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사냥꾼-334화 (334/561)

#36. 시한부의 꿈 (10)

이링가로부터의 탈출 행렬이 중부 고원과 동부 저지대 사이의 가장 험준한 구간을 악전고투 끝에 빠져나올 즈음, 해적함대의 기함 미주리는 마침내 탄자니아 최대의 항구도시 다르에스살람을 사정권에 넣었다.

퓌이이이이리리릿-

사람보다 크고 전술차량만큼 무거운 고폭탄들이 바람을 찢어발기며 날아드는 소리. 한 발 한 발의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항만 입구엔 엄청난 크기의 물기둥이 치솟았다. 작은 보트들은 간접적인 여파만으로 균형이 위태로워질 정도. 로더필드가 살아 돌아온들 정면에서 막아내기란 불가능한 폭력이었다.

우릉…… 우릉…… 우릉……

포탄보다 느린 포성은 물기둥이 치솟고서 한참이 지나서야 해풍과 함께 밀려왔다. 어림잡아 50초에 달하는 시차는 포탄이 그만큼 먼 거리를 날아왔음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전함 미주리는 현재 항만 입구에서 약 28킬로미터 떨어진 해상에 떠있었다. 더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기뢰의 존재.

미군 포로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그리고 백악관 미치광이의 항의로 말미암아 함부로 격침시킬 수도 없는 전함을 막기 위해, 서방세계의 해상 연합임무부대(CTF)는 기뢰를 줄줄이 깔아 차단 기뢰원(遮斷機雷原, Interception Minefield)을 만들어놓고, 이를 해적제독에게 경고하는 식으로 전함의 남진을 지연시켜왔다.

퍼엉-!

바다에서 또다시 물기둥이 치솟는다. 이번 물기둥은 포탄이 아니라 기뢰가 터지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수중에선 서방세계에 고용된 헌터들과 해적함대 잠수부들의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잠수부들의 목적은 당연히 기뢰원을 파괴하는 것. 기뢰의 위치를 알기만 하면, 사람이 들어가서 시한폭탄을 붙이고 나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작업 자체의 위험성과는 별개로.

연합임무부대의 지휘관들은 아마 환장할 노릇일 것이다. 단지 바다에 기뢰가 있다고 경고했을 뿐인데, 해적들은 매번 정확한 좌표라도 통보받은 것처럼 헤엄쳐 들어와 기뢰들을 폭파해댔으니까. 기뢰원을 지키기 위한 수중매복마저 모조리 간파당한 것은 물론이다.

‘생사람깨나 잡았겠지.’

임무부대 내부에 주술사 왕을 숭배하는 첩자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 내 존재를 모르는 이상, 그들은 그런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콰쾅!

조금 엇나간 포탄 한 발이 하얀 모래가 깔린 해변 위로 떨어졌다. 수영장 제조기라는 별명에 걸맞게, 고폭탄이 터진 자리엔 한쪽으로 쏠린 타원형의 크레이터가 커다랗게 생겨났다. 물을 가득 채운다면 수십 명이 넉넉하게 헤엄을 칠 수 있을 법한 구멍이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항구에서는 끊임없이 탈출선들이 빠져나왔다. 숙련도 낮은 선원들을 태운 전함은 주포 재장전에 40초 안팎의 시간이 걸렸고, 탄착군 또한 반경 삼사백 미터 범위로 넓게 퍼져서 형성되었기에, 좁은 항만 입구를 타이밍에 맞춰 재빨리 통과한다면 의외로 위험성이 높지 않았다.

사람이 느끼는 공포는 그와 별개일지라도.

이날이 오기에 앞서, 그레이스는 내게 전함의 포탄을 추가로 조달할 수 있는지 문의한 바 있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설마 이것까지 가능할까 싶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한번 물어는 볼게. 내 귀여운 해적제독이 나포한 전함의 함포 말인데, 그 포탄을 추가로 손에 넣을 방법이 있을까?」

“주포 포탄을 말하는 건가? 부포가 아니라?”

「으-음. 부포 쪽도 있으면 좋긴 해. 다만 방금 이야기한 건 주포 쪽이야. 적을 위압하는 효과로는 탄도탄만큼이나 훌륭한 무기니까, 재보급이 불가능하다면 일찍부터 아껴서 써야겠지. 어때? 혹시 이번에도 사랑스러운 아내를 기쁘게 해줄 수 있겠어?」

스커드 미사일과 684를 활용하는 방식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그레이스는 대전략을 세울 때 심리적 충격의 극대화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필시 약자로서 국가를 등에 업은 강자를 상대하느라 생긴 선호겠지. 정면대결을 통해 적을 물리적으로 파괴할 힘이 없을 땐,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파급효과를 얻을 방법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 약자들의 투쟁이 테러로 귀결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고.

