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40화 (340/561)

#37. 금기와 욕망 (2)

피에르프란체스코 베네벤타노는 그동안 줄곧 감금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내 부하들이 심문을 시도해보긴 했으되, 제 가문과 인형술사의 관계에 대해선 딱히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만 밝혀냈을 따름. 가벼운 행실만큼이나 알맹이도 가벼운 인간이었다 하겠다.

다만 인형술사가 죽을 때 가지고 있었던 프라이빗 뱅크의 계좌 카드에 대해서는 단서를 하나 얻긴 했다. 바로 카드를 발급한 은행의 정체와 소재.

이전까지는 카드의 형식만 보고서 어느 프라이빗 뱅크의 계좌 카드이겠거니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은행의 소재를 알게 된 것은 나름 진전이라 할 만했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간판도 없이 영업해왔다는 그 음지의 은행을, 피에르는 「친구들의 은행(방카 디 아미치)」이라 불렀다.

이탈리아 범죄조직들의 강한 연고주의는 그 자체가 하나의 보안장벽으로 기능한다. 요컨대 내가 계좌카드를 가지고 은행을 방문하더라도, ‘친구’가 아닌 낯선 이에게 비밀금고를 열어주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는 뜻. 정치인들과 대부호들, 그리고 마피아의 검은돈을 보관하는 은행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보안이었다.

이런 종류의 은행들은 무작정 쳐들어가 털어버리기도 곤란하다. 금고를 연고지 곳곳에 분산시켜놓으니까. 불특정다수의 주민들이 혈연과 지연과 우정으로 마피아와 엮여있는 지역에서, 외부인들은 누가 자신을 감시하는 ‘친구들’인지 분간해내기조차 어렵다.

‘적어도 단시간에 조용히 들어갔다 나오기는 무리지.’

재수 없으면 내가 찾는 인형술사의 비밀금고는 도시로부터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산중의 옛 수도원이나 고성(古城), 또는 농장 지하에 처박혀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금고들의 은닉처엔 당연히 무장 경비들이 배치되어 있을 터. 이들로부터 정시 연락이 끊어지면, 전직 총리까지 엮여있는 비밀결사 「프로파간다 두에」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자칫 이탈리아 경찰의 기동대나 국가헌병대까지 몰려오는 수가 있었다.

그다음은 당연히 정규군의 차례겠지.

금고를 여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또 금고 안쪽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이상 현장에서의 예상 소요시간은 최대한 길게 잡아놓는 게 맞았다.

보고를 받고서 녹취를 들어본 바, 피에르는 이렇게 진술했다.

「은행 창구에서 근무하는 친구들은…… 우욱…… 외부에 있는 비밀금고들의 위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친구나 친구의 보증인을 확인하고…… 얼굴도 모르는 간부들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지요……. 이 번호에 해당하는 금고를 찾는 사람이 있다고……. 번호의 구간에 따라 담당하는 간부가 다 다릅니다…….」

그렇게 전화를 건 다음엔 은행 앞으로 고객을 모셔갈 픽업 서비스가 도착한다. 평소 현금수송차량을 겸하는 방탄트럭의 짐칸에 몸을 싣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금고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내게 성 모리스와 라자러스의 기사단이나 프로파간다 두에를 잡아먹겠다는 욕심은 없다. 그건 선택과 집중에 어긋나는 일. 욕심을 부렸다간 소화불량에 걸려 시일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본말전도 그 자체라 하겠다.

그러나 금고의 내용물에는 관심이 있었다. 인형술사는 원탁 바깥의 금고에 과연 무엇을 넣어두었을까. 좋은 거면 나 홀로 독점하고,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라도 당초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레이스와의 신뢰관계를 제고할 수단으로 써먹을 수 있겠지.

베네벤타노 가문의 근거지인 베네벤토는 나폴리에서 가까운 곳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스텔라 포르투나를 무장여객선으로 개장한 핀칸티에리 사(社)의 조선소가 바로 나폴리 광역권에 속한 카스텔람마레 디 스타비아에 위치해있었다. 베수비오 화산과 폼페이 유적을 사이에 두고 나폴리와 연속성을 이루는 위성도시에.

고로 나는 귀찮게 밀입국을 하거나 새로운 위장신분으로 번거로운 출입국 동선들을 만들어 내거나 할 필요 없이, 공능법인 개마의 안호준 부사장이라는 껍데기를 그대로 쓰고서 이탈리아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링가에서 탈출한 평화유지군 그룹이 린디에 도달한 후 이틀이 경과한 다음의 일이었다.

“사업상의 이유로 오셨다고요?”

각성능력자를 전담하는 출입국심사관은 정중한 태도로 입국목적을 물었다.

