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36화 (336/561)

#36. 시한부의 꿈 (12)

항구의 주요기능은 단 하루 만에 그레이스의 수중에 떨어졌다.

684는 그 뒤로 사흘간 더 존재감을 과시했고, 그 이후엔 전장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제 어머니와 자매들은 물론이고, 미리 말을 주고받은 나에게조차 사전에 예고를 하지 않은 돌발적인 실종이었다.

그레이스는 내게 해상에서의 항공탐색을 요청했다.

「정황상 아무래도 바다로 들어간 모양인데……. 당신도 알다시피, 그 아이는 지금 존재감을 감출 여력이 없는 상태지. 아직 살아있다면 당신의 눈으로 찾을 수 있을 거야.」

마녀가 이렇게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놓고 협조를 구한 것은, 내 힘을 빌리지 않고선 사라진 684를 찾을 방법이 전무했던 탓이었다.

684에게 스스로의 존재감을 감출 여력이 없다 함은, 무너져 내리는 영육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마력 회로의 출력을 항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마력장과 그 마력장이 영향을 미칠 마소의 흐름은, 황금기의 눈으로 보면 하나의 거대한 신호의 발산이나 마찬가지. 바다에서라면 수평선 가까이에서도 포착이 가능할 신호다.

달리 말해, 내 눈으로도 684를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684의 자살을 의미한다. 설령 내 시야가 닿지 않을 만큼 멀리까지 달아났다손 치더라도, 그 끝엔 결국 죽음만이 있을 테니까. 설마하니 684가 원탁을 찾아가 도움을 청할 리는 없지 않겠는가. 원탁이 관대하게 받아줄 리는 더더욱 없을 것이고.

실험체로 전락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내가 684를 찾지 못했다고 알리자, 그레이스는 묘한 비음을 흘리더니 내게 이렇게 물었다.

「그 아이에게 수명연장 처치를 해줄 때, 뭔가 들은 것 없어?」

“무엇을?”

「무엇이든.」

“글쎄…….”

나는 기억을 더듬는 시늉으로 시간을 끌다가 답했다.

“갈수록 우울함이 많아지는 느낌이긴 했다만, 딱히 뭔가 특별한 말을 듣지는 못했다. 그러는 너야말로 달리 짚이는 구석이 없나?”

「나는 점령지를 소화하느라 바빠. 다 죽어가는 애 하나에게 할애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

“……그럼 그 다 죽어가는 애를 굳이 찾아달라고 한 이유가 뭐지?”

「알잖아. 684의 유해가 애먼 잡것들에게 발견되면 곤란하다는 거.」

그레이스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콜레로의 뱀」은 어디까지나 원래 살던 지저의 강으로 돌아간 것이어야만 해. 만에 하나라도 주술사 왕의 위엄과 명성이 훼손되어선 안 된단 말이야.」

“과연.”

「뭐, 당신의 눈으로도 찾을 수 없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겠네. 이번에도 도움을 준 데 감사를 표해 둘게.」

“매번 듣는 것도 낯간지럽다.”

「큭큭. 기대하고 있어. 내 감사는 이번에도 말이 전부가 아닐 테니.」

이렇게 말하는 그레이스에게선 점점 더 강력한 힘과 권력을 손에 넣어가는 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하기야, 내가 제 복제체의 시체 하나를 얼려서 보관하고 있음을 모르는 이상, 684의 전향은 크게 우려할 바가 아니겠지. 쉽게 상상할 바도 아닐 테고. 내가 684의 수명한계를 속였다 한들, 「콜레로의 뱀」은 은밀한 운용이 가능한 전력이 아니다.

아프리카 대륙 동쪽의 바다는 깊이가 썩 깊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684는 항구에서 3백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암초까지 나아가 몸을 숨겼다. 주요 항로들이 모두 암초를 비껴갔으므로, 때때로 숨을 채우며 얕은 물 아래 똬리를 틀고 있을 만한 곳이었다.

나는 684를 기다리는 동안 위장신분에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다. 이링가 방면에서 탈출한 평화유지군 집단이 엑소더스를 완수하려면 아직도 5백 킬로미터의 거리를 더 움직여야만 한다.

탈출 행렬이 게릴라들의 천국인 산악지대를 빠져나와 광활한 사바나 초원지대에 들어섰으므로, 이제는 그냥 달리는 일만 남았지만, 문제는 이게 왕의 군대에게도 해당되는 사실이라는 점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링가 방면 평화유지군의 마지막 탈출구는 왕의 군대가 점령한 다르에스살람으로부터도 약 5백 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져있지 않았다. 양측이 비슷한 거리에서 같은 지점을 향해 레이스를 벌이는 극적이고도 아슬아슬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이게 의도한 결과라면 연출력 하나는 대단하다고 해야겠군.’

다르에스살람 방면 왕의 군세를 차단할 지형장벽은 단 하나. 내 조직 산하의 함대가 일찍부터 들어가 활동하던 루피지 강이 유일했다.