아내 운운하는 개소리에는 그냥 반응 자체를 하지 않는 편이 유익했다. 나는 짧은 궁리 끝에 대답했다.

“방법을 찾아보겠다.”

「오,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제로는 아니다, 라고만 해두지.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더 기대감이 드는걸. 성공하면 톡톡히 보답할게.」

무기 상인으로서의 나는 그 오래된 포탄들이 어디에 보관되어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곳은 동종업계 종사자들이 가끔 잭팟을 터트리곤 하는 세계적 명소였으니까.

미국 인디애나 주, 크레인(Crane) 육군 탄약관리시설.

대형 탄약고의 숫자만 2천여인 이 시설에 무엇이 얼마나 저장되어있는지는, 시설에 상주하는 인력들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할 것이다. 상세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기록관리청(NARA)에 문의를 해봐야 하는 구시대의 저장물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

이곳은 오래된 탄약을 폐기하는 기능도 수행한다. 내가 한국에서 거래하는 김천 잉여재산처리처와 같이, 민간 사업자들의 경쟁 입찰을 받는 형식으로.

당연하게도, 이곳에서 나오는 모든 종류의 입찰공고는 웬만큼 덩치가 있는 무기 상인들이라면 빠짐없이 살펴보는 사업정보다.

나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언뜻 16인치 전함 포탄을 대량으로 폐기할 업자를 구한다는 공고를 본 기억은 나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언제였는지, 그리고 입찰자가 나왔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서였다.

세상은 예산이 지배한다. 그리고 포탄의 폐기비용은 생산비용을 능가한다. 크레인 탄약창은 저장 공간이 워낙에 광활한 곳이라 재고 처리가 급하지도 않으니, 설령 그때 입찰자가 나왔다 한들 다년간에 걸쳐 나누어 처리하는 방향으로 결정이 났을 확률이 높다.

그 민간 사업자에게 선을 댈 수만 있다면 포탄을 빼돌리는 건 어렵지 않겠지.

‘간만에 대구에 있는 미군 놈들과 이야기를 나눠봐야겠군.’

놈들은 지금까지도 꼬박꼬박 상품을 내주고 돈을 받아가고 있다. 미군의 순환배치 시스템 덕분에 지금 본토로 가있는 패거리가 분명히 있을 테니, 그 연줄을 이용해서 사업자 정보를 확인해보면 될 것이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미군 연놈들에게 직접 물건을 요구할 수는 없다. 전함 포탄을 달라고 해버리면,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내가 누구와 거래하는지 알아채지 못할 리가 있나. 충분한 금액을 지불하기만 한다면 그들도 기꺼이 국익을 배반하겠으나, 약점을 내주고 불안요소를 만들면서까지 추가비용을 지출할 이유가 없다.

사업자 정보를 얻을 때도 일정 기간의 정보 전체를 달라는 식으로 요청해야 할 터.

“그보다, 그레이스.”

「응?」

“이런 지엽적인 문제 외에, 바다에서도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할 때가 되지 않았나?”

「근본적인 문제라……. 또 뭔가 매력적인 제안이 나올 것 같네.」

“해군.”

내가 그동안 대마법사의 가호를 제공하며 지켜본 해적함대는, 게릴라로서는 분명 뛰어난 전력이었으되, 전략적인 함대운용의 측면에선 미비하고 미숙한 점들이 많이 눈에 띄는 비효율적인 집단이었다.

이러한 비효율은 함대의 관리행정이 복잡해질수록, 함대의 규모가 커지고 전장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그리고 함대를 구성하는 함선들의 역할이 분화되고 무기체계가 발전을 거듭할수록 심화될 수밖에 없다.

문제의 핵심은 구성원들의 교육 수준이다.

칠각기사단과 그레이스 복제체들이나마 관리감독 및 독전관으로 투입할 수 있는 왕의 육군과는 달리, 왕의 해군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하는 상황.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인간이 열 중 여덟아홉인 인적자원 풀을 가지고 어떻게 전술적·전략적 역량을 갖춘 장교진을 육성한단 말인가.

이런 이야기를 하자, 그레이스는 관심이 동한 투로 반응했다.

「맞는 말이긴 해. 그래서, 그 인력 육성의 기초를 당신이 마련해주겠다는 말이야?」

“그렇다.”

「그렇게 도와주는 대신 내 해군에 당신의 지분을 확보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까? 당신의 부하들을 관전무관으로 심어 넣음으로써?」

“오해하지 마라. 나는 그저 거간을 서주려는 것뿐이니까.”

