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35화 (335/561)

#36. 시한부의 꿈 (11)

“「생명」을 공격용으로?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나?”

대상을 급속도로 노화시키거나, 과도한 면역반응을 유도하거나, 아예 세포 자체를 직접적으로 붕괴시켜버리거나 하는 식이면 「생명」도 얼마든지 공격마법으로 쓸 수 있다. 다만 지나친 비효율성이 문제가 될 따름. 그나마도 상대의 마력장을 중화하지 못하면 쓸모가 없어진다.

영혼을 가진 모든 존재에겐 최소한의 마력장이 존재하는 만큼, 표적이 일반인이라 한들 「생명」으로 일격에 즉사시키려면 대마법사의 존재감을 노출시키는 수밖에 없다. 「생명」의 회로점유율 또한 상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려야겠지.

그레이스가 자그맣게 웃었다.

「큭큭. 그렇게 비효율적이면 내가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어. 그렇다고 효율적이라고 하기도 어렵지만, 어쨌든 알려주고서 도리어 욕을 먹을 수준의 지혜는 아니라고 봐. 황금기의 눈을 가진 당신이라면 정확한 작용기전을 파악해서 개량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잠깐. 설마 네가 만들어놓고 너도 작용하는 원리를 모르는 건가?”

「몰라. 왜냐면 만든 사람이 내가 아니니까.」

“……그러면?”

「원래는 엘름스테드의 연구 노트 중 하나에 적혀있었던 것인데, 엘름스테드 스스로 고안해낸 게 맞는지부터가 의문이야. 왜냐면 이 「생명」의 응용기술에 대한 내용은 다른 건 일절 없이 술식 하나가 다였거든. 꼭 어디서 베껴오기라도 한 것처럼.」

“혹시 다른 마스터의 연구를 훔쳐낸 것이라 생각하나?”

「글쎄? 당사자가 죽었으니 진실은 모를 일이지. 자기 연구에 관해선 내게 비밀이 없었던 엘름스테드의 입으로도 이 술식에 대한 단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어.」

“…….”

「어때, 싫어?」

“실제로 사용했을 때 위력이 어떤지는 알아야 좋고 싫고를 말할 게 아닌가.”

「아, 이런. 당신과의 통화가 즐거워서 조금 들떴던 모양이야.」

그레이스는 자신이 붙인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나는 이 「생명」의 응용공식을 「부패」라고 불렀어. 술식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떠나, 일단 겉보기만으로는 유기체의 부패를 유발하고 가속화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야.」

“부패, 라.”

「악마숭배교단의 교주로서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기술이었지. 마법의 시대가 돌아온 이후엔 사람을 죽이고 나서 사망 추정시각을 교란하거나 산 사람을 고문하는 용도로 종종 사용했고. 본격적인 공격기로서는 뭐…… 이미 말한 대로, 그렇게까지 효율적이진 않아.」

“흠.”

「이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 딸아이들 중 하나를 내어줄 수도 있어. 당신이 바랄 경우의 말이지만.」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나는 반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해야만 했다. 이 마녀가 뭔가 의심을 품고 슬쩍 떠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나는 늦기 전에 여상한 퉁명스러움을 지어냈다.

“그걸 대가라고 주겠다는 건가? 내가 네 딸을 받아서 어디에 쓴다고?”

「글쎄? 명색이 마법사인데 어디든 쓰려면 쓸 데가 없을까. 신뢰가 문제라면, 하다못해 죽여서 시체인형으로 굴려도 남는 장사인걸.」

“……그냥 마법이나 내놔라.”

「우리 자기, 이런 쪽으론 너무 알기 쉬운 사람인 것 같아.」

그레이스는 청량한 웃음을 터트렸다. 말하는 투로 미루어, 684에 관해 낌새를 챘다기보다는 전부터 이어지는 내 성향 헤아리기의 일환인 것 같았다. 나는 불쾌감보다는 안도감을 더 크게 느꼈다.

684의 전향은 참수작계 수립을 위한 정보수집의 화룡점정이 되어줄 것이다.

통화를 마친 이후 나는 수연에게 지시하여 즉각 대구로 연락을 넣었고, 수연 녀석은 채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미국에서 걸려온 워커 소령의 전화를 받았다고 보고했다. 그의 첫마디는 내가 원하는 정보들을 곧바로 보내줄 수 있다는 것이었고, 그의 둘째 마디는 정보료로 얼마를 주겠느냐는 것이었다.

