아치들의 숫자도 상당하고. 이들이 당신과 정말로 무관한가?”

「…….」

“나는 시간 낭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미안, 하오.」

발다싸레가 감정을 꾹 억누르며 하는 사과. 이놈에게는 아마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눈을 피해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외부인은 없으리라는 확신이.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과를 받아들이지. 옆에 있는 내 부하에게 다음 물건을 달라고 해.”

「다음 물건? 설마-」

“걱정 마라. 이번엔 네 아들의 일부가 아니니까.”

「알겠소…….」

나란히 앉은 내 부하에게서 계좌카드를 건네받은 발다싸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카드의 번호를 확인했다. 잠시 후, 발다싸레의 눈이 찢어질 듯 확대된다. 아들은 카드의 형식만을 알아보았으되, 아버지는 제 주인의 소유인 카드의 번호까지 암기하고 있었던 모양.

「맙소사. 이건……!」

“알아보겠나?”

「당신 대체 누구야! 이걸 어떻게 손에 넣었지?!」

“목소리를 낮추고 예의를 갖춰라.”

발다싸레의 동요는 극심했다. 죽은 줄로 알고 있었을 아들과 화상으로 대면했을 때도, 조금 전 그 아들의 잘린 손가락을 전달받았을 때도 이 정도로 크게 흔들리진 않았었다.

사실 처음엔 인형술사의 대리인을 가장하여 접근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사전에 정해놓은 암호 따위가 있다면 금세 들통이 날 터. 발다싸레가 모르는 척 엉뚱한 곳으로 이끌어 비밀결사와 기사단의 비상대응체계를 가동시키면, 그땐 군경을 상대로 대마법사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싸워야 할 공산이 컸다.

‘혹은 웨스트버튼이 남겨놓은 별도의 안배가 있을지도 모르지.’

애써 원탁 바깥에 비밀을 간직할 장소를 만들어놓고, 그 보안을 순전히 추종자의 역량에만 기댄다는 건 지나치게 허술한 일처리다. 실제로 그렇게 허술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지라도.

내가 공연히 지금처럼 일을 처리하는 게 아니다.

「혹시-」

발다싸레가 힘겨운 표정으로 허덕이듯 물었다.

「당신께서는 빛과 진리의 원탁에서 나오신 분이십니까? 저의 주인 되시는 분께선 어떻게 되셨습니까?」

“내가 언제 너에게 질문을 허락했지?”

「…….」

“너는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이에 발다싸레는 고개를 돌려 내 부하를 뜯어보았다. 처음에 이미 면밀히 보았으되, 지금은 원탁의 하수인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살피는 것이라 아까보다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발다싸레의 얼굴엔 곧 혼란스러워하는 감정이 떠올랐다. 요즘의 원탁은 황인종도 하수인으로 거두는가 싶겠지.

「이 카드와 연결된 금고로 안내해드리기를 바라십니까?」

“그래.”

「……안내를 해드리면, 저와 제 아들은 죽이지 않으실 겁니까?」

“물론.”

「이대로 옆에 있는 이 사람을 데리고 이동하면 되는지요?」

“그냥 너 혼자만 움직이면 된다. 나는 알아서 따라갈 테니.”

「가는 도중에 통화권 이탈지대가 끼어있을 텐데 괜찮겠습니까? 그리고, 은행 직원들은 처음부터 동행하지 않은 사람의 출입을 가로막을 겁니다.」

“상관없어.”

「저는 금고를 여는 방법을 모릅니다만-」

“그것도 상관없다. 전화는 이만 끊도록 하지. 필요할 때 다시 걸겠다.”

「……알겠습니다.」

발다싸레는 혼란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통화권 이탈지대 운운하는 것으로 미루어 비밀금고는 제법 먼 곳에 숨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정말로 혼자서 움직이는 발다싸레는 가까운 소도시인 몬테사르키오로 이동, 「친구들의 은행」 지점으로 들어가 창구에 계좌카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경태는 내 앞으로 빵을 들이밀었다.

“형님. 이것 좀 드십시오. 진짜 맛있습니다.”

경태가 우물거리는 빵은 베네벤토의 제과점에서 사온 것이었다.

작전지역 사전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두 세기에 걸쳐 장사를 했다는 가게의 존재를 확인한 경태는, 선행하여 별장에 있던 부하들로 하여금 내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해당 업소의 모든 상품을 종류별로 사놓도록 지시해놓았다.

‘확실히 맛은 좋군.’

2백 년의 역사가 장식은 아닌지, 아니면 내가 단 것을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인지, 다양한 종류의 빵들은 하나같이 내 입맛에 잘 맞았다.

발다싸레를 태운 위장 현금수송차량은 좌우로 포도밭과 양조장이 즐비한 길을 따라 북상했다. 트랙터가 많이 돌아다니는 구불구불한 2차선로에선 속도를 많이 내기 어려웠으므로, 우리는 때때로 다른 길을 타면서도 여유로운 미행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내가 우유와 함께 두 봉지의 빵을 먹어치울 즈음, 현금수송차량은 몬테사르카오로부터 약 15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산기슭으로 진입했다.

산중의 도로는 차량 한 대가 간신히 지날 만한 너비였다. 각성수들의 마력장이 시야를 교란했으므로, 우리는 아주 길게 잡았던 추적의 간격을 2백 미터까지 축소했다.

15분 가량이 더 흘렀을 때, 친구은행의 차량은 산중에 외따로이 자리한 예배당에 도달했다. 뭉툭한 종탑과 자그마한 건물. 주변엔 바스러진 그루터기들이 많이 보였다. 각성수들의 침식을 저지하고자 노력한 흔적들일 것이었다.