마음이 급해진 평화유지군은 무장여객선을 운용하는 헌터집단들에게 마지막까지 강상전단의 역할을 다해달라고 의뢰했다. 강한 화력과 방어력을 겸비한 무장선박들은 물길을 따라 130킬로미터에 달하는 차단선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헌터집단의 대표들은 국적을 초월하여 한목소리로 항의했다.

「미쳤습니까? 그 망할 놈의 해적 전함이 강 하구를 틀어막으면 퇴로가 끊어져버리는데, 우리더러 당신들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내륙수로에 남아 임무를 수행하라니? 우리한테 억지를 부릴 게 아니라 선주회사나 보험사부터 설득하시죠.」

런던 전쟁보험 요율위원회(War Risks Rating Committee)가 탄자니아 내륙수로의 위험요율 인상을 결정하면 그 피해는 선박을 임대한 회사와 선박을 임차한 헌터들이 감당해야 한다.

전함 미주리는 그 커다란 덩치로도 현대적인 구축함들만큼이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다른 방해가 없다면, 다르에스살람에서 루피지 강 하구까지 진출하는 데 두 시간 좀 넘는 시간이면 족하다는 뜻.

탄자니아 방면 평화유지군 구성국들은 가진 기뢰를 다 퍼붓는 걸로도 모자라 우방국들이 가진 기뢰까지 웃돈을 주고 긁어오는 한편, 선주회사들과 헌터집단들에게는 구성국들의 연대보증으로 보험료 대납을 약속하고, 미국에게는 강력하게 책임 분담을 요구했다.

「책임? 우리가 대체 무슨 책임을 져야 합니까?」

기자회견을 연 백악관 미치광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노호했다.

「그동안 집단안보에 무임승차해온 것에 대해서는 대가를 내놓으라고 해도 뻔뻔스럽게 안 내놓으며 버티더니, 자기들이 보내달라고 해서 억지로 보낸 배가 납치당하니까 우리에게도 비용을 분담해라? 말도 안 되는 소리!」

「상황이 이 지경까지 악화된 것도 결국은 저들의 안보 무임승차가 원인입니다. 독일을 보십시오. 그 크고 돈 많은 나라에서 하늘에 띄울 수 있는 전투기가 7대밖에 안 된다는 게 무슨 농담입니까? 영국은 또 어떻습니까? 대체 얼마나 훈련을 게을리했기에 고래에게 처맞아서 입는 피해가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까?」

「만약 저들이 가진 전력을 온전히 쓸 수만 있었어도 주술사 왕의 군대는 절대 지금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겁니다!」

「시민 여러분! 미국은 그동안 동맹을 자칭하는 강도들에게 끊임없이 강도질을 당하는 돼지저금통이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저들의 억지와 어리광을 들어주어선 안 됩니다! 미합중국은 단 한 푼의 돈도 헛되이 지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저들에게 보상금을 받아내야 합니다! 저들은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미국이 전투함을 파견하면 즉각 협동작전을 개시하겠노라고! 그런데 실제로는 어땠습니까? 우리의 전함이 해적들을 상대로 외롭게 싸우는 동안 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냔 말입니다!」

「미국의 믿음은 처참하게 배신당하고 또 강간당했습니다! 아메리카 퍼스트! 아메리카 퍼스트! 신께 맹세하고 시민 여러분들께 다시 맹세하건대, 저는 미국을 위하여 반드시 합당한 보상을 받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부디 이 나라에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영국 총리가 이 발표를 듣고 혈압이 올라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백악관의 미치광이가 정말로 멋진 일을 해주었다고 생각했다.

경태는 684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그 아가씨를 그대로 내버려둬도 괜찮겠습니까?”

“내버려두지 않으면?”

“형님께 마지막으로 처치를 받은 게 벌써 이틀 전의 일입니다. 가서 설득을 더 해보거나, 정 말을 듣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데려와야 하는 게 아닌지…….”

“억지로 데려와서 시키는 전향에 무슨 의미가 있나.”

“에이, 의미가 있죠. 그 아가씨는 칠각기사단 바깥의 삶을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자기가 전향 후에 누릴 시간들을 상상해봤자 피상적인 상상으로 끝나지 않겠습니까?”

“…….”

“일단 형님 아래로 들어와서 우리 조직에서의 생활을 한 번 경험해보기만 하면, 그 아가씨도 분명 살아있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팍팍 들 겁니다. 자기를 거두어준 형님께는 감사의 마음이 깊어지겠죠. 이 김경태가 춘식이의 목을 걸고 장담합니다.”

“……일단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하지.”

684는 내가 준 위성전화를 가지고 있다. 전향을 결심했을 때, 스스로 움직이지 못할 지경에 처해있다면 도움을 요청해오겠지. 원거리에서 감시를 하고 있는 만큼, 684가 의식을 상실한다면 즉시 보고가 올라올 것이기도 했다.