딱히 군사기밀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사업입찰 정보 및 사업진행현황을 유출하는 건 상품을 빼돌리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이었으므로, 워커가 희망하는 값은 처음부터 그리 대단한 금액이 아니었다.

내가 받아본 자료에 따르면, 크레인 탄약창의 전함 포탄은 지난 5년간 매해 1,500발씩 폐기되어, 전함 미주리의 현역 복귀가 결정된 시점에선 8천여 발의 재고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해적함대가 선호할 고폭탄(HC)의 수량은 약 5천 발. 고폭탄만으로도 4회 이상의 완전 재보급이 가능한 물량이다.

미주리가 바다로 나온 후에도 폐기 작업은 중단되지 않았다. 애초에 전함의 작전 기간을 길게 잡지 않았다는 방증. 운용 인원만 천팔백이 넘어가는 전함을 계속해서 굴리느니, 새로운 무기체계를 개발하여 배치하는 편이 장기적으로는 훨씬 더 싸게 먹힌다.

‘조만간 그 결과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겠지.’

해적함대가 서방세계의 정규해군을 상대로 선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로켓추진 충각선이라는 무기체계의 의외성이 절반 이상의 지분을 차지한다.

이제 서방세계는 충각선을 카운터 칠 중장갑 무인수상전투함(USV) 배치에 총력을 기울이는 상황이다. 해적함대 지도부가 전략안과 선구안, 그리고 기술적 전문성을 고르게 갖춘 인력을 수급하여 전장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다면, 해적함대의 황금기는 의외로 빠르게 막을 내릴 가능성이 있었다.

여하간 나는 본사에 위장기업 설립 및 해당 폐기업체의 인수를 지시해놓았다. 저쪽은 갑작스러운 인수 제안이 당혹스러울 터이나, 세상에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드문 법.

돈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더 많은 돈을, 그러고도 해결이 안 되면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제시하면 그만이다. 일개 폐기업체의 가치가 높아봐야 얼마나 높으려고.

나는 그레이스에게 포탄을 확보할 길이 있노라 통보했고, 그 결과가 지금 다르에스살람 항만 입구에 쏟아지는 장대한 규모의 포격이었다.

쿠궁-!

수중폭발의 음계는 공기 중에서의 폭발보다 낮다. 파장이 긴 음파가 수면을 뚫고 나오는 광경이 보인다.

둔중한 폭음과 함께 솟구친 물기둥은 폭포 쏟아지는 소리를 내며 하얗게 내려앉았다. 그 주변으로는 불운하게 휘말린 배와 인간의 조각들이 후둑 후두둑 떨어져 자잘한 물보라들을 일으켰다. 주변을 지나던 다른 배의 승객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우성을 쳐댄다.

그러나 당하는 자들의 공포감과는 별개로, 포격의 집탄률은 여전히 좋은 편이 못되었다.

‘숙련도가 쌓이기 전에 포신 수명이 다하게 생겼군.’

내가 아는 한, 전함 미주리의 주포 수명은 절반이 채 남지 않은 상태다. 그러니 무식한 해적들이 숙련병이 될 즈음이면 그때는 포신이 닳아 집탄률과 명중률을 깎아먹을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더라도 테러병기로서는 손색이 없을 테지. 일정 거리 이내에서는 여전히 유효한 탄착군을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고.

「끼에에에에에-!」

뭍에서 들려오는 괴성은 시가지에 난입한 684가 내지르는 것이었다.

다른 때와 달리 밝은 시간에 정면공격을 감행한 신화적인 흉물은, 그 모습을 보고 그 소리를 듣는 모든 이들을 공황과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반응은 다양했다. 달아나는 자. 주저앉는 자. 무릎을 꿇고 왕의 자비를 간구하며 기도를 올리는 자. 그리고 환희에 찬 표정으로 함성을 지르며 뱀을 뒤따르는 자들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벌고자 남은 평화유지군 후위부대들 또한 곳곳에서 도주하거나 와해되는 광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용기를 가지고 맞서는 자들이 없지는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도로변의 화물 터미널에 매복한 영국군 전차소대와 보병소대였다. 위장엔 적잖은 공을 들여놨다. 전장을 감제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면 매복은 분명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나는 무전을 보냈다.