「거간?」

“나와 거래하는 정규해군 제독이 하나 있다. 중남미 사람이고, 부하들과 국민들에게 ‘사적인’ 복리를 제공하는 데 관심이 많은 독선적인 애국자지. 제 조국 사람들만 안온함을 누릴 수 있다면 바깥세상에서 몇 명이 죽어나가든 관심 없다고 말하는 인간이니, 조건이 맞는다면 아프리카 해적과의 거래도 사양하지 않을 거다.”

「흐-음. 그럼 우리 자기가 얻는 건 뭘까? 거간비로 내게 뭘 받고 싶어?」

“그런 건 필요 없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내게는 하나의 안전장치니까. 너는 다만 그들을 네 사람으로 홀리지 않겠다는 약속만 해주면 된다.”

「응? 그게 무슨…… 아아.」

“이해했나?”

「이해했어, 이해했어.」

그레이스는 나와 처음 만났던 자리에서 오갔던 대화를 되새김질했다.

「그랬지. 세상이 어찌 되든 알 바 아니지만, 내가 너무 거칠게 날뛰어서 당신의 뜨락까지 지저분한 난리들이 밀려오는 건 싫다고. 그러니 나머지 세상에 적당한 선의 질서가 유지되도록 완급을 조절하며 부숴달라고.」

“잘 기억하는군.”

「당신이 소개해주겠다는 애국자들은 내 활동이 사랑하는 조국에까지 피해를 주는 걸 싫어하겠지. 그래, 그들의 조국은 당신이 말했던 ‘나머지 세상’의 일부로구나.」

“정확하다.”

「당신, 매번 머리를 굴리는 게 지나치게 섹시하지 않아?」

“왜, 잔꾀를 부리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나?”

「이런. 비꼬려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어련할까.”

멕시코 해군의 회색 애국자들은, 이건 좀 아니다 싶은 느낌이 드는 사안이나 중재가 필요한 안건에 대해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게 도움을 구할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거래처이자 중개인인 내게. 내 사람들을 직접 심는 것보단 못할지언정, 인적자원을 절약하면서 잠재적인 내부협력자들을 만들어놓는 방편인 셈.

마르띠네즈 제독의 파벌은 정신무장도 투철하다. 제독 개인에 대한 충성심은 경태가 감탄을 표할 정도였고, 광적인 애국은 광적인 믿음을 갈음할 만했다. 템플 기사단 카르텔 같은 미친놈들에게 치를 떨던 자들이 이교의 신앙에 쉽게 떨어질 리가 있나. 그레이스가 작정을 한다면 또 모를까.

현실적으로 그레이스에게 내어주기에 이보다 적합한 인력을 찾기 힘들 지경이다.

「서운한걸. 남편이 이렇게나 아내를 믿어주지 않다니.」

그레이스는 이렇게 또 시답잖은 개소리를 하고 나서 내 권유를 받아들였다.

「좋아. 당신 말에 따르도록 할게. 솔직히 고민이 없지 않았는데, 가렵던 곳을 긁어줘서 고마워.」

“잘 생각했다.”

「초빙해오는 교관들이 남미 출신들이라면, 그들이 쓰는 언어는 스페인어야? 아니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다.”

「통역을 준비해둬야겠네.」

여기까지 말하고서, 그레이스는 음색을 달리했다.

「뭔가 거래를 할 때마다 매번 내 이득이 더 큰 것 같아 좀 민망한 마음이 들 지경인데…….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겠지?」

“됐다. 매사에 일일이 이익의 대소를 따져서야 무슨 큰일을 도모하겠나. 당장은 원탁을 무너뜨리기 위한 투자 겸 동맹의 신의를 쌓아나가는 과정이라고 치지. 너나 나나 서로에 대한 불안이 남아있기는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달콤하기도 해라.」

애초에 대가를 받을 생각도 없었거니와, 684의 전향을 앞둔 상황에선 그레이스를 최대한 방심시켜두는 게 맞는 선택이었다.

그레이스는 만족스러운 음성으로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그래도 이번엔 성의를 표해두고 싶어. 귀한 자산은 평소부터 관리를 잘해야지. 아직은 불확실성과 리스크가 끼어있을지라도, 기대이익이 워낙에 거대한 자산이니 말이야.」

“특별히 줄 것이 있기는 한가? 네 고유의 마법적 지혜라도 공유해준다면 모를까. 「태내성형」처럼 내게 무가치한 건 제외하고.”

「음, 못해줄 것도 없는데?」

“……진심인가?”

「물론이지. 이를테면…… 그래. 혹시 당신, 「생명」을 공격용으로 사용해본 적 있어?」

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0