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금기와 욕망 (1)
684의 몸에는 331의 문신이 남아있었다. 새까만 역십자가와 흉물스러운 역칠망성. 역순으로 새겨진 신격 72문자. 그리고 열두 장의 날개 사이에 적힌 로마숫자 331.
일찍이 596에게서 보았던 것과 형태가 동일한 이 문신은 그레이스의 모든 딸들에게 공통적으로 새겨지는 것이라 했다. 미인계를 맡는 일부 예외적인 복제체들을 제외하고.
684는 그레이스가 찍어놓은 낙인과도 같은 이 문신을 지우고 싶어 했으나, 그와 별개로 331의 흔적이 다 사라지는 건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684는 내게 도움을 청했다. 아예 다 지워버릴 거라면 목덜미와 어깻죽지 아래에서부터 꼬리뼈 부근에 이르는 피부를 「생명」으로 전부 갈아버리면 그만인데, 일부를 남겨두자면 눈으로 보면서 시술을 해야 하니까. 문신의 밀도가 높아, 거울에 의지하여 스스로 손을 쓰면 실수를 하기 십상이었다.
684는 내게 등을 향한 채로 말했다.
“번호는 남겨두었으면 좋겠어.”
황금기의 눈이 있으니 굳이 옷을 걷어낼 필요가 없었다. 나는 684가 바라는 대로 번호를 제외한 나머지 문신을 말끔하게 지워주었다.
“혹시 331에게 미안함을 느끼나?”
“미안함?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돌아선 684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만, 나 한 사람만큼은 그 자매를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도 내가 죽은 뒤에 누군가 나를 기억해줬으면 했거든. 내게는 그 누군가가…… 음, 당신이었지. 이제는 의미가 없어진 유언이긴 해도.”
말끝에서 684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드러낸 수줍음은 내가 키워놓은 의존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어서 물었다. 331의 육체를 쓰는 데 불편한 마음이 있느냐고.
“딱히.”
684는 가냘픈 미소를 머금고 어깨를 으쓱였다.
“나라는 사람의 시작부터가, 본디 내 것이 아닌 다른 자매의 기억이 내 몸을 빌린 것이었는걸. 시일이 흐른 지금도 내 안에서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여전히 적어.”
이 대목에서 684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자면, 내 기억은 원래부터 두 개의 육체에 걸쳐져 있었던 셈이지. 그게 이제 셋이 되었을 뿐이고.”
“알 만하군.”
“내 자매들은 누구나 다 같은 처지야. 기억의 원본을 제공한 빠른 번호의 자매들을 제외하면 말이야. 그래서 우리의 경계는 흐릿해. 모두가 비슷한 기억들을 물려받아 자아에 눈을 떴고, 모두가 비슷비슷한 삶을 살았으니까.”
“그건 유감이다.”
“괜찮아. 이제부터는 다를 거니까. 더 정확히는, 당신을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벌써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해야겠지만.”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고맙긴. 그게 사실인걸.”
발그스름히 웃어 보인 684는, 숨을 고른 후 단단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하면 돼?”
“무엇을 하다니?”
“당신이 내게 전향을 권했던 건 전력으로서의 내가 필요했기 때문이잖아?”
내가 가만히 응시하자, 684는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서둘러 덧붙였다.
“물론, 그, 내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겠지. 오해하진 마. 절대로, 절대로 당신을 나쁘게 보는 게 아니야. 다만…… 그게 전부일 수는 없잖아. 당신은 원탁의 적이고, 내 어머니처럼 시간과 자원을 아껴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임무를 달라?”
“응. 나는 준비가 됐어. 이제 당신을 위해 싸우게 해줘.”
지금의 684는 내 곁을 벗어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울타리가 되어줄 세력 없이 홀로 숨어 살아가기엔 무섭고 위험한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니까. 그런즉, 자신의 자리를 확실히 만들어 두고자 마음이 급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
“너무 일러.”
“……응?”
“이르다고 했다. 인간의 몸이 오랜만인 만큼 당분간은 재활과 적응 과정을 거치는 편이 낫지 않겠나?”
“재활…… 필요 없는데…… 나 바로…… 도움이 될 수 있는데…….”
“내가 보기엔 필요하다. 네가 「콜레로의 뱀」으로 활동한 기간이 하루 이틀이 아니지 않나.”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전신이식의 예후를 더 지켜봐야 할 필요성도 있지. 나는 네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모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쓰려고 너를 데려온 게 아니야.”
듣기 좋은 말을 고르긴 했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684는 직접적인 전투보다 다른 쪽의 쓸모가 더 큰 인적자원이니까. 나는 다시 손가락을 꿈지럭대는 684에게 물었다.
“네가 마지막으로 쉰 게 언제지? 잠깐씩 틈틈이 취한 휴식 말고, 날짜와 기간을 정해서 쉬었던 게 언제였는지를 묻는 거다. 뱀이 되고 나서는 제대로 쉰 날이 없었을 테니.”