“684. 정면에 보이는 화물 터미널에 챌린저 전차 4대가 각성능력자 보병 2개 분대와 함께 숨어있다. 철갑탄 공격에 유의하도록.”

전차 주포로 쏘는 철갑탄은 흉물에게도 위험한 무기다. 겉보기로만 멀쩡할 뿐, 영육의 균형이 엉망진창인 지금의 684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아기들로 이루어진 비늘의 틈바구니로 안테나를 삐쭉 내밀고 있던 684는, 내 경고에 곧바로 반응했다.

684의 덩치는 포격을 맞기도 좋고 폭격을 맞기도 좋다. 그럼에도 그레이스가 시한부 판정을 받을 딸을 한낮의 전투에 출전시킨 것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 하나는 나의 눈이고, 다른 하나는 방패가 되어줄 민간인들이다.

아무리 684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지만, 오래된 신화로부터 기어 나온 뱀은 전장에서 숨을 거두어도 무방한 존재가 결코 아니다. 주술사 왕으로서의 그레이스는 벌써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을 붙여 684의 퇴장을 예고해놓은 상태였다.

「나, 뱀의 영혼을 가진 주술의 왕 홍고 무크와비응이카가 이르노라.」

「내가 이 땅에서 도모하려는 왕업(王業)은 인간 세상에 가득한 고통의 순환을 끊어내고자 하는 긍휼의 뜻이요, 과거에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 불의를 이제라도 정죄하려는 징벌의 의지이며, 삶과 죽음이 한가지로 두려운 자들에게 현세와 내세의 평화를 주고자 하는 구세의 서원(誓願)이다.」

「왕이 이러한 뜻을 세우매, 지저의 강에서 지상의 눈물을 삼키던 뱀도 스스로 나아와 왕의 발치에 엎드렸다.」

「크고 오래된 뱀은 왕에게 호소하였다. 피부 하얀 정복자들의 폭거가 이 땅을 어지럽힌 이래, 너무도 많은 눈물이 땅 밑으로 흘러들어와 견딜 수가 없었노라고.」

「하여 내가 큰 뱀의 입을 열어 뱃속으로 들어가 본 바, 그곳에는 땅 위에서 내려온 가장 순수한 눈물이 그득하게 들어차 있었다.」

「인간 세상의 부조리가 죽인 무수히 많은 아기들의 눈물이.」

「그 눈물에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겪은 아기들의 영혼이 녹아있었은즉, 왕은 슬프고 또 분개하여 원죄 있는 자들에게 응보가 따르리라 저주하였다. 이 저주가 고대의 뱀에게 원한의 꺼풀을 씌워주었으니, 바로 너희가 지저의 뱀에게서 보는 아기의 얼굴들이다.」

「왕은 묻노라. 이 땅에 만연한 기아와 증오의 연쇄는 과연 누구에게 원죄가 있는가?」

「약탈과 학살과 압제의 유산을 물려받은 자들에게 고한다. 너희가 누린 모든 것이 추악한 과거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너희에게는 이제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한다. 싸우다가 죽거나, 가진 것 전부를 내놓을 각오로 진심어린 용서를 구하거나.」

「지저의 뱀에게 깃든 아기들의 숫자만큼 죽음이 쌓이면 그것으로 아기들을 달랠 수 있을 것이고, 같은 숫자만큼 사죄가 쌓이면 그것으로도 아기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지저의 뱀은 비로소 거친 허물을 벗고 본래 있던 땅 아래 콜레로의 강으로 돌아가 잠들게 될 테지.」

「원죄를 진 자들이여. 모든 것이 오롯이 너희에게 달려있다. 죽음과 사죄의 합계가 고대의 뱀으로부터 너희를 구할 것인데, 죽음보다는 역시 사죄를 쌓는 편이 더 쉽지 않겠는가? 왕은 너희들 각각의 나라에 충분한 수의 의인(義人)들이 있으리라 믿는다.」

「행동하라, 의인들아. 너희의 참회와 기도로 아기들의 영혼과 너희의 동포들을 함께 구하여라. 구원은 당장 오늘이라도 이루어질 수 있다. 뱀은 오늘이라도 잠들 수 있다.」

「왕은 기다리고 있겠다.」

딸들을 철저하게 도구로 소모하는 마녀가 아기들의 원한을 운운하는 꼴이 우습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악마숭배교단의 교주로 군림해온 전문가답게 지어낸 내용의 디테일이 좋았다. 684의 죽음마저 심리전의 재료로 써먹는 알뜰한 교활함이 대단하다고나 할까.