“예. 핀칸티에리 카스텔람마레에 들러 선박의 안전점검과 추가적인 개장에 대해 상담을 해보려고 합니다. 담당자와 만날 약속이 잡혀있지요. 혹시 그분의 연락처가 필요하십니까?”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그보다 얼마나 체류하실 예정이십니까?”

“글쎄요. 기왕 온 김에 관광을 하며 좀 쉬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그래도 아마 일주일은 넘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주일이라……. 신용등급이 원체 높으시니, 기본적인 숙박신고 의무만 준수하신다면 체류기간이 더 길어져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이탈리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선생님(Signore).”

“감사합니다.”

나는 출입국심사관으로부터 각성능력자 증서와 여권을 돌려받았다.

입국심사가 이토록 간단히 끝난 것은 국가 간 각성능력자 이동에 관한 제도적 합의가 충분히 성숙할 만큼 시간이 흐른 덕분이며, 또한 헌터 집단들과 헌터 개개인의 활동이력이 유의미한 신용평가가 가능할 정도로 누적된 덕분이기도 했다.

스탠더드 앤 푸어스, 무디스, 피치 그룹 등 국가와 기업의 신용을 평가하던 신용등급기관들은 이른바 「수렵기업」으로 분류되는 헌터 집단들과 주요 구성원들에 대해서도 나름의 평가 기준을 마련했다. 그들의 입장에선 새로운 사업영역을 개척한 셈이다.

조직 산하 공능법인들의 신용등급은 최하가 AA+ 이상이었고, GHSS 컨소시엄의 대표업체인 개마는 최상위인 AAA에 해당했다. 개마의 부사장인 안호준의 신용등급 역시 AAA이긴 마찬가지. 여기엔 소속국가의 신용도 또한 반영되어 있다.

신용등급이 높은 각성능력자는 어디를 가든 제도적인 편의를 누릴 수 있었다. 숙박신고만 하면 된다는 건 사실상 평범한 관광객과 동일한 취급.

피에르프란체스코는 내 부하들에 의해 나보다 먼저 베네벤토 교외의 임대별장으로 배송된 상태였다. 「생명」으로 안면근육을 부풀리고 뒤틀어 이목구비를 바꾸고, 신경을 끊어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반신불수 장애인으로 만든 후, 신경이 손상된 부위에 흉터를 새김으로써 전상을 입은 헌터로 꾸며 비행기를 태운 것이다.

GHSS 컨소시엄의 입지와 신용등급은 여기서도 쓸모가 많았다. 컨소시엄이 인도적인 차원의 의료협조를 요청하자, 국제 어쩌고 하는 이름을 단 협회들이 앞다퉈 손을 내밀어왔던 것.

각성능력자를 위한 의무후송은 민간 영역에서도 아주 많은 협력체들이 존재한다. 피에르는 처음 입원한 병원에서 실제와 다른 신분으로 회복불가판정을 받았고, 이후 다른 시설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행적이 세탁되었다.

나는 마중을 나온 부하들과 합류하여 피에르를 가둬놓은 별장으로 향했다.

‘지저분하군.’

나폴리는 눈 돌리는 곳마다 궁핍함이 묻어나는 쇠락한 도시였다. 번화가를 한 꺼풀만 벗겨내면 여기저기 그래피티가 그려진 낡은 주택가가 자리하고 있고, 노변의 쓰레기통들은 쓰레기더미에 완전히 파묻혀 기능을 상실했다.

쓰레기 처리 업무를 마피아의 사업체들이 수주하는 도시는 과거에도 청결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되, 오랜만에 본 나폴리는 지난날보다 훨씬 더 더러운 곳이 되어있었다.

별장까지는 대략 한 시간쯤 걸리는 길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피에르는 어두컴컴한 독실에서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잠은 절망에 빠져 무기력해진 인간이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시신경이 끊어진 상태였으므로 불을 켜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복면을 쓴 경태가 피에르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형님. 이 새끼 웃는데요?”

“깨워.”

어디 내 앞에서 좋은 꿈을 꾸고 있나.

경태가 침대를 걷어차자 피에르는 허억-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깨어났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슬픔으로 일그러진다. 밝은 세상으로부터 한 점의 빛도 없는 무저갱으로 단숨에 굴러떨어진 기분이 아닐는지.

발다싸레에게 영상통화로 아들의 무사함을 확인시켜주자면 우선 피에르를 정상적인 몸으로 만들어주어야 한다. 만약 발다싸레가 예상보다 냉혹한 인물일 경우, 다중 장애를 얻은 아들이 후계자로서 무가치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으니까.

반대로, 이 지역의 보편적인 정서와 같이, 발다싸레가 가정을 꾸린 자식조차 몸만 커다란 아기(Bamboccione)처럼 아끼는 아버지라면 일이 많이 편해질 것이다.

“아? 아아아아아-!”

시각과 청각, 발화능력을 순서대로 회복시켜주자, 피에르는 눈을 크게 뜨고 거친 숨을 쉬며 잔뜩 상기된 얼굴로 소리를 질러댔다.