진입로가 외길이었기에 우리가 차를 타고서 들키지 않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은행의 직원들은 고객과 예배당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등을 돌려 사주경계에 돌입했다. 고객이 안에서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마 고객으로부터 인출을 요구받기 전까진 그대로 경계에만 임하겠지.

경태가 물었다.

“금고가 보이십니까?”

“보인다.”

“뭐가 들어있습니까?”

“인형들.”

“어, 시체인형들이요?”

“그래.”

“뭔가 특별한 구석이 있습니까?”

“글쎄.”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 재료로 쓴 시체부터 특별한 게 하나 보이는구나.”

“시체가 특별하다뇨……?”

“스승새끼의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다. 웨스트버튼 그놈이 저가 가장 아끼던 손자를 가지고 인형을 빚어놨어. 발언권은 없을지라도, 원탁내각에 출입할 자격을 가진 계승권자였는데.”

“와우.”

경태가 가벼운 감탄사를 흘렸다. 나는 경태에게 지시했다.

“여기서 기다려라. 잠시 들어갔다 나오마.”

“조심하십시오.”

몇 명 안 되는 은행 직원들의 감시는 완벽할 수가 없었다. 염동력을 활용한 비행으로 조용히 솟구친 나는, 곡률이 큰 탄도비행으로 예배당 담장 안에 내려섰다. 사각지대를 노린 비행엔 채 1초가 걸리지 않았다.

“비켜라.”

두꺼운 금고 문 앞에서 핸드폰을 들고 서성이던 발다싸레가 내 목소리를 듣고는 소스라치게 돌라 뒤를 돌아본다. 귀신과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창백한 안색. 나는 나를 보는 두려운 시선을 무시하고 금고로 다가섰다.

당연하게도 금고의 잠금장치엔 마법이 걸려있었다. 웨스트버튼의 인장반지에 내장된 마법적 비대칭 열쇠의 기능은 여기서 첫 번째 효용을 발휘했다.

반지를 본 발다싸레가 숨을 삼켰다.

“그 반지는……!”

“조용히.”

금고에 걸린 마법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반지를 끼운 손으로 마력을 운용하며 허공에 대고 몇 개의 획을 연속으로 그었다. 통상시야로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되, 잠금장치를 고정시켜놓은 마법은 작동이 중단되었다.

금고를 그냥 부숴버리거나, 혹은 강제로 마법을 깨버렸을 경우 금고 안에 들어있는 전투인형들이 신호를 받아 깨어나게끔 되어있는 구조였다.

끼리리리릭-

염동력으로 핸들을 돌리고 문을 당기자 마침내 금고 속의 공기가 바깥으로 흘러나온다. 이 공기 자체가 금고에 걸린 마법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보안장치였으므로, 나는 강한 마력을 투사하여 오염된 공기 속 모든 유기물을 무해한 형태로 파괴해버렸다.

‘그 마법이 원래 인형술사의 연구였나?’

그레이스가 내게 알려준 「생명」의 응용술식 「부패」는, 황금기의 눈으로 작용과정을 살펴본 바 「부패」보다는 「대장균 합성」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마법이었다. 표적을 구성하는 유기성분을 재료로 써서 대장균을 합성해내는 마법. 부패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하고, 그 양상도 일반적인 부패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 금고, 그리고 관에 들어있는 시체인형들은 「대장균 합성」과 유사한, 그러나 보다 복잡하고 진보된 마법의 코드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레이스로부터 공유받은 지혜가 없었다면 기능과 원리를 파악하는 데 다소 시간을 들여야 했을 터.

참으로 공교롭기도 하지.

라즈베리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전라남도 신안의 섬에서와 같이, 나는 과거 원탁이 영국정부의 의뢰를 받아 진행했던 생물병기 연구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떠올렸다. 원탁의 실험에 중대한 오류가 발생했던 것은, 누군가가 연구결과를 독점하고자 실험과정에 은밀히 사보타주를 가한 탓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어쩌면 나는 지금 그 의문의 답을 눈앞에 둔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스스로 마법적인 힘을 지닌 병원균을 빚어내는 데엔 실패했을지라도, 연구의 예기치 못한 부산물로서 특정 병원균을 마법적으로 합성해내는 기술이 튀어나왔던 게 아닐까?

당시의 연구에서 실험을 위해 사용된 주요 세균들 중 하나가 바로 대장균이었다.

“발다싸레. 내가 나가고 나면, 은행 직원들에게 말해 여기 있는 모든 관을 꺼내어 가라.”

“관……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관. 네 주인이 이 금고의 내용물을 알려주지 않았던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시체들이 들어있는 각각의 긴 상자들은, 사실 단순한 관이라기보다 인형들의 거짓 생명을 길게 유지하기 위한 특수 보관장치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내용물이 내용물인 만큼 관이라고 불러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어서 지시했다.

“네 아랫것들에게 연락하여 은행 앞에 미리 트럭을 한 대 대기시켜놔. 은행의 수송차량이 돌아가면 곧바로 짐을 옮겨 실을 수 있게끔. 그러고 나면 트럭을 어디에 대어놔야 할지 알려주겠다. 이해했나?”

“예……. 이해했습니다.”

“좋아.”

내가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자 발다싸레의 눈에 읽기 쉬운 갈증이 스쳐 지나간다.

조직의 수장으로서, 나는 내 호의를 갈구하는 자들의 신경신호를 아주 많이 보아왔다.

그래. 동반승천을 약속한 원래의 주인이 유명을 달리했다면, 이젠 새로운 동아줄을 붙잡아야 할 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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