684에게는 충분한 공을 들여놨다. 이 이상으로 내가 설득을 시도한다면 내 쪽에서 매달린다는 느낌을 주기 십상. 나에 대한 믿음이 깊어지기는커녕 역효과를 볼 가능성도 상당하다. 당장은 깨닫지 못하더라도, 새 몸을 얻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 뒤에 곱씹어보면 뭔가 이상함을 느낄 수도 있을 터.

나는 기다렸다.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

초조함이 깊어지는 시간을 인내하고 다시 인내하는 동안, 점점 더 확신이 깎여나간 나는 지금이라도 경태의 말대로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입이 짧아지고 잠이 줄어들었다.

다르에스살람 함락 후 닷새째가 되던 날의 밤, 나는 드디어 스텔라 포르투나의 함교로부터 684가 전화를 걸어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작게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를 찾더니, 내가 자리를 비웠음을 듣고는 흉물스러운 소리로 울면서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묻더라고.

나는 스텔라 포르투나의 선창에서 마침내 684와 재회했다.

684의 육체는 전보다 더 심각하고 흉물스러운 몰골이 되어있었다. 무수히 발생한 기형종과 영양부족으로 말미암아 잔뜩 마르고 일그러진 아기들의 모습. 그저 가만히 웅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몸 여기저기서 아기들이 뚝뚝 떨어져 나와 숨을 거둔다.

몸통에 박힌 아기 하나는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숨 가쁜 옹알이를 했다.

「브아, 브아아-」

어쩐지 기시감이 진하게 드는 장면.

「아. 와줬구나, 당신…….」

684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지 않았나. 네가 결심을 하면, 그때는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다고.”

「아파. 나, 너무 아파.」

“준비는 다 되어있다. 상태가 심각하니 지금 바로 이식에 들어가야겠군. 너는 그냥 나를 믿고 내게 모든 걸 맡기기만 하면 된다.”

「응, 믿어…….」

“머리를 내려라. 뇌를 적출해야 하니까.”

684는 조용히 지시에 따랐다. 내가 불로 씻은 제례검을 댈 것도 없이 아기들의 결합이 갈라지고, 끈적거리는 피가 여러 줄기의 냇물처럼 흘러나오며, 서로 엉겨 붙어 뇌를 보호하는 골격 조직이 조명 아래에 노출된다.

이제 칼질 한 번이면 흉물을 이루는 결합의 가장 취약한 고리가 끊어질 터.

거대한 영적 다형성 군체의 결합구조가 붕괴하여 하나의 통합된 마력회로를 이루지 못하게 되면, 내가 찍어 눌러야 할 마력장은 오직 하나. 684의 뇌가 발산하는 마력장뿐이다. 뇌세포들이 괴사하기 전에 마력장을 억압하고, 「생명」의 힘으로 상태를 고정하여 새로운 몸에 집어넣어야 하는 것이다.

흉물의 마력장이 사라진 다음이면 엉겨 붙은 뼈를 가르는 것쯤은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다. 머릿속으로 마지막 이미지 트레이닝을 돌린 내가 흉물의 머리를 밟고 올라 칼을 고쳐 들 즈음, 내 무게를 느낀 684가 아기들의 입을 움직여 작은 화음을 발했다.

「잠깐만…….」

“뭐지?”

「유언을, 남겨두고 싶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이식수술의 성공률이 낮다고 겁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나다.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라.”

쩍 벌어져 피를 흘리는 머리로 말미암아, 흉물스러운 육체의 생명은 이 순간에도 빠르게 꺼져가는 중이었다. 잠시 힘든 숨을 고르던 684는, 아직 통제 아래에 있는 모든 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화음을 구성했다.

「당신을, 알게 되어 기뻤어. 이 몸에, 들어오고 나서 줄곧, 힘들고, 외롭고, 우울했지만…… 당신이 함께, 밥을 먹어주고, 당신이,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고, 당신이 내 아픈 곳들을, 신경 써서 살펴주는, 동안에는, 외롭지도 않았고, 우울함은 덜했고, 힘든 것들도 잠깐은, 잊어버릴 수 있었지.」

“그런가.”

「응. 비록 짧은 시, 간 동안이었지만, 당신은 내게, 어머니나, 다른 자매들조차 주지 않았던 것들을, 주었다고 느꼈어. 무언가, 내 안에, 오랫동안 비어있던 부분이, 채워지는 기분, 이었지. 고마워. 정말로.」

“…….”

「이식에 실패해도, 당신, 을, 원망하지 않아. 당신도 그때는, 슬퍼하거나, 자책, 하지 않았으면 좋겠, 어.」

684가 생각하는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엔 크고 깊은 간극이 존재했다. 이식에 실패하면 내가 슬퍼하리라 생각하는 걸 보니, 그동안 내가 들인 노력이 684의 내면에 아주 효과적으로 작용했음을 알겠다.

사람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다만, 나를, 기, 억해 줘.」

684의 유언은 여기까지였다.

나는 칼을 그어 결합구조의 핵심을 끊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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