“글……쎄.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그 정도로 오래되었나?”
“우리 자매들에겐 일이 없는 날이 굉장히 드물어. 그도 그럴 게, 서로를 제외하면 대체재가 없는 인력들인걸. 술식 사용이 가능한 마법사들이잖아. 다른 임무가 없으면 하다못해 마탄(魔彈)이나 탤리스만 제작 할당량이라도 채워야지.”
“그렇군. 그럼 한동안 내 조직의 근무규칙을 따른다고 생각해라.”
“당신 조직의 근무규칙? 그게 뭔데?”
“위험도가 높은 보직을 담당하는 인원들은 비상시가 아닌 한 연간 180일의 휴무를 보장받는다는 규칙. 너는 이제 갓 내게 의탁했을 뿐이지만, 전투인력들의 육체와 정신을 만전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규칙이니 휴무를 좀 앞당겨서 쓰더라도 무리는 없지.”
“……?……???”
나를 보는 684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180일? 일반적인 회사도 아니고, 그러면서 조직이 운영이 돼?”
“되니까 내가 살아서 여기에 있겠지.”
“세상에…….”
“그렇게 놀라워할 것 없다. 내 조직의 사업 환경은 이미 원탁에 노출되어있는 칠각기사단과는 많이 다르니까.”
어차피 깨닫게 될 일이라면 내 쪽에서 먼저 밝혀두는 편이 낫다. 나는 짧은 휴지를 넣어 덧붙였다.
“무엇보다, 나는 내 부하들이 언제나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길 바란다. 제아무리 명검이라도 관리를 하지 않으면 고철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조직이 보유한 다른 어떤 자원도 인적자원만큼 귀하진 않아.”
“…….”
“네가 장기적으로 내 힘이 되어주려면 너 역시 내 조직 내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야 한다. 너 같은 마법사가 명확한 소속도 직급도 없이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활동하는 건 비효율적인 일이지.”
“내 자리…….”
“그래. 네 자리. 직급, 소속, 처우, 권한과 업무상의 협조체계 같은 것들. 이것들을 확정짓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 그때까진 그냥 마음 편히 쉬고 있어라. 같이 있는 녀석들이 적응을 도와줄 거다.”
684는 나만이 아니라 내 조직에 대해서도 애착을 가져야 한다. 자신이 머물 곳에 대한 견고한 애착을. 그러고 나면 칠각기사단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데에도 더욱 거리낌이 없어지겠지. 조직에 대한 칠각기사단의 위협을 자기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한 다음일 테니까.
684에게 붙인 인력은 경호실에 속한 여성 전투인력들이었다. 해외 출장 시 경호를 붙여야 하는 간부들 중엔 미주처럼 성별이 여성인 경우가 왕왕 있었으므로, 그런 녀석들을 밀착 경호하려면 평소부터 일정 규모의 여성 전투인력들을 육성해놓을 필요가 있었다.
“아, 그렇지.”
나는 잊고 있었던 주의사항을 당부했다
“내 부하들 사이를 거닐 땐 웬만하면 베일을 쓰고 다녔으면 좋겠군. 네 외모는 그레이스와 같아서 위험하니까.”
“어? 응.”
“너는 아직 급여 카드가 없으니, 뭔가 사고 싶은 것이 생기면 네게 붙어 다니는 녀석들에게 부탁하도록 하고.”
“급여?”
자신의 자리라는 말에 홀려있던 684는, 급여라는 말을 듣고는 다시 한 번 눈동자가 흔들렸다.
“급여……가 있어? 특정 임무에 대한 활동비나 지부의 공금, 위장신분과 거처의 유지비용 같은 것들 말고, 다른 목적 없이 순수하게 개인에게 주는 돈?”
“그래.”
“당신은 대마법사잖아.”
“그런데?”
“대마법사가 추종자들에게 급여를 줘? 추종자들이 대마법사에게 헌금을 바치는 게 아니라?”
“……참 이상한 데서 놀라는군.”
생각해보면, 칠각기사단이든 빛과 진리의 원탁이든 돈을 걷으면 걷었지 추종자들에게 급여를 챙겨줄 리가 없었다. 둘 다 사이비 종교단체이긴 마찬가지니까. 사이비 종교의 재정은 추종자들이 각자의 생업을 유지하며 알아서 돈을 가져다 바치는 것이 기본이다.
구원은 공짜가 아니다.
스승새끼가 아직 원탁에 머물던 시절, 그러니까 원탁이 영국정부로부터 한창 홀대를 당하던 시기, 원탁의 재정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원탁의 마스터들이 품위를 유지하며 각자의 연구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동반승천의 믿음으로 뭉친 가신단과 추종자들의 경제적 헌신 덕분이었다.