그레이스의 심리전은 영상이 온라인에 업로드 된 직후부터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제1세계 각지에서 옛 과오를 뉘우치겠다는 사람들의 가두행진이 벌어지고, 종교시설에서는 기도회가 열렸으며, 관심을 먹고 사는 일부 정치인들은 주술사 왕을 테러리스트가 아닌 국가 차원의 협상 대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적의 전쟁수행의지를 분열시키는 훌륭한 술책이라 하겠다.

그 결과 중의 하나가 항구 내의 음카파 국립 종합경기장에 설정된 안전구역. 이곳으로 피신하는 자들은 왕의 포로가 되는 대신 당장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경기장에 모인 사람의 숫자는 의외로 적지 않은 편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선택으로 왕에게 생사여탈권을 맡기기로 한 자들.

나는 경기장이 위치한 구획 상공에서 안전구역을 순찰하는 왕의 전사로 위장하고 있었다. 바다와 육지 양면을 모두 감제하면서 평화유지군의 공격을 신경 쓰지 않아도 무방한 최적의 위치다.

콰앙-!

시가지에 전차의 포성이 울려 퍼진다. 궁지에 몰린 영국군 전차소대가 벽을 파괴하여 통로 개척을 시도하는 소리였다.

영국군 전차소대는 684의 급격한 방향전환 및 우회기동을 감지하고 매복이 발각당했음을 감지했으나, 전차가 아무리 기민하게 기동한들 복잡한 시가지에서는 흉물스러운 뱀을 따돌릴 수 없었다. 하물며 출입구가 한정된 터미널 내부에서임에야.

육중한 전차는 한 대만 주저앉아도 길이 막혀버린다. 684가 약화시킨 지반은 선두 전차를 보기륜까지 가라앉혀 기동불능으로 만들었고, 나머지 전차들은 제자리에서 선회를 하던 중 684가 발한 충격파를 연속으로 얻어맞았다. 염동력으로 공기를 후려쳐서 일으키는 투명하고 파괴적인 물결들을.

부서진 파편들이 튀어 오른다. 전차의 장갑은 간접적인 충격파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냈으나, 장갑 외부로 노출된 부무장과 관측용 장비들은 그렇지가 못했다.

전차를 엄호하던 보병들은 684가 길게 내뿜는 불길 한 번에 조직력이 무너졌다. 대 로더필드 전에서 얻은 전훈을 토대로, 소형 유조차에서 떼어낸 연료탱크를 뱃속에 저장해온 684였다. 뜨거운 화염의 길이는 터미널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고도 남았다.

거대한 뱀의 화염방사는 전차 소대의 주변으로도 이루어졌다. 비교적 멀쩡하게 남아있는 관측수단들을 연기로 가려버리기 위함이었다.

눈이 멀어버린 전차들이 공황에 빠져든다. 684는 저가 지른 불길을 뚫고 공격을 감행했다. 생살을 태우는 고통을 아랑곳 않는 돌격이었다.

「으애애애애애앵!」

그을음을 먹고 우는 아기들의 합창은 항구 전체에 울릴 만큼 거대했다.

각각의 전차엔 마력장으로 전차를 방호할 각성능력자들이 탑승하고 있었으나, 대마법사의 마력장마저 옥죌 수 있는 괴물이 지근거리까지 접근했을 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전차들은 차례차례 강철의 관으로 화했다. 해치 내부로 투사된 「발화」에 의해, 또 장갑 안쪽으로 폭사된 「열화」와 「염동」의 충격에 의해.

‘저돌적이군.’

내가 보기에 684는 스스로를 고통스러운 싸움으로 내몰고 있었다. 영육의 안정성을 저해하고, 그나마 남아있는 수명을 줄이는 짓.

나는 684의 이러한 행동이 어머니에 대한 부채감, 그리고 어머니와 자매들을 배신한다는 죄악감을 덜어내기 위한 노력이기를 바랐다.

차마 그레이스를 등질 결심이 서지 않아, 자포자기한 마음에 수명을 내다 버리며 간접적인 자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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