“빛이 보인다! 소리가 들린다! 세상이%#@$!”

외치는 말이 제 모국어였으므로 스페인어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말뜻을 완전히 알아듣기 어려웠다. 경태가 피에르의 뒤통수를 빡 소리 나게 후려쳤다.

“어이, 형씨. 상황파악이 안 되시나? 영어로 말씀을 하셔야지.”

“크억-”

피에르가 젖은 눈을 깜박거린다. 글썽거리는 눈물은 아파서가 아니라 너무 오랜만에 빛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었다. 지금도 시야가 선명하지는 않을 테지. 상황파악이 느린 게 당연한 일이었다.

피에르는 곧 주변에 서있는 사람들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반신에 감각이 돌아왔을지언정 손발은 여전히 구속된 상태임도 깨닫는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가빠지기 시작하는 호흡. 눈에도 새로운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마지막으로 피에르의 안면을 붙잡고 마력장을 억눌러 얼굴의 형태를 원상태로 되돌렸다.

“끄아악!”

변형되고 뒤틀려있던 근육들이 우득우득 원상태와 원위치를 회복한다. 일부러 더 아프라고 거칠게 힘을 썼으므로, 피에르의 낯짝에선 그나마 남아있던 환희의 여운도 싹 지워졌다. 영상통화를 시켜주기에 적절한 상태가 된 것이다.

이곳 별장은 황금기의 눈으로 베네벤타노 가문의 저택을 감제할 수 있는 위치였다. 나는 피에르로부터 알아낸 제 아버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작은 액정에 발다싸레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얼굴을 가린 나를 보고 눈을 찌푸리더니 경계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Chi sei? Come fai a sapere questo numero di telefono?」

나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우리 영어로 대화합시다, 베네벤타노 씨. 이쪽 말은 알아듣기 어려우니.”

발다싸레의 주름이 조금 더 깊어졌다.

「당신은 누구요? 누군데 이 번호를 알고 있는 거지? 내 이름을 아는 걸 보니 잘못 건 전화는 아닌 듯한데.」

여느 비밀스러운 사업가들과 같이, 발다싸레는 복수의 휴대전화를 소지하고 있었다. 내가 전화를 건 번호는 가까운 사람들과의 연락을 위해 사용하는 쪽의 것.

나는 저택 거실에 자리한 대지휘관 발다싸레를 특정해냈다.

‘시작은 좋군.’

사전에 피에르를 심문한 결과를 토대로 발다싸레가 집에 있을 법한 요일과 시간을 골라 타임 테이블을 짠 것이긴 하나, 예상이 빗나갔다면 목표가 내 시야에 들어오게 유도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을 낭비하게 되었을 터.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거라면 이만 끊겠소.」

이렇게 채근해오는 발다싸레는 안색이 꽤나 초췌했다. 메시아로부터 연락이 끊어진 추종자이자 아들의 실종을 겪은 아버지의 얼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대의 아들을 데리고 있는 자요.”

「……뭐라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자제분과 짧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드리도록 하지. 단, 모든 대화는 영어로 나누셔야 하오. 내가 알아듣지 못할 말이 한 마디씩 튀어나올 때마다 자제분의 손가락을 한 마디씩 잘라드리리다.”

제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소리에 피에르가 움찔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피에르에게 침묵을 강요하던 부하들이 좌우로 한 발씩 물러선다. 피에르는 액정에 뜬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파파! 파파!”

「피에르? 정말로 피에르냐? 오, 신이시여. 네가 살아있었다니…….」

“파파! 구해주세요! 나 너무 무서워요!”

가까이에서 듣고 있던 경태가 으- 하고 살짝 몸서리를 쳤다. 아내와 자식을 둔 다 큰 성인이 혀 짧은 소리로 파파, 파파 하는 꼴을 보기 괴로웠던 모양.

지금의 피에르에게선 상류층 흉내를 내는 자들에게 경멸을 표할 때의 품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를 보는 순간, 그간 누적된 정신적인 부하가 정신적인 퇴행으로 터져 나오기라도 한 것인지.

그에 반해 발다싸레의 반응은 제법 절제된 것이었다. 아들이 살아있다는 데에 안도감을 드러내면서도, 감정에 완전히 휩쓸리지는 않는 느낌. 아들을 진정시키면서 사소한 정보라도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대화를 끌어가려 한다.

나는 피에르의 입에서 유의미한 정보가 나오기 전에 폰을 거두어, 영상통화를 음성통화로 전환했다.

“전화상에서의 해후는 그쯤 해두고, 이제 자제분의 무사귀환을 전제로 우호적인 대화를 나눠봅시다.”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노려보던 발다싸레는 곧 낮고 답답하게 짓눌린 목소리를 내었다.

「내게 바라는 게 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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