영국정부의 지원이 재개되었을 지금이라면 사정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원탁의 마스터들이 추종자들의 물질적 생활에 그렇게 주의를 기울일지는 의문이었다.
마스터들에게 있어서, 지금의 인간세상은 진정한 인류의 부활이 이루어지고 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무가치한 것이니까.
“아무튼, 나는 이만 가보겠다.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아.”
684는 돌아서려는 나의 옷자락을 붙잡고 쭈뼛쭈뼛 물었다.
“언제 다시 돌아와?”
“잘 모르겠군. 그래도 최대한 자주 얼굴을 비추도록 노력해보지.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하루에 한 번이라도 전화로 문진을 하고.”
“아, 응…….”
옷자락을 놓은 684는 한숨을 내쉬듯이 “하루에 한 번…….”이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선 내게 부탁했다.
“이름.”
“음?”
“당신이 괜찮다면 말이지만, 여유가 있을 때, 내가 쓸 이름을 생각해줬으면 해. 앞으로 계속 684라는 번호로만 불리는 건 싫으니까.”
“네 이름은 너 스스로 생각해보는 편이 낫지 않겠나? 내가 지어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려고.”
“아냐. 당신이 지어주는 거라면 그게 어떤 이름이든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어.”
과연 어떨까. 경태의 개처럼 대충 춘식이라고 부르면 싫어할 것 같은데.
“당신에게서 이름을 받고 싶어. 내게 새로운 생명을 준 당신에게서.”
684가 힘주어 하는 말에 나는 정체 모를 불편함과 거부감을 느꼈다. 나로부터 생명을 받은 타인에게 이름을 주는 것이 단순한 행위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내 안의 어떤 선을 건드리는 듯한 꺼림칙함 속에서, 나는 조금 늦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알았다. 한번 생각해보지.”
“응! 고마워!”
침울하던 684의 낯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아프리카에서의 일은 이제 끝이 보이고 있었다.
해적함대의 기함은 다르에스살람 앞바다에 정박한 채 움직이지 않았고, 대초원을 가로질러 거침없이 남하하던 왕의 군세도 루피지 강 차단선에 가로막혀 진격이 지체되었다.
이링가 방면에서 탈출한 평화유지군 그룹은 바다가 가까워지면서부터 제공권 장악에 힘입은 공중수송을 개시했다. 그렇게 보급을 충원하고 짐을 덜어내며 속도를 끌어올린 결과, 7월 23일이면 작은 항구인 린디에 닿을 것이 예상되었다. 린디에선 각성능력자들을 동원한 가설부두 설치가 한창이었다. 잘 연출된 기나긴 탈출극이 곧 막을 내릴 예정인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조금 안 좋은 소식이 들어왔다. 술타나의 사병대인 「라스카르 쁭아왈 끄술타난 잠비(LPKJ)」가 수마트라 중북부를 근거지로 삼은 무자헤딘 세력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술타나 측으로부터는 점잖은 전투인력 지원 요청이 몇 번 왔을 뿐,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상세히 설명하진 않았다. 그것은 체면이 상하는 일이니까.
그러나 중국인들 이상으로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권에서, 전통적인 정서의 결정체라고 해도 좋을 골초 꼰대가 같은 내용의 요청을 반복해서 보냈다는 건 그 자체로 사안의 위급성을 방증하는 바다.
그리고 같은 문화에서, 현명한 친구는 친구의 어려움을 ‘체면이 상하지 않게’ 알아서 살펴 헤아려야 하는 것.
술타나의 사업장에 배치해놓은 내 부하들은 보다 자세한 상황을 보고해왔다. 술타나의 영역에서 영 재미를 못 보고 있던 중북부의 이슬람 극단주의 꼴통들이, 긴 교착상태를 타개하고자 해외로부터 같은 극단주의 세력을 용병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 술타나의 아들이 어머니를 배신하는 악재까지 터졌노라고. 이는 그전까지 그런대로 선전하고 있었던 라스카르가 열세에 몰린 주요한 요인이라 했다.
잠수정의 추가 건조와 개량에 차질이 빚어지면 곤란하다. 주술사 왕의 군세에 무기를 공급하는 밀수 체인은 특정 구간에서 잠수정들을 이용해 경로를 세탁할 예정이고, 앞으로도 이래저래 쓸 일이 많을 테니까. 언젠간 왕의 군세와 해적함대로부터도 잠수정 주문이 들어올지 모르는 일.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기념일까지는 아직도 조금이나마 시간적 여유가 남아있다. 천안문 광장으로 가서 전 세계 지하디스트들을 열광케 할 봉화를 피워 올리기 전에, 잠시 짬을 내어 술타나를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다만 이 땅에서 거둔 수확을 매듭짓는 게 먼저일 터.
나는 우선순위가 낮아 처분을 미뤄놓았던 한 수인(囚人)에 대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